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수형 박사가 박상훈 정치학자의 『혐오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긴 서평을 작성했다.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이견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긴 서평은 이미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게재된 글이지만 정치발전소 회원들에게도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마음에 2회에 걸쳐 공유한다. - 정치발전소

한국판 포퓰리즘으로서의 팬덤 정치
『혐오하는 민주주의, 팬덤 정치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서평 ⓵
박수형(<운동은 이렇게> 역자)
1.들어가며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사달이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조기 대선으로 일단락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장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황당무계하고 시대착오적인 판단이었다. 누군가는 특검과 탄핵으로 대통령과 정부를 흔드는 다수파 야당의 횡포 탓으로 돌리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런 공격을 통상적인 헌법 질서와 권한 내에서 충분히 잘 대응하고 해소할 수 있는 사안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전임 대통령의 치명적 판단 착오는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합당한 심판을 받았고,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하지만 대통령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상계엄이라는 당혹스러운 결정 뒤에는 한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정치적 자질 부족 외에, 야당은 야당대로 또 대통령과 여당은 그들대로 서로를 대화 상대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 전에도, 계엄 후에도, 선거 기간에도 우리 정치는 상대방에게 점점 더 사납고 격렬한 적대와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한국 정당과 그 지지자들은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며 갈등 속에서도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모으는 방식으로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성의 있는 대화를 통한 협력과 타협보다 상대에 대한 적대와 증오, 경멸과 조롱에 더 몰두할까? 이런 의문을 품고 사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우리 정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박상훈의 『혐오하는 민주주의』(이하 줄여서 『혐민』)는 그 답의 일단을 제시하는 반가운 선물이다.
『혐민』은 한때 신선한 정치 실험으로 찬사받기도 했던, 정치인 개인에 대한 지지․지원 활동이 지금 와서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다룬다. 이 책은 ‘팬덤 정치’에 대한 개념화로부터 시작해 그것이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어떻게 발원했고, 누구에 의해 작동했으며, 정당의 당원 구성과 국회의 입법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나아가 팬덤 정치를 지속시키는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한국 정치의 제도적․행태적 병폐를 조명한 후 팬덤 정치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정치인과 정당의 책임 있는 역할을 주문한다.
이 책은 저자가 앞선 저작들을 통해 ‘지역주의’나 ‘청와대 정부’의 문제를 다룬 데서 보여줬던 우리 정치의 중심 문제에 대한 분석과 평가, 대안 제시의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지배적 해석을 무너뜨리는 명료한 사실 정리와 단단한 논리 전개, 문제가 되는 정치 현상에 대해 기술적․사회적․심리적 분석보다 정치의 관점에서 인과론을 구성해 대안을 도출하는 접근, 통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그 운영에 필수적인 정당의 중요성과 정치의 윤리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분명 이 책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팬덤 정치의 문제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 유익한 지적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하 본문에서는 왜 그렇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책의 중심 주장을 주제별로 나눠 살펴본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거나 의아한 주장에 대해 저자의 주장을 보완할 만한 이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2. 팬덤 정치의 정의, 기원, 작동 방식
팬덤 정치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만 보면, 스포츠나 연예계 스타에게 일부 사람들이 열광적 지지와 성원을 보내듯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리더에게 같은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리더가 중요하고 이성적 판단만큼이나 감성적 열정이 큰 역할을 한다면, 팬덤 정치에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평면적 이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듯 현재의 팬덤 정치는 리더에 대한 일방적 지지 못지않게 그 리더와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인과 지지자에 대한 ‘혐오의 동원’을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대중정치 양식이라 주장한다.
언론매체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재된 기사, 인터뷰, 게시글 등에 대한 의미 구조 분석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팬덤 정치의 정의는 다섯 가지 차원의 특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 정치가 보장하고 요구하는 “정당한 시민 행동”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들이 혐오하는 정치인을 향해 야유와 욕설로 그들의 의지를 꺾고자 하는 집단행동”이다. 이런 방법은 팬덤 대중의 참여를 쉽고 재미있게 해줘 그들의 목적 실현에 도움을 준다. 여기까지는 좋든 싫든 팬덤 지지자도 수긍하고 동의하는 특성들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저자가 남들과 달리 날카롭게 파악한 세 번째 차원은 팬덤 정치가 단순한 의사 표현을 넘어 정치를 “온전히 자신들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팬덤 정치는 여론 추종적 정치인과 취약한 정당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압도하는 기제로 나타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차원은 각각 기성 정당과 기존 대의 민주주의를 개혁하는 운동으로서의 팬덤 정치다. 정당 밖에 있던 팬들은 이제 정당 안으로 들어가 당의 리더를 선출하고 당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당이라는 조직적 매개체 없이 대중이 곧바로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런 방식으로 자기 의지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 직접 참여를 강조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타적 공격을 주무기로 하는 팬덤 정치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저자는 2019년 ‘공직선거법 개정’, ‘공수처법 제정’을 둘러싼 여야 정당 간 폭력 사태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이후, 팬덤 정치가 여론 시장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데서부터 답을 찾는다. 그 후로 양대 정당에서 온건파 내지 협상파는 설 자리를 잃었고 당은 대통령(후보)과 그 파벌, 즉 친박․친문을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개방형으로 자리 잡은 당내 경선이 기름을 부었다. 이제 주요 정당의 공직 후보가 되려는 이들은 자기 진영 사람들을 향해 “더 세게 말해야 하고, 상대 당을 더 세게 몰아붙여야 했다. 그래야 주목받을 수 있고 환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문재인 두 대통령은 상대 정당과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적폐 청산’과 의회 제도를 우회하는 ‘국민 직접 정치’에 의존했고, 그들을 지지하고 호위하며 상대편을 공격하는 ‘근혜사랑’과 ‘문빠’는 팬덤 정치의 대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런 설명에 더해 저자는 팬덤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동기를 중심으로 그것의 작동 방식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여기서 주체는 세 그룹, 즉 팬덤 정치를 밀고 끄는 리더, 시민, 언론으로 나뉜다. 먼저 리더는 자신만의 ‘사인화(私人化)된 권력 자원’을 빠르게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팬덤 정치를 활용한다. 이때 팬덤 리더는, 기존 정당정치는 기득권과 특권집단이 지배하고 자신은 그로부터 자유로운 아웃사이더임을 자임하며 그런 “정당․정치가 만든 규범을 무시하고 우회하며 때로는 공격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지지를 추구함으로써 정치를 좀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만든다.” 이런 정치 행태를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두 전직 대통령 외에 윤석열 전임 대통령, (이제는 대통령직에 오른) 민주당 이재명 대표,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 등이 있다.
이들 리더의 동원 정치에 호응하는 시민들은 누구일까? 저자는 조직이 아닌 활동으로만 드러나는 팬덤 시민의 사회인구학적 특성을 살피는 대신 그들을 ‘무정형의 운동 집단’으로 규정하며 그들이 공유하는 열정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 열정의 핵심은 “연대와 협력, 공익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보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자들을 제압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렇기에 이들 팬덤 시민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과도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한 ‘좌표 찍기’, ‘18원 보내기’, ‘수박 깨기’ 등에 스스럼없이 나선다. 한편, 이런 운동이 ‘정형화되지 않은 집합적 열정’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그 내부 구성의 편제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팬덤 시민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리더를 신뢰하고 따르려는” ‘추종형 팬덤’이다. 두 번째는 “리더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추구하는” ‘편익 추구형 팬덤’이다. 마지막은 “팬덤 활동을 통해 정치 참여의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정치 효능감 추구형 팬덤’이다. 이들 세 유형 중 특히 뒤의 두 집단 때문에 팬덤 정치는 계속해서 다른 리더를 찾아 이동하는 가변성을 보이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팬덤 언론은 이들 “팬덤 시민을 의식화하고, 수많은 정치 의제들에 대한 판단을 제공하며 그들의 행동과 사고 체계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기성 언론이나 여야 정당도 우리 사회의 주요 사안을 자극적이고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팬덤 시민을 이끌며 팬덤 정치를 확산하는 데는 ‘나꼼수’ 이래 지난 10여년 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팟캐스트, 유뷰브 채널, 탐사 보도 매체의 역할이 독보적이다. 그들은 시민 참여, 대중 지성, 집단 지성을 모토로 내세우지만 “합리적 이성보다 공중의 정념을 자극하는” 데 더 능숙하다. 또한 그들은 인간 심성의 성급함을 자주 악용하는데, “잘못이 분명하고 대안도 분명한데 왜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냐”며 화를 내고 화를 북돋우길 좋아한다. 이렇게 팬덤 언론은 타깃으로 삼은 인물과 집단에 대해 조롱과 비하, 혐오와 욕설에 가까운 언어들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3. 팬덤 정치 속의 정당과 의회
『혐민』에서 저자가 조명하는 여러 정치 현상들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팬덤 정치와 관련된 정당과 국회의 변화이다. 오늘날 우리 정당은 민주주의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국회 또한 민주주의 선진국들보다 훨씬 더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다. 이런 변화가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상식에 반할 뿐 아니라 통상적인 정치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한국적 양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언뜻 바람직해 보이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의 당원 수는 지난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04년에는 196만명 수준이었던 것이 2021년에는 1,043만명(유권자 대비 23.6%)으로 5배 넘게 늘었다. 정당 이론에 따르면, 당원은 “득표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정당을 시민사회와 생활 세계로 연결하며, 당내 의사결정 과정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한국의 그 많은 당원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당원 수가 전체 유권자의 1/4 정도라면, 지난 지방선거 투표율이 50%를 갓 넘는 수준에 머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원 1명이 매달 1,000원씩만 당비를 내도 그 액수가 1,251억원을 넘지만, 실제 당비 수입은 615억원으로 그 절반에 그칠 뿐이다. 당원 중 당비 납부자 비율은 20.5%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선출직․임원직 당원이 평당원보다 10배나 100배 더 많은 당비를 내기 때문이다. 생활 세계에서도 선거 시기를 제외하면 당원들의 일상적인 정치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내에서도 당원 활동은 후보 선출 시기나 간혹 지도부가 자기들 결정의 책임을 당원에게 미룰 때나 두드러지며, 대개 ARS 전화로 이뤄지는 그 투표조차 참여율은 높지 않다.
이렇게 당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도 그 규모와 실제 활동에 간극이 큰 이유는 뭘까? 저자는 당원을 세 유형으로 나눠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다. 첫 번째는 ‘허수 당원’이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그냥 당원 명부에 올라 있는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당원으로 가입된 사람들, 당원으로 가입은 했으나 당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매집 당원’이다. 후보 선출의 무게 중심이 중앙당의 하향식 결정에서 당원 투표와 여론조사로 이동함에 따라 후보들은 각종 연고나 직능․종교 단체 등을 활용해 대대적인 당원 모집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선거를 주기로 당원 수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마지막은 ‘팬덤 당원’이다. 이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대통령 또는 당대표 후보 지지를 위해 중앙당을 통해 온라인으로 입당하며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당원, 대의원, 당직자들을 특권집단이나 부패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팬덤 리더를 지키려는 열정”이 강하고 “정당보다 리더 개인에게 더 큰 충성심을” 보이는 당원이다.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당원 구성 탓에 오늘날 우리 정당은 조직력이나 정책 능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선거운동도 대개 급조된 후보 캠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렇게 해서 집권하더라도 정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팬덤 시민이 정치를 압도하고 팬덤 당원이 정당을 좌우할 때, 민주주의 최고 권위 기관인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은 어떻게 법률을 만들까? 의원들이 국회에서 펼치는 의정활동만 놓고 보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열심히 법안을 작성하고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것 같다. 민주화 직후인 13대 국회에서 의원 발의 법안 건수는 570건이었으나 20대 국회에서는 무려 23,047건으로 40배나 증가했다. 20대 국회를 기준으로 의원이 검토해야 하는 (정부 제출 법안을 포함한) 접수 법안 수와 의결 과정을 거친 통과(반영) 법안 수는 각각 24,141건, 8,799건이다. 이를 의원 수로 나눠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접수 법안 수는 미국의 2배, 프랑스의 23배, 영국의 91배, 독일의 67배, 일본의 62배나 된다. 의회가 통과․반영․성립시킨 법안 건수 역시 미국의 21배, 프랑스의 49배, 영국의 172배, 독일의 37배, 일본의 49배에 이른다. 엄청난 입법 실적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부풀려진 당원 수처럼 겉으로 드러난 양(量)에만 집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법안 발의는 법안 검토의 질을 떨어뜨린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법안 통과는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와 법을 심판하는 사법부의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어떤 경우든 입법부의 역할과 권위는 약화되고 시민사회의 자발적 연대와 자율적 협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재 국회를 두고 일컫는 ‘입법 공장화의 역설’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왜 의원들은 입법 활동의 양적 실적에 집착할까? 『혐민』에서 제시하는 답은 세 가지다. 하나는 언론과 시민단체가 의원의 의정활동 평가에서 법안 발의 건수 같은 양적 지표를 과용한 탓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이 공천 심사에 입법 활동의 양적 성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정당의 정책 조정 기능이 약화되면서 의원들 개개인의 무한 경쟁 체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문제에서도 저자의 관점은 일관된다. “팬덤 정치가, 신념도 이념도 큰 차이가 없는 정당 경쟁의 환경에서 모든 의원이 여론의 주목을 받고 대통령이나 당권에 가까이 가려는 권력 경쟁의 산물이듯, 법안 폭증 역시 같은 원인에서 발원하는 또 다른 현상이다.”
4. 팬덤 정치의 대안
이렇듯 팬덤 정치가 민주 정치를 위협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무엇일까? 『혐민』의 결론 바로 앞 장에서 저자는 팬덤 정치 현상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 이 문제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해부한다. 이 장이 다루는 내용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에서 어떤 요인들이 팬덤 정치를 불러오느냐인데,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구체적인 대안까지는 아니어도 대안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팬덤 정치를 야기하고 지속시키는 첫 번째 요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팬덤 정치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팬덤 리더를 통해 정치를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그들에게 기성 언론과 정당, 국회의원은 주권자인 시민의 의사를 왜곡하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특권집단일 뿐이다. 그래서 당장 실현하기 어렵더라도 시민이, 당원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그런 방향으로 정치를 실천한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단순 이분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흔히 민주주의는 인민에게 주권이 있는 ‘인민의 통치 체제’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말 앞에는 문구 하나가 빠져 있다. 그것은 ‘인민에 대한’ 인민의 통치 체제라는 것이다(Sartori 1997). 인민을 국민이나 시민 또는 다른 뭐라 부르든 그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 지위와 이익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통치 체제를 구성하고 유지하려면, 인민의 직접 참여와 다수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는 ‘이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복수 정당제, 갈등과 경쟁뿐 아니라 ‘타협과 합의’를 장려하는 의회 제도 같은 것들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이들 제도를 무시하고 우회할 것이 아니라 그 제도의 역할을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팬덤 정치를 불러들이는 두 번째 요인은 우리 정치에서 반응과 결정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이다. 추격형 경제발전 모델을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 탓인지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문화에 더해 24시간 뉴스 채널과 인터넷 뉴미디어가 새로운 소통 매체로 확산되면서 우리 정치에서는 사건․사태에 대한 빠른 입장 개진과 그에 따른 빠른 정책 결정이 정치적 미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과정의 속도전은 앞서 말한 시민들 간의 “다름과 차이를 조정하고 갈등과 합의의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필요한 타협을 못하게” 만든다. 타협 없는 갈등은 공존을 부정하며 적의와 혐오를 부추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치 양극화가 팬덤 정치를 낳는 것이다. 저자는 “권위주의는 명령을 통해 일하지만, 민주주의는 합의를 통해 일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합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쟁점 사안에 대한 숙려, 심의,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활동을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팬덤 정치도 제어할 수 있다.
세 번째 요인은 대통령 중심의 민주주의다.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대통령의,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민주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팬덤 정치 또한 “대통령을 위한 것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가를 최고 권력자로 만들기 위한 열정의 분출”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팬덤 정치에 의존한 대통령은 정당과 의회를 우회하는 ‘국민 직접 소통’이나 ‘직접 민주주의’ 기제를 통해 다시 한번 팬덤을 자극하고 확산하는 방법에 의존해 상대 세력을 제압하며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대통령 정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익집단 정치도 있고, 정당 정치도 있고, 의회 정치도 있다. 이들 다른 종류의 정치가 존중받고 활성화되지 않으면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와 함께하는 팬덤 정치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네 번째 요인은 이념 없는 양극화 정치다. 저자는 팬덤 정치를 양극화 정치가 극단화된 결과로 이해하는데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여야 사이에 합의의 기반을 제도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에는 정당들 사이는 물론 같은 당 내에서조차 의견이 다른 인물, 집단, 세력을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적대가 어떤 이념에 기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누군가를 ‘종북 좌파’, ‘보수 꼴통’, ‘반미’,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이념적 차이를 합리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며, “상대를 ‘이념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부당한 권력 효과를 누리고자 하는, 극단적 여론 동원 정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에 있으며, 그로 인해 정치는 일관된 가치와 원칙, 비전 없이 상황 논리만 쫓으며 권력 자원을 독점하려 들고 선거 승리와 권력 쟁취에만 몰두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팬덤을 동반하는 양극화 정치의 해법은 양극단 사이의 중도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상호 경쟁할 만한 이념을 구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대중적 지지를 모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책임 정치와 ‘좋은 정당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인에게는 그들이 시민에게 제시하는 비전, 정책, 원칙과 함께 그것의 실천이 가져온 성과와 한계를 설명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시민들이 자기 나름의 가치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치인과 정당을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정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그런 신뢰가 사회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정치인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라고 응원한다. 정치는 분명 권력 투쟁이다. 하지만 그런 권력 투쟁 속에서도 반드시 “옳은 일을 하겠다는 신념과 소명 의식이 현실 속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게 ‘단단한 내면’을 갖도록” 노력하는 정치인이 많아지기를 저자는 바란다. 이렇게 보면 신념 정치와 책임 정치가 상호 분리된 것만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신념․책임 정치와 함께 정당 정치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하는 핵심은 복수의 정당에 있다.” 이 명제에서 키워드는 ‘복수’(複數)이다. 정당이 둘 이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익, 가치, 정념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집약하고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당의 역할이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정당은 좀 더 나은 경쟁, 좀 더 나은 협력을 펼칠 수 있는 조직적 역량과 이념적 비전을 갖춰야 한다. 정치인의 신념과 책임도 여기서 만들어지고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좋은 정당이 없으면 대중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은 얼마든지 포퓰리즘 정치, 팬덤 정치, 양극화 정치를 불러올 수 있다.”
* 박수형 박사가 박상훈 정치학자의 『혐오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긴 서평을 작성했다. 이 책의 내용을 소개하면서도 몇 가지 부분에 대한 이견을 표시하기도 했다. 이 긴 서평은 이미 인터넷신문 프레시안에 게재된 글이지만 정치발전소 회원들에게도 더 많이 읽혔으면 하는 마음에 2회에 걸쳐 공유한다. - 정치발전소
한국판 포퓰리즘으로서의 팬덤 정치
『혐오하는 민주주의, 팬덤 정치란 무엇이고 왜 문제인가』 서평 ⓵
박수형(<운동은 이렇게> 역자)
대통령의 비상계엄 선포로 시작된 사달이 국회의 탄핵소추, 헌법재판소의 파면 결정, 조기 대선으로 일단락되었다. 누군가에게는 비장한 결단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다른 많은 이들에게는 황당무계하고 시대착오적인 판단이었다. 누군가는 특검과 탄핵으로 대통령과 정부를 흔드는 다수파 야당의 횡포 탓으로 돌리지만, 다른 많은 이들은 그런 공격을 통상적인 헌법 질서와 권한 내에서 충분히 잘 대응하고 해소할 수 있는 사안으로 이해했다.
그렇게 전임 대통령의 치명적 판단 착오는 헌법이 규정한 절차에 따라 합당한 심판을 받았고, 우리는 새로운 대통령을 선출했다. 하지만 대통령 한 사람에게 책임을 묻고 다른 사람으로 교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비상계엄이라는 당혹스러운 결정 뒤에는 한 개인의 인격적 결함과 정치적 자질 부족 외에, 야당은 야당대로 또 대통령과 여당은 그들대로 서로를 대화 상대가 아닌 적으로 간주하는 정치 양극화가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계엄 전에도, 계엄 후에도, 선거 기간에도 우리 정치는 상대방에게 점점 더 사납고 격렬한 적대와 혐오를 드러내고 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왜 한국 정당과 그 지지자들은 상대의 존재 가치를 인정하며 갈등 속에서도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를 모으는 방식으로 좀 더 나은 결과를 얻고자 노력하지 않을까? 왜 그들은 성의 있는 대화를 통한 협력과 타협보다 상대에 대한 적대와 증오, 경멸과 조롱에 더 몰두할까? 이런 의문을 품고 사는 사람들, 어떻게 하면 우리 정치를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꿀 수 있을지 궁금해하는 사람들에게 박상훈의 『혐오하는 민주주의』(이하 줄여서 『혐민』)는 그 답의 일단을 제시하는 반가운 선물이다.
『혐민』은 한때 신선한 정치 실험으로 찬사받기도 했던, 정치인 개인에 대한 지지․지원 활동이 지금 와서 왜 문제가 되는지를 다룬다. 이 책은 ‘팬덤 정치’에 대한 개념화로부터 시작해 그것이 어떤 정치적 맥락에서 어떻게 발원했고, 누구에 의해 작동했으며, 정당의 당원 구성과 국회의 입법 정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한다. 나아가 팬덤 정치를 지속시키는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와 한국 정치의 제도적․행태적 병폐를 조명한 후 팬덤 정치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대안으로 정치인과 정당의 책임 있는 역할을 주문한다.
이 책은 저자가 앞선 저작들을 통해 ‘지역주의’나 ‘청와대 정부’의 문제를 다룬 데서 보여줬던 우리 정치의 중심 문제에 대한 분석과 평가, 대안 제시의 미덕을 고루 갖추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 상식으로 통하는 지배적 해석을 무너뜨리는 명료한 사실 정리와 단단한 논리 전개, 문제가 되는 정치 현상에 대해 기술적․사회적․심리적 분석보다 정치의 관점에서 인과론을 구성해 대안을 도출하는 접근, 통치 체제로서의 민주주의와 그 운영에 필수적인 정당의 중요성과 정치의 윤리성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을 여기서도 볼 수 있다.
분명 이 책은 앞으로도 쉽게 사라지지 않을 팬덤 정치의 문제를 이해하고 개선하는 데 유익한 지적 자극제가 될 것이다. 이하 본문에서는 왜 그렇게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지 책의 중심 주장을 주제별로 나눠 살펴본 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쉽거나 의아한 주장에 대해 저자의 주장을 보완할 만한 이견을 제시하고자 한다.
팬덤 정치란 무엇일까? 말 그대로만 보면, 스포츠나 연예계 스타에게 일부 사람들이 열광적 지지와 성원을 보내듯 특정 정치인이나 정당 리더에게 같은 태도와 행동을 보이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정치 역시 사람이 하는 일이고 리더가 중요하고 이성적 판단만큼이나 감성적 열정이 큰 역할을 한다면, 팬덤 정치에 문제 될 만한 것은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이런 평면적 이해에 동의하지 않으며,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듯 현재의 팬덤 정치는 리더에 대한 일방적 지지 못지않게 그 리더와 경쟁 관계에 있는 정치인과 지지자에 대한 ‘혐오의 동원’을 특징으로 하는 일종의 대중정치 양식이라 주장한다.
언론매체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 게재된 기사, 인터뷰, 게시글 등에 대한 의미 구조 분석을 통해 저자가 제시하는 팬덤 정치의 정의는 다섯 가지 차원의 특성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민주주의 정치가 보장하고 요구하는 “정당한 시민 행동”이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자신들이 혐오하는 정치인을 향해 야유와 욕설로 그들의 의지를 꺾고자 하는 집단행동”이다. 이런 방법은 팬덤 대중의 참여를 쉽고 재미있게 해줘 그들의 목적 실현에 도움을 준다. 여기까지는 좋든 싫든 팬덤 지지자도 수긍하고 동의하는 특성들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다.
저자가 남들과 달리 날카롭게 파악한 세 번째 차원은 팬덤 정치가 단순한 의사 표현을 넘어 정치를 “온전히 자신들 것으로 만들어 갈 수 있다”는 자신감을 담고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팬덤 정치는 여론 추종적 정치인과 취약한 정당조직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동시에 압도하는 기제로 나타난다.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차원은 각각 기성 정당과 기존 대의 민주주의를 개혁하는 운동으로서의 팬덤 정치다. 정당 밖에 있던 팬들은 이제 정당 안으로 들어가 당의 리더를 선출하고 당의 운영 방향을 결정하는 데도 적극적으로 관여한다. 그리고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정당이라는 조직적 매개체 없이 대중이 곧바로 정책 결정에 참여하는 직접 민주주의 운동으로 스스로를 규정하며 그런 방식으로 자기 의지를 표출한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민 직접 참여를 강조하면서 상대에 대한 배타적 공격을 주무기로 하는 팬덤 정치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 의해 만들어졌을까? 저자는 2019년 ‘공직선거법 개정’, ‘공수처법 제정’을 둘러싼 여야 정당 간 폭력 사태로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된 이후, 팬덤 정치가 여론 시장의 주요 이슈로 부상한 데서부터 답을 찾는다. 그 후로 양대 정당에서 온건파 내지 협상파는 설 자리를 잃었고 당은 대통령(후보)과 그 파벌, 즉 친박․친문을 중심으로 작동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개방형으로 자리 잡은 당내 경선이 기름을 부었다. 이제 주요 정당의 공직 후보가 되려는 이들은 자기 진영 사람들을 향해 “더 세게 말해야 하고, 상대 당을 더 세게 몰아붙여야 했다. 그래야 주목받을 수 있고 환호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박근혜, 문재인 두 대통령은 상대 정당과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적폐 청산’과 의회 제도를 우회하는 ‘국민 직접 정치’에 의존했고, 그들을 지지하고 호위하며 상대편을 공격하는 ‘근혜사랑’과 ‘문빠’는 팬덤 정치의 대표 사례로 남게 되었다.
이런 설명에 더해 저자는 팬덤 정치 주체들의 정치적 동기를 중심으로 그것의 작동 방식에 대해 매우 인상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여기서 주체는 세 그룹, 즉 팬덤 정치를 밀고 끄는 리더, 시민, 언론으로 나뉜다. 먼저 리더는 자신만의 ‘사인화(私人化)된 권력 자원’을 빠르게 축적하기 위한 수단으로 팬덤 정치를 활용한다. 이때 팬덤 리더는, 기존 정당정치는 기득권과 특권집단이 지배하고 자신은 그로부터 자유로운 아웃사이더임을 자임하며 그런 “정당․정치가 만든 규범을 무시하고 우회하며 때로는 공격하고 파괴하는 방식으로 대중의 지지를 추구함으로써 정치를 좀 더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만든다.” 이런 정치 행태를 보이는 대표적인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두 전직 대통령 외에 윤석열 전임 대통령, (이제는 대통령직에 오른) 민주당 이재명 대표, 국민의힘 이준석 전 대표 등이 있다.
이들 리더의 동원 정치에 호응하는 시민들은 누구일까? 저자는 조직이 아닌 활동으로만 드러나는 팬덤 시민의 사회인구학적 특성을 살피는 대신 그들을 ‘무정형의 운동 집단’으로 규정하며 그들이 공유하는 열정의 성격에 주목한다. 그 열정의 핵심은 “연대와 협력, 공익에 대한 의무와 책임감보다 자신들과 생각이 다른 자들을 제압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렇기에 이들 팬덤 시민은 보통 사람들 눈에는 과도할 뿐 아니라 폭력적이기까지 한 ‘좌표 찍기’, ‘18원 보내기’, ‘수박 깨기’ 등에 스스럼없이 나선다. 한편, 이런 운동이 ‘정형화되지 않은 집합적 열정’에 의존한다 하더라도 그 내부 구성의 편제를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저자가 보기에 팬덤 시민은 크게 세 유형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상황에서도 리더를 신뢰하고 따르려는” ‘추종형 팬덤’이다. 두 번째는 “리더의 성공을 통해 영향력을 추구하는” ‘편익 추구형 팬덤’이다. 마지막은 “팬덤 활동을 통해 정치 참여의 효용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정치 효능감 추구형 팬덤’이다. 이들 세 유형 중 특히 뒤의 두 집단 때문에 팬덤 정치는 계속해서 다른 리더를 찾아 이동하는 가변성을 보이며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팬덤 언론은 이들 “팬덤 시민을 의식화하고, 수많은 정치 의제들에 대한 판단을 제공하며 그들의 행동과 사고 체계를 일정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기성 언론이나 여야 정당도 우리 사회의 주요 사안을 자극적이고 이분법적인 방식으로 제시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하지만 팬덤 시민을 이끌며 팬덤 정치를 확산하는 데는 ‘나꼼수’ 이래 지난 10여년 간 좌우를 가리지 않고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팟캐스트, 유뷰브 채널, 탐사 보도 매체의 역할이 독보적이다. 그들은 시민 참여, 대중 지성, 집단 지성을 모토로 내세우지만 “합리적 이성보다 공중의 정념을 자극하는” 데 더 능숙하다. 또한 그들은 인간 심성의 성급함을 자주 악용하는데, “잘못이 분명하고 대안도 분명한데 왜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냐”며 화를 내고 화를 북돋우길 좋아한다. 이렇게 팬덤 언론은 타깃으로 삼은 인물과 집단에 대해 조롱과 비하, 혐오와 욕설에 가까운 언어들을 생산하고 유포하는 방식으로 자신들의 상업적 이익과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한다.
『혐민』에서 저자가 조명하는 여러 정치 현상들 중 특히 흥미로운 것은 팬덤 정치와 관련된 정당과 국회의 변화이다. 오늘날 우리 정당은 민주주의 선진국들 가운데 가장 많은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 우리 국회 또한 민주주의 선진국들보다 훨씬 더 많은 법안을 발의하고 통과시킨다. 이런 변화가 흥미로운 까닭은 그것이 정치를 신뢰하지 않는 일반인들의 상식에 반할 뿐 아니라 통상적인 정치 이론으로도 설명하기 어려운 매우 독특한 한국적 양상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언뜻 바람직해 보이는 이런 현상은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한국의 당원 수는 지난 20년 가까운 기간 동안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2004년에는 196만명 수준이었던 것이 2021년에는 1,043만명(유권자 대비 23.6%)으로 5배 넘게 늘었다. 정당 이론에 따르면, 당원은 “득표와 재정의 상당 부분을 책임지고, 정당을 시민사회와 생활 세계로 연결하며, 당내 의사결정 과정을 최종적으로 정당화하는”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한국의 그 많은 당원이 그런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 같지는 않다. 당원 수가 전체 유권자의 1/4 정도라면, 지난 지방선거 투표율이 50%를 갓 넘는 수준에 머물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당원 1명이 매달 1,000원씩만 당비를 내도 그 액수가 1,251억원을 넘지만, 실제 당비 수입은 615억원으로 그 절반에 그칠 뿐이다. 당원 중 당비 납부자 비율은 20.5%에 불과하며 그마저도 선출직․임원직 당원이 평당원보다 10배나 100배 더 많은 당비를 내기 때문이다. 생활 세계에서도 선거 시기를 제외하면 당원들의 일상적인 정치 활동을 찾아보기 어렵다. 당내에서도 당원 활동은 후보 선출 시기나 간혹 지도부가 자기들 결정의 책임을 당원에게 미룰 때나 두드러지며, 대개 ARS 전화로 이뤄지는 그 투표조차 참여율은 높지 않다.
이렇게 당원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면서도 그 규모와 실제 활동에 간극이 큰 이유는 뭘까? 저자는 당원을 세 유형으로 나눠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고 답한다. 첫 번째는 ‘허수 당원’이다. 이들은 오래전부터 그냥 당원 명부에 올라 있는 사람들, 자기도 모르게 당원으로 가입된 사람들, 당원으로 가입은 했으나 당 활동에 전혀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두 번째는 ‘매집 당원’이다. 후보 선출의 무게 중심이 중앙당의 하향식 결정에서 당원 투표와 여론조사로 이동함에 따라 후보들은 각종 연고나 직능․종교 단체 등을 활용해 대대적인 당원 모집에 나섰다. 이렇게 해서 선거를 주기로 당원 수가 대폭 늘어난 것이다. 마지막은 ‘팬덤 당원’이다. 이들은 자신이 선호하는 대통령 또는 당대표 후보 지지를 위해 중앙당을 통해 온라인으로 입당하며 주로 온라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이들은 “당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온 당원, 대의원, 당직자들을 특권집단이나 부패 집단으로 몰아붙이며 팬덤 리더를 지키려는 열정”이 강하고 “정당보다 리더 개인에게 더 큰 충성심을” 보이는 당원이다. 다른 요인도 있겠지만, 바로 이런 당원 구성 탓에 오늘날 우리 정당은 조직력이나 정책 능력은 찾아보기 어렵고, 선거운동도 대개 급조된 후보 캠프를 중심으로 전개되며, 그렇게 해서 집권하더라도 정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팬덤 시민이 정치를 압도하고 팬덤 당원이 정당을 좌우할 때, 민주주의 최고 권위 기관인 입법부의 국회의원들은 어떻게 법률을 만들까? 의원들이 국회에서 펼치는 의정활동만 놓고 보면,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열심히 법안을 작성하고 발의하고 통과시키는 것 같다. 민주화 직후인 13대 국회에서 의원 발의 법안 건수는 570건이었으나 20대 국회에서는 무려 23,047건으로 40배나 증가했다. 20대 국회를 기준으로 의원이 검토해야 하는 (정부 제출 법안을 포함한) 접수 법안 수와 의결 과정을 거친 통과(반영) 법안 수는 각각 24,141건, 8,799건이다. 이를 의원 수로 나눠 다른 나라와 비교해 보면, 접수 법안 수는 미국의 2배, 프랑스의 23배, 영국의 91배, 독일의 67배, 일본의 62배나 된다. 의회가 통과․반영․성립시킨 법안 건수 역시 미국의 21배, 프랑스의 49배, 영국의 172배, 독일의 37배, 일본의 49배에 이른다. 엄청난 입법 실적처럼 보이지만, 이 역시 부풀려진 당원 수처럼 겉으로 드러난 양(量)에만 집중한 문제를 안고 있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법안 발의는 법안 검토의 질을 떨어뜨린다. 지나치게 많은 수의 법안 통과는 법을 집행하는 행정부와 법을 심판하는 사법부의 영향력을 증대시킨다. 어떤 경우든 입법부의 역할과 권위는 약화되고 시민사회의 자발적 연대와 자율적 협력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현재 국회를 두고 일컫는 ‘입법 공장화의 역설’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럼에도 왜 의원들은 입법 활동의 양적 실적에 집착할까? 『혐민』에서 제시하는 답은 세 가지다. 하나는 언론과 시민단체가 의원의 의정활동 평가에서 법안 발의 건수 같은 양적 지표를 과용한 탓이다. 다른 하나는 정당이 공천 심사에 입법 활동의 양적 성과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정당의 정책 조정 기능이 약화되면서 의원들 개개인의 무한 경쟁 체제가 자리 잡은 것이다. 이 문제에서도 저자의 관점은 일관된다. “팬덤 정치가, 신념도 이념도 큰 차이가 없는 정당 경쟁의 환경에서 모든 의원이 여론의 주목을 받고 대통령이나 당권에 가까이 가려는 권력 경쟁의 산물이듯, 법안 폭증 역시 같은 원인에서 발원하는 또 다른 현상이다.”
이렇듯 팬덤 정치가 민주 정치를 위협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대안은 무엇일까? 『혐민』의 결론 바로 앞 장에서 저자는 팬덤 정치 현상을 좀 더 깊이 있게 탐구하기 위해 이 문제를 민주주의 관점에서 조명하고 해부한다. 이 장이 다루는 내용은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그 실천에서 어떤 요인들이 팬덤 정치를 불러오느냐인데, 이를 거꾸로 해석하면 구체적인 대안까지는 아니어도 대안의 방향을 가늠할 수 있다.
민주주의와 관련해 팬덤 정치를 야기하고 지속시키는 첫 번째 요인은 민주주의에 대한 오해이다. 팬덤 정치에 적극적인 사람들은 팬덤 리더를 통해 정치를 직접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일종의 직접 민주주의를 상상한다. 그들에게 기성 언론과 정당, 국회의원은 주권자인 시민의 의사를 왜곡하며 자기 잇속만 챙기는 특권집단일 뿐이다. 그래서 당장 실현하기 어렵더라도 시민이, 당원이 직접 정치에 나서는 직접 민주주의를 이상으로 삼아 그런 방향으로 정치를 실천한다. 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그와 같은 단순 이분법으로 접근해서는 안 된다. 흔히 민주주의는 인민에게 주권이 있는 ‘인민의 통치 체제’라고들 말한다. 그런데 이 말 앞에는 문구 하나가 빠져 있다. 그것은 ‘인민에 대한’ 인민의 통치 체제라는 것이다(Sartori 1997). 인민을 국민이나 시민 또는 다른 뭐라 부르든 그들에게는 부인할 수 없는 중요한 특징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서로 다른 경험과 가치, 지위와 이익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이 모여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통치 체제를 구성하고 유지하려면, 인민의 직접 참여와 다수결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할 뿐 아니라 위험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현대 민주주의는 ‘이견의 정당성’을 인정하는 복수 정당제, 갈등과 경쟁뿐 아니라 ‘타협과 합의’를 장려하는 의회 제도 같은 것들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현재의 민주주의가 기대에 못 미친다면 이들 제도를 무시하고 우회할 것이 아니라 그 제도의 역할을 알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
팬덤 정치를 불러들이는 두 번째 요인은 우리 정치에서 반응과 결정의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는 것이다. 추격형 경제발전 모델을 벗어나지 못한 탓인지, 지난 권위주의 시대의 유산 탓인지 한국에는 ‘빨리빨리’ 문화가 강하게 자리 잡고 있다. 이런 문화에 더해 24시간 뉴스 채널과 인터넷 뉴미디어가 새로운 소통 매체로 확산되면서 우리 정치에서는 사건․사태에 대한 빠른 입장 개진과 그에 따른 빠른 정책 결정이 정치적 미덕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치과정의 속도전은 앞서 말한 시민들 간의 “다름과 차이를 조정하고 갈등과 합의의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필요한 타협을 못하게” 만든다. 타협 없는 갈등은 공존을 부정하며 적의와 혐오를 부추긴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정치 양극화가 팬덤 정치를 낳는 것이다. 저자는 “권위주의는 명령을 통해 일하지만, 민주주의는 합의를 통해 일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합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쟁점 사안에 대한 숙려, 심의, 조율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활동을 소중히 여기고 여기에 충분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만 팬덤 정치도 제어할 수 있다.
세 번째 요인은 대통령 중심의 민주주의다. 민주화 이후 4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도 우리는 ‘대통령의, 대통령에 의한, 대통령을 위한 민주주의’를 목도하고 있다. 팬덤 정치 또한 “대통령을 위한 것이고,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가를 최고 권력자로 만들기 위한 열정의 분출”로 이해할 수 있다. 게다가 그렇게 팬덤 정치에 의존한 대통령은 정당과 의회를 우회하는 ‘국민 직접 소통’이나 ‘직접 민주주의’ 기제를 통해 다시 한번 팬덤을 자극하고 확산하는 방법에 의존해 상대 세력을 제압하며 자기 의사를 관철하려 한다. 그러나 민주주의에는 대통령 정치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익집단 정치도 있고, 정당 정치도 있고, 의회 정치도 있다. 이들 다른 종류의 정치가 존중받고 활성화되지 않으면 대통령이나 대선 후보와 함께하는 팬덤 정치는 앞으로도 계속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네 번째 요인은 이념 없는 양극화 정치다. 저자는 팬덤 정치를 양극화 정치가 극단화된 결과로 이해하는데 그것의 “가장 큰 특징은 여야 사이에 합의의 기반을 제도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에는 정당들 사이는 물론 같은 당 내에서조차 의견이 다른 인물, 집단, 세력을 대화와 협력의 상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가 만연해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적대가 어떤 이념에 기반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가 보기에 “누군가를 ‘종북 좌파’, ‘보수 꼴통’, ‘반미’, ‘친일’로 규정하는 것은 이념적 차이를 합리적으로 다루지 않겠다는 것을” 뜻하며, “상대를 ‘이념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존재’로 규정해 부당한 권력 효과를 누리고자 하는, 극단적 여론 동원 정치에 가깝다.” 그렇다면 문제는 이념의 과잉이 아니라 결핍에 있으며, 그로 인해 정치는 일관된 가치와 원칙, 비전 없이 상황 논리만 쫓으며 권력 자원을 독점하려 들고 선거 승리와 권력 쟁취에만 몰두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팬덤을 동반하는 양극화 정치의 해법은 양극단 사이의 중도를 모색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인정하면서도 상호 경쟁할 만한 이념을 구성하고 그것을 토대로 대중적 지지를 모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저자는 책임 정치와 ‘좋은 정당 만들기’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정치인에게는 그들이 시민에게 제시하는 비전, 정책, 원칙과 함께 그것의 실천이 가져온 성과와 한계를 설명하고 책임지는 자세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야만 시민들이 자기 나름의 가치 기준에 따라 합리적으로 정치인과 정당을 평가하고 심판할 수 있으며, 그래야만 정치에 대한 신뢰가 쌓이고 그런 신뢰가 사회 곳곳으로 확산될 수 있다. 이를 위해 저자는 정치인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가지라고 응원한다. 정치는 분명 권력 투쟁이다. 하지만 그런 권력 투쟁 속에서도 반드시 “옳은 일을 하겠다는 신념과 소명 의식이 현실 속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게 ‘단단한 내면’을 갖도록” 노력하는 정치인이 많아지기를 저자는 바란다. 이렇게 보면 신념 정치와 책임 정치가 상호 분리된 것만도 아니라 할 수 있다. 신념․책임 정치와 함께 정당 정치의 중요성도 빼놓을 수 없다. “민주주의와 민주주의가 아닌 체제를 구분하는 핵심은 복수의 정당에 있다.” 이 명제에서 키워드는 ‘복수’(複數)이다. 정당이 둘 이상이어야 하는 이유는, 그럴 때만 사람들의 ‘서로 다른’ 이익, 가치, 정념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집약하고 대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정당의 역할이고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려면 정당은 좀 더 나은 경쟁, 좀 더 나은 협력을 펼칠 수 있는 조직적 역량과 이념적 비전을 갖춰야 한다. 정치인의 신념과 책임도 여기서 만들어지고 여기서 빛을 발휘한다. 그래서 저자는 이렇게 강조한다. “좋은 정당이 없으면 대중 민주주의가 갖는 역동성은 얼마든지 포퓰리즘 정치, 팬덤 정치, 양극화 정치를 불러올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