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의 인구위기부수기] 8장 세대론으로 바라보는 인구위기 ①

공식 관리자
2025-06-20
조회수 214

[김창인의 인구위기부수기] 8장 세대론으로 바라보는 인구위기 ①


출산 파업. 청년들이 불의가 가득한 한국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아이를 낳지 않고 있다고 설명하는 용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저출생은 ‘비출산으로 세상을 멈추고 바꾸기 위한 통쾌한 한 방’이 아니다.


단지 출산이 개인의 선택이자 권리의 영역으로 자리 잡으면서 자연스럽게 합계출산율이 떨어지고 있을 뿐이다. 물론 0.6명대로 향하고 있는 극단적인 합계출산율의 수치에는 한국사회의 내 한 몸 먹고살기 힘든 불평등 구조가 한 몫하고 있지만, 이를 바꿔내기 위해 집단적 비출산을 결심할 정도로 한국의 청년들이 정의로운 것도 아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고 해서 합계출산율이 오르는 기적 같은 건 없다. 어쩌면 출산파업으로 대표되는 인구위기 공포론은 청년들의 목소리를 빙자한 각기 다른 정치적 주장들이 난무하는 것에 도움만 될 뿐이다.


어떤 청년담론은 페미니즘 때문에 남성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이라며 안티페미를 선동하고, 어떤 청년담론은 군부독재의 후예인 검찰독재 정권이 나라를 망치고 있어서 청년들이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라 자기 맘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귀에 걸면 귀걸이요, 코에 걸면 코걸이다.


그렇다고 ‘세대’를 중심으로 인구위기를 바라보는 틀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세대’라는 렌즈를 통해 베이비부머 혹은 86세대로 불리는 기성세대와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한 저출생 세대 사이에 낀 지금의 청년세대가 살아갈 인구감소시대를 전망해보려 한다.


저출생은 청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한다. 아이를 낳기 어려운 현실이 문제라고 한다. 그래서 지금의 사회구조를 바꾸면 청년들이 아이를 낳을 것이라 하는데, 역설적으로 청년들에게 아이를 낳으라고 주장하는 이유는 지금의 기성사회를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일정 규모의 출산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유지’하기 위해 ‘변화’해야 한다는 논리라니, 인구위기를 인구증가로 해결하자는 주장이 가진 모순이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출산장려가 아니라 인구감소 사회를 준비하자고 주장하는 것이 더 낫다.


이 모순의 틈바구니에서 각 세대가 가진 이해관계를 발견할 수 있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인구위기가 미래인 기성세대와 인구감소 시대를 저출생 세대와 함께 살아갈 청년세대의 이해관계는 당연하게도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인구감소 사회에 대한 설계의 책임과 역할은 청년세대의 몫이다. 지금의 청년세대와 이제 막 태어나기 시작한 저출생 세대가 공존할 수 있는 사회모델을 만들어내야 한다. 인구위기를 가장 직접적으로 마주할 사람들은 베이비부머 세대가 아니라 지금의 청년세대다.


인구위기는 청년들의 무기가 될 수 있을까


인구위기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는 주장은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고 누구에게 위협일까. 직관적으로 보면 인구정책의 수혜자들에게 이익이고, 그 정책의 대상이 아닌 사람들에게 불공정일 것이다. 그렇다면 청년들이 인구위기를 부추기고 기성세대는 인구위기를 부정해야 하는 것 아닐까? 그러나 실상은 그보다 더 복합적이다.


인구위기를 거론하며 정년을 연장하자고 하고, 초고령 사회를 대비하기 위해 국민연금 소득보장율만 높이자고 하는 주장은 현재 대기업 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는 중년의 기성세대에게 유리하다. 인구가 줄어들면 안 된다는 주장의 이면에는 자신들의 노후를 책임질 인적자원이 줄어드는 것에 대한 기성세대의 두려움이 잠재되어 있다. 출산장려정책은 사회에 부적응하고 있는 청년들을 정상화 혹은 교정해야 한다는 암묵적 목적을 합의하고 있기도 하다. 그래야 기성세대가 만들어 온 기성사회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지속가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인구위기를 막아내고 지금 그대로의 사회를 유지하자는 주장은, 기득권을 유지하고 싶은 심리와 떨어져 있을 수 없다.


물론 청년세대 중에서도 기성사회의 수혜자가 있다. 어떤 청년은 태어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이미 기득권일 것이고, 좋은 학벌이나 일자리에 진입하면서 기득권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는 경우도 있고, 다수의 청년들은 자신이 언젠가 기득권에 진입할 것이라 희망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청년세대를 마치 기성사회의 피해자처럼 단일하게 묘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청년세대를 단일한 집단으로 볼 수 있다는 주장은 혈액형별 성격이 있다는 유사과학과 별반 다르지 않다. 한국의 청년 숫자만 해도 약 900만 명에 달하는데, 그 모두를 어떻게 단일한 특징으로 규정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세대를 중심으로 한 해석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모든 세대는 동시대를 살아가며 공통된 사회적 경험을 통해 성장한다. ‘아웃풋’은 달라도, ‘인풋’은 같다는 것이다. 예컨대 지금의 청년세대는 IMF 외환위기를 겪으며 초등학교에서 아나바다 운동을 배웠고, 금모으기 운동으로 집에서 금가락지 받아 학교에 냈던 경험이 있다. 2002년 월드컵에서 비더레즈 티를 입고 거리에 나와 전 국민이 함께 응원한 문화적 경험도 있다.


현재 청년세대의 공통된 사회적 경험을 압축적으로 표현하면 “IMF부터 세월호까지, 국가와 사회가 개인을 보호해주지는 않다는 것을 반복적으로 학습한 세대”다. 각자도생에 익숙할 수밖에 없고 사회에 자신의 삶을 기댈 수 없는 동일한 조건에서, 누군가는 페미니즘을 통한 새로운 공동체로서 젠더라는 정체성을 발견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는 일베를 하면서 공공성의 영역을 부정하는 단계로 나아가기도 하는 것이다. 결국 청년담론은 같은 인풋을 가진 지금의 청년세대에 대해 각자 원하는 방식대로 아웃풋을 해석하는 작업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일반화•주류화된 담론이 청년세대 모두를 대표하는 것처럼 기능한다.


기성세대인 ‘86세대’ 역시 마찬가지 작업이다. 1980년대 학령인구 중 4년제 대학 취학자는 12%에 불과했고, 그나마 대학생들 전부가 운동권이 되어 짱돌을 던지며 투쟁했던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대학생 시절 단 한 번 거리에 나가 돌을 던져본 경험을 전두환을 몰아낸 역사의 중심에 서있었다 기억하고, 선거 때 김대중•노무현에게 던진 한 표로 자신을 민주화의 성취를 만들어낸 주역 세대라 규정할 수 있는 것은 86세대에 대한 담론 재구성 작업의 결과물이다. 조국 사태가 검찰의 부당한 공격이라는 시선 역시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라는 86세대의 공통적인 사회적 경험에서 기인한다. 세대를 규정하는 것은 해석투쟁이고, 이 해석투쟁을 통해 비로소 ‘세대’라는 주류화 된 집단적 의식을 가지게 된다.


‘이대남’ 담론도 처음에는 20대 남성들 전부를 안티페미로 규정하려는 일종의 해석투쟁으로 시작했지만, 역으로 지금에 와선 청년남성 일반이 페미니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지는 경향성이라는 실체적 조건을 형성했다. 이와 같은 청년담론 구성과 세대 규정이 허구적이며 모순이라는 주장은 별 의미가 없다. 세대담론의 근거는 논리적 실체가 아니라, 그에 동의하고 편승하는 대중의 힘과 사회적 합의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구위기를 통해 지금의 청년세대를 새롭게 재규정하는 담론의 작업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이러한 질문으로부터 시작해 인구위기는 지금의 청년세대가 사회적•시대적 역할을 책임질 수 있는 계기이며, 청년세대가 인구감소사회를 준비하는 주체로서 준비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쳐보고자 한다.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