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인의 인구위기 부수기] 1장 인구위기 공포마케팅 ②

공식 관리자
2024-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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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인구위기 공포마케팅 ②

 

 


저출생-초고령 사회는 나쁘기만 할까

 

지금까지 역사 속 인구감소는 대부분 전쟁이나 재난으로 촉발된 비극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새로운 사회로의 진입요인이 되기도 했다. 유럽 인구 3분의 1을 희생시켰다는 흑사병 시대에 영국은 농민들의 노동가치가 올라가면서 영주들과 협상력이 높아졌고 봉건제 몰락과 근대사회 진입이라는 사회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일할 사람이 사라진다(2024)>에서 흑사병 사례를 언급하며, “인구감소는 망자와 봉건영주에게는 재앙이었을지언정, 살아남은 일반인에게는 축복이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인구감소가 누구에게 재앙인지에 대한 질문과 그 답이다. 더구나 현 시점 우리가 마주한 인구감소의 미래는 전쟁이나 재해가 아닌 사회적이며 점진적인 과정이다. 그렇다면 이 인구감소가 누구한테 부정적이고 누구한테 긍정적인지 살펴보고 판단할 여지가 더 넓어진 것 아닌가?

 

한동일 작가는 <로마법 수업>에서 “노예의 소유주들은 은근히 노예가 가정을 갖기를 바랐다. 그건 노예에게서 출생한 자녀가 그대로 주인의 재산이 되기 때문이었다”며 로마 사회의 교묘한 출산장려정책과 한국의 저출산 위기론을 비교하기도 했다. 1) 우리가 마주한 인구위기는 우리 모두의 위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인구 5천만 대한민국이 유지된다면 우리의 삶 역시 지금 그대로일 가능성이 더 높지만, 저출생-초고령 사회는 아직 겪어보지 않은 가능성의 미래다.

1) “능동태 아니면 수동태, 이쪽 아니면 저쪽…한국엔 ‘중간태’가 필요해” 경향신문 장은교 기자(2019.11.09.)

 

저출생-초고령 사회는 어떤 사회일까. 기본적으로 고령 사회가 된다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선진국 대열에 합류했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보건의료 기술 발전과 사회적 인프라가 구축되었다는 뜻이고, 위생적인 주거 및 도시 환경을 갖추고 국민적 소득수준도 일정 부분 도달했기 때문에 노인 인구가 늘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대수명이 늘어나고 더 오래 건강하게 살 수 있다면, 이것은 좋은 일이지 나쁜 일이 아니다. 저출생 현상도 부정적으로 볼 수만은 없다. 자녀 돌봄의 시간 대신에 자기계발과 사회활동, 여가생활에 더 많은 시간을 쏟을 수 있다. 흑사병 사례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구 1인당 노동에 대한 가치도 증가한다. 노동시장을 적절히 변화시킬 수 있다면, 노동자가 자기노동에 대한 가치를 높여가며 더 나은 노동환경에서 일할 권리를 상대적으로 더 보장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을 포함해 작금의 실업문제도 어느 정도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저출생-초고령 사회 그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 인류가 역사를 거치며 그동안 여러 문제들을 해결해온 결과이기도 하다. 전체로선 ‘인구’지만, 그 인구는 수많은 개인들의 집합이고, 각 개개인들의 삶이 존재한다. 그리고 역사의 진보는 언제나 그 개인들의 삶에서 자유와 권리를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 결과 인구의 양적팽창이 가지는 중요성은 점차 낮아지고 있다. 물론 아직까지 국가단위에서 인구가 가지는 힘을 과소평가할 순 없다. 그러나 과거와 달리 현대사회는 인구 숫자에만 의존해 생산력을 가지는 시스템이 아니다. 가족 등 소규모 집단에서도 인구 숫자로 경제를 부양하며 경쟁에서 승리해 생존을 이어오던 시대는 끝났다. 인구의 양보다 질이 더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시대를 인류는 문명의 진보로 만들어 온 것이다.

한 개인이 최대한 오랜 시간 동안 건강하게 살아가고, 가족단위의 경제부양을 위한 다자녀 양육의 압박으로부터 독립해 스스로 인생 전반 설계하며 여가와 문화를 즐길 수 있다는 것은 행복에 더 가까워진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자녀 출산을 생존 혹은 생계의 수단이 아니라, 개인의 자기결정권 영역으로 보장하는 것 또한 인간의 자유와 권리에 대한 사회규범의 진보적 방향성이다. 그리고 사회는 이러한 개인의 권리보장과 증진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구성원 각 개인의 입장과 최소한의 인구 지속가능성을 확보해야 하는 국가의 입장이 충돌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국가가 인간의 자유와 권리의 영역에 부당하게 개입하는 방식으로 역사를 ‘빽도’할 순 없는 법이다. 출산은 국가가 보장해야할 시민의 자기결정권이지, 요구할 수 있는 의무가 될 수 없다. 반대로 출산에 대한 시민의 자기결정권을 존중하고 보장해야 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다. 저출생-초고령 사회가 가져올 여러 우려와 사회문제들을 ‘인구증가’의 방식으로 해결하자는 발상과 그에 따른 출산장려정책들이 올바른 답이 될 수 없는 이유다.

 

적정인구의 모순

 

만약 인구 숫자가 부족하다는 진단이라면, 어느 정도까지 인구 숫자를 맞춰야 할까? 지구적 차원과 국가적 차원에서 가장 적절한 숫자의 인구 숫자는 얼마일까? 이를 설명하기 위한 개념으로 적정인구와 최적인구론이 있다.

 

한 사회의 인구 숫자를 유지하기 위한 개념으로서 대체출산수준은 일반적으로 2.1명이다. 사망률이 높은 국가는(기대수명이 낮은 개발도상국이거나 전쟁 중인 경우) 사망하는 인구 숫자를 고려하여 그보다 높지만, 한국처럼 기대수명이 평균 수준 이상이라면, 2명이 결합해 2명을 출산해야 대략 비슷한 인구수로 유지 가능하다는 계산이다.

 

지구 차원의 적정인구는 각 기관마다 다르긴 하지만 대부분 20~30억 명 수준이다. 진화생물학자 폴 얼리크가 1994년에 계산한 지구의 적정인구는 15~20억이었다. 모든 사람이 알맞은 부와 기본권을 누리고 문화 및 생물 다양성이 보장되며 사람들의 창의성이 잘 발현된다는 조건으로 계산한 결과다. 국제생태발자국네트워크가 지구 생태보호를 기준으로 한 계산에 따르면, 모든 인구가 프랑스인 수준으로 살려면 30억 명, 한국인 수준으로 살려면 22억 명까지 줄여야 한다고 한다. 2) 어쨌든 현재 80억 인구는 지구에 부담이며, 앞으로 100억 명이 넘게 치솟을 지구 인구수를 예상하면 지구 차원에서 인구감소는 장려해야할 미래인 셈이다.

2) “지구의 적정인구는 얼마일까…그리고 한국은?” 한겨레 곽노필 기자(2024.06.29.) 


한국은 어떨까? 지구 인구는 줄이되 한국 인구는 늘려야 한다는 주장은 타당한 결론일 수 없다. 만약 지구의 적정인구를 20억 명이라고 가정하면 약 75%의 인구수가 줄어야 한다. 모든 국가가 이를 기계적으로 분담하여 현재 인구수에서 각 75%씩 감축하기로 한다면, 한국의 적정인구는 1250만 명이다.

 

이렇게 극단적으로 계산하지 않더라도, 전문가들은 현재 대한민국 인구(2023년 기준 5,117만 명)보다 줄어드는 것을 적정인구로 추산한다. 한국인구학회는 4,600만~5,100만 명, 국토도시학계는 4,350만~4,950만 명,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은 4,300만 명(2080년 기준)을 적정인구로 봤다. 통계청도 4,300만 명(2065년 기준)을 적정인구로 뽑았다. 3)어떻게 계산을 하든, 지금의 5천만 인구보다 규모를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3) “땅도 좁은데 인구 줄면 좋은 거 아니냐고요?” 한국일보 전영수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교수(2020.06.06.)


만약 적정인구의 개념을 긍정하는 입장이라면, 현 시점 인구감소는 극복의 영역이 아니라 관리의 영역이다. 물론 인구 연령구조(저출생-초고령)는 별개의 문제로 봐야 하며, 일정 수준까지 인구수를 안정적으로 감소시키며 이후 유지하기 위한 대안들이 추가로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 적정인구라는 개념 자체가 과연 타당한가에 대한 의문도 존재한다. 인구 문제의 고전인 <인구위기>의 저자이자,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선구자이기도 한 뮈르달 부부는 최적인구론을 거부한다. 적정인구를 계산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고 “사변적인 탁상공론”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적정인구를 계산하기 위해선 미래의 국제정치, 기술발전 등까지 모두 예상해야 하는데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한 적정인구 개념은 인류의 기술발전 속도가 시간이 갈수록 감소할 것이라는 전제를 바탕에 두고 등장한 것인데,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인류 과학발전의 경로와 속도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정반대의 측면에서 적정인구론을 부정하는 방법도 있다. 기하급수적으로 하나의 국가에서 인구폭발이 일어났을 때, 국제적 패권국가로 발돋움하는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폴 몰런드는 <인구의 힘>에서 영국과 미국의 패권국가로서 성장 동력이 인구폭발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영국이 전 세계 곳곳으로 이주를 도모하고 식민지를 건설하며 제국이 될 수 있었던 배경을 인구의 힘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반면 인구수가 적은 국가는 강소국은 될 수 있을지언정, 국제적으로 주요 국가 지위를 차지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물론 인구수가 전부는 아니며, 영국에서 인구폭발이 있을 수 있었던 사회적 요인과 늘어난 인구를 이주할 수 있는 과학발전과 국제정세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니냐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적정인구 논리가 다양한 관점에서 파훼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보면 ‘5천만 대한민국’이라는 목표는 허구적이며 모순적이다. 적정인구론 자체가 설득력이 없고, 설사 적정인구 개념에 동의하더라도 줄여야할 숫자다. 건국 이래 대한민국 역사에서 인구수는 대부분 5천만 이하였다. 1960년 2500만 명대, 1970년 3200만 명대, 1980년 3800만 명대, 1990년 4200만 명대, 2000년 4700만 명대, 2010년 4900만 명대였다. 5천만 인구수를 넘어선 것은 2012년으로, 정작 ‘5천만 대한민국’으로 살아본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5천만 대한민국’이라는 수치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 이하로 떨어진다고 해서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경제호황 시기로 보면 적정인구는 3000만 명대일 수 있다.

 

합계출산율의 함정

 

제 아무리 좋은 기능의 내비게이션이라도 목표를 잘못 설정하면 길을 잃기 마련이다. 한국 정부는 지금의 인구위기를 국가비상사태로 선언하면서, 정책의 목표를 ‘합계출산율’의 증가로 설정하고 있다. 단순하게 이해하면 합계출산율이 오르면 해당 정책은 성공한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을 것이다. 여기서 문제의식은 합계출산율이 오른다고 해서 사회가 더 나아지진 않는다는 점과 설사 합계출산율이 어느 정도 오른다고 해서 우리가 마주한 인구위기를 해결하긴 어렵다는 점이다.

 

2024년 윤석열 정부는 저출생 난제를 타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며 다양한 정책 대안들을 발표했다. 부모 1인당 육아휴직 급여를 첫 3개월 동안 최대 250만원으로 상향하고, 육아휴직 실질 사용을 늘이기 위해 대체인력지원금 120만원을 도입하겠다고 했다. 여기에 더해 5세까지 무상돌봄 시스템과 11세까지 국가보육책임, 신혼·출산·다자녀 가구에 대한 주택 공급을 대폭 늘리기 위한 주택 마련 대출요건 완화 등 구체적인 대책들을 함께 발표했다.

 

그동안 ‘양육’ 분야에 집중됐던 예산을 '일·가정 양립'으로 전환하겠다는 방향성은 긍정적인 변화라 할 수 있다. KDI 분석에 따르면 지난해 저출생과 직결된 예산 중 87.2%가 '양육' 분야에 집중됐지만, '일·가정 양립'에는 8.5%만 지원했다. 반면 윤석열 정부의 신규 정책은 국비 사업의 80% 이상을 ‘일·가정 양립’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아이를 많이 낳게 하기 위한 유인으로서 정책과 양육의 사회화를 위한 국가책임 정책을 현실에선 선을 딱 긋고 구분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정부의 저출생 대응 정책은 육아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향상시키고 노동 환경을 개선하는 효과가 있다.

 

그러나 전문가들과 시민단체는 ‘국가비상사태’라는 표현에 비해, 정부가 발표한 내용들에 여러 한계가 존재하고 부족한 정책이라고 평가했다. 예산투입과 현금지원의 규모가 미흡하다는 점, 고용보험 미가입자와 경제 취약계층 등 사각지대가 명확하다는 점이 대표적인 비판이다. 실제 OECD 평균 가족분야 공공지출(아동수당, 육아휴직 급여, 보육 서비스 지출 등)이 GDP 대비 2.12%인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1.37%에 불과하다. 현금 지원 영역으로 가면 OECD 지출 평균이 1.1%인데 비해, 한국은 0.2% 수준으로 더 열악하다. 또한 정부의 주택마련 대출요건 완화 정책의 수혜자는 집을 구매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춘 신혼부부만이 그 대상이라는 점에서 한계가 뚜렷하다.

 

이 중 주목하고 싶은 지점은 바로 ‘사각 지대’다. 사실 저출생 대응 정책에 ‘사각지대’가 존재하는 것은 윤석열 정부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출생’ 대책 그 자체에 원인이 있다. 정부는 애초에 ‘저출생’을 해결하겠다고 했지, ‘사회 불평등’을 해소하겠다고 한 적이 없다.

 

실제로 합계출산율만 올리면 된다는 목표라면, 중산층 대상 정책이 투입 대비 효과가 좋을 것이라는 추정은 충분히 가능하다. 2019년 출산 가구 가운데 상위층 비중은 54.5%, 중위층은 37%인데 반해 하위층은 8.5%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출산 가능성이 높은 상위층과 중위층에 예산을 집중 투자하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을 할 수도 있다. 이철희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가 밝힌 연구 결과에 따르면 현금 및 보육 지원 정책은 소득 4분위(상위 60~80%) 가구의 합계 출산율만 높였다고 한다. 주택마련 대출요건이 핵심 저출생 대응 정책인 것을 보면, 정부의 의도는 합계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오히려 그 대상을 명확히 한 것일 수 있다.

 

다른 예시를 들어보자. 한국사회는 기혼 가정의 출산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합계출산율’을 높이는 것이 목표라면 결혼을 시켜야하고, 되도록 빨리 할 수 있도록 유인해야 하며, 비혼 출산 혹은 한부모 가정 등에 대한 지원은 후순위로 밀릴 수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아이를 출산하기 어려운 동성커플에 대한 사회적 권리 역시 관심받기 어렵다. ‘저출생’이 사회적 과제의 최우선이라면 발생하는 부정적 요인들이다. 여성을 조기 입학시켜 사회진입 시기를 앞당기는 것을 저출생 대응 정책이라고 내놓는 것 역시 합계출산율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서 발생하는 오류다. 인구증가를 목적으로 한 정치와 정책들이 지금의 한국사회 불평등을 유지하는 것을 넘어 강화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합계출산율을 2.1명대라는 정상궤도로 올린다고 해도 인구 문제가 온전히 해결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만약 과학의 진보로 인해 인간의 수명이 더 늘어난다면 어떻게 될까. 기대수명이 120세, 200세까지 늘어난다면? 그때에도 늘어난 고령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노인들 숫자만큼 아이들을 더 많이 낳아야 한다고 주장할 것인가?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인구를 훌쩍 넘어 200억, 500억으로 팽창하는 것이 좋은 일일까?

 

애초에 ‘부양해야 하는 청년 vs 부양받아야할 노인’이라는 구도 자체가 잘못됐다. 우리는 다른 답을 찾아야 한다. 인구 정책이 필요한 이유는 인구증가가 아니라, 이 해법을 찾기 위한 다양한 대안들의 사회적 논의와 실행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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