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장 인구감소를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①

많은 교육전문가들은 지금보다 학급당 인원수가 줄어든 ‘동그라미 학교’를 지향한다. 한 학급을 10~15명인 소규모로 구성해서 교육의 질적 상향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또한 김영삼 정부의 대학설립준칙주의가 촉발한 현재의 양산형 대학들의 수를 감축하면서 대학공공성을 확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인구감소 시대는 이러한 맥락의 교육개혁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어차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학교 수도 학생 수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하고, 그 방향성은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인구감소로 인한 교육위기는 역설적으로 인구감소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교육의 취약점들이 인구감소로 인해 더 극단적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그리고 이 모든 취약점들은 교육을 사유재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공공성이라는 방향성을 제대로 세워내는 것만이 교육위기와 인구감소시대의 유일한 대안이다. 교육은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과정의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맞서 저희는 이 땅의 청년들과 연대하려 한다”
어느 노동자 파업 집회의 발언 같지만 그렇지 않다. 2020년 문재인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전공의총파업을 주도했던 한 청년의 발언이다. 그는 의대 증원에 맞선 전공의들의 투쟁에 대해 “옳은 가치에 대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건 어느 세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얘기다. 노예 해방, 여성참정권 등은 그 시대 당시에는 주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그런 움직임이, 옳은 가치가 맞다고 평가받는다. 우리가 해야 하고, 우리 세대의 일이고,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의대 증원 반대를 노예 해방-여성참정권 확보와 같은 선상에 놓고 그만큼 중요한 시대적 가치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강한 반발과 코로나 국면이 겹치면서 문재인 정부의 의대증원은 실패로 귀결됐다. 그리고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다시 의대 증원을 시도하고 있지만, 역시나 강한 저항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다. 물론 공공의료와 필수의료의 인력 부족이라는 한국 의료시스템의 문제점이 의대 증원으로 단번에 해결될 순 없다. 단순한 의대 증원은 의대에 진입하려는 상층 계급 자녀들의 욕망을 해소하는 기제가 될 뿐이며, 오히려 의사 기득권을 강화하고 필수의료 영역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곧 마주할 저출생-초고령 사회에서 의사 수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고, 여기서 발생할 필수의료 영역에서의 공백을 해결하는 것 또한 의사 수 확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에서 2022년 82.7세로 늘어났고, 2023년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는 2072년 기대수명이 91세로 늘어난다고 전망하고 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당연하게도 ‘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적으로 노년기에 여러 질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19년 70세 이상 고령층의 연간 평균 내원 일수는 38.8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노인이라면 한 달에 세 번 정도 병원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48년까지 총 내원 일수는 2019년보다 138%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업 종사자들의 숫자가 지금과 그대로라면, 노동 강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031년까지 약 13만 명 이상의 보건의료계열 노동력이 부족할 것이고, 그 중 전문직 부족 규모는 약 6만 1000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한국의 의사 숫자가 많은 편도 아니다. 한국 의사(한의사 포함) 수는 인구 1000명 당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보다 적고, 2.5명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의사 숫자는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었다. 2000년 3,507명이던 의대 정원을 2006년까지 3,058명으로 감축한 것이다. 이 정원 규모는 2024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1)
1) 해당 챕터의 의사 수 현황과 전망은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이철희), 위즈덤하우스>를 참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 증원이 매 시도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전공의들을 주축으로 한 당사자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의사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공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표방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가능한 걸까?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대학이 계층사다리로서 확고하게 기능하고 있고, 이를 시정하려는 계획은 이 계층사다리를 오르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앞서 올라간 선배들과 뒤이어 올라올 후배들 사이에서 “왜 나한테만 이러냐”는 불공정 심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대 증원에 대한 공정성 논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은 한국의 대학 서열 체계를 어떻게 해체하고 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대증원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의대’가 대학서열 최상위 정점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교육’ 문제가 해결되어야 ‘의사 기득권’이라는 특정 직종의 표면적 문제를 넘어, 저출생-초고령 사회에서 살아갈 시민들의 건강이라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계층 사다리’가 아니라 ‘계급 대물림’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저출생 현상이 가지는 특수성은 ‘교육’이다. 비용도 비용지만, 이렇게 치열한 교육경쟁사회에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드는 수준이다.
2022년 한국의 초중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원이고, 사교육 참여율 78.3%이며, 사교육비 총액은 26조 원에 달한다. 그리고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가구 소득 상위 20%의 교육비 지출액은 하위 20%보다 20배 이상 높다. 학생들의 80%가 사교육을 하고 있는데, 상위계급 학생들은 20배의 사교육비를 더 지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과열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는 수치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돈을 쏟아 부으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이 제공한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학기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의대에서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1050명 중 소득 9·10 구간에 있는 학생 비율은 74.4%다. 고소득층일수록 명문 의대에 더 많이 진학한다는 것이다. 또한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2022년 학생 1인당 학부모 부담금 자료에 의하면, 2022년 자사고 학생 1인당 학부모 부담금은 평균 862만 원이고, 사립외고는 평균 760만 원에 달한다. 만약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최고 수준의 교육 코스를 밟는다면 얼마나 돈이 들까? 사립 초등학교(최고 1,295만 원)-사립 국제중학교(최고 1,499만 원)-사립 외고(최고 1,866만 원)로 대학 진학 전까지 학비만 최대 1억7865만 원에 달한다.2) 의무교육인 초중고 과정에서 이만큼의 금액을 지출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결국엔 부모의 소득과 사교육 투자가 자녀 입시 성공 여부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2) <대학 무상교육의 구상(박정원), 진인진>에서 언급한 여영국 정의당 국회의원 발언
2020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간한 <사회이동성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사회유동이 매우 낮은 사회다. 사회유동성은 자녀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계층이동성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해당 보고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를 사회유동성이 높은 상위 국가들로 소개했고, 독일(11위), 프랑스(12위), 일본(15위), 영국(21위)에 이어 한국은 25위로 언급했다. 이어 저소득층 가계가 중위소득에 도달하는데 몇 세대가 소요되는지를 계산했을 때, 한국은 5세대가 소요된다고 밝혔다. 자신이 저소득층이라면 손주의 손주 대까지 5세대가 노력해서 간신히 중간 수준의 소득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렇게 계층이동이 어려운 구조에서 상위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학벌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명문대라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들의 사회 주요 지위 분포를 보자. 2010-2014년 신규 임용 법관의 79.8%, 2012-2014년 신규 임용 검사의 68.7%, 2007-2012 외무고시 합격자 81.3%, 25개 신문방송업계의 부장급 인사 74.9%, 500대 기업 CEO 50.5%가 이른바 SKY 출신이다.3) 이 정도면 기를 쓰고 명문대에 진학하려고 하는 욕망과 여기에 막대한 비용을 쓰는 이유까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3) <대학 무상교육의 구상(박정원), 진인진>
반대로 자녀 교육에 투자할 재원이 없는 가정형편이라면 출산을 기피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미 교육은 계층 사다리로서 기능을 넘어 계급 대물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물림 할 수 없는 조건임을 직시한다면, 대물림할 존재 자체를 낳지 않으면 되니까.
물론 그렇다고 줄어든 학령인구가 교육경쟁을 완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녀가 있는 가정들 간의 교육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해지고 있고,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교육위기가 노동에 끼친 영향
교육은 개인에게 있어 학습과 성장을 모색할 있는 배움의 장이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교육을 사회에서 권리로 보장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교육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된다’라는 사회적 규범을 학습을 한다면, 음주운전을 하지 않음으로서 해당 운전자 스스로 안전해지는 것을 넘어 다른 운전자와 보행자들 역시 안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교육의 사회적 편익이자, 외부효과다. 학문적 성취 역시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성취를 기반으로 그가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논쟁한 양자역학이 탄생할 수 있었듯, 모든 학문적 성취는 또 다른 학문적 성취의 기반이 된다. 교육이 사유재가 아닌, 공공재로 취급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스스로의 편익을 담보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측면에서라도, 교육을 사회적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
교육의 구체적인 사회적 역할이 노동재생산에 있는 것 역시 비슷한 원리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데, 시민의 사회적 역할 중 하나가 노동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노동을 각자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에 개입하는 영역으로서 교육은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는 여태까지 대학을 서열로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노동을 재배치하는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친 서열화와 경쟁심화로 인해 교육을 사유재로만 인식하는 사회가 되어버리면서, 이러한 가이드라인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교육을 사유재로만 인식하는 사회에선, 교육에 대한 비용과 노력 대비 수익이 더 나을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명문대에 진입한 이들은 학벌을 정당한 권리라고 인식하고, 꼭 명문대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대학 서열 수준과 학력에 따라 적합한 진로를 가늠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교육수준에 따른 진로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투자한 비용은 막대한 손해가 되는 것이고 사회가 제공한 ‘좋은 학벌-안정된 삶’이라는 가이드라인은 일종의 사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벌피라미드에 기초한 사회에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순 없다. 다수의 교육경쟁 패자들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에 진입하기 어렵다.
이런 사회에서 일자리에 대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무엇일까. 눈앞에 기대치에 맞지 않는 일자리만 선택지로 존재한다면, 차라리 선택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고 기대치에 맞는 일자리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 전체로선 비효율적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기피 노동업종에서의 공백이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노동시장 수급 불균형, 미스매칭 문제다. 이러한 교육위기를 방치한다면, 인구감소는 노동위기와 불평등 심화로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노동재생산으로서 역할이 마비된 현실을 바꾸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상복구다. 대학서열체계를 더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좋은 일자리로의 진입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학벌과 학력에 따른 일자리 진입로를 단순화시키는 방식으로 미스매칭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매칭에서의 ‘미스’를 줄이자는 발상이다.
반대로 아예 ‘매칭’을 바꾸자는 아이디어도 가능하다. 대학과 노동시장의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는 방식이다. 교육과 노동재생산 구조의 관계를 끊어낼 순 없지만, 그 교육 현장이 곧바로 대학일 필요는 없다. 초중고 의무교육에서의 직업교육 강화, 구직자 대상의 직업훈련제도, 대학원 시스템 정비로 양질의 연구 인력을 키워내는 등 다양한 방법론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현재의 대학중심 노동재생산 구조가 더 비효율적일 수 있다. 기업들이 신규인력을 채용하고 나면 업무부터 기초교양까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그 일면이다. 학벌과 학력은 학교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냐는(혹은 사교육을 얼마나 받았냐는) 것만을 증명할 뿐, 노동시장에서의 탁월함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리고 현 시점 우리에게는 대학의 역할 자체를 재규정할 수 있는 계기가 목전에 와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숫자 조정이 불가피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대학은 사라지고 다른 어느 대학은 생존할 것이다. 이 기준을 어떻게 제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대학 체계를 수립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
6장 인구감소를 더 나은 교육을 위한 도약의 발판으로 ①
많은 교육전문가들은 지금보다 학급당 인원수가 줄어든 ‘동그라미 학교’를 지향한다. 한 학급을 10~15명인 소규모로 구성해서 교육의 질적 상향을 도모하자는 것이다. 또한 김영삼 정부의 대학설립준칙주의가 촉발한 현재의 양산형 대학들의 수를 감축하면서 대학공공성을 확보하자는 주장도 있다. 인구감소 시대는 이러한 맥락의 교육개혁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될 수 있다. 어차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해도 학교 수도 학생 수도 줄어든다. 그렇다면 그에 맞는 시스템을 재구성해야 하고, 그 방향성은 사회적 합의에 달려 있다.
인구감소로 인한 교육위기는 역설적으로 인구감소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사회 교육의 취약점들이 인구감소로 인해 더 극단적으로 드러났다고 보는 것이 더 적확하다. 그리고 이 모든 취약점들은 교육을 사유재로 인식하는 관점에서 비롯된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공공성이라는 방향성을 제대로 세워내는 것만이 교육위기와 인구감소시대의 유일한 대안이다. 교육은 나의 것도 너의 것도, 아닌 우리 모두의 것이어야 한다.
“과정의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맞서 저희는 이 땅의 청년들과 연대하려 한다”
어느 노동자 파업 집회의 발언 같지만 그렇지 않다. 2020년 문재인 정부의 의대 증원에 반대하며 전공의총파업을 주도했던 한 청년의 발언이다. 그는 의대 증원에 맞선 전공의들의 투쟁에 대해 “옳은 가치에 대한 시대적 흐름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시대건 어느 세대가 꼭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얘기다. 노예 해방, 여성참정권 등은 그 시대 당시에는 주류가 아니었다. 하지만 시대가 흐르면서 그런 움직임이, 옳은 가치가 맞다고 평가받는다. 우리가 해야 하고, 우리 세대의 일이고, 그렇게 목소리를 내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의대 증원 반대를 노예 해방-여성참정권 확보와 같은 선상에 놓고 그만큼 중요한 시대적 가치라고 설파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강한 반발과 코로나 국면이 겹치면서 문재인 정부의 의대증원은 실패로 귀결됐다. 그리고 2024년 윤석열 정부가 다시 의대 증원을 시도하고 있지만, 역시나 강한 저항으로 인해 난항을 겪고 있다. 물론 공공의료와 필수의료의 인력 부족이라는 한국 의료시스템의 문제점이 의대 증원으로 단번에 해결될 순 없다. 단순한 의대 증원은 의대에 진입하려는 상층 계급 자녀들의 욕망을 해소하는 기제가 될 뿐이며, 오히려 의사 기득권을 강화하고 필수의료 영역을 위축시킬 것이라는 우려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확실한 사실은 우리가 곧 마주할 저출생-초고령 사회에서 의사 수가 부족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것이고, 여기서 발생할 필수의료 영역에서의 공백을 해결하는 것 또한 의사 수 확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한국의 기대수명은 1970년 62.3세에서 2022년 82.7세로 늘어났고, 2023년 통계청 장래인구추계는 2072년 기대수명이 91세로 늘어난다고 전망하고 있다. 수명이 늘어난다는 것은 긍정적인 현상이지만, 당연하게도 ‘건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런데 인간은 자연적으로 노년기에 여러 질환에 취약할 수밖에 없다. 2019년 70세 이상 고령층의 연간 평균 내원 일수는 38.8일이다. 일반적인 경우 노인이라면 한 달에 세 번 정도 병원을 방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2048년까지 총 내원 일수는 2019년보다 138% 증가할 것으로 예측된다. 의사를 비롯한 보건의료업 종사자들의 숫자가 지금과 그대로라면, 노동 강도를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2031년까지 약 13만 명 이상의 보건의료계열 노동력이 부족할 것이고, 그 중 전문직 부족 규모는 약 6만 1000명으로 추정된다.
현재 한국의 의사 숫자가 많은 편도 아니다. 한국 의사(한의사 포함) 수는 인구 1000명 당 2.6명으로 OECD 평균인 3.7명보다 적고, 2.5명인 멕시코에 이어 두 번째로 낮은 수준이다. 그런데도 의사 숫자는 늘어나기는커녕 줄어들었다. 2000년 3,507명이던 의대 정원을 2006년까지 3,058명으로 감축한 것이다. 이 정원 규모는 2024년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1)
1) 해당 챕터의 의사 수 현황과 전망은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이철희), 위즈덤하우스>를 참고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대 증원이 매 시도마다 어려움을 겪는 것은 전공의들을 주축으로 한 당사자들의 저항이 워낙 거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들은 의사 기득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적어도 겉으로 ‘공정’이라는 사회적 가치를 위한 정의로운 투쟁을 표방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주장이 가능한 걸까?
한국 교육 시스템에서 대학이 계층사다리로서 확고하게 기능하고 있고, 이를 시정하려는 계획은 이 계층사다리를 오르던 사람들의 삶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당사자 입장에서는 앞서 올라간 선배들과 뒤이어 올라올 후배들 사이에서 “왜 나한테만 이러냐”는 불공정 심리가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의대 증원에 대한 공정성 논란을 정면으로 마주하는 방법은 한국의 대학 서열 체계를 어떻게 해체하고 완화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것이다. 의대증원을 둘러싼 논란의 핵심은 ‘의대’가 대학서열 최상위 정점에 있다는 것에서부터 비롯된다. ‘교육’ 문제가 해결되어야 ‘의사 기득권’이라는 특정 직종의 표면적 문제를 넘어, 저출생-초고령 사회에서 살아갈 시민들의 건강이라는 보편적 권리에 대한 문제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사회에서 교육은 교육만의 문제가 아니다.
대학, ‘계층 사다리’가 아니라 ‘계급 대물림’
선진국들과 비교했을 때 한국의 저출생 현상이 가지는 특수성은 ‘교육’이다. 비용도 비용지만, 이렇게 치열한 교육경쟁사회에서 자녀를 출산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에 대한 고민이 드는 수준이다.
2022년 한국의 초중고교생 1인당 월평균 사교육비는 41만원이고, 사교육 참여율 78.3%이며, 사교육비 총액은 26조 원에 달한다. 그리고 2019년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가구 소득 상위 20%의 교육비 지출액은 하위 20%보다 20배 이상 높다. 학생들의 80%가 사교육을 하고 있는데, 상위계급 학생들은 20배의 사교육비를 더 지출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육과열이 어느 정도인지 체감할 수 있는 수치다.
그리고 이렇게까지 돈을 쏟아 부으면 실제로 효과가 있다는 것이 현실에서 증명되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이 제공한 '국가장학금 신청 현황' 자료에 따르면, 2023년 1학기 서울대·고려대·연세대 의대에서 국가장학금을 신청한 학생 1050명 중 소득 9·10 구간에 있는 학생 비율은 74.4%다. 고소득층일수록 명문 의대에 더 많이 진학한다는 것이다. 또한 명문대에 진학할 가능성을 높이려면 명문고등학교에 진학해야 하는데, 한국교육개발원(KEDI)의 2022년 학생 1인당 학부모 부담금 자료에 의하면, 2022년 자사고 학생 1인당 학부모 부담금은 평균 862만 원이고, 사립외고는 평균 760만 원에 달한다. 만약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입학 전까지 최고 수준의 교육 코스를 밟는다면 얼마나 돈이 들까? 사립 초등학교(최고 1,295만 원)-사립 국제중학교(최고 1,499만 원)-사립 외고(최고 1,866만 원)로 대학 진학 전까지 학비만 최대 1억7865만 원에 달한다.2) 의무교육인 초중고 과정에서 이만큼의 금액을 지출할 수 있는 가정이 얼마나 될까. 결국엔 부모의 소득과 사교육 투자가 자녀 입시 성공 여부의 가장 중요한 결정요인이 될 수밖에 없다.
2) <대학 무상교육의 구상(박정원), 진인진>에서 언급한 여영국 정의당 국회의원 발언
2020년 세계경제포럼에서 발간한 <사회이동성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은 사회유동이 매우 낮은 사회다. 사회유동성은 자녀가 부모보다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을 의미하는데 계층이동성과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해당 보고서는 덴마크, 노르웨이, 핀란드, 스웨덴, 아이슬란드를 사회유동성이 높은 상위 국가들로 소개했고, 독일(11위), 프랑스(12위), 일본(15위), 영국(21위)에 이어 한국은 25위로 언급했다. 이어 저소득층 가계가 중위소득에 도달하는데 몇 세대가 소요되는지를 계산했을 때, 한국은 5세대가 소요된다고 밝혔다. 자신이 저소득층이라면 손주의 손주 대까지 5세대가 노력해서 간신히 중간 수준의 소득 가정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렇게 계층이동이 어려운 구조에서 상위계급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으로 학벌을 제시하고 있다. 흔히 명문대라 불리는 서울대•연세대•고려대 출신들의 사회 주요 지위 분포를 보자. 2010-2014년 신규 임용 법관의 79.8%, 2012-2014년 신규 임용 검사의 68.7%, 2007-2012 외무고시 합격자 81.3%, 25개 신문방송업계의 부장급 인사 74.9%, 500대 기업 CEO 50.5%가 이른바 SKY 출신이다.3) 이 정도면 기를 쓰고 명문대에 진학하려고 하는 욕망과 여기에 막대한 비용을 쓰는 이유까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
3) <대학 무상교육의 구상(박정원), 진인진>
반대로 자녀 교육에 투자할 재원이 없는 가정형편이라면 출산을 기피하는 것 역시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이미 교육은 계층 사다리로서 기능을 넘어 계급 대물림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물림 할 수 없는 조건임을 직시한다면, 대물림할 존재 자체를 낳지 않으면 되니까.
물론 그렇다고 줄어든 학령인구가 교육경쟁을 완화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자녀가 있는 가정들 간의 교육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치열해지고 있고, 시스템이 바뀌지 않는 한 더욱 치열해질 것이다.
교육위기가 노동에 끼친 영향
교육은 개인에게 있어 학습과 성장을 모색할 있는 배움의 장이다. 이렇게만 설명하면 교육을 사회에서 권리로 보장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교육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사회에도 반드시 필요한 영역이다. 교육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이익이 개인을 넘어 사회 전체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운전자가 ‘음주운전을 하면 안 된다’라는 사회적 규범을 학습을 한다면, 음주운전을 하지 않음으로서 해당 운전자 스스로 안전해지는 것을 넘어 다른 운전자와 보행자들 역시 안전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교육의 사회적 편익이자, 외부효과다. 학문적 성취 역시 마찬가지다. 아인슈타인의 학문적 성취를 기반으로 그가 반대의견을 개진하고 논쟁한 양자역학이 탄생할 수 있었듯, 모든 학문적 성취는 또 다른 학문적 성취의 기반이 된다. 교육이 사유재가 아닌, 공공재로 취급되어야 하는 이유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는 스스로의 편익을 담보하고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하는 측면에서라도, 교육을 사회적 권리로 보장해야 한다.
교육의 구체적인 사회적 역할이 노동재생산에 있는 것 역시 비슷한 원리다. 사회를 구성하고 지탱하는 시민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의 역할인데, 시민의 사회적 역할 중 하나가 노동이기 때문이다. 사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노동을 각자 어떻게 분담할 것인지에 개입하는 영역으로서 교육은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방식은 다양할 수 있는데, 우리 사회는 여태까지 대학을 서열로 나누고 그 서열에 따라 노동을 재배치하는 가이드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지나친 서열화와 경쟁심화로 인해 교육을 사유재로만 인식하는 사회가 되어버리면서, 이러한 가이드라인 자체가 무너진 것이다.
교육을 사유재로만 인식하는 사회에선, 교육에 대한 비용과 노력 대비 수익이 더 나을 것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명문대에 진입한 이들은 학벌을 정당한 권리라고 인식하고, 꼭 명문대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의 대학 서열 수준과 학력에 따라 적합한 진로를 가늠하게 된다. 만약 이러한 교육수준에 따른 진로 조건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자신이 투자한 비용은 막대한 손해가 되는 것이고 사회가 제공한 ‘좋은 학벌-안정된 삶’이라는 가이드라인은 일종의 사기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학벌피라미드에 기초한 사회에서 모두가 승자가 될 순 없다. 다수의 교육경쟁 패자들은 자신의 눈높이에 맞는 일자리에 진입하기 어렵다.
이런 사회에서 일자리에 대한 개인의 합리적 선택은 무엇일까. 눈앞에 기대치에 맞지 않는 일자리만 선택지로 존재한다면, 차라리 선택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고 기대치에 맞는 일자리에 계속해서 도전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개인의 합리적 선택이 사회 전체로선 비효율적 시스템으로 귀결된다. 기피 노동업종에서의 공백이 점차 늘어나는 것이다. 노동시장 수급 불균형, 미스매칭 문제다. 이러한 교육위기를 방치한다면, 인구감소는 노동위기와 불평등 심화로 확장될 것이다.
이렇게 교육의 노동재생산으로서 역할이 마비된 현실을 바꾸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원상복구다. 대학서열체계를 더 공식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좋은 대학을 나올수록 좋은 일자리로의 진입을 확실하게 보장하고, 학벌과 학력에 따른 일자리 진입로를 단순화시키는 방식으로 미스매칭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다. 매칭에서의 ‘미스’를 줄이자는 발상이다.
반대로 아예 ‘매칭’을 바꾸자는 아이디어도 가능하다. 대학과 노동시장의 연결고리를 단절시키는 방식이다. 교육과 노동재생산 구조의 관계를 끊어낼 순 없지만, 그 교육 현장이 곧바로 대학일 필요는 없다. 초중고 의무교육에서의 직업교육 강화, 구직자 대상의 직업훈련제도, 대학원 시스템 정비로 양질의 연구 인력을 키워내는 등 다양한 방법론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현재의 대학중심 노동재생산 구조가 더 비효율적일 수 있다. 기업들이 신규인력을 채용하고 나면 업무부터 기초교양까지 처음부터 다시 가르쳐야 한다며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그 일면이다. 학벌과 학력은 학교생활을 얼마나 열심히 했냐는(혹은 사교육을 얼마나 받았냐는) 것만을 증명할 뿐, 노동시장에서의 탁월함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그리고 현 시점 우리에게는 대학의 역할 자체를 재규정할 수 있는 계기가 목전에 와있다. 학령인구 감소로 인한 대학 숫자 조정이 불가피한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대학은 사라지고 다른 어느 대학은 생존할 것이다. 이 기준을 어떻게 제시할 것이며, 결과적으로 어떤 대학 체계를 수립할 것인지 우리는 결정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