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점일기_2] 봄, 서점, 벚꽃말고 기후위기

공식 관리자
2023-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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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일기_2] 정치·사회전문서점 서점지기의 하나마나한 정치이야기

 


봄, 서점, 벚꽃 말고 기후위기


삼삼오오 모여 사진을 찍는 사람들, 한 손에 커피를 들고 남은 점심시간을 산책하는 온화한 표정의 직장인들 그리고 카페 야외자리에 앉아 봄의 기운을 만끽하는 커플들. 낮 시간인데도 지하철역에서 서점으로 이어진 길이 사람들로 가득하다. 벚꽃이 만개했기 때문이다. 국회의사당이 자리한 여의도만큼은 아니지만, 서점 앞에 놓인 이 아담한 길도 나름 유명한 벚꽃 명소다.

 

다른 시공간과는 달리, 사람들의 표정이 평화롭고, 온화하며 여유로워 보인다. 그리고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는 이 마저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니, 역시 봄은 봄인가 보다. 그러나 벚꽃과 사람들을 뒤로하고 서점으로 돌아오니, 또 역시 서점은 서점이다. 지난 글에서 밝혔듯, 길거리의 열기와는 상관없는 도도한 외딴섬, 차가운 이성의 공간.

 

바깥세상과의 연결고리를 위해 창문을 활짝 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봄날의 바람과 햇살, 봄을 만끽하는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오늘 만큼은 서점의 도도함(사실은 썰렁함)을 따스하게 녹인다. 평소 클래식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오늘의 묘한 기분을 증폭시키기 위해 비발디(Vivaldi)의 「봄」을 듣는다. (개인적으로 비발디(Vivaldi)의 「사계」는 막스 리히터(Max Richter)가 재해석한 음반이 최고라고 생각한다.)

 

매우 ‘곰’같은 감각을 소유한 나에게, 이런 계절의 변화를 온몸으로 체감하는 것은 굉장히 낯선 일이다. 그저 더우면 반팔을 입고, 추우면 반팔위에 패딩을 꺼내 입는 것이 다인데, 이런 극적인 자각이 내심 어색하고 낯설다. 이 생경한 변화의 원인을 생각하다보니 문득, 오랜만에 맞는 ‘온전한 봄’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닿았다.


사실상 ‘팬데믹’ 상황이 종료되고, 사람들이 모이자 거리가 활기를 찾았다. 마스크에 가려져 있던 얼굴이 드러나고, 따스한 봄바람과 꽃내음이 교차하니 웃음과 여유가 절로 넘친다. 이게 바로 ‘봄’이었던가. 당연하게 여겼기에 느끼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를 기나긴 비극을 겪고 나서야 알게 된 셈이다.


한편으론 두려움이 엄습했다. 언제고 다시 봄을 빼앗길 수 있다는 두려움, 언제 또 ‘팬데믹’과 같은 전 인류적 재앙이 닥칠지 모른다는 ‘트라우마’.


‘트라우마’가 그 자체에 그친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우리의 걱정이 그저 ‘트라우마’가 아니라는 신호는 이미 지구촌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사계절이 뚜렷한 나라’임을 자랑스레 배우고 자란 누구나가 체감하듯, 이미 우리는 봄과 가을을 조금씩 여름과 겨울에 내어주고 있다. 사실 이 거리에 핀 벚꽃도 아직은 피지 말아야 했다. 서울의 벚꽃이 지난 해 보다 10일, 평년보다 14일이나 앞당겨 피었다는 소식이다.


모든 문제를 소위 ‘퉁’치듯 기후변화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기후 문제를 풀어 가는데 해롭다지만, 기후변화로 인한 위기가 우리 일상에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북극의 빙하가 빠르게 녹고 있고, 세계 곳곳에서 이상 기온과 기후로 인한 재해가 거듭되고 있음을 우리는 목도하고 있다.


IPCC(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의 보고서는 우리 생태계가 회복 불가능한 위험에 빠질 시기를 기존의 2052년에서 2040년으로 10년 앞당겨 관측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 파국을 막기 위해 2030년까지 탄소배출량을 지금의 절반으로 줄여야 한다는 것인데 즉, 소위 ‘골든타임’이 8년도 채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상황이 이러하니, 비극의 끝에서 겨우 깨달은 나의 ‘봄’은 이미 지키기 쉽지 않아 보인다. 더군다나 이 절박하고 엄중한 경고 앞에 놓인 많은 상황이 이상하다.

 

틈만 나면 미래세대를 외치면서 도대체 의미를 알 수 없는 진흙탕 싸움만 하고 있는 정치권이 이상하고, 갈 길 바쁜 온실가스 감축 목표 앞에 어떻게든 꼼수만 부리려는 정부가 이상하다. 산업 시스템의 대전환이 절박한 상황에서 주요 대화 파트너를 적대시 하는 정부가 이상하고, 사회적 대화기구 참여를 놓고 핏대 높여 싸우는 시민단체들도 이상하다. 위기 극복을 위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서 (지난 2세기 동안 뒤엎지 못한) 체제를 변혁해야만 문제가 해결된다는 주장도 이상하고, 라이프스타일로서 친환경 이미지나 소비하며 에코백과 텀블러를 10개씩 가지고 있는 나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이래도 되는 건가?

 

이미 기후위기를 과장된 헛소리로 치부하는 목소리들은 잦아들었다. 사람들은 멀고 흐릿하게 느꼈던 기후위기를 이제 일상의 구체적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그러니 기후위기가 이제 우리 시대 가장 중요한 화두임을 부정할 수 없다.

 

그런데 뭔가 찜찜하다. 인류사에 기록 될 거대한 사회적 변화이자 역사적 전환이라 하기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이것은 역사의 도도한 물결 앞에, 한 낱 인간의 실존적 고민일 뿐일까? 이 거대한 전환을 앞두고, 개인은 무엇을 해야 하고,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사회적 논의는 없고, 언제까지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는 메시지만 공허하게 떠돈다.(물론 그 것도 잘 안될 것 같아 걱정이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이렇게 해도 어렵게 되찾은 나의 ‘봄’을 지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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