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 3

공식 관리자
2022-03-10
조회수 474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13. ‘정치적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정치적이어야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이란 표현은 냉소나 비난의 의미로 사용된다. 정치적이란 말이 제 의미를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이 해소되어야 노동자 시민에게 정치적 인간이 되기를 권할 수 있다고 본다.

학문으로서 정치학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적 인간론’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인간이 인간이기 위해서는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인간이 가족을 이루고 친족과 마을을 이루어 사는 것만으로는 ‘목적을 가진 삶’, ‘윤리적으로 좋은 삶’을 살 수 없으며, 그런 삶은 오로지 정치 공동체를 이루어 살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생각해 보라. 가족이나 친족 공동체로 이루어진 마을 안에서만 살게 된다면, 정의란 무엇이고 자유란 무엇인지가 중요할까?

그보다 더 큰 규모의 공동체 속에서 남들 내지 타인들과의 삶이 불가피해야, 왜 법이 필요하고 법 앞의 평등이 중요한지, 그것이 정의를 실현하는 문제와 어떤 관계가 있는지, 나아가 공적 결정에 필요한 정당성의 토대를 만드는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는지 등등이 제기되지 않겠는가? 이런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누군가 정치 공동체 없이도 살 수 있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 이상의 존재이거나 아니면 인간 이하의 존재일 것”이라고 말했다. 요컨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말은 지배적 위치를 차지하고자 하는 인간의 동물적 본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누구든 선한 목적을 가진 좋은 삶을 살고자 한다면 그것을 위해서라도 좋은 정치 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 바로 여기에 있다.

제대로 정치적인 사람은 어떻게 하면 인간 삶의 현실을 좀 더 낫게 만들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사람이다. 현실을 개탄하고 냉소하는 사람이 아니다. 지금의 정치 현실을 야유하고 비난만 한다면 기성세력이 지배하는 정치 질서는 달라지기는커녕 더욱 강해지기만 한다. 보통의 시민들이 정치를 혐오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냉소나 개탄보다는 “어떻게 하면 지금과 같은 정치를 바꾸고 변화시켜 공동체에 기여하게 할 수 있을까?”를 묻는 사람이 제대로 정치적인 사람이다.

변화의 에너지와 적극적 참여의 열정을 모으려는 사람들이 늘어나야 정치도 사회도 달라질 수 있고 또 그래야 새로운 가능성이 만들어질 수 있다. 개탄과 야유, 냉소는 일반 시민을 정치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거나, 정치를 기성세력의 독점물로 방치하게 하는 ‘악마의 유혹’일 때가 많다.

 

강의 때 이런 반응을 보이는 조합원이 있었다. “당신 말대로 정치가 중요한 것은 알겠지만, 그렇다고 나까지 정치에 관심을 가져야할까 생각하게 된다. 법 잘 지키고 남에게 해 끼치지 않고 개인 삶을 충실하게 살면 되지 않나 하고 반발심도 갖게 된다.” 개인 삶은 중요하다. 개인 삶을 희생할 정도로 정치에 관심 갖는 것은 나도 반대다. 하지만 개인 삶을 위해서도 정치를 좋게 만들고 사회를 개선하는 데 어느 정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렇게 답했다.

 

사회는 개인들의 단순한 합이 아니다. 철학자들이 강조하듯 인간이란 사회 속에서만 개별화될 수 있는 존재다. 달리 말해 사회가 없다면 개인도 없다. 그렇기에 사회 혹은 공동체 전체를 관장하는 정치의 기능이 좋아야 개개인도 좀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 스펙과 소득이 연애와 결혼의 조건이 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아니면 키스 잘하고 유머 있고 요리 잘하는 사람이 사랑받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사랑하고 싶은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사적 삶을 위해서도, 정치가 제 기능과 역할을 하느냐 못 하느냐의 문제는 너무나 중요하다.

어느 사회든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는 노동이고 그 핵심은 노동시간에 있다. 노동시간이 짧은 사회일수록 노동의 가치가 더 튼튼해진다. 그런 사회일수록 더 건강하다. 일에 대한 헌신성도 높다.

책을 많이 읽는 나라도, 종이 신문의 발행 부수가 많은 나라도 이런 사회다. 많은 이들이 출판계의 오랜 불황을 염려하는데 다른 어떤 정책보다 장시간 저임금 노동 체계를 개선하고, 책 읽을 시간과 여유를 갖게 하는 것이 최고의 출판 진흥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진보든 보수든 노동문제를 개선하는 데 누가 더 유능한지를 두고 경쟁해야 한국 민주주의가 좋아진다. 그래야 인간다운 교육도 가능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있고 출판업자들도 산다.

노동문제, 정말 중요하고 또 중요하다. 그렇다면 노동시간의 문제를 누가 개선할 수 있을까? 개별 기업 경영자가? 개별 노조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기업 단위 이상의 집합적 노사 관계에서 노동 관련 정책 의제가 제기되어야 하며, 아마 그것으로도 충분하지 않을 것이다. 금융정책, 산업정책, 경제정책의 변화가 동반되지 않고 가능할까?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 영역을 이끄는가? 입법과 공공 정책의 범위에서 활동하는 정당의 힘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렇기에 노동운동도 민주주의와 정치, 정당에 유의미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방향으로 꾸준히 확대되고 발전해야 한다. 노동자도 조합원인 동시에 노동자 시민, 노동자 당원이 되는 것이 자연스러워야 민주주의가 발전한다.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어떤 사안이든 절대적으로 옳은 결론을 갖기는 어렵다. 다양한 요구와 이견 사이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할 때가 많은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상대의 관점에서도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결정에 따라서 갈리게 될 피해자와 수혜자의 관점도 균형 있게 들여다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것이 인간 행위를 이끄는 황금룰(golden rule)로 받아들여져야 할 것이다.

서로 상대가 있는 정당은 특히 더 그래야 할 것이다. 각자의 당파적 입장을 말하더라도 최대한 보편적이고 공정할 때 변화는 시작될 수 있다. 그렇지 않고 그저 자신들의 입장만 고집스럽게 내세우며 아무 일도 안 하는 것 혹은 ‘하는 척’만 하는 것을 좋다고 말할 수는 없다. 상대 정당과 마주보며 다투고 협상하고 조정하는 대신 서로의 지지자들을 향해 아첨하는 것으로 일관하는 정치를 해서도 안 될 것이다. 노사 관계도 다르지 않다. 불일치와 갈등이 있는 곳에 정치가 필요하다면 노동운동은 역시 넓은 의미에서 정치적인 이성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치가 불일치와 파당성을 핵심으로 한다면, 정당들이 민주정치를 이끈다는 것은 갈등과 경쟁을 통해 공동체의 통합과 평화가 진작되는 것을 가리킨다. 노사 관계도 마찬가지다. 노동자와 사용자도 생산의 결과를 둘러싸고 의견의 불일치와 갈등적 경쟁을 감수해야 한다. 그 속에서 교섭과 협상을 통해 노사 관계를 함께 이끈다는 것은 특별한 인간 활동이 아닐 수 없다. 그에 맞는 안목과 실력을 갖춰야 하고, 그래야 공동체를 좀 더 자유롭고 건강하고 평화롭고 평등하고 안전하게 통합하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차이와 갈등 속에서도 공동체를 통합으로 이끄는 인간 활동을 정치라고 한다면, 이를 이끄는 정치 이성은 서로 정파를 달리하는 진보, 보수는 물론 노동자 시민과 사용자 시민에게도 필요한 덕목이 아닐 수 없다.

앞서도 말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투쟁하고 시위하는 것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그것은 민주주의가 뭔가 잘못되고 있는 것의 징후일지는 몰라도 민주주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협상하고 타협하고 조정하는 것에 민주주의가 있다.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를 이끄는 정치 이성 역시 더 투쟁적이거나, 불퇴전의 각오를 드러내는 비타협적 전투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정한 조건과 평등한 분배 효과를 진작시키는 상호작용 속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신뢰와 통합 속에서 민주주의가 필요로 하는 시민적 덕성이 자라날 수 있지, 불신과 적대 속에서 공동체적인 덕목이 자라난다고 말하는 정치철학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타협’은 아름다운 정치 언어다. 그것은 차이와 갈등을 전제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조정과 협상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서로 불완전한 이해와 갈등적 분배 갈등 속에서도 한발 더 공동체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인간 활동이다. 상대에게 공포를 심어 주고, 자신의 편에 분노를 동원하는 것과는 다른 종류의 일이다. 적대와 대립, 증오를, 조정 가능한 갈등과 차이, 이견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 민주주의를 이끌 수 있다. 세상을 어둡고 암울하게 만드는 사람은 그런 정치 이성을 갖춘 사람이 아니라 그렇지 않은 이들이다.

정치 이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에게서 볼 수 있는 정형화된 특징은 두려움이다. 사람들이 투쟁의 전선에서 멀어질까 봐, 상대가 우리의 불완전함과 존재론적 약함을 눈치 챌까 봐 교섭과 협상에 나서지 못할 때가 많다. 노동자와 조합원들에게 더 많은 경제적 혜택이 이들을 타협적이게 만들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들도 이들이다. 고임금을 받는 ‘중산층 노동자’의 등장과 확대를 노동운동의 타락으로 보는 것도 이들이다.

생각해 보면 일하는 다수 노동자의 삶이 늘 가난하고 궁핍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더 나은 소득, 더 나은 삶을 향유하는 데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함에도, 이를 타락으로 보는 것은 불합리하다. 이들의 고임금이 소득세를 통해 중하위 사회계층에게 복지로 돌아갈 수 있도록 재분배 구조를 개선하는 문제가 중요하고, 대기업 노동운동이 비정규직과 불안정 노동자 집단을 포괄할 수 있도록 좀 더 넓은 지역별・산별 조직 기반을 발전시키는 과제가 중요하다고 할 수는 있어도 중산층에 가까운 급여를 받는 것 자체를 부정시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선진 민주주의 국가라고 부르는 나라들의 한결같은 특징은 노동자들이 중간계급(middle class)의 중심을 차지한다는 데 있다. 이들 나라에서 노동운동은 중간층과 하층의 사회 구성원 사이의 연대와 협력을 주도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도 점차 그런 상황으로 나아가고 있다. 중산층 가운데 대기업 노동자, 공공 부문 노동자, 연구와 교육 부문 노동자가 차지하는 비중은 커졌다. 생산직 노동자가 반드시 사회 하층이어야 할 이유도 없어지고 있다. 과거 중세 군주정 시대에 시민혁명을 이끌었던 사람들의 사상과 태도를 자유주의라고 부르고, 그들이 내건 인권과 평등의 가치가 노동자를 포함해 가난한 시민 일반에 확산된 것을 진보라고 하듯, 노동운동의 성과가 일하는 사람들의 다수를 사회 중간층으로 이끈다면 그것 역시 사회발전이고 진보라고 이해해야 할 것이다.

노동운동의 이상은 기업을 공격하고 사업주를 아프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유사한 노동을 하는 사람끼리 연대하고, 좋은 기업 운영과 좋은 경제정책에 대한 공동의 이해를 진작하는 데 있다. 이런 관점의 노동운동이 성장해야 자본주의 사회를 노사가 공존하는 경제공동체로 이끌 수 있다.

그렇기에 노동조합의 조직적 기반을 기업 단위에 묶어두지 않고 더 넓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고, 협소한 물질적 이익추구를 넘어 사회와 경제 운영 전체를 함께 이끄는 공동 통치자를 지향하는 것이다. 노동운동이 정치적이지 않고, 그에 맞는 합리적 이성을 갖추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런 변화가 가능할 수 있겠는가.

정치적인 이성과 함께 창조적 열정을 지향하는 것이야말로, 다른 누구보다 정당정치와 노사 관계를 이끄는 사람들이 깊이 새겨야 할 경구라고 생각한다. 갈등적이며 이율배반적인 위험한 조건에서 말하고 행동해야 하는데, 여기서 의미 있는 성과를 내는 사람의 말과 행동이 어떻게 창조적이지 않을 수 있을까. 제대로 정치적이어야 실체적 변화의 가능성을 만들 수 있으며, 사회를 한발 앞으로 이끄는 적극적 열정이 노동운동을 이끌 때 좀 더 담대한 희망을 만들 수 있다.

노동운동의 가치와 역할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민주주의자들이자 희망을 잃지 않는 사람들이다. 서로 다른 정견과 갈등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정당들 사이에서 합리적 경쟁을 이끌어 사회를 더 넓게 통합하고자 하는 사람들도 그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얼굴은 밝고 빛난다. 개선과 변화의 방법을 찾아 상상력을 최대화하려는 사람들의 표정이 어둡고 잔혹해 보일 리 없다. 가능성, 상상력, 용기, 기백을 강조하며 희망을 말하는 자도 그들이다. 민주주의는 이들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는 가장 인간적이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체제이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민주주의는 그보다 더 넓은 정치의 세계를 구성하는 한 부분이다. 따라서 정치의 역할을 이해하지 않고는 민주주의를 잘 다루기는 어렵다. 정치 또한 그보다 더 넓은 인간 세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결국 인간과 정치, 그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 민주주의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도 정치와 인간에 대한 이해가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요컨대 민주적이되 동시에 정치적이고 나아가 인간적이어야 하며, 그럴 때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더 깊고 더 넓어질 수 있다고 본다.

누구든 원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구원을 확신하는 사람도 기꺼이 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슬픔 없는 삶이 가능하다고 믿는 인생은 참다운 인생이 될 수 없다. 불행과 고통의 경험은 빈번하고 도처에 널려있다. 신실한 자에게도 영혼의 평안은 짧게만 허락되는 축복일 뿐, 대부분의 시간은 지옥 같은 마음을 이고 견디며 버텨내야 할 일들뿐이다. 늙고 병들고 냄새나는 삶을 외롭게 마주할 운명을 피하지도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둥글고 관대해지기보다 편협하고 완고해지는 것 때문에 괴로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 인간이 놀랍게도 사회를 만들고 국가를 운영한다. 누구의 삶도 존엄하지 않은 바가 없으며, 그런 삶을 위해서는 자유롭고 평등해야 한다는 것을 ‘시민됨’의 권리로 주장하는,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인간이기도 하다. 서로의 열정과 이익, 취향과 감각이 다르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연대와 협력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은 물론, 어떤 공동체를 어떻게 만들고 가꿔 나갈 것인가를 두고 씨름하기도 한다. 슬픔과 고통, 죽음과 같은, 회피할 수 없는 존재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런 한계에 대한 자각 덕분에 인간은 더 큰 변화를 성취할 수 있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개별 인간은 이야기(story)를 남기고 사라지는데도, 인류는 수천 년을 이어가는 역사(history)를 만들어 간다는 것은 놀랍기 그지없다. 영원히 죽지 않고 남의 도움 없이 자족적 삶을 사는 신이 어찌 인간 삶의 이런 다양한 변천(vicissitude)을 부러워하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우스개로 하는 이야기지만, 죽음 없는 삶의 지루함 때문에 변덕과 심술을 절제하지 못하는 신의 운명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자극해 내는 내면의 갈등과 예민한 감각을 사회적 삶의 풍부함으로 발전시키는 인간의 역사가 더 위대해 보일 때가 있다.

민주주의는 그런 인간의 삶에서 발원한 정치제도다. 한 정치철학자는 민주주의란 신의 세계에서나 실현될 수 있을 뿐, 인간의 본성에는 맞지 않는 정치제도라고 말했는데, 나는 그 반대라고 생각한다. 신들의 세계에서는 민주주의가 필요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인간의 불완전함과 한계 때문에 만들어지고 발전해 온,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정치적인 제도이자 체제이다.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민주주의’로 불리는 정치제도와 정치 원리를 인간이 만들고 인간이 실천하고 있음에도, 사실 정치철학자들이 이를 인정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소수가 다수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다수가 소수를 통치하는 것은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는다며, 민주주의는 신의 세계라면 몰라도 인간의 세계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단언했던 사람이 있다고 이야기한 바 있다. 18세기 중후반의 사상사를 대표하는 정치철학자 장 자크 루소(Jean Jacques Rousseau)다. 누구나 잘 아는 그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말이다. 하지만 천상의 국가가 민주주의로 운영된다는 것도 이치에 맞지는 않다.

민주주의가 인간에 맞지 않는 제도라는 생각은 루소만의 것이 아니다. 적어도 19세기 이전에는 그 어떤 철학자도 민주주의를 추천한 적이 없다. 인간의 조건에 맞는 민주주의 기획을 발전시킨 정치가나 지식인도 없다. 1787년 세계 최초로 연방헌법을 제정해 공화정을 제도화한 미국의 헌법 제정자들도 자신들이 만들려는 것은 공화정이지 민주주의가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미국에서 민주주의가 받아들여지고 정당화된 것은 한 세대가 더 지난 1830년대 들어서였다. 미국의 민주당은 그때 만들어졌다.

세습 군주와 소수 귀족의 통치체제를 피로써 무너뜨린 1789년 프랑스혁명 역시 마찬가지였다. 혁명의 주도자들 역시 민주주의가 아니라 공화정을 주장했고, 민주주의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프랑스에서 노동조합과 정당의 결사가 인정되어 본격적인 민주주의를 하게 되기까지는 그 뒤로도 1백 년이 더 필요했다.

지금도 민주주의를 마지못해 인정하는 나라가 있다면 단연 프랑스다. 프랑스인들만큼 정당 이름에 ‘민주’라는 단어를 넣기를 꺼리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유럽 국가들 가운데도 ‘민주’가 반드시 진보적인 의미로만 사용되지 않는 사례는 많다. 민주당(스웨덴, 스위스), 민주주의를위한포럼당(네덜란드), 국민민주당(노르웨이, 독일), 자유와직접민주주의당(체코) 등에서 보듯이, 민주는 이들 극우 혹은 극우에 가까운 정당의 이름에 더 자주 들어 있기도 하다. 달리 말해 민주주의를 말한다고 해서 반드시 민주주의자는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다시 시간을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로 돌려보자. 철학자의 회의적 시각과 시민혁명의 주도자들조차 수용하기를 꺼리던 민주주의를 당시에 요구하고 주장했던 이는 누구였나? 마지막까지 참정권이 허용되지 않았던 노동자들과 여성이다. 근대 시민혁명을 주도한 남성 중산층 부르주아가 세습군주정과 귀족정 대신 공화정을 주장하고 개인 권리에 기초를 둔 자유주의의 새 원리를 주창했다면, 시민됨의 권리와 자유를 모든 사회구성원에게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민주주의로의 확장을 요구하고 나선 것은 노동자와 여성이었다.

이들이 정치에서 평등한 시민권을 갖기 전의 체제를 정치학자들은 (보통선거에 대비되는 의미에서) ‘제한선거 체제’ 혹은 (재산세를 납부하는 사람에게만 참정권이 허용되었다는 의미에서) ‘납세자 선거 체제’라고 부른다. 남에게 고용되어 있거나 가부장의 지배하에 있어서, 자주적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노동자들과 여성은 공익에 대해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재산을 가진 남성 중산층 이상의 사회계층에게만 참정권을 허용하던 시절이었다.

오늘날 그렇게 주장한다면, 돈 없고 남자가 아니라서 투표권을 불허한다면 정신 나간 일이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는 정말 그랬다. 그런 시대에 당당하게 정치 참여의 권리와 자유로운 시민권을 주장하면서 민주주의를 현대 인간의 역사 안으로 끌어들인 것은 바로 평범한 남녀 보통 사람들이었다는 사실, 그렇게 해서 민주주의를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야말로 인간의 역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취가 아닐 수 없다.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오늘도 조합원으로부터 받은 질문을 두고 이야기하겠다. 질문 요지는 이랬다.

 

“참정권 확대를 위해 공개 삭발식을 하는 등 청소년들이 직접 나서서 정치적 의사를 표현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취지는 공감하지만 청소년들이 과거 노동운동이 하던 방식을 따르는 걸 보며 기분이 착잡했다. 정치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조언을 해줄 수 있을까?”

 

두 마음 사이에 긴장이 느껴진다. 하나는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긍정적인 조언을 하고 싶다는 마음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들이 삭발이나 단식 농성 같은 방식으로 그간 노동운동에서 자주 사용했던 투쟁의 모습을 보일 때 갖는 복잡한 마음이다. 나도 아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갖고 자신들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좋다고 본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도 갖게 되고 다른 사람의 동의를 얻기 위해 이견에 대해서도 고려하는 자세를 갖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 방식이 삭발과 단식투쟁처럼, 과거 권위주의 시절에나 정당화될 수 있는 것이라면 좋지 않다고 본다.

민주주의에서라면 누구든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는 데 있어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가 기본권으로 허용된 조건에서라면 가능한 한 합리적이고 평화적인 방법으로 의사를 표현해야 한다. 물론 민주주의도 이상적인 체제는 아니므로 어떤 경우는 자신을 걸고서라도 뭔가를 실현해야 될 때가 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인생을 살면서 많아야 한두 번이면 좋겠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잘 운영하고자 하는 이유는 그런 극단적인 방식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권익과 열정을 표현할 자유로운 기회를 넓히기 위한 것 아니겠는가.

삭발이나 단식 같은 방식이 대중으로부터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동의를 얻는 쪽이 승자가 되는 게임 룰에 기초를 둔다. 그렇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방법을 선택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 형성론을 필요로 하지, 선도적 희생과 고립 감수의 태도와는 양립하기 어렵다. 그것은 주변화되는 선택이다.

삭발하고 단식을 하는 사람은 절박한 절규를 하는 것이겠지만, 자칫 동료 시민들의 지지를 얻고자 할 때 필요한 긴 준비나 노력을 못하게 할 수도 있다. 혹은 자신이 얼마나 옳은 일을 하는지를 앞세우게 되고, 동참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수치심이나 죄책감을 갖게 하는 태도로 이어지기도 쉽다. 민주주의는 평등한 참여를 지향한다. 강압보다는 설득의 방법으로 일하는 체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보통의 평균적 인간도 따라할 수 있는 방법으로 요구와 주장을 펼치는 것이 좋다.

 

알게 모르게 우리 주위에서는 시위하고 단식하고 삭발하는 것을 민주주의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나는 출판사를 운영한 적이 있다. 그때 책의 제목에 ‘민주주의’가 들어가면 표지 디자이너가 시위하는 장면을 담은 시안을 보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그런 모습은 민주주의가 잘 안 됐을 때 항의하는 것을 나타내지, 그것이 민주주의의 본령일 수는 없다.

민주주의는 이견 사이에서 대화하고 설득하고 교섭하고 조정하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데 있다. 민주주의자는 회의를 잘 이끄는 사람이지, 선도적으로 자신을 희생하고 투쟁하는 사람이 아니다. 의회민주주의가 정견을 달리하는 정당들 사이에서 공적 의제를 둘러싸고 합리적으로 논쟁하고 조정해서 서로에게 타협적인 결과를 도출하는 것이듯이, 노사관계에서의 민주주의 역시 단체교섭과 협상을 잘해서 서로에게 유익한 타협을 이끄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모든 가치 있는 변화, 오래 지속될 개선은 그만큼 오래 걸려 성취된다. 관련된 행위자가 모두 변화되고 개선된 조건을 수용하고 적응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즉각 이루어져야 하고, 당장 실시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대화나 교섭을 촉구할 때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나 그것이 일상적인 자세나 태도일 수는 없다. 그런 사람은 늘 상대의 반성과 사과를 촉구하는데, 사실 누군가를 향해 반성하라거나 사과하라는 식의 요구는, 교섭과 협상이 필요로 하는 상호주의를 부정하고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책임을 돌리는 것에 그칠 때가 많다.

 

2017년 1월 독일의 자유베를린 대학에서 한국학을 전공하는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그때 이런 질문을 받았다. “한국에 가본 적이 있어요. 우연히 시위대를 만났어요. 아저씨들이 붉은 머리띠를 두르고 소리를 쳤어요. 너무 무서웠어요. 그런데 궁금했어요. 어떻게 대화하나요?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나요?” 그 친구에게 민주주의의 이미지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화의 장소나 장면 같은 것이었고, 시위나 붉은 머리띠, 구호는 민주주의라기보다는 민주주의를 하지 않겠다는 상징으로 이해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질문에서 배울 것이 있다고 생각했다.

옳은 것을 외치고 주장하는 것은 생각보다 그렇게 어렵지 않다. 하지만 옳은 방향의 변화를 만들어 가는 데는 시간도 필요하고 성실한 노력도 필요하며, 그 변화의 혜택을 공유할 집단들에 대한 설득도 필요하다.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상대와는 서로 양립 가능한 타협의 공간을 확인하는 대화와 협상이 필요하다.

 

권위주의가 모든 일을 빨리 단행하는 장점이 있다면, 민주주의는 일이 느리게 이루어진다는 단점이 있다. 다만 민주적 변화는 일방적이지 않기에 오래 지속되는 장점이 있다. 권위주의가 특단의 조치와 즉각 실행을 요구한다면 민주주의는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를 지향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는데, 우리 아이들이 이런 민주주의 체제 특징을 익혔으면 한다.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어떤 철학자도 민주주의를 최선의 정치체제라고 보지 않았다. 플라톤(Plato)은 민주주의를 나쁜 정치체제로 규정했고, “아테네 민주주의는 철학자(소크라테스)를 살해하는 죄를 저질렀다.”며 유보 없이 비판한 것으로 유명하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le)는 플라톤에 비해서는 온정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그 역시 민주주의를 좋은 정치체제의 유형에 넣지 않았다. 근대 시기의 철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대다수는 민주주의를 선동에 취약한 체제로 이해했다. 현실적으로 민주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을 때에도 어쩔 수 없어서 하게 된, 일종의 ‘필요악’(necessary evil)으로 여겼다. 1830년대에 미국을 방문해 민주주의의 실제 모습을 경험한 뒤, 유럽 지식인들을 열광시킨 책 『미국의 민주주의』(Democracy in America, 1835)을 냈던 프랑스의 자유주의자 알렉시 드 토크빌(Alexis de Tocqueville)이 대표적이다.

그는 민주주의가 다수의 독재로 전락해 개인의 자율성과 같은 자유주의적 가치가 억압될 가능성을 진심으로 걱정했다. ‘평등’과 ‘민주주의’를 돌이킬 수 없는 섭리 내지 그에 가까운 변화라는 사실을 인정했지만, 마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 민주주의는 어쩔 수 없는 현실의 변화였을 뿐, 이성적 최선은 아니었다.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 같은 정치가의 평가도 흥미롭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부형태다. 단, 지금까지 실천된 다른 모든 정부 형태를 제외하면 말이다”(democracy is the worst form of government except all the others that have been tried.).

역사적 경험으로 보자면 민주주의가 다른 체제보다 못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불합리하기 짝이 없는 정치체제라는 것이다. 정치학자도 민주주의를 받아들이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정치학계에서 민주주의를 이론화하려는 노력은 20세기 중반에 이르러서야 시작되었고, 이때야 비로소 ‘민주주의 이론’이라는 뜻의 ‘democratic theory’라는 표현이 처음 등장했다.

당시 정치학자들로 하여금 민주주의에 대한 이론화 노력을 자극한 사람은 경제학자였던 조셉 슘페터(Joseph Alois Schumpeter)였다. 그가 1942년에 출간한 책, 『자본주의, 사회주의 그리고 민주주의󰡕(Capitalism, Socialism and Democracy)야말로 사실상 민주주의에 대한 최초의 이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주의적 접근을 비판하며, 있는 그대로의 민주주의, 즉 실제로 작동하는 민주주의의 현실에 맞게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다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현실로서의 민주주의란 ‘민중이 지배하는 체제’가 아니라 ‘민중의 지지를 얻으려는 정치가들의 경쟁 체제’라고 정의했다. 그의 주장이 정치학계에 미친 영향은 컸다.

 

정치학자들조차 민주주의를 진지한 학문적 주제로 받아들인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며, 아무리 길게 잡아도 1백 년이 안 된다. 민주주의는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니다. 국가나 정부, 입헌주의나 법치주의, 관료제와 의회 등 현대 국가를 운영하는 많은 원리나 제도의 경우는 철학자와 정치학자, 법학자들에 의해 오랫동안 논의되고 발전해 왔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달랐다. 민주주의는 철학자와 학자들의 회의적 견해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에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냈다.

노동자들과 여성들이 앞장서서 그런 변화를 일궈 냈고, 정치학자를 포함한 지식인들이 뒤늦게 이론화에 나선 게 민주주의다. 정치학 분야의 다른 주제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지식인을 포함해 넓은 의미의 전문적 식자층보다 노동조합 활동 경험이 있거나 여성들의 평등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주제가 아닐 수 없다. 그것도 몸(경험)으로 말이다.

노동자가 시민이 되고, 여성이 시민이 되고, 노동조합이 다수의 일하는 보통 사람들을 조직한 결사체가 되고, 그들 가운데 역량과 소명감을 가진 활동가들이 정치적 대표가 되고 입법자가 되고 공공 정책의 공동 운영자가 되는 변화를 말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의 등장과 발전은 설명할 수 없다. 남녀 노동자들이 결사를 하고, 조직의 중요성을 공유하고, 대표와 집행의 기능과 체계를 발전시키고, 교섭과 협상의 능력을 통해 기업 경영은 물론 경제 운영의 책임 있는 주체로 성장해 온 과정이야말로 민주주의가 역사적으로 보여준 사회적 모습이자 성취가 아닐 수 없다.

보통의 인간들이 일궈가는 풍부한 실천의 문제로서 민주주의는 노동자나 조합원들이 훨씬 더 잘 이해하고 실천한다. 지식인들 가운데 매우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주장하던 사람들이 전체주의자가 되는 경우는 많았다. 하지만 노동조합의 경험이 많은 사람들 가운데 전체주의자가 되는 경우는 드물다. 문제를 이념적이고 추상적으로 다루는 데 익숙한 지식인에 비해, 경험과 지혜를 통해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노동자나 노조 활동가들이 훨씬 편견에 덜 빠지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와 관련한 정치학계의 이론적 논의도 중요하지만, 그와 무관하게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불합리한 지위에 대한 고민의 경험은 물론, 노동조합 활동을 통해 갖게 된 여러 문제의식이나 지혜가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을 가졌으면 한다. 노조 조합원이나 활동가, 지도자로서 민주적 자부심을 가졌으면 좋겠다. 이 강의가 가치를 갖는다면, 바로 그런 생각이 좀 더 단단해지도록 돕는 데 있다.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오늘도 조합원 질문을 다룬다. 질문자는 아마도 지금과 같은 정당 정치나 선거가 무척이나 재미가 없나보다. 그러나 어쩌랴, 민주주의를 재미만을 위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프로듀스 101>이나 <고등래퍼>, <미스터트롯>처럼 국민 참여형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투표나 팬덤 형성과 비교해, 선출직 공무원이나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는 근본적으로 어떤 차이가 있나?”

 

민주정치에서 공직 후보 선거는 시민주권을 실현하는 것이다. 권력은 시민에게서 발원한다. 반면 국민참여형 경선 내지 인기투표, 팬덤현상에서 스타와 대중 사이의 권력관계는 스타 편향적이다. 민주적 선거와 인기투표형 경선 모두 시민/국민 참여로 이루어진다. 하지만 민주적 선거의 경우 선출된 사람은 소속 정당의 공약에 기초를 둔 시민 대표이자 또 그 때문에 책임성의 윤리를 부과 받는 반면, 스타는 특정 정당을 대표하는 것도 아니며 특정 정견에 구속되지 않는 개인이다. 전자가 시민과 대표 사이의 주권현상을 특징으로 한다면 후자는 소비자와 생산자 사이의 시장적 교환관계의 특성을 더 많이 갖는다.

물론 선거도 인기투표적 특징을 가질 수 있고 팬덤현상이 지배할 수 있다. 그러면 정치는 민주적 이상과는 멀어지고 점차 선출직 군주정에 가까워진다. 인기와 팬덤은 시장지배력를 구현하는 상품이 되고, 결국 주권은 시민이 아니라 통치자에게로 옮겨지게 된다. 민주정이나 공화정이 시민에게는 자유를, 통치자에게는 책임을 부과하는 체제라면, 팬덤정치나 인기투표적 정치는 통치자의 자유를 위해 열성 지지자들이 헌신하는 체제에 가깝다.

주권 현상을 좀 더 생각해보자. 민주주의에서 주권의 소재는 어떻게 정해지는가? 정치적 결정 혹은 공적 결정이 내려진다고 할 때, 그 결정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주권을 갖는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복지국가나 사회민주주의 체제를 만들고 싶은 마음에 스웨덴 시민에게 우리 선거에 참여할 수 있는 권리를 줄 수 있을까? 같은 영어를 사용한다고 미국 선거에 캐나다 시민을 참여하게 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라면 불가능하다. 우리가 내린 결정에 스웨덴 시민이 복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미국의 선거 결과로 등장한 미국 대통령의 결정을 캐나다 시민이 따를 의무는 없기 때문이다.

고대 민주주의란 시민이 법을 만들고 그 법을 만드는 시민이 그 법을 따르는 체제를 가리켰다. 오늘날의 민주주의는 시민이 입법자 역할을 하는 시민 대표를 뽑고 그들이 만든 적법한 법은 모든 시민에게 구속력을 발휘하는 체제를 가리킨다. 우리가 참여하고 그 참여로 대표의 권위가 만들어지고 그들의 권위적 결정을 통해 우리도 영향을 받지만, 대표들은 시민의 자유를 위해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 하지만 팬덤현상이든 인기투표형 국민경선에서든 시민은 소비자가 되고, 스타에게 더 구속되는 팬이자 추종자가 되기를 기꺼이 감수하고자 한다.

‘책임 정치’라는 말을 들어봤을 것이다. 이때 등장하는 개념이 정당이다. 정당이란 무엇인가? 정당은 정치가를 개인으로서만이 아니라 특정 정견을 공유하는 집단적 책임에 묶어 두는 역할을 한다. 스타도 기획사를 통해 책임성을 공유할 수 있지만, 정당에 비할 바가 못 된다. 정당의 공직 후보는 물론 정당의 대표 역시 선출의 방식을 통해 책임성을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당정치 없이 민주주의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반대로 팬덤을 통해 인기를 동원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스타를 정당정치의 방법으로 활동하게 할 수는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연예계의 스타는 스타가 되고 대중의 사랑을 받고 인기와 팬덤이 만들어지는 특별한 방법에 의존하듯이, 민주주의는 민주주의가 만들어지고 시민에게 책임성의 규범을 실천하는 특별한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정치의 체제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맞는 방식으로 운영되어야지 연예계에서 스타가 출현하는 방식이나 자유 시장의 원리로 운영될 수 없다.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정치철학자들도 진땀을 뺄, 어려운 질문을 하나 더 다루고 넘어가자.


“정치는 도덕적으로 깨끗한 사람이 해야 할까? 아니면 부도덕하더라도 능력 있는 사람이 해야 할까? 정치에 대한 도덕주의적 이해와 현실주의적 이해가 혼란스럽다. 정치는 도덕이 중요한가 아니면 현실이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어느 한 방향의 내용이 아니라, 이 둘 ‘사이의 공간’을 개척하는 데 있다. 요컨대, 현실주의냐 도덕주의냐가 아니라 ‘현실적 도덕주의’ 또는 ‘도덕적 현실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공간이 존재하며, 바로 거기에 정치의 본질이 있다고 본다. 그래서 정치는 늘 고민이 동반된 결단이 필요한 인간 활동이다. 그렇지 않고 도덕주의나 현실주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는 정치의 길은 유해하다.

근대 철학의 종합자로 알려진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가운데 어느 한쪽의 철학을 선택하지 않았다. 󰡔순수이성 비판󰡕의 저자이면서 또 󰡔실천이성 비판󰡕의 저자라는 사실을 의미 있게 생각해야 한다. 도덕과 현실은 늘 긴장하지만 따로 존재할 수는 없다. 인간의 육체와 영혼이 다른 원리에 의해 움직이고 작동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 안에서 두 요소가 좋은 균형을 이루어야 건강하면서도 선한 삶을 지향할 수 있듯이 말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이율배반(antimony)의 개념을 철학적으로 발전시킨 것으로도 유명하다. 우리 인생은 온통 이율배반으로 가득하다. 우리는 신의 형상을 닮고자 하지만 천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신의 형상을 닮으려고 노력하지만, 한계 많은 피조물이 감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현실에 눈감지 않는 것, 그 속에 이성과 열정 같은 것을 신의 선물로 이해하며 뭔가 도덕적으로도 가치 있는 변화를 만들어 가는 것, 나는 바로 그 속에 자신이 성숙시켜야 할 인격성이 있다고 믿으며, 그것이 외면적 실력으로도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 모든 것이 이율배반성을 자각하는 데서 오는 성취가 아닐 수 없다.

혹자는 현실적 도덕주의나 도덕적 현실주의가 형용모순이나 말장난 같다고 할지 모르겠다. 이율배반과 같은 어려운 개념으로 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드냐며, 어느 한쪽을 분명하게 선택하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바로 그 형용모순의 힘을 중시한다. 때로 우리는 아름다운 슬픔, 찬란한 비극, 작은 거인과 같은 표현이 사실을 더 잘 드러낸다고 느낄 때가 있다. 분명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그렇다.

어쩌면 우린 그런 현실 속에서 사는 것인지 모른다. 우리 삶이 늘 기쁘고 아름답기만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슬프기만 한 것도 아니다. 사랑의 고통을 표현하기 위해 셰익스피어가 말한 ‘스위트 소로우’(sweet sorrow) 같은 표현이나, 정치의 본질로서 신성함 뒤에 숨겨진 잔인함을 나타내기 위해 마키아벨리가 말한 ‘경건한 잔인함’ 같은 표현도 의미가 있다.

도덕과 현실은 분명 정치를 포함해 인간의 삶 전체를 떠받치는 두 축이다. 이 두 축 가운데 하나만 선택하면, 다시 말해 외다리로 서 있게 되면 정치는 위태로워진다. 어느 한쪽으로부터 너무 멀어져도 자신을 지킬 수 없다. 도덕과 현실 사이에 있는 작은 오솔길을 찾아 나서는 정치인이 많아지면 좋겠다. 그 오솔길의 어느 한쪽은 늪이고 다른 쪽은 강물이다.

북쪽으로 가려고 할 때 나침반이 가리키는 정북의 방향을 따라 일직선으로 갈 수 없고, 늪을 피하고 강을 우회해 가야 하듯이,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현실의 제약을 고려하되 도덕이나 윤리, 규범의 등불을 버릴 수는 없다. 반대로 도덕의 등불은 현실을 더 잘 비춰 주는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래전 김대중이라는, 한국을 대표하는 정치인이 말했듯이, 정치가에게는 ‘서생의 문제의식’과 ‘상인의 현실감각’이 필요하며, 이 둘 사이에 좋은 균형을 발전시키는 것이 정치가의 책임이라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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