4장 인구감소사회를 준비하는 첫걸음 : 노동 ②

공식 관리자
2025-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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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인구감소사회를 준비하는 첫걸음 : 노동 ②


‘1차 노동시장’이라는 성역 부수기


“누군가가 안정감을 느끼는 울타리가 다른 누군가에게는 넘을 수 없는 벽1)

1) <교육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허태준)>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 해결 없이 인구감소시대에 지속가능한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 지나친 소득 격차와 불평등은 구직 의욕을 상실하게 하고 1차 노동시장에 대한 경쟁을 심화시키면서, 사회 전체의 관점으로 보면 비효율적 노동구조를 재생산하는 원인이 된다. 방안은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2차 노동시장을 없애는 방식으로 모든 일자리를 1차 노동시장의 조건과 동일하게 맞추는 것이다. 둘째는 1차 노동시장을 보호하고 있는 장치들 중 불합리한 구조를 타파하면서 일종의 하향평준화를 통한 실체적 평등을 도모하는 것이다.


첫 번째 방안은 현실적으로 가능하지 않고 이상적이지도 않다. 모든 일자리가 고임금이 될 순 없다. 상위 소득을 억제하지 않고 저임금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다. 귀족 계급에 대한 특권 폐지 없이 어떻게 신분제 타파가 가능하겠나? 기업별, 산업별, 직종별 임금격차를 줄이고 평등한 과정으로 가기 위해선 상위 소득 계급에 대한 임금개편 논의가 필수다.


모든 일자리를 평생직장으로 만드는 것 또한 과연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시대에 요구받는 문화인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IMF 외환위기 이후 평생직장 시대는 끝났다. 한국 노동자들의 평균 근속 기간은 5.9년에 불과하다. 이것이 자발적인 직장 문화 현상이라면 모든 일자리가 평생직장일 필요는 없는 것이고, 만약 평생직장 일자리가 부족해서 생기는 일이라면 이 역시 1차 노동시장이 가진 성역이라 평가해야 한다. 그렇다고 노동자 모두를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라는 뜻은 아니다. 1차 노동시장이 가진 철밥통을 내려놓음으로서, 전체 노동시장의 안정성을 평균적으로 높여나가는 방법도 있다.


결론은 두 번째 방안인 1차 노동시장의 성역을 부수는 것이다. 누군가는 노동해방을 위해 자본가 계급을 타파해야 하는데 노-노 갈등을 부추긴다고 비판할 수 있다. 노동해방에 동의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인구감소와 노동공백이 맞물리면 그 노동해방을 외칠 수 있는 사회 자체가 위협받는다는 현실을 상기해야 한다. 그래서 불합리한 소득격차로 인한 불평등도 해소하면서 인구감소 위기도 해결하자는 말이다.


1차 노동시장의 핵심을 고임금과 평생직장으로서 안정성으로 규정한다면, 구체적 대안 역시 그 둘을 해체하는 작업에 있다. 호봉제라 불리는 연공서열임금체계를 직무급제로 전환하고, 정년 제도를 폐지하자는 제안이다.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들의 주된 임금체계인 호봉제는 연차가 높을수록 상승한다. 말 그대로 오래 일한 노동자와 신입 노동자가 같은 업무를 해도 급여가 다른 불평등 구조다. 이러한 연공서열제는 일반적으로 정년 제도와 연결된다. 정규직 노동자의 입장에서는 그 안정성과 높은 임금을 선호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러한 호봉제 중심 구조가 이 안전망 밖의 다수 노동자들과의 불평등 구조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2020년 기준 전체 노동시장에서 호봉제 도입 비율은 14.4%에 불과하다. 임금체계가 아예 없는 기업이 60%이고, 5인 미만 사업장의 경우 73.3%로 더 높은 비율로 임금 무체계 직장이다. 사실상 최저임금 적용 직장인 것이다.2) 이들에게 호봉제는 그림의 떡일 뿐이다. 이러한 호봉제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원칙에도 위배되고, 나이중심의 서열구조라는 한국 특유의 권위주의 문화를 강화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더욱이 한국의 호봉제는 세계적으로 매우 강력한 수준이다.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에 의하면, “현행 연공 서열은 신입사원과 장기근속 직원의 급여차가 3배가 되는데, 유럽의 경우에는 1.7~1.8배, 일본도 2.1배 정도"다.

2) “노조여 세상을 바꾸려면 호봉제부터 바꿔라”(시사인, 전혜원 기자) 2021.01.25


반면 직무급은 직무가치에 따른 임금체계를 말한다. 나이와 연차, 고용형태를 떠나 실제로 하는 업무에 따라 임금을 책정하는 ‘동일노동 동일임금’의 원칙을 그대로 적용하자는 말이다. 생애주기 중 임금 고점에서의 급여는 호봉제보다 낮을 수 있지만, 사회 어느 영역에서 어떤 일자리를 가지고 노동을 하든 평균적인 임금의 총액은 더 많을 수 있다. 평생직장 시대가 끝난 현 시점에서, 전체 노동시장의 임금 평등을 높이는 방향이다. 이를 통해 상위 20%와 하위 80% 간 소득격차를 줄이고, 특정 노동(기업 및 산업)에 대한 선호와 노동 공백을 줄여 나자가는 것이다.


정년 제도도 마찬가지다. 국민연금 수급 연령인 만 65세까지 정년을 연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있지만, 한국사회에서 정년 연장의 혜택을 받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또한 대기업-공공부문 정규직들에 한정된 특권 연장 논의에 불과하다. 정년을 연장하든 안하든 고령인구의 경제활동은 점차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정년 연장이 시행된다면, 정년 연장의 혜택을 받는 노인과 그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수 노인들 간의 불평등만 더 심화되는 꼴이다.


정년 폐지는 일자리 나누기 측면에서도 검토할 수 있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가 노동불평등과 함께 노동 공백을 줄이는 방식이라면, 일자리 나누기는 노동 공백을 채우는 방식이다. 한국 노동자는 연 평균 1915시간을 일한다. OECD 국가 평균보다 무려 300시간이나 많다. 이러한 열악한 노동환경을 개선하는 방법으로서 주4일제와 같은 실험을 통해 일자리 나누기를 시도할 수 있다. 정년 폐지 역시 정년 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기업에서 청년고용률을 높이는 유인의 효과를 낸다. 물론 정년 폐지로 인해 퇴직한 노인들에 대한 특화 일자리를 만들고 보장하는 것이 동반되어야 한다. 일자리 안정성에 대한 책임을 기업에 미루는 것이 아니라, 사회 전체 노동시장에서 평균적 상향의 방식으로 구현해보자는 것이다.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에도 불구하고


켄 로치 감독의 ‘나, 다니엘 블레이크(I, Daniel Blake)’는 영국 복지제도의 어두운 면을 다루고 있다. 시민으로서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만들어진 복지제도가 취지와 달리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훼손하고 있다는 주제의식을 설득력 있게 전달하고 있다. 영화 주인공인 다니엘은 심장병 환자다. 그래서 일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방법으로 질병수당을 신청한다. 하지만 복지제도는 그에게 질병수당 조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반복할 뿐이고, 다니엘은 어쩔 수 없이 구직수당 신청을 하게 된다.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특강도 억지로 듣고 구직활동을 증명하기 위해 이력서를 제출하고 다닌다. 하지만 정작 취업제안이 와도 심장병 때문에 일을 할 수 없으니, 구직수당을 받기 위해 이력서를 냈던 것이라 말할 수밖에 없다. 다니엘은 “놀면서 보조금이나 받으려 하는 것이냐”는 핀잔을 감내해야 했다.


영화는 복지 제도 자체를 없애자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복지에 조건을 달고 인간을 규격화해서 그 조건에 부합하는지 관료제가 판단하는 시스템에 대한 질문일 것이다. 국가는 다니엘에게 자신이 복지 대상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끊임없이 증명해내라고 요구했다. 이러한 복지 시스템이 오히려 인간을 소외시키고 존엄하지 못한 존재로 취급하고 있다는 아픈 이야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지제도는 그 취지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구직수당은 구직자들의 구직활동을 지원하기 위한 제도다. 이를 개인이 증명해야 하는 시스템의 비인간성에 대한 문제의식은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구직활동을 유인하지 않는 구직수당 제도를 운영하자는 것은 목적 배반이다.


복지는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권리를 사회가 보장해야 한다는 원론적 취지도 있지만, 지금 당장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없는 시민들이 사회적 의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한 지원제도이기도 하다. 복지제도 운영을 위해 필요한 사회적 재원은 그러한 사회적 의무를 수행하는 시민들에 의해 가능한 것이기에, 사회연대의 순환이라 볼 수 있다.


구직수당•실업급여의 원조격 모델인 스웨덴의 실업보험은 ‘노동우선주의’에 입각해있다. 시민 당사자가 스스로 노동해서 생활하는 것을 기본으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학력 등 구직자의 조건에 적합한 직업을 안내하고, 자격조건이 부족하면 직업교육 안내를 하고, 가장 마지막에 현금지원을 실행한다. 실업보험급여 수령 자격에는 국영고용센터에 등록해 적극적으로 직업을 찾아야 하며, 고용센터 직업 알선가와 협력해 개인 구직계획표를 달성해야 하는 활동도 있다. 실제 구직활동을 하지 않으면 현금지원도 없다. 정부가 제공하는 직업훈련이나 고용서비스를 거부하면 실업급여를 끊고, 두 번째 실직 시에는 실업급여를 받는 기간 안에 취업하지 않으면 소득지원 혜택마저 중단한다.


한국은 국민취업제도가 스웨덴 방식과 유사하게 존재하지만, 노동시장에서 중심 정책의 위치라고 평가하긴 어렵다. 윤석열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하는 청년일자리도약장려금 사업도 취업애로청년을 고용한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지원책이지, 구직자들을 노동으로 유인하는 정책은 아니다. 일자리 부족이 청년실업의 원인이 아님에도, 아직까지 한국 일자리 정책의 중점은 창업 지원과 일자리 창출에 머물러 있다.


물론 실업급여 수급 조건으로 구직활동 증명을 요구하긴 하지만 사실상 요식행위에 가깝다. 많은 사람들은 실업급여를 노동과 구직 사이의 일종의 쉼표와 재충전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 이러한 실업급여 조건을 까다롭게 만들어 부정수급자를 없애자는 의견도 있지만 적절하지 않다. 노동과 구직활동 사이의 재충전이라는 실업급여의 실질적 효과가 나쁜 것도 아니고, 실제 실직자가 구직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필요한 쉼의 시간을 사회적으로 지원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차라리 수급기간을 단축하더라도 현재 운영되는 실정에 맞추어 노동과 구직 사이에 쉼표로서 실업급여를 재제도화하고, 구직활동 유인에 특화된 시스템을 연결시켜 체계화하는 방식이 낫다. 핵심은 구직활동 증명이 아니라, 구직활동의 지원이다. 폭넓은 분야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실질적 노동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직업훈련제도 운영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노동 수요 불균형(미스매칭)의 문제는 노동시장 이중구조 해소가 핵심이지만, 그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사회구성원의 노동에 대한 인식 변화가 함께 진행되어야 한다. 학벌사회인 대한민국에서 학력에 따른 일자리 수요공급을 온전히 일치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다수 취업예정자는 눈높이보다 낮은 일자리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이를 강한 유인으로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쉬었음 청년’의 증가는 막을 수 없다.


가까운 장래에 노동력 부족이 가장 심각하리라 예상되는 5개 산업은 사회복지서비스업, 소매업, 음식적 및 주점업, 전문직별 공사업, 육상운송 및 파이프라인 운송업이다.3)일•가정 양립 사회가 전면화를 통한 대체인력에 대한 시장 확대와 정년 폐지 등으로 선호 일자리의 기회 폭을 넓힌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기피 직종에서 노동을 담당해야 한다. 기피 직종의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것과 동시에, 이러한 직종으로 구직자들을 유인하기 위한 구직제도 개편과 직업훈련제도의 강화는 반드시 필요하다.

3)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이철희)> 위즈덤하우스


다른 측면으로는 노동을 거부하는 원인 중 하나인 자산소득에 대한 기대감을 억제해야 한다. 대한민국은 온갖 코인들이 난무하는 코인전성시대를 살고 있다. 주식이나 코인을 하지 않는 사람들을 찾기 어려울 정도다. 가상자산이 실제 생산성 있는 활동이 아니라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주변에서 누군가 코인으로 대박 났다는 영웅담은 그 자체로 노동의욕을 저하시킨다. 자산소득이 노동소득보다 우위인 사회라면 투기를 통한 한탕주의가 횡횡할 수밖에 없다. 당장의 시장 활성화만 바라보며 자산소득과 투기에 대한 규제를 완화한다면, 인구감소시대라는 곧 닥쳐올 미래에 붕괴되는 노동시장이라는 처참한 결과를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대안이 될 수 있을까


인구감소사회를 준비하는 대안으로 외국인 노동자를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단순하게 생각해보면 인구가 부족하면 꼭 아이를 낳으라고 할 것이 아니라, ‘인구’를 외국에서 ‘수입’해오면 될 수도 있다. 난민-이주민에 대한 강력한 평등융화 정책으로 한국이라는 국가 자체를 재구성하자는 제안이다. 사실 국제적 차원에서 보면, 하나의 민족으로만 구성된 국가가 더 특수하기도 하다. 인구감소시대에 상상하지 못할 대안은 아닌 것이다. 그러나 다양한 인종•민족의 외국인들에게 포용적인 사회를 만들자는 주장과 외국인 노동자를 인구감소시대의 대안으로 삼자는 주장은 전혀 다르다.


외국인 노동자를 통한 노동 위임의 대표적인 사례는 싱가포르다. 싱가포르는 1986년 합계출산율 1.43명이라는 수치에 충격을 받고 1987년부터 출산장려정책을 실행했다. 한국보다 20년이나 빠르다. 그러나 2023년 합계출산율은 0.97명으로 더 추락했다. 그럼에도 싱가포르의 인구는 1987년 300만 명대에서 2022년 564만 명으로 오히려 더 늘어났는데, 그 비결은 적극적인 이민 장려 정책을 통한 외국인 노동자의 증가에 있다. 현재 싱가포르는 전체 인구 중 63%만이 싱가포르 시민권자이고, 나머지는 영주권자이거나 장기 체류 외국인이다. 외국인 노동자는 싱가포르 GDP의 1/3을 담당하고 있을 정도로 큰 규모다. 이 정도면 외국인에 의해 돌아가는 국가라고 봐도 무방하다.


당연하게도 문제가 생겼다. 2013년 싱가포르는 44년 만에 대규모 시위와 사회적 갈등을 경험했다. 싱가포르는 아직까지 태형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치안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집회•시위도 사실상 금지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69년 이후 최초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고 그 이유는 싱가포르 저임금 노동자들과 외국인 노동자들의 갈등 때문이었다. 외국인 노동자들은 싱가포르 자국민들에 비해 열악한 차별임금에 대한 불만이 폭주했고, 싱가포르 저임금 노동자들은 외국인들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며 분노한, 뻔하고 비극적인 스토리였다.


다른 인종•민족에 대한 포용적 문화가 상대적으로 강한 유럽에서도 난민 정책이 쏘아올린 사회적 갈등을 감당하지 못해 정치적 혼란기를 맞고 있다. 그런데 단일민족 신화가 유난히 강한 한국 사회가 이를 감당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2023년 기준 한국의 외국인 비중은 전체 인구의 4.89%다. 아직 다문화 국가(5% 기준)로 진입도 못했다. 외국인 노동자를 인구감소사회의 대안으로 보는 관점은, 이 비율을 인구감소 국면이 가시화되는 20년 만에 2~30% 가까이 올리자는 주장이나 마찬가지인데 다소 급진적이다. 오히려 그로 인해 발생할 사회적 갈등을 해결하는데 더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 수 있다.


만약 사회적 갈등이 전무하다해도, 이런 접근 방식이 옳은 지에 대한 질문이 있을 수 있다. 2023년 오세훈 서울시장은 싱가포르 출장을 다녀오더니 난데없이 일•가정 양립을 위한다며 필리핀 가사 관리사를 도입했다. 일하는 시간을 줄여서 가정에 쓰게 해야 한다고 했더니 가정에 외국인 가사 관리사를 두고 일을 더 열심히 하라는 발상의 전환도 문제지만, 외국인을 값싼 가격에 쓸 수 있다는 언사는 더 큰 문제다. 오세훈 시장은 필리핀 가사도우미들이 싱가포르에서 일하면 월 40만 원밖에 못 받지만, 우리나라에서 일하면 월 200만 원은 받을 수 있다며 그들에게도 이득이 되는 셈이라는 논리를 펼쳤다. 


합계출산율 1.0명 이하인 저출생 국가 한국과 싱가포르가 필리핀 가사 관리사를 두고 쟁탈전을 펼쳐야 하나보다. 실제 필리핀은 2020년 합계출산율 2.75명으로 아직까지 산아제한정책을 펼치는 인구증가 국가다. 오세훈 시장 논리대로라면, 앞으로 저출생 국가들은 인구증가 국가들의 노동자들을 이등시민 삼아 사회를 유지해야 한다. 일제강점기에 일제가 조선 사람들을 이등신민으로 만들고자 했던 관점과 무엇이 다를까?


학교에서 사회교과목으로 플랜테이션이라는 개념을 가르친다. 선진국의 대자본과 식민지 원주민의 값싼 노동력과 제3세계 열대 기후가 결합해 수출 중심 기업형 농업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물론 제국주의의 침략이라는 역사적 배경도 함께 배운다. 값싼 외국인 가사도우미와 선진국의 경제력이 만나 저출생 현상의 문제를 해결한다니. 가히 인구위기 버전의 플랜테이션이라 할 수 있다.


가사도우미 업종을 떠나 전체 노동시장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현 시점 한국사회에서 외국인 노동자들이 주로 종사하는 업종은 제조업, 건설업, 숙박 및 음식점업, 농업 등이다. 모두 한국 노동자들이 기피하는 현장이다. 자국 시민들이 자국 시민으로서 생활과 권리를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노동임에도 불구하고,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그 책임을 떠넘기고 착취하는 사회를 우리가 지향할 미래라 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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