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과 민주주의 세미나 후기]
왜 ‘정치적 감정’인가 (1회 후기)

- 김군찬 정치발전소 회원(변호사)
1. 강연에 참여하게 된 계기
최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국 정치를 덮고 있다. 혐오와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일시적인 사회적 반응을 넘어, 어느덧 ‘혐오하는 민주주의’라 표현할 정도로 한국 정치의 구조적 일부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단지 일부 시민의 감정적 반응에 그치지 않고, 정치 담론과 정책 결정 전반에 침투하여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끼고, 계엄 정국에 들어서는 극단적인 상상을 떠올리기 까지 한다. 아마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의 적폐청산, 국정농단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감정’은 이제 사회 곳곳에 깊이 각인 된 것으로 보인다. 이성과 제도로 정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감정을 정치에서 배제해야 하는지 우리가 오히려 감정의 역할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여러 고민 들을 품고 있던 참에 ‘정치적 감정’을 정면으로 다루는 이번 세미나를 발견했고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정치발전소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2. 누스바움의 질문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적감정』은 1장에서 인도와 미국의 사례, 고전 및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짚어나가며, 감정이 국가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임을 역설한다. 정치적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이성과 제도로만 정치적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단지 합리성과 제도로만 작동하지 않으며, 시민들 간의 상호 존중과 공동체 유대를 가능케 하는 감정의 기반, 즉 ‘공적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공적 감정’은 단지 지지와 분노 같은 일차원적 감정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애도할 줄 아는 마음, 사랑과 연민을 포함한다. 이는 시민이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존중(평등한 존중)하고, 국가의 기반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자원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국가가 감정을 다뤄야 한다’는 주장에 거리감이 든다. 잘 알고 있듯이 감정이 정치를 지배했을 때 파시즘이나 전체주의가 탄생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세미나에서도 ‘정치적 무관심을 요구하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안정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여태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윤리’라는 의견도 제기되었고 나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물론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경계의 필요성을 명확히 말한다. 그녀는 감정을 다루되, 그것이 ‘선동과 날조’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감정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이번 세미나는 내게 정치적 감정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단단히 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 한국의 ‘정치적 감정’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다시 들여다보면, 분명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치인을 선택할 때 연설보다는 토론을 중시하고, 그만큼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물론 연설에 100만 군중이 운집하던 3김 시대와 노무현 대통령처럼 ‘정치적 감정’을 다루고자 한 정치인들도 있었지만,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겸손’이 미덕으로 강조된 사회에서 정치적 감정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기 어려웠던 것 같다.
사례로 들었던 앞에 인도, 미국의 사례와 달리 인도와 미국이 감정의 상징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시도해온 것과 달리, 한국의 경우 애국심을 상징하는 태극기나 애국가는 시대적 의미를 상실한 채, 오히려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광화문 광장에 ‘민주공화국’의 상징이 아닌 ‘조선’의 동상이 서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선언처럼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적 감정’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제도적으로도 건강보험, 징병제, 주민등록제 등 세계적인 석학들도 주목하는 성과를 갖고 있고 적어도 계엄 정국 이전까지는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민주주의를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길을 못 찾는 것을 보면 제도를 지탱하기 위한 ‘정치적 감정’이 왜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시민을 ‘공적감정’을 가진 주체로 대하기보다는, 여전히 선동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종의 ‘시민종교’ 역할을 하는 거대 양당은 감정을 갈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면, 누스바움이 강조한 ‘공적감정’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또한 누스바움이 지금과 같은 국제 정세(트럼프의 등장, 극우 포퓰리즘, 민주진영의 후퇴)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론을 보완했을지 궁금하다는 의견도 제시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현재진행형 이론이고 과제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4. 앞으로의 논의
결국 문제는 ‘정치적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정치적 감정’은 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도 있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적 감정’에 대한 논의는 정치, 제도, 교육과 예술,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스바움 역시 예술의 힘, 공공의 상징, 정서 교육과 같은 학자로서의 해결책들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열린 결말이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제기된 많은 질문은 이후의 세미나에서 더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감정과 민주주의 세미나 후기]
왜 ‘정치적 감정’인가 (1회 후기)
- 김군찬 정치발전소 회원(변호사)
1. 강연에 참여하게 된 계기
최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한국 정치를 덮고 있다. 혐오와 분노와 같은 감정들은 일시적인 사회적 반응을 넘어, 어느덧 ‘혐오하는 민주주의’라 표현할 정도로 한국 정치의 구조적 일부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단지 일부 시민의 감정적 반응에 그치지 않고, 정치 담론과 정책 결정 전반에 침투하여 많은 사람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도 정치적 사안에 대해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느끼고, 계엄 정국에 들어서는 극단적인 상상을 떠올리기 까지 한다. 아마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정국의 적폐청산, 국정농단으로 대표되는 ‘정치적 감정’은 이제 사회 곳곳에 깊이 각인 된 것으로 보인다. 이성과 제도로 정치를 설명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잘못된 것은 아닌지, 감정을 정치에서 배제해야 하는지 우리가 오히려 감정의 역할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여러 고민 들을 품고 있던 참에 ‘정치적 감정’을 정면으로 다루는 이번 세미나를 발견했고 부끄럽지만 오랜만에 정치발전소 기획에 참여하게 되었다.
2. 누스바움의 질문
마사 누스바움의 『정치적감정』은 1장에서 인도와 미국의 사례, 고전 및 현대 정치철학자들의 사상을 짚어나가며, 감정이 국가를 구성하는 본질적 요소임을 역설한다. 정치적 감정을 배제한 채, 오직 이성과 제도로만 정치적 자유주의를 유지할 수 있는가 문제의식을 드러낸다.
그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단지 합리성과 제도로만 작동하지 않으며, 시민들 간의 상호 존중과 공동체 유대를 가능케 하는 감정의 기반, 즉 ‘공적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이러한 ‘공적 감정’은 단지 지지와 분노 같은 일차원적 감정을 넘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애도할 줄 아는 마음, 사랑과 연민을 포함한다. 이는 시민이 서로를 동등한 존재로 존중(평등한 존중)하고, 국가의 기반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핵심 자원이라고 한다.
개인적으로는 여전히 ‘국가가 감정을 다뤄야 한다’는 주장에 거리감이 든다. 잘 알고 있듯이 감정이 정치를 지배했을 때 파시즘이나 전체주의가 탄생했던 역사적 경험 때문일 것이다. 세미나에서도 ‘정치적 무관심을 요구하는 다원적 민주주의를 지향하고 안정성을 지키는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 여태까지 우리가 받아들인 윤리’라는 의견도 제기되었고 나도 그 말에 깊이 공감한다. 물론 누스바움은 『정치적 감정』에서 경계의 필요성을 명확히 말한다. 그녀는 감정을 다루되, 그것이 ‘선동과 날조’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비록 감정에 대한 불편함은 쉽게 사라지지 않지만, 이번 세미나는 내게 정치적 감정을 또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정치적 자유주의를 단단히 하기 위한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3. 한국의 ‘정치적 감정’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 정치를 다시 들여다보면, 분명 감정을 다루는 방식이 서툴렀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정치인을 선택할 때 연설보다는 토론을 중시하고, 그만큼 감정보다는 이성과 논리를 중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 물론 연설에 100만 군중이 운집하던 3김 시대와 노무현 대통령처럼 ‘정치적 감정’을 다루고자 한 정치인들도 있었지만, 유교적 전통으로 인해 ‘겸손’이 미덕으로 강조된 사회에서 정치적 감정은 일정한 범위를 넘어서기 어려웠던 것 같다.
사례로 들었던 앞에 인도, 미국의 사례와 달리 인도와 미국이 감정의 상징을 통해 국민적 통합을 시도해온 것과 달리, 한국의 경우 애국심을 상징하는 태극기나 애국가는 시대적 의미를 상실한 채, 오히려 정치적 분열의 도구로 사용되기도 한다. 광화문 광장에 ‘민주공화국’의 상징이 아닌 ‘조선’의 동상이 서 있는 것도 인상적이다. 개인적으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한으로 망했으니 대한으로 흥하자”라는 선언처럼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공적 감정’들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편, 제도적으로도 건강보험, 징병제, 주민등록제 등 세계적인 석학들도 주목하는 성과를 갖고 있고 적어도 계엄 정국 이전까지는 높은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민주주의를 운영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정치가 길을 못 찾는 것을 보면 제도를 지탱하기 위한 ‘정치적 감정’이 왜 중요한지를 실감하게 된다.
오늘날 한국 정치는 시민을 ‘공적감정’을 가진 주체로 대하기보다는, 여전히 선동의 대상으로 소비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종의 ‘시민종교’ 역할을 하는 거대 양당은 감정을 갈등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쓰고 있는 현실을 떠올리면, 누스바움이 강조한 ‘공적감정’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하게 다가온다.
또한 누스바움이 지금과 같은 국제 정세(트럼프의 등장, 극우 포퓰리즘, 민주진영의 후퇴)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론을 보완했을지 궁금하다는 의견도 제시되었고 그 이야기를 들으며, 현재진행형 이론이고 과제라는 점을 떠올리게 된다.
4. 앞으로의 논의
결국 문제는 ‘정치적 감정’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기르고, 어떻게 다루느냐에 있다. ‘정치적 감정’은 공동체의 토대가 될 수도 있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도구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정치적 감정’에 대한 논의는 정치, 제도, 교육과 예술, 문화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스바움 역시 예술의 힘, 공공의 상징, 정서 교육과 같은 학자로서의 해결책들을 제시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열린 결말이다. 이번 세미나를 통해 제기된 많은 질문은 이후의 세미나에서 더 풍부한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