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 1

공식 관리자
2022-03-08
조회수 1195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박상훈

 

시작하며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7. 아이를 위해서는 온 나라의 정치가 필요하다

8. 노동 정치와 정당 정치라는 양 날개

9. 좋은 대표 없이 민주주의 없다

10. 민주주의는 일종의 권력 균형체제

11. 매니페스토 운동 비판

12. 선의가 가진 윤리적 딜레마

13. 정치적인 인간이어야 하는 이유

14. 투쟁하고 싸울 수만은 없다

15. 좋은 타협이 중요하다

16. 민주주의, 불완전한 인간의 작품

17. 민주화의 두 주역 : 노동자와 여성

18. 삭발투쟁을 지켜보며

19.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하지만

20. 팬덤과 인기만으로 안 되는 이유

21. 도덕주의와 현실주의 사이에서

22.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1 : 고대 민주주의

23. 민주주의의 역사적 기원 2 : 현대 민주주의

24. 혼합체제로서의 민주주의

25.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26. 위험한 논리로서 ‘민주 vs 반민주’

27. 허상으로서의 직접정치, 시민정치, 운동정치, 민심정치

28.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① 결사, 조직, 집단

29.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② 입헌주의

30.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③ 민주적 책임성

31.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④ 정치인 없는 민주주의의 길?

32.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⑤ 광장 민주주의와 시민 참여

33.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⑥ 집단지성과 대중지성

34.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⑦ 직접 민주주의 vs 대의 민주주의

35.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⑧ 소통 기술의 발전이 민주주의를 구원할 수 있을까?

36.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와 오해 ⑨ 새로운 민주주의보다 있는 민주주의 잘하자

 마치며



시작하며

 

이 짧은 노트는 일종의 강의 기록이다. 오랫동안 필자는 노동조합의 초청으로 ‘노동자들에게 정치란 무엇이고 또 민주주의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강의를 해왔다. 애초 내가 준비한 강의 노트는 짧았지만, 조합원들의 질문은 그 이상의 풍부한 대화를 가능케 해주었다. 그들 모두에게 감사한다.

 

이 노트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요약하자면 이렇다. 노동운동은 정치와 무관하다거나 정치적이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일수록 정치와 무관한 순수한 노동운동을 강조한다. 하지만 민주주의에서 노동이 정치와 거리가 멀면 멀수록 편협한 관점에 갇히기 쉽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방법으로 여러 시민 집단의 삶에서 제기되는 요구를 개선해 가는 것을 가리키는데, 노동운동이 정치와 거리를 두게 되면 그 가치는 협소한 권리 획득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노동 있는 민주주의’도 중요하지만, 그만큼 ‘민주주의 있는 노동운동’, ‘정치적 이성을 갖춘 노동운동’도 중요하다.

 


1. 노동조합이 존중되는 사회

 

2015년 9월 8일 국내 언론에 흥미로운 국제뉴스 하나가 보도되었다. 미국의 현직 대통령이 노조 가입을 권유하는 연설을 했다는 내용이었다. 미국 노동절을 기념해 보스턴의 노동자협의회가 주관한 행사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한 연설이었는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가족의 생계를 보장할 좋은 직장을 원하는가. 누군가 당신을 든든하게 뒷받침해주기를 바라는가. 나라면 노조에 가입하라고 하겠다. ……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노조가 필요하다는 사실이다.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함께할 때 우리는 더 강하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이 모인 자리라서 이렇게 말한 것일까?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급여에 의존해 가족을 건사하고 아이들의 미래를 준비하는 노동자 시민의 숫자는 어느 나라든 절대다수이기 때문이다. 세계 10대 경제 선진국만 보더라도 전체 시민 가운데 노동자 시민이 차지하는 비중은 평균 90%를 상회한다. 자영업자의 비중이 비정상적으로 많아서 그렇지 우리나라 역시 노동자 시민의 비중은 전체 인구의 75%를 넘는다.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을 결집하는 최고의 조직으로서, 지금까지 이보다 나은 조직화 모델은 존재한 적이 없다. 노동자들을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고 안전을 지켜주었으며, 소득의 증가와 일자리 안정은 물론, 참정권과 사회경제적 평등의 진작에도 노조만큼 큰 역할을 한 것은 없다.

게다가 정치가에게 노조는 선거 승리에 필요한, 가장 많은 ‘표’와 ‘돈’을 가진 존재이다. 오바마는 그가 출마한 2번의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의 경쟁 후보보다 노동조합원인 유권자로부터 2배 가까운 표를 더 얻었다. 노동조합의 정치 후원금은 거의 90% 정도가 오바마에게 몰렸다.

누가 뭐라 하던 현대 민주주의에서 노동자는 가장 중요한 시민 집단이다. 이들이 그에 합당한 자부심을 느끼는 것이야말로 좋은 일터, 좋은 경제, 나아가 좋은 사회, 좋은 정치, 좋은 민주주의를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이다. 버락 오바마의 이야기를 좀 더 들어보자. 그는 이렇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일터란 급여 이상의 곳이다. 일하는 사람들은 톱니바퀴의 톱니가 아니라 그 이상의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이들을 위해 꿈을 간직한 엄마와 아빠들이다. 어려움에 처한 동료를 돕기 위해 교대근무를 해주는 사람들이다. 은퇴 이후의 삶을 위해 저축하려는 사람들이다. 매일 아침 일터에 나오고 늦게까지 일터에 남아 제대로 일을 마쳤는지를 확인하는 사람들이다. …… 더 높은 임금, 공정한 임금, 아이를 위한 보육, 유연한 근무지 선택, 그리고 유급 휴가와 같은 것들은 여성 노동자와 노동자 가족들에게만 좋은 것이 아니다. 기업에도 좋은 것이다. 경제 전반을 위해서도 좋은 것이다.”

 

오바마의 이런 생각은 2008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도 표현된 바 있다. 그때 그는 미국 민주주의를 이끌 민주당의 비전을 말하면서, 자신을 대표로 선출한 민주당의 경제관을 남다르게 표현해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우리는 미국 경제의 튼튼함을 억만장자의 숫자나 󰡔포춘󰡕(Fortune) 지가 선정하는 5백 대 기업의 이윤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이 뇌물을 제공하지 않고도 도전 정신을 발휘해 새로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는 경제, 손님의 팁에 의존해 살아가는 식당 여종업원이 아픈 아이를 돌보기 위해 하루 휴가를 내면서 실직의 두려움을 갖지 않는 경제를 튼튼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노동의 존엄성(dignity of work)이 존중되는 경제를 튼튼하고 강하다고 말한다.”

 

일하는 사람들의 열정이 공동체를 풍요롭게 이끌고 그들의 자존감이 성숙한 민주 사회의 기틀이 될 수 있으려면 노동조합이 필요하다.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하는 노조가 없는 사회, 즉 노동 억압적인 기업이나 노동 배제적인 경제체제에서라면 일하는 사람들의 시민권이 온전히 보장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노동자들만 무권리 상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가족, 미래의 노동자 시민이 될 아이들 역시 시민권을 가질 수 없다.

노동자를 제외한 소수의 사회 구성원만이 시민권을 갖는다면 그때의 시민권은 사회를 넓게 통합하는 보편적 권리가 되지 못한다. 중상층의 계층만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민주주의라 말할 수도 없을 것이다. 오바마의 ‘2015년 노동절 연설’을 마저 들어보자.

 

“노조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어느 직업이나 자부할 만한 것과 존중받을 만한 것이 있다. 다만 여러분들이 매일같이 일하는 동안 자존감을 표현하고 목소리를 내는 데 있어서 노조만큼 도움이 되는 것은 없을 것이다. 나는 노동자의 가정이 마땅히 가져야 할 가치와 자존감이 모든 일터에서 반영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노동자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노동자들의 이익은 물론, 조직할 권리를 위해 나섰던 이유이다. …… 노조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왜 노조가 중요한지를 이해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노동자 친화적인 정당이 집권하면 자신이 노동자라는 사실에 대해 자부심이 높아진다. 유럽이 대표적이다. 그간의 여론조사가 보여주는 것은, 보수적인 정당의 집권기보다 진보적인 정당의 집권기에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노동자라고 밝히는 응답자가 늘어난다는 사실이다. 이 연설이 있던 시기 미국의 노조 조직률은 12%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여론조사 기관인 갤럽은 ‘노조에 대한 미국인들의 호감도’가 56%로 조사되었다고 발표했다. 노조에 대한 호감도 수치는 2009년 48%, 2012년 52%, 2018년에는 61%로 늘었는데, 특히 민주당 지지자들 사이에서 2009년에서 2019년 사이 66%에서 82%로 증가했다. 서유럽 민주주의 국가들에 비해 노동자의 권리 보호가 약한 것으로 알려진 미국조차 최소한 이 정도 수준은 된다.

우리는 어떨까? 스스로 돌아보고 깊이 생각해 보게 된다. 노동조합을 누구나 함부로 공격해도 되는 ‘공공의 적’이 아니라 노동자 시민들의 권익과 열정을 표출하는 자율적 결사체로 존중하는 것은 그 자체로 사회 발전의 중요한 지표다. 노조가 온전한 시민권을 향유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은 좋은 일터, 좋은 경제, 좋은 민주주의를 위해서도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민주주의자가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노조 없는 사회가 아니라 노조의 역할이 기업 차원을 넘어 사회와 공동체 전반으로 선용되는 환경을 만드는 데 있다. 그렇기에 어떻게 해서든 우리 사회도 노동의 존엄성과 노동조합의 역할이 존중되는 방향으로 발전하도록 모두가 노력해야 할 것이다.

 


2. 선명 투쟁보다 지혜로운 투쟁 

  

한 조합원이 강의 때 이런 질문을 했다. 그때의 질문과 나의 대답을 소개하고자 한다.

 

“선명 투쟁과 협상・타협 사이에서 분명한 태도를 보이지 못하면 회색분자로 매도당하기 쉬운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선명함을 고수하고 돌아서면 공허할 때가 많다. 신념의 힘 못지않게 현실적인 성과도 중요한데, 해결해야 할 사안이 등장할 때마다 늘 고민이 된다. 어떻게 해야 할까?”

 

선명함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상황은 아주 드물다. 세상을 진지하게 마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따라서 나는 선명함과 신념의 힘은 자신의 내면을 이끄는 원리로 삼되, 상대가 있고 그의 의견이 나와 다른 현실에서는 현명함과 지혜로움의 가치가 균형을 이루도록 하길 바란다.

어떤 상황에서도 물러서지 않겠다거나 정의파로서 현실을 인정할 수 없다며 늘 화내고 소리치는 사람들은 일견 신념의 힘을 중시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내면은 공허하고 허망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신을 오래 지키고 유지하지 못하고 떠나는 경우가 많다. 어쩌면 그들은 그 이유를 자기 자신이 아닌 것에서 찾는 데 익숙한 사람일지 모른다.

우리는 신념의 힘과 현실적 제약 사이에서 일하는 존재들이다. 회색분자나 타협파로 비난받고 오해될 위험을 감수하지 않은 채 의미 있는 변화를 만들 수 없다. 이 사실을 인정하면 진짜 변화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을 할 수 있다. 화내고 소리 지르고 구호 외치는 것으로 자기 할 일을 다 했다고 여기는 것이 아니라, 내일 아침 좀 더 일찍 나가서 좀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 있는 방안을 준비하고자 노력할 수 있다.

용납할 수 없다고 화내고 소리 지르기만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의로움을 과시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실제 필요한 준비와 노력은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완전한 해결은 현실적으로 어렵다 할지라도, 꾸준하기만 하면 개선할 수 없는 것이 없다고 여기는 사람, 그런 이가 진짜다.

약간의 개선도 꾸준한 노력을 북돋는 기반이 된다면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래야 화내고 떠나는 대신 자신의 과업을 계속해 갈 수 있다. 급진주의자보다 점진주의자가 급진적 변화를 성취할 기회를 누린다. 그것이 민주주의라고 생각한다. 민주주의는 혁명적 방법으로 운영될 수 없지만, 혁명보다 더 깊고 넓은 변화의 가능성을 조금씩 열어갈 수 있는 정치체제다.

 

독일의 정치지도자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이야기를 하고 싶다. 그는 분단된 독일에서 서독 정부의 동방정책을 이끈 사민당 총리를 역임했다. 1974년 총리직에서 물러났지만 1989년 이루어진 독일 통일의 외교적 초석을 놓은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빌리 브란트는 자신의 정치관을 ‘이상과 현실’이라는 말을 통해 인상적으로 표현했다. ‘생각은 이상적으로, 실천은 현실적으로’라고 말했을까? 아마 그랬다면 아무 감동을 주지 못했을 것이다. 상투적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생각은 현실적으로, 그러나 행동은 이상적으로!”

태도를 결정하기 전에 우리는 현실의 조건을 충실하게 고려해서 실제 변화가 가능한 선택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단 결정하고 나면 그 뒤 실천은 맹렬하고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 진짜 신념의 힘을 갖는 지도자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늘 현실에서 알리바이를 찾고 다른 사람을 탓하며 신념의 힘을 허비한다. 그런 사람은 늘 말만 거창할 뿐 진짜 문제 앞에서는 뒷걸음질하는 지도자다.

 

변화의 정치를 이해하는 사람은 타협적인 사람이 아니라 타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들이야말로 신념의 힘을 가진 ‘현실적 이상주의자’이고 동시에 ‘이상적 현실주의자’다. 지도자에 필요한 이성과 열정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종류의 것이 아닌가 한다.

  

 

3. 더 사회적이고 더 정치적인 노동운동을 바라며

  

노동운동에 오랫동안 복무한 친구의 고민을 들은 적이 있다. 조금 긴 내용이지만, 그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 보면 대충 이렇다.

 

“한국의 노동운동도 그간 많은 발전을 했다. 아직도 더 개선되어야 하겠지만, 노동조합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수용 정도도 커졌다. 임금을 비롯한 노동자의 권리가 신장되었고, 결사와 교섭, 쟁의의 차원에서 노동운동의 힘과 영향력도 발전해왔다.

비단 노동운동 내부에만 국한된 현상도 아니다. 한국의 민주화를 노동운동 없이 설명하기는 어려우며, 민주화 이후에도 민주주의의 사회적 가치를 확산하는 데 있어 큰 기여를 했다. 유급 휴가의 범위를 넓히고, 연금이나 최저임금을 포함해 복지나 사회적 시민권 의제를 확산하는 데도 노조의 기여는 컸다.

분명 노동자의 권리를 자의적으로 침해하거나 이념적으로 불온시하고 몰아붙이기만 하던, 과거 권위주의 시대의 노동 현실은 많이 개선되었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35년을 지나고 있는 시점에서 생각해 볼 때, 한국의 노동운동은 여전히 민주주의로부터 합당한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노동운동도 사회발전과 정치발전을 위해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역할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 노동과 사회, 노동과 정치 사이에는 여전히 깊은 심연이 가로놓여져 있는 느낌이다.

노동 문제야말로 여전히 많은 사람이 언급하기 불편해 하는 대표적인 이슈다. 스스로 민주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노동 문제는 다루기 어려워한다. 언론을 포함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노동조합을 경원시하거나, 과격한 행동을 고집하는 반(反)사회적 집단으로 이해한다.

반대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정치를 우습게 여길 때가 많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정치의 세계는, 적법한 시민의 대표로서 주권을 위임받아 공적 결정을 내리는 곳임에도 그러하다. 그보다 계급 운동의 가치를 앞세우며 공장과 거리에서 비타협적 투쟁을 전개하는 것을 우선시하는 사람들도 많다.

‘민중 궐기’와 ‘직접 정치’를 내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 현실에서 이런 접근은 일회성 투쟁과 행사 위주의 활동에 그칠 뿐이다. 그것이 가져온 부작용도 컸다. 배타적 투쟁의 이미지만 갖게 한 동시에, 노동운동이 마땅히 가져야 할 공동체적 기반을 꾸준히 확대하려는 노력을 경시하는 분위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노조가 민주주의 발전의 중심 기구로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는 것도 문제지만, 다른 한편 민주정치와 양립할 수 있는 노동운동을 확대・발전시키는 과제 역시 지체되고 있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노동 문제 앞에서 한국 민주주의는 무기력하고, 노동운동은 민주주의와 정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는 현실, 문제의 복잡성은 바로 여기에 있지 않나 싶다.”

 

그가 말한 대로, 노동조합은 민주주의의 발전을 견인하고 공동체의 통합에 기여하는 우리 사회의 중심 행위자로 발돋움해야 한다. 노동 문제를 혁명이나 계급투쟁의 관점이 아닌 민주주의의 문제이자 공동체의 기초를 튼튼히 하는 문제로 다루는 실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본다.

마찬가지로 정당과 정치가들이 갖춰야 할 소양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노동 문제를 민주주의의 중심 과제로 이해하고 다루는 실력에 있다고 본다. 진보뿐만 아니라 보수도 노동 문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잘 다뤄야 한다. 일하는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다면 세상 어느 정당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없다. 스웨덴에서 중도와 보수정당이 연합해 선거에 나서 집권한 적이 있는데, 그때 그들은 “우리가 진짜 노동자를 위한 당!”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노동 문제는 민주주의의 실질적 내용을 채우는 것임은 물론 모든 인간 활동의 기초 가운데 기초다.

신자유주의(neo-liberalism)라고 불리는 경제 독트린이 있다. 1970년대 후반부터 정부 차원의 모든 인위적인 경제 개입을 비판하면서 ‘자유 시장’의 논리를 설파했다. 해고 요건을 완화하는 노동 유연성, 공공 부문의 민영화, 탈규제와 복지 축소 등을 강조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말로는 시장의 탈정치화를 주장하지만, 정부가 가진 공적 재분배 기능을 인위적으로 축소하고 나아가서는 노동조합의 역할을 의식적으로 약화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지극히 정치적인 의도를 갖는 경제 독트린이 아닐 수 없다.

경제 독트린의 하나로서 신자유주의가 낳은 부정적 영향 가운데 하나는 ‘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가치’ 내지는 ‘노동의 존엄성이 갖는 의미’를 심각하게 훼손한다는 데 있다. ‘노동 유연성’(labor flexibility)이라는 그 부드럽고 유연한 말이 실제로 가져온 것은 비정규직 양산과 실업 증가였다. 그로 인한 고용 불안과 빈곤은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가 아니라 노동비용의 축소를 가능하게 해주는 정상적 시장 요소로 간주했다.

이렇듯 상당수의 노동자가 열심히 일할 기회도 갖지 못하는 잉여 인간이 되면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 대신에 “일하는 것이 특권이자 감사해야 할 일”이라는 새로운 노동 윤리가 만들어졌다. 이보다 더 비인간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제 독트린은 지금껏 없었다.

이를 신자유주의라고 하는 외적 영향 때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사태의 절반만 보는 것이다. 나머지 절반은 신자유주의의 영향을 제어하고 완화하는 데 있어서 정치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왜 민주주의를 옹호하는가? 민주주의 자체의 그 어떤 숭고한 뜻이나 이념을 이야기하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오히려 그런 접근이 위험할 때도 있다.

예를 들어 정치를 ‘민주 대 반민주’의 싸움으로 보게 되면, 기대와는 달리 사회가 양극단으로 분열되는 결과를 피할 수 없다. 민주주의가 특정의 급진 이념과 동일시되는 방식으로 해석되면 대개는 공허한 구호나 주장으로만 이어질 뿐, 다수의 보통 사람들이 직면해 있는 삶의 구체적 현실은 생기 없는 모조품으로 전락해 버릴 때가 많다.

민주주의와 정치는 어떻게 작동될 때, 노동자 시민을 포함해 보통의 평범한 시민들을 위한 만인의 체제가 될 수 있을까?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같은 민주주의 국가들 사이에서도 계층 간 평등의 정도가 큰 나라가 있고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신자유주의가 미친 영향을 크게 받은 나라도 있고 적게 받은 나라도 있는데, 무엇이 그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가장 강력한 설명의 하나는 기업 운영-노사관계-정당 체계-정책 결정 과정에서 노동의 시민권이 얼마나 폭넓게 보장되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노동과 민주주의 사이의 관계를 조사한 여러 학자가 강조하듯이, 노동자들의 이익과 열정을 대변하는 노조는 물론, 그런 노조와 협력하는 정당의 힘이 강한 나라일수록 계층 간 불평등 정도는 작고 빈곤율도 낮다.

투표율은 어떨까? 노동의 대표성이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큰 나라일수록 투표율도 높다. 또한 그럴수록 범죄율도 낮고 사회적 약자 집단에 대한 보호의 수준이 높다. 시장 경쟁에 내몰리는 정도도 낮고 규제 없는 금융 개방에 대한 방호벽은 높으며 그 결과 경제체제도 안정적이다.

노사분규가 증가하고 급진적 노동운동이 출현할 가능성은 늘지 않을까? 아니다. 서유럽 여러 나라들에서 볼 수 있듯이, 노동의 권리가 폭넓게 인정될수록 전체적으로 높은 수준의 산업 평화가 유지된다. 정치학자는 물론 사회학자들도 널리 인정하듯이, 노동의 참여와 관심이 협소한 물질적 이익을 넘어 정치・사회적으로 확대될수록 노동운동의 탈급진화 내지 온건화 경향이 커지는 것은 하나의 법칙에 가까운 현상이다.

노동의 힘이 기업 안에서는 물론 사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커지면, 자신만의 배타적 이익 추구 성향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 대한 책임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들이야말로 왜 우리가 노동 배제적인 민주주의가 아니라 노동 참여적인 민주주의를 지향해야 하는지를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노동의 시민권에 폭넓은 기초를 둘 때에만 민주주의는 안정되고 또 인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다. 노동운동 역시 자신의 관심과 역량을 기업과 현장이라는 좁은 범위 안에 가둬두지 말고 더 정치적인 영역으로 확대해 가야 할 것이다. 반정치적, 혹은 비정치적 노동운동은 신자유주의의 영향력에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4. 조합원은 자치 능력이 있을까

 

오늘 다룰 조합원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나 노동운동도 보호자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매우 근본적인 문제제기였다.

 

“민주주의는 일종의 시민 자치에 기초를 둔 정치체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노동조합만 보더라도 일반 조합원이 과연 노조를 운영할 자치 능력이 있는 것일까 하는 회의가 들 때가 있다. 학교에서도 학생 자치를 말하지만 사실 교사와 같은 보호자 내지 가디언(guardian)의 역할이 필요한 것 아닌가?”

 

로버트 달(Robert Dahl)이라는 정치학자가 있다. 20세기 최고의 민주주의 이론가로 평가받는 대학자이다. 1915년 생으로 2014년까지 거의 1백 년의 인생을 살면서 평생 민주주의에 대한 저서를 출간하고 강연을 했다. 청소년 시절 학비를 위해 부두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노동운동을 경험했다. 이때 ‘노조원 아저씨들’을 지켜보면서 그들이 민주주의를 운영할 책임 있는 주권자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민주주의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수색대에 배치가 되어 유럽 전투에 참여했다. 깊은 밤 매복 작전을 수행하던 중에 ‘만약 운 좋게 살아 돌아간다면 민주주의 연구자가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그는 민주주의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정치체제라고 정의한다. 중요한 것은 이때 ‘평범한 보통 사람의 체제’라는 표현의 의미가, ‘능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실 보통의 시민이 가진 능력은 똑같지 않다. 근본적으로는 정치체제를 직접 운영하거나 통치할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거기에 있지 않다. 민주주의에서라면 평범한 보통의 시민을 포함해 누구의 의견도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는 데 있기 때문이다. 능력과 무관하게 만인은 평등하게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에 민주주의는 기초를 두고 있다.

 

물론 민주주의도 능력과 성과를 필요로 한다. 하지만 그것은 시민 개개인의 능력과 성취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는 통치 능력을 갖는지 의심스러운 평범한 보통의 시민들에게도 동등한 시민권을 갖게 하는 민주주의가, 귀족정이나 군주정 나아가서는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보다 능력/성취의 면에서 더 나은가 그렇지 않은가에 문제의 핵심이 있기 때문이다.

귀족정이나 군주정은 모두 최고의 통치 능력을 가진 사람에게 정치체제의 운영을 맡기는 체제를 말한다. 권위주의나 전체주의 역시 국가 목표나 민족적 이상, 나아가 역사 발전의 법칙을 이해하고 있는 소수의 엘리트나 전위 집단이 체제 운영을 맡는 체제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통치자의 능력에 의존하는 이들의 정치체제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에 비해 더 우월한 성취나 능력을 보였을까?

그렇지 않다. 경제적으로 더 발전되고 사회 문화적으로 더 풍요로운 성취를 이룬 쪽은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군사적으로도 처음에는 전체주의 국가에게 밀렸지만 결국 두 차례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것은 민주주의 국가들이었다. 예술적인 성취나 새로운 기술 개발을 포함해 문명적 기준을 더 많이 만족시킨 쪽도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자유롭고 공정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든 쪽도 민주주의 국가들이다.

조합원이나 청소년, 학생들이 노조나 학급을 운영하면서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을 추구할 수도 있고, 편협한 감정을 절제하지 못해 노조 안에서든 학급 안에서는 혼란과 상처를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노조가 있는 게 낫다. 교사나 교육 당국의 위계적 명령에 순응하는 학교보다 학생들의 발언권에 수용적이고 개방적인 학교가 낫다. 학생 자치도 좀 더 잘할 방법을 찾아야 하고 노조 안에서 조합원들의 책임 의식도 커지게 할 지혜도 발휘해야 하겠지만, 조합원이든 학교 구성원이든 그들의 능력과 자격을 준거로 노동조합과 자치의 문제에 접근할 수는 없다.

노동조합의 활동이 자유롭고, 학생들의 자율적인 선택을 바탕으로 학교를 운영하는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도 무책임하고 무질서한 조합원과 학생들 때문에 골머리를 썩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노조 없는 경제, 학생 자치 없는 교육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노조가 있다고 회사 생활이 행복해지고 학생 자치가 허용된다고 평화로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더 좋은 노동조합, 더 좋은 학급자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자유로운 참여와 그에 따르는 책임을 어떻게 양립시킬 것인지, 개인 의견의 자유와 집합적 결정의 권위를 병행 발전시킬 수 있는 조직 문화와 학급 문화를 발전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 이상사회가 아니라 이전보다 좀 더 개선된 사회나 조직 문화를 일궈가는 데 있을 뿐이다. 그런데 그게 가치가 있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만이 희망을 품고 살 수 있다. 헛된 목표를 추구하지 않고, 변화 가능한 범위를 넓혀가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

 


5.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

  

현대 민주주의는 자본주의라고 하는 생산 체제 위에 서 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체제에서 민주주의는 실현되지도 살아남지도 못했다. 사회민주주의(social democracy)는 있어도 사회주의적 민주주의(socialist democracy)라는 표현을 현실에 적용할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이다. 자본주의의 발전은 역사상 그 어떤 생산 체제보다 경제적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그것은 계층 간 불평등의 원리에 기초를 둔 것이자 인간 사회의 공동체적 통합을 위협하는 부정적 효과를 동반했다.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를 구상하고 조화로운 공동체를 소망하더라도, 자본주의가 동반하는 불평등한 계층 질서와 갈등 관계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하는 문제를 빼고 민주주의의 미래를 말하는 것은 공허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자본주의 폐지 없는 민주주의 없다’며, 자본주의 철폐하자고 말하는 것 또한 허망하다. 진보나 좌파 사이에 자본주의 이후의 대안적 생산 체제에 대한 합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자본주의는 하나가 아니라는 점이다. 영미식 자본주의와 스칸디나비아 자본주의 사이에 차이는 크다. 반노동적 자본주의와 노동을 통합하는 자본주의 사이에는 말할 수 없이 큰 유형 차이가 있다. 자본주의가 고정된 체제인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안에도 여러 유형이 있을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방법으로 자본주의의 변화나 수정 또한 불가능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간의 역사를 통해 말한다면, 사회주의나 공산주의 경제체제보다 자본주의를 민주적 가치에 맞게 조정, 조율해 가는 것이 더 낫다고 볼 수도 있다. 자본주의도 고쳐 쓸 수 있다고 믿어야 민주주의도 잘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노동은 가장 중요한 생산자 집단이다. 그 수에 있어서나 조직적 잠재력에 있어서 그에 견줄 만한 세력은 없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어떻게 이해되느냐에 따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내용과 질은 크게 달라진다. 노동을 축소해야 할 생산 비용으로 간주하고 참여로부터 배제하려 할 때 그것은 단순히 노동만 배제하는 것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사실상 사회 전체를 배제하는 것과 같은 부정적 효과를 낳는다. 사회 구성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키는 가장 중요한 인간 활동이 존중되지 않는 환경에서 그 어떤 가치 있는 것들이 자라날 수 있겠는가.

노동을 배제하려는 사람들의 심리가 온전할 수도 없다. 노동자들의 권리 주장을 좌경용공이나 반사회적 행위로 몰아가는 비이성적 노동 억압의 논리가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 논리 속에는 노동으로 먹고사는 사람을 멸시하고 천대하면서 못사는 사람을 멀리하는 심리가 잠재되어 있다. 그런 심리가 지배하는 한, 어떤 사회도 구성원들 상호 간의 인정과 신뢰, 믿음과 같은 공동체적 가치나 덕목을 키워갈 수 없다. 이런 환경에서는 인간 사회가 필요로 하는 윤리적인 토양이 척박해질 수밖에 없다.

 

가끔 “민주주의가 밥 먹여주느냐?”며 따져 묻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잘 생각해 보면 민주주의가 밥 먹여 줄 수 있어야 한다. 어느 정당이 집권하느냐에 따라 경제적 분배 효과가 계층별로 달라질 때, 민주주의는 안정된다. 그 경우 어느 사회집단이든 정치 참여의 욕구가 자신들의 필요로부터 발생하며, 결과적으로 개인과 민주주의 사이의 결합이 튼튼해지기 때문이다.

유럽의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당 정치의 이념적・계층적 분화가 작은 미국조차 민주당이 집권했을 때와 공화당이 집권했을 때 계층별 소득분배가 뚜렷하게 다르다. 미국 ‘프린스턴 대학 민주정치연구센터’의 창립자인 래리 바텔스(Larry M. Bartels) 교수의 책 󰡔불평등 민주주의󰡕에 따르면, 1947년에서 2005년 사이에 미국 인구의 20퍼센트를 차지하는 가난한 빈곤 계층의 소득 증가율이, 공화당 집권기에 비해 민주당 집권기에 6배나 더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의 문제는 정치와 사회 사이의 이런 유의미한 함수관계를 만들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일하는 사람들의 권리와 삶에 기반을 두지 못하는 정치를 민주주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없다. 전체 노동자의 절반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의 눈으로 볼 때, 정치를 누가 하든 자신들의 삶이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고 한다면, 민주주의는 참여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말이 되지 못할 것이다. 퇴직한 노동자들, 나이든 노인 시민들의 절반이 빈곤에 시달리고 고독사를 자신의 마지막 운명이라고 여기게 된다면 민주주의는 그 가치를 잃고 만다. 젊은 노동자들이 고용과 소득에 대한 불안 때문에 결혼을 포기하고, 가임 여성들이 생활고 때문에 출산과 양육을 주저하는 사회에서 민주정치의 기능은 그 근본으로부터 회의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한국 민주주의를 위기로 몰고 가는 주범은 다른 것이 아닌, 노동 배제적이고 하층 배제적인 사회, 그리고 그 위에 서 있는, ‘노동 없는 정치’가 가난한 보통 사람들을 절망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어느 사회든 노동 문제는 가장 인간적이고 가장 공동체적인 문제다. ‘노동 윤리’ 내지 ‘일에 대한 헌신’이 없는 공동체가 풍요로워질 수는 없을 것이다. 함께 땀 흘려 일하는 보람을 향유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목적 있는 삶을 살고자 하는 특별한 피조물로서 우리 인간에게 부여된 가장 원초적인 소명이다.

 

자본주의가 있는 한 아무 의미가 없다는 무책임한 주장보다 자본주의를 노동 친화적인 방향으로 수정하고 조정해 가는 접근이 훨씬 더 민주적이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6. 활동가가 되고자 한다면

  

과거에는 학생운동 출신이 사회 모든 곳에 활동가를 공급하는 수원지였다. 그 역할이 끝나면서 쟁의가 있는 현장에서 새로운 활동가들이 성장하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받은 조합원 질문에 답했던 내용을 소개하고자 한다. 질문을 이러했다.

 

“조합원들이 노조 활동가나 지도자로 성장하려면 어떤 자질을 갖춰야 하고 그런 자질은 어떻게 기를 수 있을까? 정치 분야에서도 지도자나 출마자를 위한 정치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들었다.”

 

교육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성장의 잠재력을 키우고 자질을 향상하는 데 있다. 조합원을 대상으로 한 정치 교육 역시 다르지 않다고 본다. 다만 교양으로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끌고 조직을 책임지는 데 필요한 것을 갖추는 일은 조금 다른 차원의 문제다.

지도자는 교육될 수 있을까? 정치철학의 오래된 질문인데, 대개는 타고난 재질을 강조하면서 가르쳐지기 어렵다고 여기는 정치철학자가 많다. 어떤 자질이 정치가나 지도자에게 필요한가에 대해서도 합리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그래서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카리스마’라는 표현을 썼다. 그 의미를 잘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선, 합리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분명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특별한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은 목소리도 작고 태도는 유순하지만 사람들에게 강한 신뢰감을 준다. 어떤 사람은 강한 웅변 능력을 통해 사람들을 추종자로 만들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스마트한 중재자의 매력을 통해 사람들에게 기대감을 갖게 하기도 한다.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를 일률적으로 말하긴 어렵지만 어떤 집단이든 지도적 인물들의 역할이 있다. 그가 앞장서면 뭔가 일이 이루어지고 변화와 개선을 만들 것 같은 힘을 가진 존재가 분명 있다.

 

남이 가르쳐주기 어렵다는 것은, 스스로 그런 신뢰감과 개성적 힘을 길러야 한다는 뜻이다. 리더는 스스로 성장한다. 과거 권위주의 시기에는 이른바 투쟁을 통해 리더가 만들어졌지만, 민주주의에서 그런 일은 점점 어려워진다. 스스로 리더로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은 독서하고, 사색하고, 토론해야 한다.

독서는 나와는 다른 생각이, 내 사고의 범위 안을 더 깊고 넓게 채울 기회를 제공한다. 사색은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화함으로써 스스로의 인격성과 정체성을 형성하게 한다. 토론은 내면의 힘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성숙시키는 기회와 가능성을 준다. 정치를 포함한 모든 지도적 행위가, 불가피하게 표출될 수밖에 없는 갈등과 차이 속에서 협력을 만들어내는 인간 활동이라면 다름과 낯섦에 익숙해져야 한다.

정치가나 지도자가 가져야 할 최고의 미덕은 나와 다른 사람임에도 불편해하지 않는 것, 그 속에서 일을 도모할 수 있는 심리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서, 사색, 토론의 능력이 효과적으로 발휘되게 하려면 갖춰야 할 인간적 풍모가 하나 더해져야 한다고 본다. 그것은 웃음이 좋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다른 생각, 다른 사람을 만났을 때 그의 마음을 무장 해제시키고 당신의 생각이 수용될 수 있게 하는데, 좋은 웃음만큼 좋은 무기는 없다. 그래서 나는 웃음이 좋지 못한 사람은 정치를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지도자가 되려 해서도 안 된다고 본다.

정치가를 포함해 모든 활동가나 지도자에게 웃음은 너무 중요하다. 절망과 비극 속에서도 유머로 연설을 시작할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다. 어떤 상황에서도 시민을 웃게 만드는 사람이 좋은 정치가다. 지도자라면 자신의 웃음이 좋아야 할 것이다. 이 모두가 이견 속에서 일해야 하는 정치가, 지도자의 숙명이다.

 

독서하라, 사색하라, 토론하라, 그리고 웃음을 잃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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