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 2

공식 관리자
2022-03-08
조회수 147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오늘의 조합원 질문은 청소년 정치교육에 대한 주제다. 조금 길지만 추가적인 질문들도 함께 다뤄보겠다.

 

“미래의 노동자인 청소년들에게도 정치교육을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이들을 지나치게 비정치적으로 교육한다. 이것이 최선일까?”

 

민주주의 사회라면 정치를 이해하고 잘 다뤄서, 공동체를 잘 가꾸고 개인의 삶을 풍요롭게 만드는 것이 모두의 자유이자 권리가 된다. 아이들에게도 정치교육이 당연히 제공되어야 하며, 오히려 권장되어야 좋은 민주 사회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 선진국의 가장 큰 특징은 미래의 시민, 미래의 노동자에게 정치교육의 기회를 부여하는 것을, 사회의 당연한 의무로 여긴다는 점이다.

독일을 예로 들어보자. 독일은 아이들에게 민주주의를 가르치는 것을 시민교육이라고 하지 않고 정치교육(Politische Bildung)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시민교육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정치교육이 더 좋은 표현이다. 국가나 정부가 시민을 가르칠 수는 없다. 그와 반대로 시민이 정치를 이해하고 선용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울 기회를 누리는 것, 그것이 핵심이다. 그것을 국가나 정부의 책임으로 삼아야 민주주의다. 미래의 시민이자 미래의 노동자, 미래의 직업인으로서 자신들이 어떤 자유와 권리, 기회를 가질 수 있는지를 알게 해야 한다. 독일은 연방정치교육원이라는 기관을 만들어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독일은 나치 세력이 정치를 악용해서 불행을 경험한 나라다. 나치가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정치가 제 역할을 못하게 되면 사회가 얼마나 큰 비극을 감당해야 하는지를 보여 준 사례다. 연방정치교육원의 가장 큰 목표는 그 같은 비극을 반복하지 않는 데 있다. 미래 세대들에게 정치가 악용되지 못하도록 견제하고 선용하는 길을 생각하게 하는 것도 중요한 업무다.

국가나 정부의 본질은 폭력이다. 개발과 환경 파괴를 가장 많이 하는 것도, 전쟁에서 볼 수 있듯이 살인을 가장 많이 하는 것도 국가와 정부다.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위협하는 국가/정부를 만나게 될 것인지, 시민의 자유와 생명, 재산을 지키는 국가/정부를 만나게 될 것인지는 정치가 어떤가에 달려 있다. 선거와 정당, 노동조합과 자율적 결사체들은 민주정치의 중심 제도이자 행위자들이다. 이들이 국가와 정부를 어떻게 움직여 가느냐에 따라 결과는 전혀 달라진다.

정치는 얼마든지 악용될 수 있다. 사회적 강자 집단들의 욕구를 실현하는 수단이 될 수도 있고, 소수의 도당과 파벌들에 의해 남용되고 희생될 수도 있다. 정치를 공공재로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똑같은 민주주의를 하더라도 어떤 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반면, 어떤 나라는 그렇지 못하게 된다. 정치를 알고 이해하고 선용할 수 있는 힘을 시민들, 그리고 미래의 시민들이 가질 수 있는가는 한 사회의 미래가 걸린 문제다.

 

필자가 이렇게 답하자, 조용히 듣고 있는 한 조합원이 이렇게 추가 질문을 했다. “그건 독일 같이 노동운동이 발전된 사회민주주의 국가들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 아니냐?” 그래서 이렇게 답했다.

 

독일과 같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정당 선택의 폭이 좁고 노동운동이나 사회복지의 발전 수준이 낮은 미국도 기본은 한다. 아이들이 정치를 경험하기란 어렵지 않다. 중・고등학교 학생들도 선거에서 자신들의 생각을 표출할 수 있다. 학교의 한쪽 벽에 공화당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또 다른 벽에 민주당을 지지하는 학생들의 의견을 붙일 수 있다. 아이들 간의 지나친 논쟁이나 잘못된 표현을 제어하고 교정해 주는 지도교사도 있다. 방과 후나 등교 전에,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위해 선거운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이들을 ‘청소년 민주당원(Young Democrat)’, ‘청소년 공화당원(Young Republican)’이라고 부른다.

정당 가입을 생각해 보자. 많은 민주주의 국가들은 아이들의 정당 가입을 제한하지 않는다. 물론 제한하는 나라도 있는데, 그래도 우리보다 연령 기준이 훨씬 낮다. 아무리 보수적인 정당도 16세부터는 가입할 수 있으며, 조금 진보적인 정당은 12세에서 14세면 가입할 수 있다. 선출직 공직자가 되어 공동체를 잘 이끌어 보겠다는 꿈을 갖는 아이라면 일찍부터 정당에 가입해 정치를 배우고 경험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30대 장관은 물론 총리가 나올 수 있는 곳은 이런 나라들이다. 일찍부터 정치와 정당을 경험해야 국회도 젊어진다.

아이들에게 공부나 할 것이지 왜 정치에 관심을 갖느냐고 야단치는 사회에서 정치는 늘 나쁜 의도를 갖는 사람들에게 악용될 수밖에 없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공동체에 대해 더 깊은 관심을 갖게 되고, 타인의 권리와 자유도 존중하게 된다. 정치에 관심을 갖지 말라는 것은 “정치는 나쁜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좋은 정치의 길을 말해 줘야 하고 좋은 정치의 방법을 익히게 해야 하며, 그런 교육의 기회를 누리는 것을 아이들의 권리라고 생각해야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인생을 풍부하게 살 수 있는 길은 뭘까? 다른 사람의 삶에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의 삶도 풍부해진다. 누가 더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가를 두고 경쟁하게만 하면 아이들이 공동체를 생각하기란 어렵다. 타인의 존재에 대한 고려나 존중도 어렵게 된다. 아이들이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 불행해지거나 이상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생각이 깊어지고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 대한 이해도 성숙된다. 정치를 그렇게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이런 질문이 이어졌다. “그래도 정치는 결국 권력 장악이 목적 아닌가? 아이들에게 어려서부터 정치에 관심 갖게 하는 것이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는다.”

 

권력을 장악하고, 다른 사람을 힘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 아니다. 그것은 반(反)정치적이고 정치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가를 더 많이 생각하는 것이 정치의 본질이며, 이 점을 가르쳐야 한다. 정치를 가르치지 않으면, 정치를 욕하는 세태를 아이들이 반복하게 된다. 아이들이 정치를 욕하기만 하면 어찌될까? 나중에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되어서 정치란 자유롭게 참여하고 선용할 수 있는 ‘우리들의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정치는 결국 기존에 독점해 왔던 사람이 계속 하게 된다. 변화와 개선은 없고 다시 정치를 욕하는 일만 반복하는 시민 문화도 반복될 것이다.

고등학교 졸업할 때 담임선생님이 졸업장을 나눠주면서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당부했던 말이 생각난다. “사회에 나가서 뭘 해도 좋은데 정치는 절대 하지 마라!” 그때 우리는 모두 웃었고, 그럴 리가 없다는 듯 별 문제의식 없이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하면 이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그보다는 이렇게 말했어야 한다고 본다.

‘지금까지는 미성년자였지만 이제 성인이 되었고, 대학생이나 직업인으로서 사회에 나가게 된다. 투표도 하게 될 것이다. 본격적인 시민권의 행사자가 되는 것이다. 그때 소극적으로 투표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뭔가 더 적극적인 노력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나도 정치가가 되고 선출직 공직자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할 수도 있다. 그럴 때 부디 좋은 소명 의식과 더불어 재능과 실력을 쌓기 위해 노력하기를 바란다. 정치가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만, 잘만 한다면 공동체를 위해 좋은 일이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나날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한다.’

정치는 불온한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다. 아이들이 미래의 우리 사회를 어떻게 이끌까를 생각할 때 정치가 빠질 수 있을까.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에게 국어도 가르치고, 수학도 가르치고 영어도 가르쳐야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는 ‘공동체’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갖는 것이다. 그런데 ‘정치란 무엇인가’를 고민할 기회도 없이 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공허한 일이다. 아이들은 정치를 배울 권리가 있고, 정부나 교육 당국은 그 기회를 제공할 책임이 있다. 마찬가지로 조합원에게 정치 교육을 하는 것은 조합의 민주적 역할이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노동운동을 통해, 우리가 이루려고 하는 공동체를 상상하고 희망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어떻게 하면 함께 일하며 협력하는 것의 가치가 근본이 되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도 그런 사회를 상상하고 자신의 삶을 준비하는 데 열정을 갖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면 노동 배제적인 문화나 풍토로부터 벗어나, 노동자와 기업이 경제 운영의 공동 협력자가 됐을 때의 유익함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까? 정치가는 정치가답고 기업가는 기업가답고 공무원은 공무원답고 교수는 교수답게 자신이 소명으로 삼은 일에 헌신과 보람을 가지고 좀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고민은 노동운동뿐 아니라 진보, 보수를 떠나 모든 정치가들이 책임 있게 답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업이다. 앞서도 강조했듯이, 노동은 인간 공동체의 토대이자 터전에 해당하는 문제이다. 땀 흘려 일하고 협동하는 것의 보람이 단단하게 자리 잡고 있지 않으면 어떤 인간 공동체도 행복할 수 없다.

중학생 정도의 나이만 되어도 몸이 다 자란 아이들에게 땀 흘려 함께 일하며 협동하는 노동의 가치는 가르치지 못하고 누가 더 책상에 오래 앉아 있는가를 경쟁하게 하는 우리의 교육 현실은 그래서 문제라는 것이다. 청소년기에 경험해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노동의 즐거움이다. 아르바이트 자체는 나쁘지 않으나, 그 속에서 협력의 가치와 공동체성을 배울 기회가 될 수 없는 환경이 문제다. 청소년의 아르바이트가 ‘노동 배제적인 사회 문화가 지배하는 환경 속에서 강제된 노동’이 되지 않게 하는 것도 교육의 관심사가 되었으면 한다.

 

알고 지내는 철도 기관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동료 한 사람이 급하게 기차 정비를 하느라 땀범벅이었다. 때마침 아이 손을 잡고 그 옆을 지나던 젊은 엄마가 아이를 멈춰 세우더니 “너, 공부 안 하면 저 아저씨처럼 된다!”라고 하더란다. 그 정비사는 어느 정도 고용이 안정된 공기업 소속에다 결코 소득이 낮은 직업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에서 노동자로 범주화된다는 것이 어떤 낙인의 대상이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아닌가 한다.

학교 교육의 현실에서건 학교 밖의 사회 현실 속에서건, 시민권의 한 내용이 되어야 할 노동의 가치가 충분히 실현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개선하는 데 있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노동자들 스스로 결사의 힘을 키우는 것과 더불어 노동의 문제를 중시하는 정당들이 정치적으로 영향력을 키우는 데 있다. 민주주의는 이를 가능케 하는 원천이고, 이는 앞선 민주주의 국가들이 수많은 경험을 통해 실증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민주 사회를 만들고 발전시켜야 할까? 군사적 평화나 안전이 확고한 나라 혹은 타국의 영향력으로부터 덜 취약하고, 거꾸로 우리나라의 영향력에 대해 다른 나라들이 반응하는 정도가 커지고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높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흔히 말하는 강대국이 되길 바라야 할 것이다. 잘 알다시피 보수파들은 이런 정치적 지향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물론 세계가 국가 간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한 국제적 발언권의 중요성을 누구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따라서 진보파도 외교나 안보, 군사 분야를 다룰 수 있는 실력을 쌓아야 하고, 그 일을 감당할 인재 내지 정책 역량을 키워야 할 것이다.

다양한 일자리와 병원・박물관・공연장이 많고, 의학 기술이나 범죄 수사 능력이 뛰어난 나라를 원할 수도 있다. 세계적인 기업이 많아지고, 먹고사는 문제와 관련해 물질적인 필요가 잘 충족되는 나라를 원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경제 발전의 수준이 높은 사회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이 역시 보수파가 중시하는 가치들이지만, 어떤 면에서는 진보, 보수를 떠나 누구든 경제를 잘 관리하는 데 있어서 유능함을 발휘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나라가 부강해지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 모두가 중요한 목표이고 지향이겠지만, 민주주의의 문제에 관심을 좀 더 집중해 보자. 한마디로 민주주의의 가치나 규범, 그 연장선에서 갖게 되는 좋은 사회에 대한 기대, 그 기대를 실현하기 위한 정치적 열정에 대한 것 말이다.

어느 나라나 민주주의라고 할 때, 상당 정도 공유되는 바람직한 가치나 규범이 있다. 어느 민주주의 국가든 헌법에는 그런 가치 합의가 적시되어 있다. 대체로 그 내용은 생명, 자유, 평등, 행복 추구로 수렴된다. 재난과 질병, 범죄로부터의 안전도 마찬가지다. 그런 점에서 좀 더 건강하고 평등하고 자유롭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민주주의 국가 사이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기본 규범 내지 가치라 할 수 있다.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기 위해 이렇게 질문해 보자. 현재 민주주의 국가로 분류되는 나라는 120개 정도 된다. 이들 가운데 빈곤 인구의 비율이 낮고 계층 간 불평등 정도도 낮으며 비정규직의 규모도 작은 나라는 어디일까? 투표율은 높고 인권 및 자유화 지표도 좋으며 소수자 및 이주민에 대한 권리 부여 정도가 높고 여성 장관 비율도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기대 수명이 높고, 불법 약물 복용, 10대 임신, 10대 자살, 저체중아 출산율, 정신 질환 발병률, 영양실조, 비만율이 낮은 나라는 어디일까? 후천적으로 계층 상승이 가능한 사회적 유동성이 높은 나라, 즉 기회의 평등 수준이 높은 나라는 어디일까? 강력 범죄율과 재소자 비율이 낮은 안전한 나라는 어디일까? 요컨대 어떤 유형의 민주주의가 되어야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가 될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국가 간 민주주의의 성취를 통계적으로 조사 연구한 성과들에 따르면, 가장 설득력 있는 결론은 다음 두 가지다. 하나는 보수 정당만이 아니라 진보 정당들도 득표 경쟁력을 갖고 집권도 할 수 있는 나라, 즉 정당 정치가 좋은 나라다. 물론 이때의 진보 정당이란 노동의 가치와 존엄성을 다른 무엇보다도 중시하는 정당이다.

다른 하나는, 노동조합의 힘이 강할수록 좋은 지표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보통 노동조합의 힘은 노조 조직률(density), 노사 단체협약 적용률(coverage), 산별 내지 중앙 집중화(centralization)의 정도로 평가한다. 즉, 노동자의 조직률이 높고 교섭력이 넓고 크며 그 효과가 노조 없는 일터에까지 확대되는 정도가 큰 나라일수록, 노조의 힘은 강하고 튼튼하며 민주주의가 지향하는 사회의 질이 높다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보수 정당과 기업 집단의 영향력이 크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그 속에서도 노동을 배제하는 정도가 덜할수록, 그리고 진보적인 정당들도 상당한 득표를 하고 집권의 전망도 있는 나라들이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가능성이 높다. 이념적・계층적 대표의 범위가 정치적으로 충분히 넓은 민주주의일수록 그 사회를 구성하는 다양한 집단들의 관심과 이익이 평등하게 고려될 수 있다.

 

진보 정당의 경쟁력이 낮아 집권의 가능성이 없는 민주주의를 보수 독점의 정치라 할 수 있는데, 그런 경우 그 사회의 하층이나 약자 집단의 이익은 대표되기 어렵다. 누구나 자유롭고 공정하고 건강하고 평화로운 민주주의 국가를 원한다. 그러려면 노동이 배제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의 시민권이 정당과 노조를 통해 살아나는 민주주의를 만들어야 한다. 진보만 있고 또 보수만 있는 정치가 아니라, 진보와 보수가 균형 있게 경쟁할 수 있어야 좋은 민주주의다.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오늘 다룰 조합원 질문은 직접 행동, 직접 정치, 직접 민주주의에 대한 주제다.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당사자가 직접 나서기를 바란다. 정당이나 국회를 신뢰하지 않는다. 대개는 야유의 대상이다. 누군가 대신하는 것을 대리정치, 제도정치, 대의정치 등으로 표현하면서 비판하곤 한다. 이런 대표 없는 민주주의를 지향하는 주장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는가?”

 

모든 인간의 집단 행위는 대표를 필요로 한다. 고대 아테네 직접 민주주의도 대표를 뽑았다. 다만 선거만이 아니라 추첨을 폭넓게 사용했다. 오늘날과 같은 대의민주주의도 시민들이 대표를 직접 뽑는다. 직접 나서서 단체나 조직을 만들 수도 있다. 따라서 대의민주주의는 ‘현대판 직접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으며,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는 ‘고대판 대의 민주주의’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고대 아테네에서는 직접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시민의 범위 안에 여성과 노동자가 배제되어 있었으니 ‘좁은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에는 인종, 지역, 종교, 성적 차이와 무관하게 모두가 시민이며, 모두가 직접 정치가도 공무원도 노동활동가도 될 수 있으니 ‘넓은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고대 직접 민주주의에서는 추첨 기계로 대표를 선발했으니 ‘기계적 평등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동료 시민들의 평판을 많이 확보한 사람이 선발되니 ‘시민 신뢰의’ 민주주의라고 할 수 있다.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이렇다. 지금까지 우리 인간은 대표를 잘 뽑는 민주주의를 발전시켰다. 조합장이나 대의원, 반장이 없는 노조나 학급이 아니라 조합원과 급우들의 권익과 요구를 잘 다루는 대표를 뽑는 선택을 했다. 직접 민주주의 운동을 하는 단체에는 대표가 없을까? 거기도 있다. 대표도 있고 활동가도 있다. 그들이 내민 명함에는 사무국장 아무개, 대표 아무개라고 버젓이 쓰여 있다. 대표가 없는 민주주의가 아니라 좋은 대표가 있는 민주주의가 필요하다.

노조나 정당, 단체, 조직이란 조합원과 시민을 대표하는 집단이다. 대표 없고 활동가 없고 리더 없는 직접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것이 현실에서는 노조 혐오, 정당 혐오를 정당화하는 역할을 한다. 우리는 좋은 냉장고를 쓰기 위해서 냉장고를 직접 만드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 좋은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가 돈을 많이 벌도록, 그렇지 않은 냉장고 회사가 돈을 벌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 경제를 운영한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싶다고 직접 자동차 회사를 차리는 것이 아니라 대표적인 자동차 회사들이 서로 경쟁해서 적정 가격으로 양질의 자동차를 구입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는 사실을 안다.

대표 없는 민주주의, 정당 없는 민주주의, 시민이 직접 나서는 민주주의는 정치를 원시적 혼란 상태로 만든다. 좋은 대표를 뽑고 대표자와 피대표자 사이에 깊은 신뢰를 형성하는 노력이 노동운동은 물론 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온다. 이런 노력이 늘 좋은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지만, 이 방향을 견지할 때는 실패의 경험을 통해서도 배울 수 있고 다시 전진할 수 있다.

대표도 조직도 없는 직접 행동주의는 우리를 막다른 길로 데려갈 뿐이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현대 민주주의가 대면한 가장 강력한 도전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 내는 권력 효과’에 있다. 달리 말하면 그 어떤 구조적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들이 있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서 의견을 모아 공적 결정을 내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 이전에 ‘거대 조직의 권력 효과’ 때문에 시민 개개인이 이미 불평등한 조건 위에 서 있다는 사실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의미다.

대규모 ‘법인 자본주의’, 그리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국가 관료제’로 대표되는 ‘거대 조직화의 시대’에서도 시민 개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권이 보장되고 행사될 수 있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지 못한 민주주의론은 허상에 불과하다.

 

국가관료제는 위계 체제(hierarchy)를 기본 원리로 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1원 1표의 불평등 원리’에 기초를 둔다. 이 속에서 민주주의를 그 가치에 맞게 실천하는 일은 결코 간단치 않다. 제아무리 자유로운 개인으로 이루어진 사회라 해도, 개인의 힘만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개개인의 시민이 집단으로 조직되거나, 집단으로 투표할 수 없다면 평등한 시민권은 공허한 말에 불과하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기본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결사의 자유’이고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두 가지다. 하나는 자본주의하에서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인 노동자들의 결사체로서 노동조합이다. 다른 하나는 사회를 나눠서 대표하고 통합하는 정당의 대표 기능 및 조직적 역할이다. 흔히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의 사회학교’라고 불리고, 정당은 ‘민주주의의 정치학교’라고 불리는데, 이런 말이 실감이 날 때 민주주의는 발전한다.

현대 민주주의는 시민들이 정당이 중심이 된 정치 결사와 노조가 중심이 된 사회 결사를 통해 경쟁하고 교섭하고 협력함으로써 작동한다. 이를 통해 경제 권력과 행정 권력을 제어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가 민주주의다. 좋은 노사관계와 정당 정치가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자본주의적 경제 권력과 국가 관료제의 행정 권력이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뿐 민주주의는 기대만큼 좋아지지 않는다.

노조 이외의 다양한 결사체가 풍부하게 발달하는 것도, 정당 이외의 다양한 정치조직이 자유롭게 활동하는 것도 모두, 노조와 정당의 역할이 큰 사회에서 더 잘 실천된다.

 

결사체와 조직, 집단은 현대 민주주의의 중심 행위자들이다. 사회적 약자들이 모여서 문제를 제기하는 것을 ‘집단 이기주의’라며 불온시하는 경우가 많다. 집단은 공통의 이해관계를 진작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율적 결사체를 가리킨다. 그것을 이기적이라 비난하면 결사의 자유는 빈말이 되기 쉽다. 그런 자율적 결사체를 부정시하는 것은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만들어내는 불평등 구조가 그대로 온존되기를 바라는 일이 된다. 약자들에게 집단과 결사, 조직은 최고의 민주적 수단이자 가치이다. 이를 통해 자신들의 집단적 이익을 진작하면서도 사회 전체에 대한 책임감을 익힐 수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진정한 민주주의자’라고 내세우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가끔 집단이나 조직의 역할을 부정시하는 경우를 볼 수 있다. 그들은 광장에서의 직접 행동을 강조하고 대중의 운동적 참여 내지 순수한 열정을 강조하곤 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할 수도 없고 무엇보다도 운동과 열정의 힘은 간헐적으로는 강할지 몰라도 지속되기 어렵다. 책임감을 공유할 일상적 기반을 가꿔나갈 수도 없다. 사나운 주장과 일방적 공격성을 쏟아놓고 돌아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대부분은 위선적인 삶을 마주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규모 운동을 일으키려는 낭만적 열정보다, 민주주의에 맞는 일상적 실천을 더 안정적으로 조직하고 제도화해야 한다는 것, 그것이야말로 거대하게 조직된 국가 관료제와 자본주의 경제 체제에서 자유와 평등의 가치를 확대하고 점차 실현해 갈 수 있는 사실상의 유일한 방법이다.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오늘은 조금 다루기 쉽지 않은 조합원 질문이다. 질문은 이러했다.

 

“선거 때마다 매니페스토(manifesto) 운동이 벌어지곤 한다. 매니페스토 운동은 민주적인가? 매니페스토 운동이 가진 장점은 무엇이고, 한계가 있다면 무엇인가?”

 

매니페스토란 정당이나 후보들의 공적 약속이 가진 실현 가능성을 가리키며, 매니페스토 운동이란 그것을 검증하기 위한 실천을 뜻한다.

정당과 후보들의 공약이 단지 표를 얻기 위한 무책임한 약속이 되면, 시민이 후보나 정당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후보나 정당이 시민을 선택하게 된다. 그러면 정당과 후보가 가져야 할 민주적 책임성은 실현될 수 없다.

민주주의가 잘 작동하면 정당들과 후보들이 서로의 공약이 허구적인지 현실적인지를 따지는 기능을 한다. 그런 환경이 되어야 시민은 자신의 주권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기회를 갖게 된다. 정당 간의 좋은 경쟁이 사실상 최고의 매니페스토 운동이다.

한동안 유행했던 한국의 매니페스토 운동도 그런 기회를 확대하려는 목적으로 시작은 되었다. 다만 정치 행위자로서가 아니라 정치 밖 심판자의 역할을 극대화하려 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정당과 후보의 공약을 심사하고 평가한 정보를 언론을 통해 확산하는 방식으로 활동을 했는데, 문제는 의도와 상관없이 결과적으로는 정당이나 정치인들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키우는 데 기여했다는 점이다. 매니페스토 운동이 반정치주의를 정당화 해주는 역설이 발생한 것이다.

유권자에게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좋아지지 않는다. 모든 사안을 충분한 정보를 검토한 뒤 결정하는 유권자는 없다. 유권자가 정보를 선별하고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방법으로 선택하는 대표적인 방법은 특정 정당이나 정치가를 신뢰하는 것이다. 대개의 유권자는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정치인이 제공하는 정보를 받아들인다. 따라서 정당들이 좋아야 하고 유권자의 신뢰를 받을만한 정치인이 많아지는 것이 중요하지, 누군가 제3의 중립적 평가자가 있어서 유권자의 판단을 이끈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마치 노사 간 교섭의 질이 중요한데, 이를 공익위원에게 맡길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민주주의란 산출(output)이 아니라 투입(input) 측면에서의 변화를 중시한다. 다시 말해 기존에 대표되지 못한 요구나 기대를 조직하고 투입해서 그 전과는 다르게 가치가 재분배되는 것을 지향한다. 따라서 민주주의를 좋게 만들려면 투입의 측면이 중시되어야 한다. 기존 정당에 참여해 변화를 도모하거나 그렇지 못하면 새로운 정당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기업 이익에 편중된 정책이 많다면 노조 역시 투입 부분에서 변화의 효과를 키워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당파적 선택을 불가피하게 동반한다. 인생이 선택이듯 정치 참여 또한 당파적 선택을 동반하고 그렇기에 책임이 뒤따른다. 특정 정당과 후보에 대한 선택적 참여나 지지가 민주적 시민 활동이다. 그렇지 않고 정치 밖에서 자신들의 여론 동원 능력을 통해 정당과 후보에 압박을 가하는 방식은 한계가 있다.

매니페스토 운동가들은 자신들을 정당 정치의 상위에 있는 듯한 도덕적 권위의식을 내세울 때가 많다. 하지만 냉정하게 말해 유권자 시민으로부터 주권적 권위를 위임받는 쪽은 정당이나 후보 쪽이지 매니페스토 운동 같은 시민단체는 아니다. 아무리 부족하고 문제가 많다고 해도, 결국 유권자 시민에게 책임을 지게 될 쪽도 정당이나 후보다.

노동조합 밖에서 노조가 잘하는지 보자는 시민단체를 만들어 노동조합을 압박하기보다, 노동조합에 참여해 변화를 도모하는 것이 나은 것처럼, 정당이나 정치인을 신뢰할 수 없다며 정치 밖에서 압박만 하는 것으로는 한계가 있다.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머

  

다분히 정치철학적인 조합원 질문을 하나 더 다루고 넘어가자.

 

“선한 목적을 위해 때로는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수단을 선택하는 것이 정치라는 주장을 들어 본 적이 있다. 이런 주장은 부도덕한 정치를 옹호하는 것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뭔가 정치의 본질을 깊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인가?”

 

선한 목적을 위해 때로 악한 수단을 손에 쥐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정치 현실임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넓게 보면 정치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래서 폭력과 같은 악한 수단을 사용하더라도 정당한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가 있다. 대표적으로 정당방위가 있다. 어느 나라 어느 법에도 정당방위가 인정되면 처벌이 면제된다. 누군가에게 상해를 입히거나 살인을 저지르더라도 그것이 불가피하다면 허용된다. 정치에는 이런 상황이 너무 많다. 국내 정치도 그렇지만 국제 정치는 더하다.

제아무리 좋은 법도 모두에게 혜택을 주지 못한다. 사회복지 예산을 늘리면 약자 집단이 받을 혜택이 늘어나겠지만, 사적 보험과 같은 시장적 수단을 통해 사적 복지를 구매할 수 있는 집단은 과세를 통해 그 비용을 더 부담하게 될 것이다. 노동시장 정책도 그렇고 조세정책도 마찬가지다. 입법을 포합해 공공 정책은 대부분 강한 분배 효과(distributional effect)를 갖는다.

더 극적인 상황도 있다. 예를 들어 A라는 결정을 할 때 잘되면 50명을 구할 수 있고, B라는 결정은 잘 되면 10명을 구할 수 있다. 그런데 A라는 결정이 잘못되면 1백 명이 희생될 수 있는 반면, B라는 결정은 잘못되더라도 최대 30명 이상의 희생자는 나오지 않을 수 있다고 해보자.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까? 둘 다 불가피한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결정이지만 어떤 것이 최선인지는 그리 간단치가 않다.

전쟁의 상황에서 정치적 결정은 훨씬 더 어렵다. 전쟁의 승리란 대개 상대방 군인들에게 더 많은 죽음과 폭력을 가한 결과다. 더 효과적으로 살인을 하고 더 적은 비용으로 더 많은 폭력을 가하는 일이 전쟁에서는 좋은 정책이 된다. 도덕적으로 옹호하기 쉽지 않지만, 어느 나라든 이를 정치적으로는 더 높이 평가한다.

독일의 전통 종교 가운데 하나인 ‘발할’이라고 있다. 그 교리에 따르면 정치인과 군인들은 천국에 갈 수 없다. 불가피하게 악한 수단을 사용해야 할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다만 천국에는 가지 못하지만 그들을 구원하는 별도의 내세가 있다. 그들의 악한 행위는 인간을 선하게만 창조하지 못한 신에게도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형태나 논리는 다르지만 대부분의 종교가 이와 유사한 예외 장치를 갖고 있다.

전장에 나서는 장군과 병사에게 어떤 일이 있더라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도덕적 명령을 내릴 수는 없다. 그보다는 이 폭력적 상황을 최대한 빨리 끝내기 위해 우리가 가진 폭력을 효과적으로 사용해 전쟁을 서둘러 끝내도록 하자는 명령을 내려야 할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치적 결정도 이와 유사한 측면이 있다.

정치가 도덕적으로 선한 수단만을 사용해서는 사회를 좋고 선하게 만들 수 없을 때가 많다. 천사의 정치나 천상의 정치에서라면 모를까, 인간의 현실은 악한 수단과 좋은 목적이 양립할 때가 있다. 이런 이율배반적인 상황에서 일하기 때문에 정치를 하는 사람은 늘 몸부림치듯 고민하면서 고통스러운 결정을 하게 된다. 이런 상황이 두려워서 아무 일도 못 하는 사람은 정치할 수 없다. 그러면 결국 이런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을 승자로 만들 것이다.

어떻게 해서든 선한 목적을 위해 악한 수단을 손에 쥐어야 하는 상황을 최소화하고, 선한 목적과 선한 수단이 양립될 수 있는 가능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 할 것이다. 좋은 정치가는 자신이 하는 일이 이런 운명과 마주해야 하고, 또 그 일에 정치적 소명이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런 정치가라면 늘 쉽지 않은 결론과 쉽지 않은 결정을 앞에 두고 숙고를 하게 될 것이고, 그것이 그의 내면을 더 성숙시킬 것이다.

 

그래서 좋은 정치가에게는 깊은 인간적 향기와 공익적 영웅의 풍모가 깃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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