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 6

공식 관리자
2022-03-15
조회수 699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집단 지성의 사례처럼, 정치가나 정당들의 매개 없이 직접 민주주의를 통해 시민들이 직접 현명한 의사 결정의 사례를 만들어 갈 수 있지 않을까?”

 

집단 지성을 두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보자. 하나는 정치를 통한 길이다. 학력이든 소득이든 외모든 누구의 의견도 차별 없이 동등한 권리를 부여하는 정치체제에서, 이들 전체의 집단적 의사가 귀족정이나 왕정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 민주주의 역시 이런 집단 지성을 지향한다. 다른 하나는 정보통신체제를 통해 집단 지성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인터넷이나 인공지성과 같은 기술적 편의를 사용한다면 시민들의 총회를 열 수 있고, 이곳에서 정치가나 대통령, 정당 등의 매개 없이 공익에 가까운 결정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이를 뒷받침한다.

민주적 집단 지성은 시민이 활용할 수 있는 다양한 매개와 대표, 조직 등의 역할을 긍정한다. 반면 정보 통신적 집단 지성은 시민만 있으면 된다. 대표와 조직은 모두 특권의 기반이 된다고 본다. 민주적 집단 지성은 시민들이 계급이나 지역, 성별, 인종 등 수많은 차이와 갈등으로 분열되어 있다고 보고 그런 차이와 갈등을 정치과정으로 불러들여 평등화의 효과를 높이고자 한다. 제아무리 지식과 정보를 자유롭게 분배해도 시민들 사이에는 오해로 볼 수 없는 이익 갈등과 충돌이 불가피하므로 중재, 조정, 교섭, 협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는 조직과 정치가들의 역할이 필요하다고 여긴다. 반면 정보 통신적 집단 지성은 인터넷 같은 공간에서 계층, 학력, 소득 같은 격차는 드러나지도 않으며 의미도 없다고 생각한다. 자유로운 정보 소통만으로 충분하다고 본다.

설령 모든 사회구성원이 가상공간에서 한자리에 모여 평등한 의견을 모아 결정을 내린다 해도 권력 현상은 피할 수 없다. 누가 의제를 제시할 것인가? 단순한 판단이 필요한 쉬운 의제가 아니라 환율정책이나 이자율 정책, 외교, 군사 관련 의제는 어떤 선택지가 가능한지 누가 제시할 것인가? 의제 제시권을 가진 이들의 영향력은 누가 통제할 것인가? 총회는 언제 열 것인가? 모든 사람이 개인적인 활동을 멈추고 총회에 참여하도록 법으로 정할 것인가 아니면 자발적인 참여에 의존해 총회를 열 것인가? 구속력 있는 결정에 필요한 참석률의 크기를 어떻게 정할 것인가? 등등 기술의 문제로 치환할 수 없는 문제는 한두 개가 아니다.

정치의 역할 없이, 이를 이끄는 복수의 정당 없이, 다양한 사회 갈등을 대변하고 집약해 주는 정당의 역할 없이 민주적 집단 지성은 만들어지지 못한다. 민주주의는 기술 발달의 혜택을 활용하면서도 기술로 대신할 수 없는 정치적 지혜와 제도, 절차를 통해 실천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더 나은 집합적 결정을 이끌어 내고자 했던 인간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결실이 민주주의다. 정치가나 정당, 노동조합의 역할 없이, 정보 통신의 기술을 통해 시민이 직접 공적 결정과 집행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은 망상일 때가 많다.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직접 민주주의에서 참여가 가장 잘 실현되는 것 아닌가?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그렇지 못하다고 생각이 되는데, 설명을 듣다보면 그 반대라고 말하는 것 같다.”

 

고대 아테네에서 실천된 민주주의를 직접 민주주의의 이상에 가까운 전형이라 해보자. 그런데 그때의 시민 참여 특히 시민의 직접 참여는 생각보다는 소수에 국한된 현상이었다. 직접 참여에 필요한 시간적 여가와 소득의 기회를 대체할 만한 여력을 가진 시민을 위해, 사회 구성원의 절대 다수가 생산과 재생산의 역할을 전담해야 했다. 그렇기에 노예로 불린 노동자는 물론 재생산을 담당하는 여성에게도 시민권을 줄 수 없었다. 그렇다면 공적 역할을 위해 여가를 향유했던 시민들은 모두 잘 참여했을까?

아테네의 경우 전체 사회 구성원 가운데 약 5분의 1에서 8분의 1 정도의 남성 중산층 가부장들만이 시민권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 모두가 열심히 참여했던 것은 아니다. 정치 참여는 자유의사를 가진 시민에게만 허용되었다. 정치 참여는 시민의 의무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에 속했다. 참여한 이후 그가 한 모든 공적 행동은 사후적으로 엄격한 심사를 받았다. 시민 개인의 입장에서 볼 때 정치 참여에는 매우 무거운 책임이 따랐다는 뜻이다. 그 때문에 실제 시민의 정치 참여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정치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시민은 전체 인구 가운데 약 5분의 1에서 8분의 1 정도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그들 시민 가운데 실제로 민회에 참여한 시민은 얼마나 됐을까? 6분의 1에서 7분의 1 정도였다. 합쳐서 계산해보자. 전체 사회 구성원 가운데 실제로 직접 참여한 비율은 얼마나 될까? 5분의 1에서 8분의 1 정도의 시민 가운데 6분의 1에서 7분의 1 정도였으니, 결국 2퍼센트에서 4퍼센트 안팎에 불과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황당하기 그지 없는 일이다. 이를 소수 시민의 지배체제라고 할 수는 있어도 민주주의라고 할 수는 없다.

 

“그래도 민회에서 모든 것을 충분히 논의하고 결정할 수는 있었지 않을까? 6천 명 정도의 시민이 모여, 시민의 이름으로 공적 결정을 내리고 집행했다면 오늘날처럼 수백 명의 시민 대표가 공적 결정을 주도한 것에 비해 못하다고 볼 수는 없지 않을까?”

 

거기에도 오해가 있다. 민회는 1년에 40회 정도 열렸으며, 회기는 하루였다. 그날그날 선출되는 의장의 임기 역시 하루를 넘을 수 없었고, 실제로 민회가 지속된 시간은 반나절 정도에 불과했다. 원한다고 해서 누구나 의제를 제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민회를 기준으로 할 때, 설령 자유로운 토론이 허용되었다고 해도 참여자의 절대다수는 단 1분도 발언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

6천 명의 시민이 4시간의 회기 동안 1분씩 발언한다고 해보자. 그게 가능하려면 26일 정도가 걸린다. 5분씩 발언한다면 120일이 넘게 걸린다. 역설적이게도 직접 민주주의는 토론과 숙의 없는 민주주의를 만든다. 직접 참여한 소수의 시민들 사이에서 선동과 숫자 대결의 민주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지는 게 직접 민주주의다.

오늘날처럼 의견 집단이나 결사체를 만들어 그들과 그들의 대표를 중심으로 공적 토론의 밀도를 높이는 방법은 왜 사용하지 않았을까? 불가능했다. 시민총회를 통해 운영되는 체제였기 때문이다.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 아닌 집단적 목소리는 인정되지 않았으며, 민주주의 이전에 정치를 주도했던 귀족 집단이나 가문의 개입 역시 인정되지 않았다. 정당을 조직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고 노동조합 등 이익 결사체를 만들 수도 없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한다면, 직접 민주주의에서 시민이 체제 운영에 참여할 수 있었던 실제 범위나 직접성의 정도는 과장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시민이 직접 참여하는 것이 교육적인 차원을 포함해 시민적 권능의 확대를 위해 필요한 일이 아니냐며 다른 차원에서 직접 참여를 강조하는 의견이 있을 수 있다. 물론이다. 참여가 갖는 최고의 가치야말로 그런 효능감을 경험하고 공유하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정당에 직접 참여하고 직접 노조 활동을 하는 것은 시민 참여로 인정하지 않는가? 왜 노조와 정당에 가입하고 관련해 활동하는 것은 시민참여와는 무관한 것처럼 여기는 걸까?

시민 정치, 시민 단체, 시민 의회 등 시민이라는 용어가 과용되는 것은 생각해 볼 일이다. 사실 ‘시민 정치’란, 문자 그대로 하면 민주주의와 같은 말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이 말은 ‘정당이나 대의제가 아닌 시민 직접 참여 정치’를 뜻하는 말로 사용된다. ‘시민 단체’라는 표현도 그렇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최고의 시민 단체 내지 가장 강력한 시민 단체는 노조와 정당이다. 그런데 우리의 경우 시민 단체는 노조와 정당과는 무관한 단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언어 사용법이 노조와 정당을 시민과 무관한 세계로 대상화하고 분리시키는 데 일조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반정당적인 시민운동, 반노조적인 시민운동을 이끄는 사람들이야 인정하기 싫겠지만, 민주주의에서라면 정당과 노조보다 더 나은 시민운동과 시민 단체는 없다.

실제로 노동조합이나 정당에 조합원이나 당원, 선거인단으로 참여하는 시민의 숫자는 적게 잡아도 수백만 명이다. 인간의 역사에서 이만한 대규모의 정치 참여는 존재한 적이 없다. 이들의 참여를 시민참여가 아니라고 보는 것도 우습고, 이들 시민의 참여를 더 가치 있게 만드는 노력 없이 무슨 민주주의가 가능하다는 것인지, 생각해볼 일이다. 현대 민주주의가 3백 명의 국회의원들로 운영되는 듯 말하는 것이나, 그들을 시민과 무관한 특권 계급처럼 이해하는 것 자체부터가 난센스가 아닐 수 없다.

다시 강조하건대 현대 대의 민주주의만큼 대규모의 시민이 정당과 조합, 협회 등 여러 이름의 결사체에 직접 참여해 정치를 이끄는 체제는 존재한 적이 없다. 대의제를 시민 직접 정치와 배치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직접 정치가 소수의 참여로 연결되고 대표를 통한 정치가 더 많은 시민의 참여를 가져왔다.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꼭 고대 아테네 방식의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의 국가는 과거 도시국가와 달리 규모가 크기 때문에 직접 민주주의를 그대로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할 수만 있다면 직접 민주주의가 여전히 더 좋은 민주주의다. 현대사회는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전자적 소통 기술이 발전했다. 온라인을 활용하면 시간과 공간, 특별한 교육과 기술이 필요 없으며 누구나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더 많은 시민들의 더 넓은 참여를 보장할 수 있다. 이런 질문에 대해서는 어떻게 답할 수 있을까?”

 

우선, 직접 민주주의냐 대의 민주주의냐 하는 논쟁을 ‘규모의 문제에서 비롯된 기술적 제약’ 때문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규모의 문제와 더불어 (‘기능 분화’와 ‘전문화’의 특징을 갖는) 현대사회의 새로운 노동 분업 구조 역시 직접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어렵게 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적 이기들은 모두 이런 노동 분업 구조를 통해 성취된 것들이다. 현대 문명을 거부하거나 고도로 분화된 기능 혹은 전문적 직업 집단을 없애지 않는 한, 이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

변호사나 판사, 검사 선발 제도를 폐지하고 ‘법의 지배’를 실현할 수는 없는 일이다. 전문 행정 관료 없이 정부를 이끌 수도 없다. 시민이 총회에 참여하고 공직을 맡을 수 있도록 생계에 필요한 생산 활동은 물론, 미래의 시민을 양육할 재생산 활동을 시민이 아닌 기계나 외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여 맡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생산과 재생산의 기능을 시민 총회 기간 동안 일시적으로 멈추게 할 수도 없다. 그렇게 해서 유지될 수 있는 인간 사회는 없다.

현대적 노동 분업 구조 말고도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국민국가를 단위로 안보와 통상 등의 필요를 관리하고 통제하는 ‘국가 간 체제’(international system)의 제약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한 국가 내부의 문제라면 규모를 쪼개고, 노동 분업 구조를 지극히 단순화함으로써 변화를 도모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는 비현실적이다. 오늘날에는 어떤 국가도 자신의 의지만으로 존립할 수는 없다. 현재의 한국 사회를 50개 나라로 독립시켜 1백만 명의 인구를 가진 소국으로 쪼갠다 해도 국가 간 관계로부터 오는 제약을 피할 수는 없다. 군대나 직업 외교관, 통상 전문가 없이 정부 활동을 이끌 수 없다. 그럴 경우 직접 민주주의는커녕 나라의 존립마저 유지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전자적 소통 등 새로운 기술 변화를 활용해 직접 민주주의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을 자주 접한다. 아예 이렇게 질문하는 사람도 있다. 공적 의제에 대한 심의와 토론, 결정 과정이 완전히 공개된다면 시민이 주권을 일상적으로 행사할 수 있지 않을까? 원격 통제 장치를 고안해 나눠 주고 손쉽게 버튼을 누르는 식으로 모든 공적 사안을 시민들이 직접 결정할 수 있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하면 한자리에 모일 필요도 없지 않을까?”

 

그런 일이 설령 가능하다 해도 직접 민주주의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공적 의제는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거나 제도화되어야 할 것이다. 수많은 공적 의제들 가운데 어떤 의제를 중요하게 취급하고 어떤 의제는 뒤로 돌릴 것인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기구나 체계도 있을 수밖에 없다. 시민들의 참여도 마찬가지다. 알아서 자율적으로 누구나 참여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공적 의제에 대한 이해를 진작하는 일 역시 시민 각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결정의 집행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시민에게 전가할 수도 없다.

다양한 삶의 조건 속에서 모든 시민이 참여할 수 있는 ‘공적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어떤가? 모든 시민이 리모컨을 들고 모니터 앞에서 공적 결정을 주관할 수 있도록, 개별적이고 특수한 사적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운 ‘완전한 공적 시간’을 만들 방법은 없다. 공적 심의를 할 사안과 공적 결정의 날 역시 누군가에 의해, 혹은 제도화된 절차 내지 기구를 통해 시민에게 미리 예고되고 준비되고 관리되어야 한다. 1년 중 일정 기간을 공적 결정의 날로 정하거나, 아니면 매일 몇 시간을 공적 결정에 참여할 시간으로 정해야 하지만, 그 시간 동안 모든 사적 삶을 중지시킬 수는 없다. 설령 그것이 자동화된 시스템을 통해 가능해진다 해도, 그런 일은 모든 사적 삶을 통제하는 ‘기술적 전체주의’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최첨단 기술로 시스템을 개발해 모두를 접속하게 하는 방법으로 직접 참여하게 하고 직접 결정하게 한다면, 자유롭고 평등하고 식견 있는 참여와 토론이 가능해질까? 어렵다. ‘예, 아니오’의 단순한 결정만 많아질 뿐, 결국 풍요로운 공적 심의와 숙의적 결정의 가능성은 희생된다. 참여는 수동적이 되고 열의는 점차 사라질 수밖에 없다. 참여가 갖는 민주적 가치가 편의적 결정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결과도 피할 수 없다. 앞서 언급한 정치학자 사르토리는 더 비관적인 결말을 말한다. 즉, 이런 방식의 결정 과정을 지배하는 것은 자신들이 원하는 결정을 얻기 위해 극도로 편향된 정보를 제공하는 극단주의자들이고, 결국 다원주의적 조정과 협의의 기반은 더욱더 좁아진다는 것이다. 요컨대 기술에 의존하는 참여와 결정의 과정은 결코 ‘민주적 시간’이 될 수 없다.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기술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제도적 대안을 계속 모색할 수는 있지 않을까? 언젠가는 직접 민주주의를 가능하게 할 특별한 제도적 방안이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중요한 것은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사실 직접 민주주의의 제도적 허망함을 논증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제도적인 문제보다는 ‘시민 문화’ 내지 ‘시민적 덕성’(civic virtue) 같은 윤리적인 문제가 더 클 수도 있다. 직접 민주주의론이 전제하고 있는 두 가지 가정을 잠깐 살펴보자.

하나는 인간에 대한 가정이다. 직접 민주주의론자들은 ‘정치가에 대해서는 최대한 부정적’이면서 반대로 ‘시민에 대해서는 최대한 긍정적’인 인간관을 드러낼 때가 많다. 대의정치 속의 인간은 사익과 특권을 추구하는 것으로 가정되는 반면, 시민 직접 정치 속의 인간은 순수하고 사회적이고 공익적인 존재로 대비되곤 한다. 정치가가 시민의 일부이고 시민의 모습을 닮았다는 생각을 잘 하지 않는다.

시민이 순수하고 완전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 자체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시민은 그런 존재가 아니다. 2천5백 년 전의 아테네 시민보다 지금의 시민이 인식과 판단의 능력에 있어서 얼마나 진보했다고 볼 수 있을까? 긍정적으로 답하기 어렵다. 사익과 공익 사이의 관계는 또 어떤가? 공익이 ‘사익의 부재’를 말하는 것일 수는 없다.

인간의 자유를 없애지 않고, 사익을 추구하려는 인간 행동이 제거될 수는 없다. 오늘날과 같은 다원 사회에서 공익이란 ‘사익의 배제나 추방’이 아니라 ‘조정된 사익’에 가깝다. 사익을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구를 부정하지 않고 이를 공적 영역에서의 차이와 갈등으로 전환해 다루는 것, 그래서 결과적으로 ‘공익의 파수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 그간 인류가 익혀 온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시민을 순수하고 공익적인 인간으로 가정하고 그 위에 민주주의를 세우는 것은 너무도 위험하다. 그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관련된 일에 더 관심을 갖는 시민, 기회가 주어지면 권력과 영향력을 추구할 수도 있는 평균적 시민을 상정하고도 견딜 수 있는 민주주의가 훨씬 더 건강할 수 있다.

사심 없이 공익에 헌신하는 마음을 가진다 하더라도, ‘무지의 딜레마’를 벗어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지식과 정보를 최대로 취득한다 해도 무엇이 최선의 결정인지를 알기는 어렵다. 우리 모두는 ‘날개 없는 인간’이다. 날 수 있다는 가정으로 민주주의를 절벽 쪽으로 끌고 갈 수는 없다. 순수하지 않더라도, 무지하고 무능하더라도 평등한 시민권이 주어지고 그 위에서 작동할 수 있는 민주주의, 그것이 우리가 하고자 노력해 온 민주주의다.

두 번째는 직접 민주주의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갖고 있는 ‘시간에 대한 가정’이다. 시간은 ‘변화에 필요한 인내의 길이’라고 이해할 수 있는데, 직접 민주주의론자들은 대개 조급하다. 대의정치의 길고 지루한 싸움과 갈등에 관용적이지 않다. 이를 불가피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성마르다. 규탄의 언어로 일관하는 일이 잦다. 당장의 변화가 아닌 것은 기만이나 속임수로 이해할 때도 많다. ‘정치인들에게 맡기면 안 된다’, ‘온라인으로 하면 된다’, ‘개방형 플랫폼을 깔고 시스템에 맡겨라’, ‘사회네트워크서비스를 통해 국민과 직접 소통하라’는 그들 주장의 이면은 현실 정치에 대한 부정과 불만으로 채워져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원하는 변화를 성취할 수 있을까? 정파적 갈등만 배제한다면, 누구의 눈에도 완전한 대안을 발견할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시민을 직접 참여시키는 것만으로 사회적 동의에 도달하는 그 복잡한 과정이 순조롭게 해결되리라 기대하는 것은 순진하다 못해 무모하다. 이견과 갈등 없이 우리가 추구할 수 있는 현실적 최선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일은 가능하지 않다. ‘조정된 합의’가 더 강하고 더 오래 가는 변화를 만들 수 있다는 자각 때문에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고 지켜 갈 수 있게 되었음을 경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없다. 하나의 옳음을 추구하는 사회는 전체주의를 피할 수 없다. 모든 것을 알 수 있는 인간은 없고, 누구든 죽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 있는 삶을 추구하려는 의미 있는 노력을 중단하지 않을 수는 있을 텐데, 우리가 발전시키고자 하는 ‘정치론’과 우리가 지키고 옹호해야 하는 ‘민주주의론’은 그런 기초 위에 서 있어야 한다.

‘옳음의 전체주의’를 지향할 수는 없다. ‘완전함을 숭배하는 민주주의론’을 감당할 수 있는 인간은 없다. 민주주의는 인간이 싸우고 적대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자각 때문에 불러들여진 정치체제다. 같아질 수 없는 차이는 인간의 숙명이다. 공적 공간을 그럭저럭 잘 제도화한다면 서로의 존재를 절멸시키려는 과도한 열정을 완화할 수 있다고 믿고, 그것을 위해 불안 불안한 노력을 지속하려는 사람들의 불완전한 프로젝트가 민주주의다. 이 세상이 갈등과 적대를 피할 수 없는 곳이기에, 서로가 순응할 수 있는 공적 질서를 찾아 나서는 일과 같은 것이 민주주의다. 그것이 ‘이상적 최고’가 아닌 ‘현실적 최선’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일에서 열정과 책임성을 다하고자 노력하면서 그 한계를 확장하려는 사람들의 위대한 사업을 민주주의자들이 하고 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정치적 덕목의 목록 가운데 꽤나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우리 스스로에 대한 ‘합리적 의심’, 틀릴 수 있다는 자각을 갖게 하는 ‘불완전함에 대한 존중’, 비용을 치르지 않고 손쉽게 얻기는 어렵다는 ‘시간에 대한 경의’, 얻을 수 없는 것에 대한 집착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지혜로운 포기’, 큰 목표에 다가가고자 할수록 꾸준하고 오래 걸리는 노력을 하게 해주는 ‘점진적 급진주의’……. 이 모든 덕목들은 우리를 ‘다정하고 침착한 혁명가’로 이끄는 현대 대의 민주주의의 가치들이다.

적극적 의지와 신념의 힘, 그리고 과감한 용기가 정치의 본질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절제된 신중함’에 의해 단련된 것이길 바란다. 민주주의가 다수의 의지를 실천하는 특별한 정치의 방법이라 할지라도, 그때의 다수 역시 ‘숙고된 판단’과 ‘불완전한 합의’를 필요로 하며, 이때의 합의란 ‘여러 차이들 사이에서 불완전하게 조율된 균형’이라는 사실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우리는 인격과 품성을 좋게 하고자 노력한다. 민주주의도 불완전하다. 우리 서로가 함께 잘 가꿔가고자 노력해야 할 이유가 있다. 민주주의가 가치를 갖는 것도 그 때문이다.



마치며

  

노동운동을 배경으로 한 영화 <빌리 엘리어트>(Billy Elliot, 2000)라는 영화가 있다. 1980년대 영국 광산 노동자의 아들이자 가난한 탄광촌에 사는 11살 소년 빌리가 침대 위에서 힘껏 날아오르는 장면으로 영화는 시작이 된다.

당시 영국에서는 석탄 산업 구조조정으로 대규모 실직이 예견되는 상황이었다. 탄광에서 일하는 빌리의 아빠와 형은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 파업을 시작했다. 거칠고 험한 일상 속에서 치매를 앓는 할머니를 돌보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빌리는 권투를 배우던 마을회관에서 발레를 처음 알게 된다. 아버지와 형처럼, 자라서 광부가 되는 게 당연한 동네에서 빌리는 몰래 발레를 배운다. 특별한 목적이 있어서라기보다 자연스레 자신의 마음이 이끄는 대로 발레의 춤사위에 빌리는 몸을 맡긴다.

실직을 앞둔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이 고급 예술인 발레를 하겠다고 몰래 연습하고 로열발레학교에 지원하려는 순간, 이를 알게 된 가족과 이웃들은 충격에 빠진다. 하지만 결국엔 빌리의 타고난 재능과 열정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음을 모두가 알게 된다. 발레학교에 입학할 아들의 학비를 위해 아빠는 파업을 포기할 결심을 한다. 노동조합 활동에 열심히 참여했던 형은 그런 아빠를 막아서지만 결국 더 깊은 가족애를 확인하는 것으로 빌리를 런던으로 떠나보낸다. 어느덧 어른이 된 발레리노 빌리는 자신의 꿈을 이룬 듯 힘차게 날아오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을 맺는다.

자신이 어떤 노동을 하는가가 그 사람의 문화나 예술적 지향을 제약할 이유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노동자이고 또 인간이기에 아름다움에 대한 열정은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노동자의 아들이 발레라는 고급 예술을 하는 것, 그것이 자연스러운 사회를 우리는 바란다. 예술의 아름다움을 모두가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가 노동운동의 목표여야 한다고 믿는다. 그렇듯 현장 노동자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시민이라는 자각도 있었으면 한다. 노동자 가운데 신망이 있고 재능이 있는 사람이 정치가의 길에도 나서고, 정치가로서 존경받는 일도 있었으면 한다. 노동과 정치 사이를 민주주의라는 다리가 더 단단하게 이어주었으면 한다.

 

<빌리 엘리어트>의 각본을 쓴 시나리오 작가는 리 홀(Lee Hall)이다. <광부 화가들>(The Pitmen Painters, 2008)라는 연극의 각본도 썼다. 두 작품 모두 탄광노조 조합원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한 기자가 그에게 왜 발레리노 혹은 화가로 성장하는 탄광 노동자 이야기를 주제로 삼았냐고 질문한 적이 있다. 리 홀은 “어린 시절 탄광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익숙한 소재라고 답했다. 그때 자신이 경험한 탄광 노동자들은 “슬픈 감성(pathos)을 표현할 때조차, 자신들이 가진 예민한 감각(sensibility)을 유머(humor)로 표현할 줄 알았다.”고 했다.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내가 만난 노동자들은 감정적으로 풍부했다(emotional). 시적인 느낌을 줄 때도 있었다(poetic). 그러면서도 유쾌했고(funny) 또 강인했다(robust).”7)

 

리 홀은 자신이 믿는 노동운동의 진정한 가치를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것은 평범한 조합원과 그 가족들도 “고급 예술(high art)의 아름다움을 평등하게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데 있다고 말이다. 리 홀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그때 나는 아름다움을 사치로 여겼던 편협한 노동운동의 낡은 관점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우리 삶의 저자(author)다. 남에 의해 작성된 삶이 아니라, 자유롭게 자기 삶을 만들어 가야 할 존재들이다. 나만의 자유가 아니라 만인의 평등한 자유를 소중하게 여기는 사회를 만드는 일이야말로 인간 활동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아닐 수 없다. 노동자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각은 물론이고, 정치철학의 재미를 즐길 수 있는 민주주의를 상상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노동운동이 아닌가 한다. 아름다운 노동운동을 정말 바란다.

 

노동자가 사회적 약자로 정의되거나, 특별한 관심을 받아야 할 대상, 아니면 시혜와 온정이 요구되는 존재로 여겨지기보다, 우리 사회의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으로서의 당당함이 지금 시대에 맞는 노동자다움으로 새롭게 정의되었으면 한다. 힘없는 약자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사회 집단으로 이해되었으면 한다. 노동운동은 더 힘을 가져야 하고, 그 힘을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선용할 수 있어야 하고, 그 힘만큼 당당하게 책임을 다해야 한다고 본다.

회사와 공장, 거리에서만이 아니라 정당과 국회 등 정치와 민주주의의 모든 현장에서 필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세상을 좀 더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롭게 만드는 데 노동운동의 역할이 꼭 필요하고 또 중요하다는 것을 실증할 수 있어야 한다. 길을 내고 또 넓혀야 한다.


7) 인용은 Ronald Paul, “Culture and the Working Class: Lee Hall’s Billy Elliot and The Pitmen Painters” ZAA vol. 6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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