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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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논쟁을 동반한다. 이상의 강의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당연히 수강자들로부터 논쟁적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제 그런 질문을 통해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민주주의론을 좀 더 구체화해보기로 하자.
“개인보다 결사체와 집단, 조직을 강조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집단으로 행위 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집단은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고 ‘개인 간 평등’을 위협할 수 있다거나, 결사의 권리가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논리로 말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아마도 개개인의 이익과 열정을 표출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것의 작용으로) 자연스럽게 공익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민주주의보다 자유주의의 원리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중시하는 가치의 차이는 설득과 교육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다르다는 것 속에서 공적 행동을 조직하려면 공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위에서 집단적 이익의 표출과 집약, 조정이 가능해야 평등한 참여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다원주의의 원리를 통해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적 기본권은 비로소 사회적 내용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개개인들 사이의 공통된 관심을 조직하고 결사하게 하는 사회적 유인이나 집단적 요소는 많다. 직업과 소득은 물론 자본과 같은 경제적 영향력도 중요하고, 학력이나 지역 등 다양한 질료가 있다. 이런 다양한 집단이 발휘하는 민주적 가능성은 수(數)의 힘에 있다. 사회 속 약자들에게는 이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경제력이든 학력이든 외모든 언변이든 상관없이 누구의 의견이든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수의 힘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잘 상응한다.
“수의 힘을 조직하는 것도 불평등의 문제를 낳는다. 독점과 이기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다수의 독재, 다수의 전제정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 하나의 이익과 열정이 다수가 될 수는 없다. 자영업자든, 중산층이든, 노조원이든, 농민이든, 기독교인이든, 불교도든, 어느 시민 집단도 전체적으로는 소수다. 따라서 다원주의의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를 잘만 운영한다면, 수많은 소수 이익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결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이들 사이에 상호작용을 통해 ‘다수의 전제’나 ‘집단 이기주의’가 작용할 가능성을 줄일 수는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 어떤 문제나 긴장, 갈등도 만들어 내지 않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감수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장과 갈등을 해결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앞서 언급했던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결사의 예술’(art of association)로 규정한 적이 있는데, 민주주의 이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토크빌 이후 집단과 조직으로 대표되는 결사체의 문제 혹은 다원주의의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총아로 자리 잡았다.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랬다. 독일과 그 위쪽, 즉 중부 유럽 위쪽의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모두 이 자율적 집단과 결사체의 역할을 잘 수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침해할 수 없는 개인 권리와 집단 간 다원적 조정 사이의 갈등 못지않게 입헌주의의 문제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 내재해 있는 도전적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자들은 노사 간 단체 협상이나 정당 간 연정 합의가 ‘헌법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며, 집단 간 다원주의적 조정을 우선시한다. 개인 권리에 기원을 둔 입헌주의를 중시하지만 그때의 입헌주의적 판단 역시 정치에서의 민주적 결정과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자율적 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해 줘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입헌주의’(political constitutionalism)라고 부르는 원리를 옹호한다.
입헌주의는 헌법을 통해,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정부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공적 개입이 개인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는 ‘제한 정부론’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런 입헌주의 없이 현대 민주주의가 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공적 결정을 이끄는 민주적 원리를 제한하는 일로 이어질 수는 없다. 그런 이유에서 헌법은 개인의 기본권을 평등하게 보호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원리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정치에 대한 헌법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지만, ‘헌법을 좋게 해서 민주주의를 좋게’ 하는 접근도 가능하지 않을까? 헌법과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
다시 강조하면, 헌법은 근본적으로 개인 권리의 보장을 우선시한다. 그것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 정치는 다수의 의사를 우선시한다. 또한 헌법은 뭔가의 지나침을 제한하는 소극적 원리로 작동하고, 정치는 뭔가를 책임 있게 하도록 하는 적극적 원리로 작동하는 힘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개혁한다고 해보자. 헌법은 재산권 등 개인 권리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치는 가난한 다수의 의사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미국처럼 민주정치의 방법으로 정당하게 결정된 것에 대해서도 위헌 청구가 자유로우면, 달리 말해 헌법의 적극적 개입이 쉬워지면 사회경제적 개혁은 어렵다.
게다가 어느 사회든 헌법은 현존하는 다수 시민의 동의를 얻은 문서가 되기 어렵다. 우리 헌법 역시 35년 전에 있었던 다수의 결정일 뿐, 지금 시민의 절반 이상은 그 결정에 참여한 바가 없다. 일반법과 달리 헌법은 개폐가 쉽지 않고 또 그것이 헌법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따라서 절차적 정의와 관련된 사안이 아닌 실체적인 사안까지 헌법을 통해 규제하려 하면 할수록 민주정치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헌법은 자주 바꿀 수 없다. 자주 바꾼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헌법을 바꾸기보다 일반법을 바꿔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힘은 정치에 있지, 헌법이나 법치를 통해 그런 변화를 이끌 수는 없다. ‘헌법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주의나 권위주의적 망상일 뿐이다. 헌법의 힘이 아니라 정치의 힘으로 우리 삶을 개선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헌정주의(憲政主義)라는 말을 썼다. 일종의 ‘헌법에 의해 규율되는 정치’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런 관점이 강해질 때마다 여야 중심의 정당정치나 의회정치는 비효율적이고 특권 지향적이라는 비판이 커졌다.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는 책임 정치는 지금도 손쉽게 야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과 의회 중심의 책임 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책임 정치이고, 정치가 그런 기능을 감당해야 민주주의다. 정부 역시 책임 정부의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때의 핵심 연계 고리가 정당이다. 정치가라고 불리는 선출직 공직자들은 정당의 이름으로 시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는다. 정당의 가장 중요한 기능 역시 공적 후보자 선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 있는 정당정부’(responsible party government)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가리켜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시민 결사체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정당은 공익의 내용을 경쟁적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의 참여와 지지를 경쟁적으로 조직하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되어 공공 정책을 주도한다. 그런 정당이 정부가 되고 또 교체될 수 있을 때 책임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 권력 기관으로 퇴락하지 않을 수 있으며, 최고 통치자의 자의적 국민 동원 내지 국가주의적 정치의 유혹을 제어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시민 주권에 기초를 둔 정당정부의 책임성을 실현하는 존재이지, (나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국가주권이나 국민주권을 위로부터 동원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민 의지의 산물이다. 국민은 권력의 최초 원천이다. 국민은 그들이 원한다면 헌법을 폐기할 수 있다.” 누가 한 말일까?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자 흑백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다.
하나의 국민 의지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 이와는 달리 시민 주권은 복수의 정견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연합하는 다원적 구성체이다. 통치자가 자신을 국가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전체로서의 국민과 직접 결합하려고 할 때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민주적 책임성의 원리는 ‘수평적 책임성’과 ‘수직적 책임성’으로 이루어진다. 수평적 책임성이란 정부가 목적을 상실하지 않도록 권력 기관을 분립시켜 상호 견제하게 하는 것이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사이의 삼권분립 원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중요한 것은 입법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부는 시민 주권의 최고 수탁 기관이기에, 입법부를 주도하는 다수당 내지 다수 연합이 행정부를 운영해야 한다. 사법부 역시 이런 입법부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시민의 기본권을 수호하는 최종적 보루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2016년 말에서 이듬해 초에 이르는 동안의 대통령 탄핵은 이 원리를 실천했다. 시민은 기본권을 행사해 정부가 목적을 상실했다고 항의했고, 입법부는 행정부 책임자의 탄핵을 가결했으며, 사법부가 입법부의 결정을 헌법에 합당하다고 해석해 파면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로 선출된 행정부 수장의 탄핵은 지지자들에게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이 지지자들과 동료 정치인들에게 원한과 분노를 남기는 것과 유사하다. 적대와 증오의 정치는 이로부터 발원하는 바가 큰데, 이 때문에 정치체제 전반이 균형을 잃고 혼란과 분열로 이어지기 쉽다. 이는 남미의 대통령제 국가들이 잦은 탄핵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탄핵의 후유증과 부정적 효과를 줄이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사이의 수평적 책임성의 원리가 좀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한번 균형을 잃은 삼권 사이의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탄핵이 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직적 책임성이란 정부가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시민이 저항과 비판, 반대만 할 수 있고 통치 권력의 향방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그럴 수 있으려면 좋은 정당 대안의 발전이 허용되어야 하는바, 이를 말하는 것이 ‘야당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야당의 역할과 반대의 공간을 부정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내가 싫어하는 정당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가까워졌다는 뜻이 된다. 동의하지 않아도 여당이고 싫어도 야당이다. 야당의 반대 때문에 여당이 책임성을 잃지 않고, 야당도 반대만 하지 않고 대안 정당으로 인정받아야 집권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의회는 특별한 제도다. 서로 다른 ‘이념과 집단 이익’이 다투고 경합하는 것은 물론, 적대와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평화협정을 추구하는 것을 기관 운영의 원리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하나의 조직 원리나 위계적 구조로 움직이는 관료제나 기업, 학교, 교회 등 여타 제도나 기관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의회 없이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적대나 갈등을 다룰 수 없다는 데 있다. 의회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자들이 발견한 최고의 ‘평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주도하는 것 역시 여야 정당들이고, 이들이 의회정치를 창조적으로 이끌 때 민주주의는 현실적 최선을 이끄는 정치체제로 기능할 수 있다.
여야 정당들이 전체적으로 책임 정치의 보루가 되지 못하면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의지는 실현되기 어렵다. 정당정치가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적 이익과 생각의 차이를 다원적으로 통합해 내지 못하면, 혹은 그들 사이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정당에 책임성을 반복적으로 부과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그 이상과 가치에 맞게 실천될 수 없기에 그렇게 말해도 될 듯하다.
“입법부 중심의 수평적 책임성, 정당의 균형적 발전을 통한 수직적 책임성이 조화롭게 실현된다면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벽한 체계를 이룰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는 완전한 체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겠다.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인간적 한계 위에 선 정치체제’라는 점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발전했다. 불완전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그에 대응해 왔다. 문제는 늘 있었다. 개선의 노력도 늘 있었다. 그게 현대 민주주의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말한 원리 위에서 작동하고, 때로 실패하지만 그런 원리 위에서 다시 학습하고 개선하는 일을 반복하는 정치체제라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현대 민주주의는 유연하고 적응력이 강하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의 경우 시민의 완전함에 기초를 둔 일종의 ‘닫힌 민주주의’로 운영되었기에 2천5백여 년 전 실천되다가 그 뒤에는 완전히 사라진 반면, 현대 민주주의의 지속성 혹은 보편성은 17세기 중엽 시민 혁명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새로운 원리를 수용하는 ‘열린 민주주의’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이런 특성과 원리들을 잘 이해하면서 그에 맞는 실천론을 발전시키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신분과 직업,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참정권이 주어져 있는데, 정치를 전문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담당하는 정치인은 왜 필요한가?”
크게 다섯 차원으로 나눠서 설명해보겠다. 첫째, 오늘날 우리는 사회분화(social differentiation)와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의 구조를 발전시켜 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나 전문가 집단은 물론, 심지어 성직자나 예술가, 의사, 시인도 직업이 되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법을 만드는 입법자와 법을 집행하는 행정가, 법을 적용하는 법률가의 역할은 구분되어 있다. 구분되지 않고 법을 만드는 사람이 집행하고 적용하게 된다면, 그건 전제정이 된다.
우리가 지금처럼 문명화된 풍요로움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민주성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분화와 분업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시민이나 국민이 모든 문제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직접 청원을 해서 체제를 운영한다고 해보자. 직업 정치인이 왜 필요하겠는가. 시민은 청원하고 최고 권력자는 실현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삼권을 가로질러 청원을 실현하는 강력한 권력자가, 다원화된 분업과 전문화의 영역을 가로질러 명령을 내릴 권위를 갖는 사회는 전체주의의 경험을 통해 이미 인류에게 충분히 알려진 바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가가 필요하다 해도 그것이 직업이 되기보다는 원래 자기 직업이 있다가 선거에서 당선되면 그때 잠깐 정치가로서 일하고 다시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면 어떤가? 원래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이나, 세비를 받지 않고 사회를 위해 잠시 봉사하다가 자신의 직업 세계로 돌아가면 최선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
민주주의란 정치라는 일이 직업이 되는 체제를 가리키고, 직업이 된다는 것은 정치하는 일로 세비를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대표의 원리로 작동한다. 누가 대표가 되기 위해 나서야 할까? 원리적으로는 모두에게 그 기회가 향유되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도, 땅과 토지에 메어있는 농민도, 여성도, 저소득층도 그런 기회를 가져야 한다. 법적으로 누구나 선출직에 도전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가졌다고 하자. 그런데 세비 없이 무급 봉사직이라고 해보자. 누가 대표 선발에 나서게 되며, 누가 일정 기간 정치가의 일을 감당하려 할까?
대부업자나 임대소득자처럼 재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거나, 변호사처럼 정치하는 일이 직업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무급 정치가의 역할을 하는 동안 가족을 건사할 소득이 사라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재산이 없거나 매달 급여가 필요한 가족들에게, 정치에 나서는 것은 무소득층이 되는 것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셋째, 막스 베버(Max Weber)라는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가 있다. 그는 정치가에게 세비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를 질문한 다음, 그러면 민주주의는 금권정(plutocracy)이 된다고 했다. 세비를 주지 않으면,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 소득을 얻을 기회를 잃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에서 정치가란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직업인’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넷째, 역사 속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흔히 참정권 운동이라고도 하는 차티스트 운동이 있다.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다.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보통선거권 요구 등을 담은 헌장(chart)을 내걸어서 그들을 가리켜 ‘차티스트’라고 한다. 헌장은 6개 항의 요구조건을 담았는데, 보통선거, 비밀선거, 균등한 선거구, 주기적 선거와 함께 의원 재산 자격철폐와 의원의 보수 지급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두 요구는 간단히 말해, 가난한 노동자도 선출직 대표로 나설 수 있어야 하니 의원으로 뽑힌 사람에게 세비를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투표만 할 수 있을 뿐 대표를 내보낼 수 없다면, 참정권은 반쪽의 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차티스트 운동에 나선 것은 바로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었다.
다섯째, 근대국가는 두 직업 집단을 통해 움직인다. 하나는 행정관료제로, 지금까지 그 어떤 인간 조직도 관료제만큼 잘 조직된 대규모 위계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이들은 특별한 선발 방법과 견습 기간을 거쳐 평생 직업을 갖게 된 존재들이다. 이처럼 직업공무원 혹은 직업관료제는 근대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중심적인 기반이다. 하지만 이들을 누가 지휘하고 통제해야 할까? 입헌군주정에서는 왕이나 군주가 그 역할을 했다. 군주정이 아닌 민주정에서는 어떻게 될까? 이 때문에 등장하게 된 것은 선거라는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의 대표다. 의회를 기준으로 말하면 입법자이고, 행정관료제와의 관계에서는 흔히 선출직이나 정무직으로 불리는 ‘정치 관료’들이다. 이들 역시 공직자이고, 공직은 그에 맞는 급여와 의전적 대우를 받는데, 민주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서 이들은 개인적 선택으로 이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당에 참여하거나, 그 소속으로 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요컨대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해 공직 후보자, 즉 직업 정치인이 양성되는 체제라는 특징을 갖는다.
결론을 내려 보자.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를 직업으로 만들었다. 적법하게 선출되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권한과 급여를 지급 받는다. 그들에게 세비는 시민이, 자신의 주권을 위임받아 제대로 사용하도록 그에 필요한 활동 기반으로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세비는 없어도 되는 특혜가 아니라 가난한 시민도 평등한 대표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민주적 조치다. 세비를 제대로 주어야 선출직 시민 대표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통해 자본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앞서, ‘정치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한국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시민의 참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에서의 민주주의’에서 이상적 민주주의를 찾는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촛불 집회는 잘못된 통치 혹은 자의적 통치를 견제하는 굳건한 ‘시민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가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이 있다면 단연 촛불집회다. 촛불집회를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는 없는가?”
촛불집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사안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복잡한 의제나 갈등적인 재분배 이슈가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다. 광장에서의 민주주의로 정부를 운영할 수도 없고, 법을 만들 수도 없다. 시장경제를 움직이고 국방과 외교 문제를 감당할 수도 없다. 사안에 따라 ‘시민적 압력’을 행사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정치와 경제, 법의 지배 등 체제 운영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시민적 열정과 에너지는 촛불 집회와 같은 저항권의 표출로도 나타나야겠지만, 동시에 그 에너지를 다양한 형태로 담아내는 결사체와 노조, 정당, 대의제의 역할을 통해서도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촛불과 광장에서의 민주적 열정이 어떻게 하면 정당정치를 좋게 만드는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광장 안에 시민 참여의 에너지를 가두어 두려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촛불집회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가 민주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에 항의하거나 보편적 인권 침해에 저항하는 일은 확실히 촛불집회가 잘한다. 하지만 시민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의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사형제가 폐지될 때를 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당시 사회당 정부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를 절멸시킬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라는 생각과 ‘사형제가 범죄를 줄이는 효과도 없다.’라는 판단에 따라 사형제 폐지를 추진했다. 하지만 여론은 몹시 부정적이었다. 사형제가 폐지되면 흉악 범죄가 늘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반대 시위와 반대 여론이 터져 나왔고, 아마 이런 ‘여론상의 민의’에 따랐다면 사형제는 존속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논란 끝에 사형제 폐지 법안은 사회당의 주도로 의회를 통과했다. 요컨대 시민 다수의 의견이나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의 정치의 한 영역에서 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이다.
그 뒤 10년이 지나 같은 사안에 대해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번에는 사형제 폐지를 잘했다는 의견이 절대다수로 나타났다. 우려와는 달리 흉악 범죄는 늘지 않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실존 여부를 심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윤리적 충족감도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민사회나 여론이 아니라, 시민의 주권을 정당하게 위임받은 정치의 세계에서 공적 사안을 둘러싼 의견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구속력 있는 결정을 이뤄가는 것, 이것을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정치의 역할과 무관하게 여론 내지 민심을 모아 공적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적나라한 세 대결의 양상을 심화시킨다는 것, 이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등적인 쟁점을 이른바 ‘광장 민주주의’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의견이 다른 시민들은 누가 더 많은 인원을 광장에 불러들일까를 두고 경쟁할 것이다. 광장에 누가 더 많이 모였는가를 기준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세 대결로 경쟁하는 두 시민 진영 사이에 합리적인 논의나 숙의, 조정과 타협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말할 수 없이 격렬한 적대와 증오만 커질 뿐이다. 또한 일방적인 주장과 결사적인 태도, 조급하게 문제를 끝내고자 하는 격한 심성만 키울 수밖에 없다.
광장 민주주의는 2016년의 촛불 집회와 같이 시민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뿐, 일상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되어야 한다. 촛불집회는 가끔 있어야지, 그게 일상화되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시민단체에 후원도 하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등의 직접 참여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도 그런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이다.”
참여의 직접성은 시민적 효능감의 원천이다. 다만 참여의 직접성이 갖는 가치가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실제 참여의 직접성을 기준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한마디로 말해,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훨씬 더 직접적이다.
시민 누구나 다양한 결사체를 직접 만들 수 있다. 집회의 자유를 통해 의사를 직접 표출할 폭넓은 기회를 갖는 것도 대의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직업 집단이든 이익집단이든, 공익집단이든 수많은 조직을 직접 만들 수 있으며, 혹은 그런 집단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익한 정책을 만들도록 조직적인 압력을 직접 행사할 수도 있다. 정당을 포함해 다양한 정치조직을 만들어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것도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민주주의를 놓고 보면 현대 대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였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집약할 수 있겠다. 우선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가치에 맞게 대의제를 더 잘하자. 그 기초 위에서 참여의 조직적 기반을 확대해가자. 조합원으로나 당원으로서, 나아가 협회 구성원이나 지지자 집단으로서 정치에 직접 참여하거나 관여하는 것의 가치를 중시하자. 시민운동과 집회, 시위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자율적 결사체에 참여하는 것 역시 시민 직접 참여임을 받아들이자. 그렇지 않고 누구도 시민을 대신할 수 없다며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직접 민주주의관을 무책임하게 앞세우지는 말자.
정당이나 노조와 같은 집단의 매개 없는 직접 민주주의는 제아무리 기술적으로 잘 디자인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소득의 압박이 적고 여가를 향유할 수 있으며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만큼의 교육을 받은 중상층의 사회계층에 편향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여성이든 노동자든 특정 지역 출신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시민권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잘만 활용하면 꽤 쓸 만하고 역동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체제이다.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바꾸는 것보다, 대의제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확대, 심화할 수 있는 길은 대의 민주주의에서 훨씬 더 넓게 열려 있다.
“한때 기성 정당과 기득권 정치를 부정하면서 급진적 주장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앞세웠던 노동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제는 기성 정당에서 공천 신청을 하고 공직을 맡으려 애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막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공식적인 당-노조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은 표도 있고 돈도 있는데, 이를 민주정치의 영역에서도 가치 있게 써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 야심도 있고 재능이 있는 노동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노동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도와주고 또 제어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워 대의제를 야유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문제라는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을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정당과 의회를 야유하고 대의민주주의를 우습게 아는 게 노동운동의 일상적 분위기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느 날 돌아보면 노동운동 지도급 인사들도 국회의원도 하고 중요 자리에서 공직을 맡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당-노조 관계에서는 그들 스스로도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반대로 노조 입장에서는 그들을 책임성을 부과할 방법도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반정치주의의 격조 높은 버전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대의 민주주의의 참여 기반을 어떻게 질적으로 심화하고, 정당정치의 이념적·계층적 기반을 어떻게 확대할 것이며, 나아가 선출직 대표와 비선출직 행정 관료제로 이루어진 정부의 책임성을 어떻게 더 잘 실현할 것인지와 같은 실체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노동운동 역시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 ‘민중총궐기’와 같은 허구적 구호로 현실을 호도할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조직 자원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표’와 ‘돈’의 영향력을 선용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공공 정책을 이끄는 것이 노동운동이 해야 할 진짜 민주주의 문제다.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민주주의에 대한 논의는 논쟁을 동반한다. 이상의 강의 내용을 다루는 과정에서도 당연히 수강자들로부터 논쟁적 질문을 많이 받았다. 이제 그런 질문을 통해 우리가 발전시켜야 할 민주주의론을 좀 더 구체화해보기로 하자.
“개인보다 결사체와 집단, 조직을 강조했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집단으로 행위 해야 한다는 것에 거부감을 갖는 것이 현실이다. 집단은 ‘개인’의 권리를 제약하고 ‘개인 간 평등’을 위협할 수 있다거나, 결사의 권리가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논리로 말이다. 이 문제는 어떻게 봐야 할까?”
아마도 개개인의 이익과 열정을 표출해서, (마치 ‘보이지 않는 손’ 같은 것의 작용으로) 자연스럽게 공익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다면 민주주의보다 자유주의의 원리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각자가 중시하는 가치의 차이는 설득과 교육으로도 사라지게 할 수 없다. 같을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다르다는 것 속에서 공적 행동을 조직하려면 공존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위에서 집단적 이익의 표출과 집약, 조정이 가능해야 평등한 참여의 기반이 만들어질 수 있다. 이런 다원주의의 원리를 통해 개인 중심의 자유주의적 기본권은 비로소 사회적 내용으로 확장될 수 있었다.
개개인들 사이의 공통된 관심을 조직하고 결사하게 하는 사회적 유인이나 집단적 요소는 많다. 직업과 소득은 물론 자본과 같은 경제적 영향력도 중요하고, 학력이나 지역 등 다양한 질료가 있다. 이런 다양한 집단이 발휘하는 민주적 가능성은 수(數)의 힘에 있다. 사회 속 약자들에게는 이 요소가 가장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경제력이든 학력이든 외모든 언변이든 상관없이 누구의 의견이든 동등하게 존중되어야 한다는 전제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수의 힘은 민주주의의 원리와 잘 상응한다.
“수의 힘을 조직하는 것도 불평등의 문제를 낳는다. 독점과 이기심의 원천이 될 수 있다. 다수의 독재, 다수의 전제정이라는 표현도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원화된 사회에서 하나의 이익과 열정이 다수가 될 수는 없다. 자영업자든, 중산층이든, 노조원이든, 농민이든, 기독교인이든, 불교도든, 어느 시민 집단도 전체적으로는 소수다. 따라서 다원주의의 기초 위에서 민주주의를 잘만 운영한다면, 수많은 소수 이익들이 자유롭게 표출되고 결사할 수 있게 하는 동시에, 이들 사이에 상호작용을 통해 ‘다수의 전제’나 ‘집단 이기주의’가 작용할 가능성을 줄일 수는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그 어떤 문제나 긴장, 갈등도 만들어 내지 않는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를 감수하고 그것이 만들어 내는 긴장과 갈등을 해결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점에서 위대하다.
앞서 언급했던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를 ‘결사의 예술’(art of association)로 규정한 적이 있는데, 민주주의 이론의 발전을 위해서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토크빌 이후 집단과 조직으로 대표되는 결사체의 문제 혹은 다원주의의 문제는 현대 민주주의 이론의 총아로 자리 잡았다. 이론으로서만이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랬다. 독일과 그 위쪽, 즉 중부 유럽 위쪽의 서구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의 발전은 모두 이 자율적 집단과 결사체의 역할을 잘 수용하는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침해할 수 없는 개인 권리와 집단 간 다원적 조정 사이의 갈등 못지않게 입헌주의의 문제 또한 현대 민주주의에 내재해 있는 도전적 문제 아닌가?”
민주주의자들은 노사 간 단체 협상이나 정당 간 연정 합의가 ‘헌법에 준하는’ 구속력을 가져야 한다고 보며, 집단 간 다원주의적 조정을 우선시한다. 개인 권리에 기원을 둔 입헌주의를 중시하지만 그때의 입헌주의적 판단 역시 정치에서의 민주적 결정과 이해 당사자들 사이의 자율적 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해 줘야 한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정치적 입헌주의’(political constitutionalism)라고 부르는 원리를 옹호한다.
입헌주의는 헌법을 통해, 시민의 권리와 자유가 정부에 의해 침해되지 않도록 하는 것을 핵심으로 삼는다. 이는 공적 개입이 개인의 문 앞에서 멈추게 하는 ‘제한 정부론’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런 입헌주의 없이 현대 민주주의가 설 수 없는 것은 물론이다. 하지만 그것이 정부로 하여금 적극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거나, 공적 결정을 이끄는 민주적 원리를 제한하는 일로 이어질 수는 없다. 그런 이유에서 헌법은 개인의 기본권을 평등하게 보호하는 것이어야 하고 동시에 민주적이고 정치적인 원리와 양립할 수 있어야 한다.
“민주정치에 대한 헌법의 개입을 최소화해야 한다지만, ‘헌법을 좋게 해서 민주주의를 좋게’ 하는 접근도 가능하지 않을까? 헌법과 정치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할 필요가 있는가? 이런 의문이 든다.”
다시 강조하면, 헌법은 근본적으로 개인 권리의 보장을 우선시한다. 그것이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반면 정치는 다수의 의사를 우선시한다. 또한 헌법은 뭔가의 지나침을 제한하는 소극적 원리로 작동하고, 정치는 뭔가를 책임 있게 하도록 하는 적극적 원리로 작동하는 힘이다.
예컨대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개혁한다고 해보자. 헌법은 재산권 등 개인 권리를 중시할 수밖에 없는 반면, 정치는 가난한 다수의 의사에 따른 변화를 수용할 수 있다. 미국처럼 민주정치의 방법으로 정당하게 결정된 것에 대해서도 위헌 청구가 자유로우면, 달리 말해 헌법의 적극적 개입이 쉬워지면 사회경제적 개혁은 어렵다.
게다가 어느 사회든 헌법은 현존하는 다수 시민의 동의를 얻은 문서가 되기 어렵다. 우리 헌법 역시 35년 전에 있었던 다수의 결정일 뿐, 지금 시민의 절반 이상은 그 결정에 참여한 바가 없다. 일반법과 달리 헌법은 개폐가 쉽지 않고 또 그것이 헌법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따라서 절차적 정의와 관련된 사안이 아닌 실체적인 사안까지 헌법을 통해 규제하려 하면 할수록 민주정치의 영향력은 줄어든다.
헌법은 자주 바꿀 수 없다. 자주 바꾼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헌법을 바꾸기보다 일반법을 바꿔 문제를 개선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민주주의에서 세상을 바꾸고 변화시키는 힘은 정치에 있지, 헌법이나 법치를 통해 그런 변화를 이끌 수는 없다. ‘헌법을 아름답게 만들어서 세상이 아름다워질 수 있다’는 생각은 국가주의나 권위주의적 망상일 뿐이다. 헌법의 힘이 아니라 정치의 힘으로 우리 삶을 개선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라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과거 권위주의 정부에서는 헌정주의(憲政主義)라는 말을 썼다. 일종의 ‘헌법에 의해 규율되는 정치’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그런 관점이 강해질 때마다 여야 중심의 정당정치나 의회정치는 비효율적이고 특권 지향적이라는 비판이 커졌다. 정당과 의회가 중심이 되는 책임 정치는 지금도 손쉽게 야유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당과 의회 중심의 책임 정치가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고집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민주주의의 핵심은 책임 정치이고, 정치가 그런 기능을 감당해야 민주주의다. 정부 역시 책임 정부의 원리를 실천해야 한다. 이때의 핵심 연계 고리가 정당이다. 정치가라고 불리는 선출직 공직자들은 정당의 이름으로 시민으로부터 주권을 위임받는다. 정당의 가장 중요한 기능 역시 공적 후보자 선출에 있다. 그런 의미에서 ‘책임 있는 정당정부’(responsible party government)를 만들고 운영하는 일을 가리켜 오늘날에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에서 최고의 시민 결사체는 정당이라는 사실을 새삼 다시 강조하고자 한다. 정당은 공익의 내용을 경쟁적으로 정의하며, 그것을 바탕으로 시민의 참여와 지지를 경쟁적으로 조직하고, 궁극적으로 정부가 되어 공공 정책을 주도한다. 그런 정당이 정부가 되고 또 교체될 수 있을 때 책임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 그래야 정부가 시민으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 권력 기관으로 퇴락하지 않을 수 있으며, 최고 통치자의 자의적 국민 동원 내지 국가주의적 정치의 유혹을 제어할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통치자는 시민 주권에 기초를 둔 정당정부의 책임성을 실현하는 존재이지, (나치의 사례에서 보았듯이) 국가주권이나 국민주권을 위로부터 동원하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협한다. “헌법이란 무엇인가? 국민 의지의 산물이다. 국민은 권력의 최초 원천이다. 국민은 그들이 원한다면 헌법을 폐기할 수 있다.” 누가 한 말일까? 미국의 대표적인 극우 정치인이자 흑백 인종 분리를 주장했던 조지 월리스(George Wallace)다.
하나의 국민 의지 같은 것은 없다. 그런 것이 있다고 믿는 순간 민주주의는 위험에 처한다. 이와는 달리 시민 주권은 복수의 정견으로 나뉘어 경쟁하고 연합하는 다원적 구성체이다. 통치자가 자신을 국가 전체와 동일시하거나 전체로서의 국민과 직접 결합하려고 할 때 권위주의적 국가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음을 이해해야 한다.
민주적 책임성의 원리는 ‘수평적 책임성’과 ‘수직적 책임성’으로 이루어진다. 수평적 책임성이란 정부가 목적을 상실하지 않도록 권력 기관을 분립시켜 상호 견제하게 하는 것이다.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사이의 삼권분립 원리가 대표적이다. 그런데 이때에도 중요한 것은 입법부가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입법부는 시민 주권의 최고 수탁 기관이기에, 입법부를 주도하는 다수당 내지 다수 연합이 행정부를 운영해야 한다. 사법부 역시 이런 입법부의 결정을 우선적으로 존중하는 기초 위에서, 시민의 기본권을 수호하는 최종적 보루로서 역할을 해야 한다. 2016년 말에서 이듬해 초에 이르는 동안의 대통령 탄핵은 이 원리를 실천했다. 시민은 기본권을 행사해 정부가 목적을 상실했다고 항의했고, 입법부는 행정부 책임자의 탄핵을 가결했으며, 사법부가 입법부의 결정을 헌법에 합당하다고 해석해 파면을 결정했기 때문이다.
물론 선거로 선출된 행정부 수장의 탄핵은 지지자들에게는 쉽게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긴다. 전직 대통령의 불행한 죽음이 지지자들과 동료 정치인들에게 원한과 분노를 남기는 것과 유사하다. 적대와 증오의 정치는 이로부터 발원하는 바가 큰데, 이 때문에 정치체제 전반이 균형을 잃고 혼란과 분열로 이어지기 쉽다. 이는 남미의 대통령제 국가들이 잦은 탄핵을 통해 보여준 바 있다. 따라서 탄핵의 후유증과 부정적 효과를 줄이고 개선하기 위해서는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 사이의 수평적 책임성의 원리가 좀 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아야 한다. 한번 균형을 잃은 삼권 사이의 관계가 어느 한쪽으로 쏠리면 탄핵이 더 큰 불행을 불러올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직적 책임성이란 정부가 제 기능과 역할을 하지 못하면 정부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정권은 교체되어야 한다는 것인가?”
시민이 저항과 비판, 반대만 할 수 있고 통치 권력의 향방에 체계적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라고 하기 어렵다. 그럴 수 있으려면 좋은 정당 대안의 발전이 허용되어야 하는바, 이를 말하는 것이 ‘야당이 있는 민주주의’의 원리이다. 야당의 역할과 반대의 공간을 부정하는 정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 내가 싫어하는 정당이 사라지게 된다면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가까워졌다는 뜻이 된다. 동의하지 않아도 여당이고 싫어도 야당이다. 야당의 반대 때문에 여당이 책임성을 잃지 않고, 야당도 반대만 하지 않고 대안 정당으로 인정받아야 집권할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 잡아야 민주주의가 산다.
의회는 특별한 제도다. 서로 다른 ‘이념과 집단 이익’이 다투고 경합하는 것은 물론, 적대와 갈등 속에서 끊임없이 평화협정을 추구하는 것을 기관 운영의 원리로 삼고 있다. 이 점에서 하나의 조직 원리나 위계적 구조로 움직이는 관료제나 기업, 학교, 교회 등 여타 제도나 기관과는 뚜렷이 구분된다. 흥미로운 것은, 그런 의회 없이 어떤 민주주의 국가도 적대나 갈등을 다룰 수 없다는 데 있다. 의회야말로 현대 민주주의자들이 발견한 최고의 ‘평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이를 주도하는 것 역시 여야 정당들이고, 이들이 의회정치를 창조적으로 이끌 때 민주주의는 현실적 최선을 이끄는 정치체제로 기능할 수 있다.
여야 정당들이 전체적으로 책임 정치의 보루가 되지 못하면 민주주의에서 시민의 의지는 실현되기 어렵다. 정당정치가 시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적 이익과 생각의 차이를 다원적으로 통합해 내지 못하면, 혹은 그들 사이의 평화적 정권 교체를 통해 정당에 책임성을 반복적으로 부과하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그 이상과 가치에 맞게 실천될 수 없기에 그렇게 말해도 될 듯하다.
“입법부 중심의 수평적 책임성, 정당의 균형적 발전을 통한 수직적 책임성이 조화롭게 실현된다면 민주주의는 어느 정도 완벽한 체계를 이룰 수 있을까? 앞서 이야기했듯 여전히 그렇지 않다고 답할 것인가?”
그럴 수 없다. 현대 민주주의는 완전한 체계를 지향하지 않는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겠다.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인간적 한계 위에 선 정치체제’라는 점을 인정한 기초 위에서 발전했다. 불완전하지만, 현대 민주주의는 문제가 생길 때마다 새로운 원리를 발전시키면서 그에 대응해 왔다. 문제는 늘 있었다. 개선의 노력도 늘 있었다. 그게 현대 민주주의다. 그런 점에서 현대 민주주의는 지금까지 말한 원리 위에서 작동하고, 때로 실패하지만 그런 원리 위에서 다시 학습하고 개선하는 일을 반복하는 정치체제라 표현한 것이다. 그만큼 현대 민주주의는 유연하고 적응력이 강하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의 경우 시민의 완전함에 기초를 둔 일종의 ‘닫힌 민주주의’로 운영되었기에 2천5백여 년 전 실천되다가 그 뒤에는 완전히 사라진 반면, 현대 민주주의의 지속성 혹은 보편성은 17세기 중엽 시민 혁명에서 시작해 끊임없이 새로운 원리를 수용하는 ‘열린 민주주의’의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현대 민주주의가 갖고 있는 이런 특성과 원리들을 잘 이해하면서 그에 맞는 실천론을 발전시키는 일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신분과 직업,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참정권이 주어져 있는데, 정치를 전문적으로 혹은 직업적으로 담당하는 정치인은 왜 필요한가?”
크게 다섯 차원으로 나눠서 설명해보겠다. 첫째, 오늘날 우리는 사회분화(social differentiation)와 노동분업(division of labor)의 구조를 발전시켜 사회를 운영하고 있다. 다양한 직종의 노동자나 전문가 집단은 물론, 심지어 성직자나 예술가, 의사, 시인도 직업이 되었다. 정치 영역에서도 법을 만드는 입법자와 법을 집행하는 행정가, 법을 적용하는 법률가의 역할은 구분되어 있다. 구분되지 않고 법을 만드는 사람이 집행하고 적용하게 된다면, 그건 전제정이 된다.
우리가 지금처럼 문명화된 풍요로움과 견제와 균형의 원리가 작동하는 민주성을 향유할 수 있는 것은 모두 분화와 분업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 모든 것을 무시하고 시민이나 국민이 모든 문제에 대해 무차별적으로 직접 청원을 해서 체제를 운영한다고 해보자. 직업 정치인이 왜 필요하겠는가. 시민은 청원하고 최고 권력자는 실현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삼권을 가로질러 청원을 실현하는 강력한 권력자가, 다원화된 분업과 전문화의 영역을 가로질러 명령을 내릴 권위를 갖는 사회는 전체주의의 경험을 통해 이미 인류에게 충분히 알려진 바 있기 때문이다.
둘째, 정치가가 필요하다 해도 그것이 직업이 되기보다는 원래 자기 직업이 있다가 선거에서 당선되면 그때 잠깐 정치가로서 일하고 다시 자기 직업으로 돌아가면 어떤가? 원래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이나, 세비를 받지 않고 사회를 위해 잠시 봉사하다가 자신의 직업 세계로 돌아가면 최선이 아닐까? 안타깝지만 그렇게 되면 민주주의가 안 된다.
민주주의란 정치라는 일이 직업이 되는 체제를 가리키고, 직업이 된다는 것은 정치하는 일로 세비를 받는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대표의 원리로 작동한다. 누가 대표가 되기 위해 나서야 할까? 원리적으로는 모두에게 그 기회가 향유되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노동자도, 땅과 토지에 메어있는 농민도, 여성도, 저소득층도 그런 기회를 가져야 한다. 법적으로 누구나 선출직에 도전할 수 있는 피선거권을 가졌다고 하자. 그런데 세비 없이 무급 봉사직이라고 해보자. 누가 대표 선발에 나서게 되며, 누가 일정 기간 정치가의 일을 감당하려 할까?
대부업자나 임대소득자처럼 재정적으로만이 아니라 시간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이거나, 변호사처럼 정치하는 일이 직업적으로 도움이 되는 사람들일 것이다. 무급 정치가의 역할을 하는 동안 가족을 건사할 소득이 사라지는 것을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은 어떨까? 재산이 없거나 매달 급여가 필요한 가족들에게, 정치에 나서는 것은 무소득층이 되는 것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셋째, 막스 베버(Max Weber)라는 20세기 초 독일의 사회학자가 있다. 그는 정치가에게 세비를 주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를 질문한 다음, 그러면 민주주의는 금권정(plutocracy)이 된다고 했다. 세비를 주지 않으면, 정치에 참여하는 동안 소득을 얻을 기회를 잃는 사람은 정치를 할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민주주의에서 정치가란 ‘정치에 의존해서 사는 직업인’이라고 정의한 것이다.
넷째, 역사 속에서 근거를 찾아보자. 흔히 참정권 운동이라고도 하는 차티스트 운동이 있다. 앞서 간략하게 살펴본 바 있다. 1830년대부터 1850년대까지 지속되었는데, 보통선거권 요구 등을 담은 헌장(chart)을 내걸어서 그들을 가리켜 ‘차티스트’라고 한다. 헌장은 6개 항의 요구조건을 담았는데, 보통선거, 비밀선거, 균등한 선거구, 주기적 선거와 함께 의원 재산 자격철폐와 의원의 보수 지급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마지막 두 요구는 간단히 말해, 가난한 노동자도 선출직 대표로 나설 수 있어야 하니 의원으로 뽑힌 사람에게 세비를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투표만 할 수 있을 뿐 대표를 내보낼 수 없다면, 참정권은 반쪽의 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차티스트 운동에 나선 것은 바로 당시 영국의 노동자들이었다.
다섯째, 근대국가는 두 직업 집단을 통해 움직인다. 하나는 행정관료제로, 지금까지 그 어떤 인간 조직도 관료제만큼 잘 조직된 대규모 위계 구조를 만들지 못했다. 이들은 특별한 선발 방법과 견습 기간을 거쳐 평생 직업을 갖게 된 존재들이다. 이처럼 직업공무원 혹은 직업관료제는 근대국가를 떠받치는 가장 중심적인 기반이다. 하지만 이들을 누가 지휘하고 통제해야 할까? 입헌군주정에서는 왕이나 군주가 그 역할을 했다. 군주정이 아닌 민주정에서는 어떻게 될까? 이 때문에 등장하게 된 것은 선거라는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의 대표다. 의회를 기준으로 말하면 입법자이고, 행정관료제와의 관계에서는 흔히 선출직이나 정무직으로 불리는 ‘정치 관료’들이다. 이들 역시 공직자이고, 공직은 그에 맞는 급여와 의전적 대우를 받는데, 민주주의가 자리 잡게 되면서 이들은 개인적 선택으로 이 길을 나서는 것이 아니라 정당에 참여하거나, 그 소속으로 정치를 직업으로 삼게 되었다. 요컨대 현대 민주주의는 정당을 통해 공직 후보자, 즉 직업 정치인이 양성되는 체제라는 특징을 갖는다.
결론을 내려 보자. 현대 민주주의는 정치를 직업으로 만들었다. 적법하게 선출되면 당연히 그에 합당한 권한과 급여를 지급 받는다. 그들에게 세비는 시민이, 자신의 주권을 위임받아 제대로 사용하도록 그에 필요한 활동 기반으로 제공한 것이다. 따라서 세비는 없어도 되는 특혜가 아니라 가난한 시민도 평등한 대표의 권리를 실현하는 데 꼭 필요한 민주적 조치다. 세비를 제대로 주어야 선출직 시민 대표가 제대로 역할을 할 수 있다.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통해 자본주의의 가치를 실현하기에 앞서, ‘정치하기 좋은 나라’를 만들어 민주주의의 가치를 실현하는 한국 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시민의 참여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촛불집회와 같은 ‘광장에서의 민주주의’에서 이상적 민주주의를 찾는다.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에서 촛불 집회는 잘못된 통치 혹은 자의적 통치를 견제하는 굳건한 ‘시민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아마도 한국 민주주의가 자랑스럽게 여길 만한 것이 있다면 단연 촛불집회다. 촛불집회를 통해 새로운 민주주의를 발전시킬 수는 없는가?”
촛불집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시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할 만한 사안에서는 효과적이지만 복잡한 의제나 갈등적인 재분배 이슈가 들어오면 감당할 수 없다. 광장에서의 민주주의로 정부를 운영할 수도 없고, 법을 만들 수도 없다. 시장경제를 움직이고 국방과 외교 문제를 감당할 수도 없다. 사안에 따라 ‘시민적 압력’을 행사할 수는 있어도, 그것으로 정치와 경제, 법의 지배 등 체제 운영을 대신할 수는 없다는 말이다.
시민적 열정과 에너지는 촛불 집회와 같은 저항권의 표출로도 나타나야겠지만, 동시에 그 에너지를 다양한 형태로 담아내는 결사체와 노조, 정당, 대의제의 역할을 통해서도 실천될 수 있어야 한다. 촛불과 광장에서의 민주적 열정이 어떻게 하면 정당정치를 좋게 만드는 문제로 연결될 수 있는지를 고민하지 않고, 광장 안에 시민 참여의 에너지를 가두어 두려는 것은 결코 좋은 결과를 낳지 못한다.
촛불집회가 잘 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구분하는 게 중요하다. 정부가 민주주의에서 벗어나는 것에 항의하거나 보편적 인권 침해에 저항하는 일은 확실히 촛불집회가 잘한다. 하지만 시민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는 의제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1980년대 초 프랑스에서 사형제가 폐지될 때를 돌아보는 것은 흥미롭다. 당시 사회당 정부는 ‘인간이 다른 인간의 존재를 절멸시킬 권리를 가질 수는 없다.’라는 생각과 ‘사형제가 범죄를 줄이는 효과도 없다.’라는 판단에 따라 사형제 폐지를 추진했다. 하지만 여론은 몹시 부정적이었다. 사형제가 폐지되면 흉악 범죄가 늘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반대 시위와 반대 여론이 터져 나왔고, 아마 이런 ‘여론상의 민의’에 따랐다면 사형제는 존속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논란 끝에 사형제 폐지 법안은 사회당의 주도로 의회를 통과했다. 요컨대 시민 다수의 의견이나 시민사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의 정치의 한 영역에서 결정이 내려졌다는 말이다.
그 뒤 10년이 지나 같은 사안에 대해 여론조사가 실시되었다. 이번에는 사형제 폐지를 잘했다는 의견이 절대다수로 나타났다. 우려와는 달리 흉악 범죄는 늘지 않았고, 인간이 다른 인간의 실존 여부를 심판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오는 윤리적 충족감도 실현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시민사회나 여론이 아니라, 시민의 주권을 정당하게 위임받은 정치의 세계에서 공적 사안을 둘러싼 의견의 형성과 변화 그리고 구속력 있는 결정을 이뤄가는 것, 이것을 정치학에서는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정치의 역할과 무관하게 여론 내지 민심을 모아 공적 결정을 하게 된다면, 그 결과는 적나라한 세 대결의 양상을 심화시킨다는 것, 이 점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갈등적인 쟁점을 이른바 ‘광장 민주주의’로 해결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되면 의견이 다른 시민들은 누가 더 많은 인원을 광장에 불러들일까를 두고 경쟁할 것이다. 광장에 누가 더 많이 모였는가를 기준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세 대결로 경쟁하는 두 시민 진영 사이에 합리적인 논의나 숙의, 조정과 타협이 가능할까?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실제로는 말할 수 없이 격렬한 적대와 증오만 커질 뿐이다. 또한 일방적인 주장과 결사적인 태도, 조급하게 문제를 끝내고자 하는 격한 심성만 키울 수밖에 없다.
광장 민주주의는 2016년의 촛불 집회와 같이 시민 대다수가 합의할 수 있는 매우 예외적인 상황에서만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을 뿐, 일상적으로는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이 이해되어야 한다. 촛불집회는 가끔 있어야지, 그게 일상화되면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그래도 이런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시민단체에 후원도 하고 촛불집회에 참여하는 등의 직접 참여는 특별한 느낌을 준다.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기대도 그런 사실에 기초를 두고 있다.’고 말이다.”
참여의 직접성은 시민적 효능감의 원천이다. 다만 참여의 직접성이 갖는 가치가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는 원인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실제 참여의 직접성을 기준으로 민주주의의 문제를 생각해보자. 한마디로 말해,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가 훨씬 더 직접적이다.
시민 누구나 다양한 결사체를 직접 만들 수 있다. 집회의 자유를 통해 의사를 직접 표출할 폭넓은 기회를 갖는 것도 대의 민주주의에서만 가능하다. 직업 집단이든 이익집단이든, 공익집단이든 수많은 조직을 직접 만들 수 있으며, 혹은 그런 집단을 통해 자신들에게 유익한 정책을 만들도록 조직적인 압력을 직접 행사할 수도 있다. 정당을 포함해 다양한 정치조직을 만들어 정책 결정 과정에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것도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이다. 역사상 존재했던 민주주의를 놓고 보면 현대 대의 민주주의가 최고의 직접 민주주의였다.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렇게 집약할 수 있겠다. 우선 현대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그것의 가치에 맞게 대의제를 더 잘하자. 그 기초 위에서 참여의 조직적 기반을 확대해가자. 조합원으로나 당원으로서, 나아가 협회 구성원이나 지지자 집단으로서 정치에 직접 참여하거나 관여하는 것의 가치를 중시하자. 시민운동과 집회, 시위만 강조할 것이 아니라, 정당이나 노동조합 등 자율적 결사체에 참여하는 것 역시 시민 직접 참여임을 받아들이자. 그렇지 않고 누구도 시민을 대신할 수 없다며 대의 민주주의를 부정하거나 현실이 될 수 없는 낭만적 직접 민주주의관을 무책임하게 앞세우지는 말자.
정당이나 노조와 같은 집단의 매개 없는 직접 민주주의는 제아무리 기술적으로 잘 디자인한다 해도 한계가 있다. 소득의 압박이 적고 여가를 향유할 수 있으며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을 만큼의 교육을 받은 중상층의 사회계층에 편향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는 여성이든 노동자든 특정 지역 출신이든 상관없이 누구나 시민권을 갖게 했다는 점에서 역사상 가장 진보적인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잘만 활용하면 꽤 쓸 만하고 역동적이고 민중적인 정치체제이다. 대의정치를 직접정치로 바꾸는 것보다, 대의제를 제대로 운영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자유롭고 평등한 참여를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확대, 심화할 수 있는 길은 대의 민주주의에서 훨씬 더 넓게 열려 있다.
“한때 기성 정당과 기득권 정치를 부정하면서 급진적 주장과 거리에서의 투쟁을 앞세웠던 노동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이제는 기성 정당에서 공천 신청을 하고 공직을 맡으려 애쓰는 경우가 많아졌다.”
현실 정치에 참여하려는 것 자체를 부정적으로 볼 수는 없다. 막을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이제라도 공식적인 당-노조 관계를 발전시키려 노력해야 한다는 점이다. 노동조합은 표도 있고 돈도 있는데, 이를 민주정치의 영역에서도 가치 있게 써야 한다. 그래야 정치적 야심도 있고 재능이 있는 노동운동의 지도급 인사들이 노동을 위한 정치를 하도록 도와주고 또 제어할 수 있다.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워 대의제를 야유의 대상으로 삼는 일이 문제라는 것은 바로 이런 노력을 못하게 한다는 데 있다. 정당과 의회를 야유하고 대의민주주의를 우습게 아는 게 노동운동의 일상적 분위기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 아니다. 어느 날 돌아보면 노동운동 지도급 인사들도 국회의원도 하고 중요 자리에서 공직을 맡는 일도 드물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지금과 같은 당-노조 관계에서는 그들 스스로도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역할을 할 수 없고 반대로 노조 입장에서는 그들을 책임성을 부과할 방법도 없다.
직접 민주주의는 반정치주의의 격조 높은 버전은 될 수 있을지언정, 그렇게 해서 달라질 것은 없다. 대의 민주주의의 참여 기반을 어떻게 질적으로 심화하고, 정당정치의 이념적·계층적 기반을 어떻게 확대할 것이며, 나아가 선출직 대표와 비선출직 행정 관료제로 이루어진 정부의 책임성을 어떻게 더 잘 실현할 것인지와 같은 실체적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노동운동 역시 그 과정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를 효과적으로 조직하고 투입할 수 있어야 한다. ‘민중총궐기’와 같은 허구적 구호로 현실을 호도할 일이 아니다. 자신들의 조직 자원과 그로부터 만들어지는 ‘표’와 ‘돈’의 영향력을 선용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공동체가 되도록 공공 정책을 이끄는 것이 노동운동이 해야 할 진짜 민주주의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