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없는 민주주의 - 3

공식 관리자
2022-02-17
조회수 613

정치 없는 민주주의

 박상훈・김성희

 

 <대화를 시작하며> 정치 없이 존립 가능한 사회는 없다


1장. 정치 실종 시대의 11가지 모습

1. 법률가 정치 전성시대

2. 정치 안 하고 군림하는 대통령

3. 정치가 대개조,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

4. 반대할 수 없는 적폐 청산

5. 처벌과 척결의 정치

6. 여론 아첨 정치

7. 열성 지지자 동원 경쟁

8. 검찰개혁을 앞세운 정치

9. 죽음을 부르는 정치

10. 매일 국민투표 하는 민주주의

11. 독선과 오만이라는 정치의 적

 

2장. 정치 몰락을 가져온 국민주권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운명은 좋은 정치인에 달렸다

2. ‘국민주권 민주주의’가 정치의 몰락을 낳았다

(1) 예기치 않은 선택 : 촛불 혁명과 국민주권 민주주의

(2)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이유

(3)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파멸적 귀결

3. 민주공화국,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나

(1) 공화정이면서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길

(2) 정제와 확대의 원리

(3)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

(4)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의 원리

 

3장. 정치, 정치답게 제대로 하자

1. 시민 분열의 양극화 정치 대신 연합 정치의 길 열자

2 ‘대통령 뽑기 민주주의’에서 ‘좋은 정치 가능한 민주주의’로 바꾸자

3. 다원 민주주의의 길을 넓히자

4. 청와대 정부 개혁, 모든 일의 전제임을 분명히 하자

(1) 청와대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반하기 때문이다

(2) 청와대 정부로는 큰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3) 큰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을 혹사시키고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4) 정부조직법대로 하자고 해야 한다

5. 국회도 정당도 변해야 한다

(1) 국회는 입법 공장이 아니다

(2) 권력 기관화된 정당의 모습도 돌아봐야 한다

(3) 정당 책임 정치의 길로 가야 한다

(4) 인재 영입보다 인재 육성하는 당이 되어야 한다

(5) 국민경선과 캠프정치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6) 정당이 선거와 정권 인수를 주도해야 한다

6. 대통령제, 그 기원으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1) 대통령이 문제다

(2) 대통령제는 어떻게 탄생했나

(3)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과 공화주의 원칙

(4) 대통령제는 강한 정부를 위한 게 아니다

(5) 대통령제 문제보다 대통령직 수행 문제를 말해야 한다

7. 대통령직의 민주적 운영을 약속해야 한다.

(1)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 다른 정부 운영을 필요로 한다.

(2) 대통령제, 빠르고 강한 결정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3) 1987년 헌법, 5년 단임 대통령제 정부를 만든 이유를 존중하자

(4) 대통령직 인수 방법부터 달리 하자

(5) 책임 정부가 민주 정부다

 

<대화를 마치며> 다르게 살고, 느리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두 대화자 소개


박상훈과 김성희는 국회로 출근한다. 박상훈은 국회미래연구원의 초빙연구위원으로 있다. 자신을 ‘구식 정치학자’라고 생각하는 정치학자다. 정치에 있어서 잘 변하지 않는 것, 오래 가는 특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정치와 노사관계를 현대 민주주의를 이끄는 양날개로 여긴다. 김성희는 21대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왔다. 독일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관심이 있고, 이를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좀 더 나은 한국 정치를 조망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김성희와 박상훈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사단법인) 정치발전소>를 만들고 이끌어왔다. 김성희는 상임이사를, 박상훈은 정치학교장을 맡아서 정치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치학의 지혜를 강의나 토론의 형태로 공유하는 활동을 같이 해왔다. 회원들과 함께 독일 정치기행, 일본 정치기행, 이탈리아 마키아벨리 정치여행을 다녀왔고, 미국 민주주의 기행을 준비하던 중에 감염병 팬데믹 때문에 잠시 멈춘 상태다. 하지만 좋은 정치에 대한 토론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하고 있다.




2장. 정치 몰락을 가져온 국민주권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운명은 좋은 정치인에 달렸다

 

“김) 정치, 특히 민주 정치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좀 더 심화시켜보자. 정치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는데, 사회적 노동 분업 구조 속에서 정치의 부분적 기능을 말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다른 사회 기능과는 달리 정치가 왜 특별한 인간 활동인지에 대해서부터 이야기해보자.”

“박) 우선 인간이 천사라면 정치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천사를 데려와 정치를 맡길 수만 있으면 의회나 정당, 정부 없이도 통치는 가능할 것이다.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다. 국가 없고 정부 없고 정치 없는 삶은 우리의 선택이 될 수 없다. 그런 삶은 오래전 토머스 홉스가 이야기한 그대로다. 정치 없는 자연 상태에서의 인간 삶이란 ‘외롭고 궁핍하고 냄새나고 잔인하며, 게다가 짧기까지’ 하다. 인간은 정치적인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었다.”

“김) 모든 개인이 자유롭고 평등하고, 또한 그 어떤 외적 제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연 상태에서 평화로운 인간 삶은 실현될 수 있지 않을까?”

“박) 불가능하다. 자연인처럼 고립된 삶을 산다면 모를까, 사회를 이루어 사는 순간 좋은 질서를 만드는 문제는 인간의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누군가가 노동을 해서 얻은 결과를 힘과 교활함으로 빼앗으려는 인간들이 승자가 되는 것을 막으려면, 모두에게 구속력을 가진 정당한 공권력이 있어야 한다. 법과 규칙을 정하고 이를 운영, 집행하는 정부가 있어야 한다.”

“김)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있다. 하지만 법 없는 사회는 존재할 수 없다. 법이 제대로 작동하는 사회라야 법 없이 살 수 있는 사람도 안전해지고 또 많아진다는 뜻인 것 같다. 법 이외에 다른 방법의 위해나 제재, 폭력이 불가능해야 자유로운 인간 삶이 가능하다. 좋은 정치, 좋은 정부를 위한 끝없는 노력은 불가피하다. 그렇다면 좋은 정치, 좋은 정부의 본질은 무엇이라고 규정할 수 있을까?”

“박) 피치자의 동의다. 동의 없는 통치, 즉 세습과 혈통의 원리로 이루어지는 통치는 피치자의 동의와 무관하게 이루어진다. 그런 경우 피치자는 우연히 좋은 왕이나 군주가 들어설 때만 좋은 운명을 기대할 수 있다. 동의를 전제로 하지 않는 통치에서는 주체적인 행위 윤리를 세울 수 없다. 최소한 피치자로서는 그럴 수 없다. 좋고 나쁨의 도덕론이나 윤리 논쟁은 통치 집단 안에서만 따져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화정이나 민주정은 특별했다. 피치자의 관점에서 자치의 원리를 말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김) 현대적 정치 언어로 말하면, 무정부보다 우리가 동의할 수 있는 정부를 만드는 것이 자유와 생명을 지키는 현실적 최선이라 여기게 된 것에서 공화정이 시작된 것 같다. 그리하여 세습과 혈통의 원리가 아니라 선출의 원리로 시민 대표를 뽑고 그들에게 통치권을 맡기게 되었다. 그뒤 재산과 성별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시민이 참정권을 행사해야 한다는 요구가 제기되면서, 공화정을 넘어 민주정으로의 긴 여정이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시민의 의견은 하나일 수 없다는 생각에서 야당이 등장하게 되었고, 복수의 정당이 입법부를 운영하고 집행부를 번갈아 책임을 맡는 변화도 있었다.”

“박) 그 과정에서 입헌주의도 자리를 굳건히 잡았다. 민주적 결정이라 해도 소수의 권리를 위협할 수 있기에, 개인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입법은 할 수 없게 한 것이다. 민주주의 국가의 헌법은 한결같이 권리장전(Bill of Rights)의 역할을 한다. 기본권 보장 문서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좋은 정부, 좋은 통치, 좋은 정치라고 부르는 것은 이런 여러 생각들의 혼합물이라 할 수 있겠다.”

“김) 현대 민주주의 체제는 민주주의뿐 아니라 민주주의 아닌 원리들에 의해서도 작동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달리 말하면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만이 아니라 공화주의, 자유주의, 입헌주의, 다원주의 등등의 혼합체제로 운영된다는 것 아닌가?”

“박) 많은 이들은 그런 여러 원리들과 무관한 순수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를 생각한다. 순수 민주주의자는 국민, 민심, 시민의 의지에 따라 결정하면 민주주의라고 여긴다. 순수 민주주의는 허점이 많을 뿐 아니라, 지나치게 단순하고 또 위험한 정치 원리다. 대중 선동의 폐해를 막기 어렵다. 집단적 증오와 적대를 동원해 성공하는 정치가의 출현 가능성도 막을 수 없다. 집단으로서 시민과 대중의 역할이 늘 좋은 것도 아니다. 인간의 집단행동은 무모한 자신감을 동반할 때가 많다. 이성이나 합리성보다 열정이나 정념에 휘둘리기 쉽다. 개인일 때보다 집단 속에 있을 때 인간은 더 쉽게 흥분하고 더 대담해진다.”

“김) 시민 집단으로서 대중은 좋은 민주주의의 토대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전체주의나 포퓰리즘은 대중적인 현상이다. 광범한 시민의 지지나 대중 운동을 동반하지 않는 전체주의나 포퓰리즘은 없다. 그런 의미에서 대중지성이나 집단지성에 대한 과도한 옹호도 위험할 때가 있다. 무엇보다도 그런 식의 민주주의론에는 정치의 역할이 들어설 공간이 없다. 당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런 것이 아닌가 한다.”

“박) 시민과 대중이 민주주의의 토대인 것은 맞지만, 그것으로 민주주의가 다 되는 것은 아니다. 시민 민주주의나 대중 민주주의만으로는 민주주의도 잘 안 된다. 정확히 말해 민주주의의 보루는 정치에 있다. 시민의 마음 상태가 민주적이냐 아니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정치다. 시민 개개인이 사적 이익과 욕구를 추구해도 얼마든지 민주주의를 잘할 수 있다. 시민이 자신의 적법한 대표를 선출하고 운용하는 절차와 과정이 좋으면 민주주의, 잘할 수 있다. 시민의 역할은 자신이 직접 정치를 하는 게 아니라, 정치할 동료 시민을 잘 선택하는 데 있다. 선출된 시민이 정당과 국회 같은 정치 제도나 절차, 규정을 책임 있게 운영하고 통제하는 것에 비례해 민주주의는 그것이 지향하는 가치에 가까운 성과를 낼 수 있다.”

“김) 시민의 대표이자 시민의 일부인 정치가들이 선출직의 권위를 가지고 비선출직인 공무원 내지 국가관료제를 지휘하는 능력에 비례해 현대 민주주의는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다. 그때에야 비로소 시민권이라 불리는 민주주의의 원천은 공허한 구호가 아니라 실제의 공공정책으로 구현되는 토대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박) 민주주의는 좋은 정치의 함수다. 정치가 좋아야 민주주의도 좋다. 정당과 국회, 대통령의 기능과 역할이 좋은 정치인들에 의해 구현되지 않으면 좋은 시민도, 좋은 민주주의도 있을 수 없다.”

“김) 민주주의에 대한 엘리트주의적 시각이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박) 민주주의는 엘리트주의가 아니고 그렇다고 반(反) 엘리트주의도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엘리트와 시민이 협력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통치하는 체제가 아니다. 시민이든 민중이든 인민이든 그들은 통치하지 못한다. 정부를 운영하고 공공정책을 결정하고 국가 예산을 다루는 것은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 대표들에게 맡겨진 일이다. 시민에 의해 선출된 자를 정치 엘리트라고 한다. 엘리트(Elite)란 선발된 자(Elect)와 어원이 같다. 민주주의는 시민이 선출한 시민의 대표로서 이들 정치 엘리트들에 의해 운영되는데, 어떤 엘리트가 그 역할을 맡아야 할지를 시민이 결정하는 체제다. 복수의 정치 엘리트 집단이 정당으로 나뉘어 통치권을 두고 경쟁하는 체제가 민주주의다. 그들이 법을 만들고 집행하고 적용하면서 권력의 자의성을 제어하고 상호 책임을 균형있게 부과할 수 있어야 민주주의다. 시민의 다양한 의견을 조직하고 표출하고 대표하면서 공익이 무엇인지를 둘러싸고, 정치 엘리트들이 더 넓고 더 깊게 숙의해 ‘합의된 변화’를 이끌어야 민주주의다. 엘리트주의냐 반엘리트주의냐 같은 허구적 대립보다 정치 엘리트 육성론이나 정치인 선용론이 훨씬 더 가치 있는 민주적 접근이다.”

“김) 한동안 많은 이들이 정치가나 정당의 역할을 줄이는 대신 시민의 직접 참여를 확대하는 것을 민주주의라 오해해왔다. 정당도 직접 민주주의 개혁을 하겠다고 하질 않나, 대통령이 국회를 압박하는 국민서명운동에 참여하질 않나, 청와대가 입법과 사법의 영역까지 국민 직접 청원을 받는 일까지 나타났다. 국민을 앞세우고 직접 민주주의를 강조할수록 정치가 나빠졌는데, 이런 일은 민주주의를 잘못 이해한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보는 듯하다.”

“박) 국민참여, 시민참여,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운 정치의 결과는 참혹했다. 서로 마주 앉아 공동체의 문제를 풀어가는 정치는 사라졌다. 여론에 직접 호소하고 지지자를 직접 동원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여기에 호응한 당파적 시민들은 서로 무례해도 좋다는 듯 행동하기 시작했다. 의견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경멸하는 일에도 익숙해졌다. 자신의 옳음만 강변했다. 서로의 차이와 다름들 사이를 채워야 할 협동의 가능성도 줄었다. 자신을 돌아보며 지나침을 절제하는 ‘반성적 균형’의 힘이 발휘될 수도 없었다. 모두가 화가 나 있고, 모두가 억울한 사회가 되어 버렸다. 이른바 직접 정치는 시민과 사회를 깊이 분열시켰고 적대와 증오의 아픈 상처를 남겼다.”

“김) 정치는 좋을 때만 가치가 있다고 했는데, 좋은 정치는 정치가의 좋은 역할 없이 실현될 수 없는 것 같다. 정치가의 좋은 역할이 사라지는 것만큼 인간 사회를 위태롭게 하는 것은 없다. 시리아나 예멘 같은 나라들의 사례에서 보듯, 정치 대신 전사의 윤리가 지배하는 곳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는 존재할 수 없다. 생각이 다른 동료 시민을 강박하려는 열정이 제어되지 않으면 정치 대신 전쟁의 논리가 커진다.”

“박) 민주주의라고 해서 다를 게 없다. 민주주의는 물리적 압제나 폭력을 줄이는 대신, 타인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은 욕구를 키우는 문제가 있다. 따라서 정치가들이 시민의 대표로서 시민들의 다양한 이익과 열정 사이에서 조정과 협의, 타협과 공존의 길을 일구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좋은 사회를 만드는 데 실패할 수 있다.”

“김)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정치가와 그들의 조직인 정당이 제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가 산다. 좋은 정치가와 좋은 정당을 길러내지 못하는 민주주의는 불행하다!”

 

 

2. ‘국민주권 민주주의’가 정치의 몰락을 낳았다.

 

 

(1) 예기치 않은 선택 : 촛불 혁명과 국민주권 민주주의

 

“김) 우리의 정치 현실 안으로 들어가 문제를 다시 보기로 하자. 우선 문재인-민주당 정부는 기대했던 역할을 하지 않았다. 문재인-민주당 정부의 가장 큰 잘못은 정치만이 아니라 시민과 사회를 과도하게 분열시키고 그들 사이를 적대와 증오의 감정으로 채운 것에 있다.”

“박) 이런 결과를 만든 것에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하나는 민주주의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있었다고 본다. 그것은 정치를 정치가나 정당, 국회가 아닌 국민주권에 맡기고자 했던 것에 있다. 의회민주주의, 정당민주주의, 대의민주주의, 다원민주주의는 열등한 민주주의로 취급당했다. 대신 국민주권 민주주의라고 정의할 만한 민주주의관이 앞세워졌다.”

“김) 모든 것을 국민의 의사를 물어 정부를 운영하겠다는 국민주권 민주주의로의 길을 선택한 것은 당시 상황에서 보면 예기치 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재인-민주당 정부의 출현은 2016년 4월의 총선, 같은 해 말의 촛불집회 그리고 2017년의 대통령 탄핵으로 이어진 격변적 상황의 산물이었다. 2016년 총선에서 집권 새누리당은 참패했다. 그 결과 민주당과 국민의당 그리고 정의당으로 이루어진 야3당 체제가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같은 해 연말에 시작된 촛불집회가 빠른 시간에 대규모의 대중동원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정치적 조건 덕분이었다. 국민주권 민주주의는 이런 야3당 체제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한다.”

“박) 그 이전까지 한국 정치에서 촛불집회는 약한 야당을 보완하는 ‘정치 밖 사회 야당’의 역할을 했다. 대체로 진보적 시민운동이 주도하고 진보적 시민이 참여했다. 이에 비해 2016년 촛불집회는 고립, 소외된 ‘대통령-청와대-친박’을 대상으로 진보와 중도 시민은 물론 보수 시민의 상당 부분까지 참여하고 지지했다. 이후 전개된 현직 대통령 탄핵 과정도 마찬가지였다. 야3당은 물론이고 집권당 내 상당 수 의원들이 탄핵에 찬성했기 때문이다. 입법부에서 여야의 절대 다수가 합치된 의지를 모아 탄핵을 가결했다는 사실도 중요했고, 사법부가 입법부와 함께 행정부 수반을 파면하는 결정을 내린 것도 중요했다. 폭력이 동반된 정변 없이 대의민주주의의 정상적 절차와 과정을 거쳐 현직 대통령을 해고한 것이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에서도 처음 있는 일이거니와, 세계사적으로도 흔치 않은 일이다.”

“김) 이 모든 과정이 존중되었다면 이후 집권한 문재인-민주당 정부는 진보와 중도 그리고 온건 보수 시민의 지지에 기반을 두는 한편, 광범한 정치 연합을 통해 박근혜 행정부 시기에 나타난 문제를 함께 개선하는 방식으로 공동통치(co-governance)를 제도화했어야 했다. 적어도 집권 첫해 정도는 탄핵 정치동맹에 참여한 정치세력 사이에서 합의된 개혁을 추진하면서 다원 민주주의의 길을 넓혔어야 당연했다.”

“박) 2017년 조기 대선에서 모든 후보가 ‘협치’를 약속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했다. 선거 결과 과반 지지를 획득한 후보가 나오지 않았다는 사실도 이를 뒷받침하기에 충분했다. 문재인 대통령 후보는 선거 당일 아침까지도 당선되면 야당부터 찾아 협조를 구하고 ‘국정 동반자’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대통령 취임사는 그런 방향의 국정 운영을 확고히 하는 듯했다. 당시 문대통령의 취임사는 호평을 받았다. 통합과 공존의 다원주의 정치를 말했다는 점에서 시대에 맞는 내용이었다.”

“김) 지금 봐도 취임사대로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있다. 주요 내용을 보면 이랬다. ‘지금 제 머리는 통합과 공존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갈 청사진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이번 선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습니다.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입니다. ... 오늘부터 저는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 되겠습니다. 저를 지지하지 않은 국민 한분 한분도 저의 국민이고, 우리의 국민으로 섬기겠습니다. ... 2017년 5월 10일, 이날은 진정한 국민 통합이 시작되는 날로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 대통령부터 새로워지겠습니다. ... 준비를 마치는 대로 지금의 청와대에서 나와 광화문 대통령 시대를 열겠습니다. ... 주요 사안은 대통령이 직접 언론에 브리핑하겠습니다. 퇴근길에는 시장에 들러 마주치는 시민들과 격의없는 대화를 나누겠습니다. 때로는 광화문광장에서 대토론회를 열겠습니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력을 최대한 나누겠습니다. 권력기관은 정치로부터 완전히 독립시키겠습니다. ... 분열과 갈등의 정치도 바꾸겠습니다. 보수와 진보의 갈등은 끝나야 합니다. 대통령이 나서서 직접 대화하겠습니다. 야당은 국정운영의 동반자입니다. 대화를 정례화하고 수시로 만나겠습니다.’ 실제는 취임사 내용과 크게 달랐다. 예기치 않은 일이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대의민주주의를 ‘간접민주주의’로 폄훼했다. ‘우리 국민은 간접민주주의에 만족하지 않는다.’며 직접민주주의를 추구했다. 청와대 중심의 독주 정치를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정당화했다고 할 수 있다.”

“박) 취임사대로 하지 않기 위해 많은 것이 달라졌다. 첫째, 촛불집회를 보는 해석이 달라졌다. ‘촛불 합의’ 대신 ‘촛불 혁명’이 앞세워졌다. 둘째, 여야 협치나 연합 정치 대신 야권 재편을 우선시했다. 호남에서 국민의당 세력을 무너뜨리기 위한 노력이 우선되었다. 이를 위해 국무총리(이낙연)-비서실장(임종석)-정책실장(장하성)을 비롯한 주요 자리에 호남 출신 내지 국민의당에서 영입한 세력을 대거 포진시켰다. 셋째, 박근혜 행정부 시기의 ‘좌익 세력 10년 적폐청산’에 짝을 이루는 ‘적폐의 철저하고 완전한 청산’을 제1호 국정과제로 선정했다. 이를 위해 박근혜 행정부 때와 마찬가지로 검찰 권력을 다시 동원했다. 넷째, 5대 권력기관을 관장하는 민정수석의 역할이 다시 강력해졌다. 박근혜 청와대 때의 우병우를 끝으로 민정수석이 사라질 줄 알았으나 그때보다 더 강한 민정수석이 등장했다. 다섯째, 대의민주주의 대신 직접민주주의로의 전환을 주장했다. 의회정치와 정당정치 대신 청와대국민청원과 공론화위원회 같은, 국민 직접 참여 제도가 상찬되었다. 여섯째, 청와대를 비서실이 아니라 국민의 의지를 집약하는 주권기관 역할을 하게 했다. 청와대의 여론조사 예산은 앞선 대통령 시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급증했다. 국회나 야당은 반(反)국민적인 것으로 비난받았다. 일곱째, 대통령이 중심이 되는 여론정치가 심화되었다. 청와대가 직접 언론 기능까지 하기 시작했다. 과거에는 꿈도 꿀 수 없었던 강력한 청와대 권력이 등장한 것이다.”

“김) 이 모든 변화를 정당화한 것이 ‘국민주권론’이었다. 국민의 직접 정치, 직접 참여는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추진되었다. 헌법 2조의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조항이 문재인-민주당 정부에서만큼 강조된 적은 없었다. 과거 우리 사회의 진보파들은 헌법을 중시하지 않았는데, 이런 경향은 완전히 사라졌다. 모두가 ‘헌법적 명령’을 내세우고 ‘민심의 요구’나 ‘국민의 뜻’을 앞세우면서, 국민주권의 시대, 직접 민주주의의 시대가 도래하는 것 같았다.”

 

 

(2)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이유

 

“박)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주권과 기본권 사이의 균형체제’라 할 수 있다. 주권은 시민 총회에서 발생한다. 우리는 5년에 한 번 행정 수반을 선출하는 시민 총회를 통해 선출직 대표에게 주권을 적법하게 위임한다. 4년에 한 번 입법자와 지방자치 운영자를 뽑는 시민 총회를 통해 같은 일을 반복한다. 입법부를 통해 법을 제정하고 행정부가 그 법을 집행하고 사법부에 법의 적용을 맡김으로써 국민주권이 어느 한 권력부서에 의해 전횡되지 못하게 한다. 기본권은 주권과 다른 원리로 작동한다. 기본권은 시민 개개인에게 주어져 있는 권리다. 주권이 시민 총회의 결과물이라면, 기본권은 국민주권에 의해서도 침해될 수 없는 권리다. 제아무리 국민주권의 원리에 따른 결정이라 해도 그 결정은 기본권의 문 앞에서 멈춰야 한다. 민주주의에서라면 기본권을 침해하는 입법은 할 수 없다. 기본권을 침해하는 행정 집행은 더더군다나 제한되는 게 민주주의다. 기본권이 보장되지 않으면 촛불집회도 시민 불종복도 허용될 수 없다.”

“김) 민주당-문재인 정부의 민주주의 이해방법은 달랐다. 우선 촛불집회를 국민의 명령 내지 국민주권의 구현으로 이해했고, 대표적인 직접 민주주의 방식으로 정의했다. 공론화위원회도 청와대국민청원도 국민주권의 실현 내지 직접 민주주의의 일환으로 정의했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면 직접 민주주의라는 식이었다.”

“박) 잘못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전체 국민총회 혹은 전체 시민 총회에서만 주권은 발생한다. 전체 총회가 아닌 일부 시민의 정치 참여는 기본권의 표출일 뿐 그것이 주권이 될 수는 없다. 직접 민주주의에서라면 모든 것은 전체 시민 총회에서 국민주권의 원리로 결정되고 집행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공공 정책을 시민 총회를 열러 결정할 수도 없거니와, 설령 그게 가능하다하더라도 공적 결정을 시민 총회에서 국민주권의 원리로 도출하게 되면 기본권은 보장될 수 없게 된다.”

“김) 고대 아테네에서와 같은 직접 민주주의에서라면 시위나 집회는 시민 총회를 위협하는 반란 행위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사례에서 보듯, 젊은이들에게 아테네 정치를 비판하고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교리를 선동했다는 이유로 죽을 수 있는 체제다. 그런 의미에서 아테네 민주주의는 사실상 국가보안법이 있는 민주주의 체제였다.”

“박) 아테네식 직접 민주주의와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달라도 너무 다른 체제다. 현대 대의 민주주의에서는 민주주의를 비판해도 처벌받지 않는다. 일상적으로 시민 총회를 열어 공적 사안을 결정하지도 않는다. 일정 임기를 주기로 시민 총회를 열어 입법자와 행정 수반을 선출해 정부 운영을 맡긴다. 대신 시민 개개인은 일상적으로 기본권을 향유한다. 소수 시민의 의견 역시 자유롭게 표현해도 된다. 침해할 수 없는 기본권이 있기 때문이다.”

“김) 직접 민주주의에서라면 전체 시민의 의지가 아닌 시민 일부의 의견이 일반의지가 될 수 없다. 직접민주주의자에게 그것은 기껏해야 ‘집단이기주의’일 뿐이다. 청와대 국민청원도 마찬가지다. 20만 국민의 동의는 전체의 의지가 아니고 부분의 의지다. 그런데도 이를 국민주권이라거나 직접 민주주의라고 규정하는 것은 맞지 않는 일이다.”

“박) 청원권은 기본권이다. 정부 운영권을 선출직 대표들에게 위임했기에 갖게 된, 시민 개개인의 권리라는 뜻이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청원법에서 청원행위는 개인의 이름으로 하게 되어 있다. 청원인이 한 명이라도 절차에 맞게 청원을 접수하면 해당 정부 당국은 문서로 그 청원인에게 회신해야 할 법적 의무를 진다.”

“김) 국민주권의 대행자로서 대통령과 집권당이 대의 민주주의의 원리로 선출되었는데, 그들이 직접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 아닐 수 없다.”

“박) 권력자가 앞세우는 직접 민주주의론 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대통령이 앞세우는 국민 직접 정치는 삼권분립과 입헌주의를 위협한다. 대통령이 국민주권을 앞세워 의회정치나 정당정치를 우회하고 회피하는 수단으로 삼게 되면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제 기능을 상실하게 된다. 우리가 중남미 대통령들에게서 보듯, 의회보다 대통령이 위임받은 국민주권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하면, 제도의 형식만 민주주의일 뿐 실제 통치는 권위주의의 방법으로 이루어진다. 개개인의 기본권이 쉽게 침해되는 것은 물론이다. 모든 것이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누가 더 여론의 지지를 많이 받는지에 따라 권력 행사의 정당성이 주장되기 때문이다. 결국 ‘매일 매일의 국민투표’처럼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유동하는 정치만 남게 된다. 이를 정상적인 민주주의라고 볼 수는 없다.”

“김) 문재인-민주당 정부 시기 실제 우리가 경험한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현실은 문제가 많았다. 직접 민주주의를 앞세워 대의 민주주의를 무력화시키는 정치를 청와대가 주도했다. 민심이나 국민의 뜻을 앞세웠지만 정작 그때의 민심이나 국민은 대통령에 대한 적극적 지지자들 위주였다.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을 ‘신뢰하기보다 신뢰하지 않음’에 기반을 둔 정치 방식이었다. 집권 민주당이 앞세웠던 ‘직접 민주주의 정당 개혁’도 마찬가지의 사례다. 당원은 신뢰할 수 없고 당 밖 국민선거인단이 참여해야 민주주의라는 식인데, 그렇게 참여한 국민선거인단이 누구겠는가?”

“박) 한국 민주주의의 오랜 전통은 ‘당정 분리’에 있었다. 하지만 대통령 지지자들은 당내에서 비판 의견이 나올 가능성을 두려워했다. 그 때문에 정당의 자율성을 제한하고자 했다. 이것이 정당에도 국민주권의 원리가 강제된 배경이다. 당 안팎에서 직접행동하는 대통령 지지 시민들이 당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제도들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견을 보이는 의원들을 지지자들이 직접 제재하고, 당직과 공직 후보자에 대한 통제권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국민주권 민주주의는 권력 정치를 심화시켰다.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큰 특징의 하나는 이견 집단이나 반대세력에 대한 두려움을 동원한다는 점이다. 다른 목소리를 제어하고 무력화시키는 일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국정의 우선순위는 사회경제적 불평등이나 양극화를 개선하는 긴 노력보다, 집권 세력 안팎에서 도전세력의 등장 가능성을 제압하려는 단기적이고 권력적인 관점이 압도하게 되었다.”

“김) 그 과정에서 내부의 반대 목소리가 더 가혹하게 다뤄졌던 것 같다. 자칫 ‘적전 분열’이나 ‘내부 총질’을 가져올 수 있다는 이유로 말이다. 진보적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욕구도 절제하지 못했다. 대통령의 통치 방식에 이견을 표출하는 의원이나 언론, 지식인을 공격하려는 욕구도 극대화되었다. 이 모든 것이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대통령 지지자들이 누군가를 향해 ‘친일파’나 ‘토착 왜구’로 낙인찍는 행위를 즐겨 하는 일이 이렇게 광범하게 허용된 것은 국민주권 민주주의 아니고는 설명되기 힘들다.”

“박) 한국의 진보적 전통은 크게 세 차원으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일반 민중과 서민의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을 중시하는 것으로, 일종의 ‘평등파’의 전통이다. 둘째는 국가 간 종속의 문제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자주파’의 전통이다. 셋째는 위의 두 전통과 겹치기는 하지만, 과거 권위주의 세력이 가진 권력을 최소화하기를 바라는 ‘반독재파’의 전통이 있다.”

“김) 민주화 초기에는 반독재의 과제가 설득력과 정당성을 가졌다. 하지만 야당으로의 수평적 정권교체가 10년 주기로 두 번 이루어지고, 그 사이 7명의 대통령을 배출하였으며, 권위주의 통치 기간보다 더 긴 민주화 이후 35년이 된 상황에서 반독재를 앞세워 반대를 제압하려는 것은 불합리하다. 세상을 ‘민주 대 반민주’로 양분시키는 것은 시대착오적일 뿐 아니라, 사실상 그것은 권력 정치에서 우위에 서려는 부당한 태도다. 그 결과는 정치만이 아니라 사회 또한 적대와 증오로 분열시키는 결과를 낳는 것으로 이어졌다.”

“박) 한국이 개발도상국 지위에 있을 때는 자주파의 관점에서 국가적 과제를 조망하는 것이 현실성을 가졌다. 하지만 에스파냐와 이탈리아에 앞서는 세계 10위권 경제 선진국이 되고 일본보다 잠재성장률이 앞서며 세계 6위의 군사력을 갖게 된 현실에서 자주파적 관점 또한 점차 시대착오적인 것이 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전통적인 자주파의 ‘반미’ 노선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반일’과 ‘혐중’이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이어 ‘국민주권 민족주의’의 양상이 사태를 악화시키고 있는 형국이다. 국민주권 민주주의 못지 않게 국민주권 민족주의가 낳은 부작용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김) 아마도 제대로 접근조차 되지 않았던 진보의 전통이 있다면 평등파의 전통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민주화 이후 첫 야당 집권이 신자유주의 수용과 겹쳤다는 데에서 발원한다. 민주화는 공고화되고 경제는 발전하고 세계화는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앞섰지만 대신 우리 사회가 안게 된 것은 불평등과 양극화였다. 가난한 시민은 더 가난해지고 부자 시민은 더 부유해졌다. 비정규직은 쉽게 벗어나기 어려운 형벌이 되었고, 부모의 도움이나 학벌의 조건을 갖추지 못하면 다른 삶으로의 이동도 어렵다. 나이든 시민의 삶은 더 어렵다. 절반 가까이가 빈곤한 삶과 고독한 죽음에 내몰리는 사회가 되었다.”

“박) 안타깝게도 저학력, 저소득의 사회적 약자들은 사회적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권력의 향배에 미치는 영향력도 거의 없는 존재들이다. 조직화가 어려운 조건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기 때문이다. 목소리 큰 시민들이 주도하는 국민주권 민주주의에서 이들의 목소리는 체계적으로 배제된다. 모두가 여론정치에 몰두해 있는 동안, 누가 이들의 ‘표출되지도 조직되지도 않은 흩어진 소리’에 귀를 기울이겠는가. 한국의 진보 세력이 도덕적 기반을 급격하게 잃게 된 것은 이런 상황의 산물인 면이 크다. 국민주권 민주주의는 진보의 무덤이 될 가능성이 높다. 국민주권 민주주의는 권력을 두고 경쟁하는 상위 정당만 살아남게 한다. 이들이 주도하는 양극화 정치에서 평등의 가치가 실현될 여지는 거의 없다.”

“김) 그런데 우리 진보는 다원주의의 발전에 반(反)하는 ‘반독재 민족주의 노선’을 퇴행적으로 고수해왔다. 진보는 진취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이미지를 상실한 낡은 세력이 되었다. 결국 정치의 양극화가 극단적으로 심화되면서 상위 두 정당과 경합할 수 있는 제3의 진보정당은 점점 설 자리를 잃었다. 민주든 민족이든 민중이든 평화든 정의든 평등이든 여성이든 노동이든, 그간 진보가 추구했던 모든 가치가 정치를 오히려 뒤틀리게 만들었다. 다른 정치를 꿈꿨던 사람들이 존재감을 가질 수 있는 다원주의의 정치 공간은 넓어지기보다는 축소되었다.”

 

 

(3)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파멸적 귀결

 

“김) 국민주권 민주주의는 문재인-민주당 정부에서 위세를 떨친 뒤 그 한계를 빠르게 드러내고 있다. 아마도 2021년 말에서 2021년 초까지 이어진 20대 대선 경선 및 본선 과정만큼 이를 잘 보여주는 것도 없다. 많은 이들이 그 과정을 지켜보며 ‘비호감 선거’라며 냉소했다. 의미 있는 정책 경쟁은 없었다. 평균적인 서민의 도덕성에도 미치지 못하는 후보와 주변의 추문을 보며 최소한의 존경심도 가질 수 없었다. 누구의 범죄 요건이 더 나쁘냐는 식의 말싸움 속에서 정치의 도덕적 권위는 느낄 수가 없었다.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들조차 승자가 된 후보에게 도덕적으로 승복하지 않았다. 같은 당 경선에 참여했던 후보 가운데는 자당 후보를 잠재적 범죄자로 보는 사람도 있다.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귀결치고는 참으로 초라하다.“

“박) 후보들 개인의 문제를 넘어 더 근본적으로 살펴야 할 더 큰 문제들도 많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말 그대로 ‘정치의 범죄화’ 현상이다. 주요 정당의 경선은 법률가 출신이 압도했다. 경선 이후에는 상대 당 후보에 대해 범죄 요건을 들이대고 조사와 처벌을 주장했다. 상대를 아프게 하는 데는 효과적이었는지 몰라도, 정치 전체에 대한 신뢰는 무너졌다. 누가 승자가 되든 국회 경험이 없는 법률가 출신의 비호감 대통령이 나오게 되었다. 대선 이후에도 정치는 안정될 수 없을 것이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국회나 정당을 공격하며 국민 여론에 직접 호소하려는 경향은 제어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김) 대통령들이 의회정치와 정당정치를 무시한 것에서 한국 정치의 비극이 시작되었다고 본다. 야당의 존재는 존중되지 않았다. 민주당이 야당이었을 때 제시했던 개혁론은 대개 야당의 역할을 강화하는 내용을 가졌다. 하지만 민주당이 여당이 되자 그런 개혁론은 찾아볼 수가 없게 되었다. 오히려 야당에게 기회를 줄 수 없다는 이상한 개혁론만 있다.”

“박) 그런 의미에서 국민주권 민주주의가 낳은 부작용 가운데 하나가 '정당의 실패'다. 정당은 자신의 후보를 길러낼 능력을 상실했다. 정당이란 공직 후보자를 양성해 시민 총회에 내보내는 역할을 한다. 20대 대선에서 정당은 그런 역할을 하지 못했다. 외부 영입이 중요해졌고, 여론조사가 경선을 지배하게 되었다. 정당이 아니라 캠프가 중심이 되는 정치가 그 뒤를 이었다. 이런 선거는 정당의 존재 이유를 회의하게 만든다.”

“김) 화제성 외부 인사 영입, 잦은 자격 미달 시비, 뒤이은 논란과 퇴출을 빠르게 반복하는 인간 소모전이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돌아가면서 계속된 선거였다. 대선이 끝나도 정당은 안정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분열과 재편이 예고되어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박) '정치의 사인화'도 따져볼 문제다. 정당이 아니라 후보의 개성적 문제가 선거를 압도하면서, 자기 당 안에서조차 자당 후보의 승리를 원치 않는 반대세력이 있다. 후보들은 한결같이 정당 기반이 없거나 약하다. 선거에서 패배한다면 책임을 둘러싼 파장은 후보 개인 문제로 몰릴 것이다. 승자가 된 사람도 분란을 피할 수 없다. 누가 승자가 되든 신임 대통령은 당이나 국회와의 관계 정립은 어려울 것이다. 앞선 정부들처럼 권력기관을 동원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날 수 없을지 모른다. ‘청와대 정부’ 현상은 계속될 것이며 결과적으로 대통령의 실패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김) 국민의 주권적 힘이 강해진 것도 아니다.”

“박) 국민주권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결과는 '국민주권의 형해화'로 이어졌다. 그간 정당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공천권을 국민에게 돌려 드린다.’며 국민선거인단을 대거 동원했다.”

“김) 민심이 모든 것인 양 주장하는, 이른바 '국민 직접 참여 민주주의론'이 정치를 지배했다. 수백만 명이 '국민의 이름'으로 이번 경선에 참여했는데, 논쟁의 질은 떨어지고 저질 말싸움과 품위 없는 행태만 많아졌다. 당의 경선이 당원에 의해서가 아닌 여론조사 민심에 이끌렸다. 그런 민심의 개입과 국민의 참여는 최대가 되었는데, 그렇게 참여한 ‘이른바 국민’은 지지 후보를 중심으로 서로를 야유하고 증오하는 검투장의 관중 역할을 하고 말았다.”

“박) '시민성의 퇴락'도 생각할 문제다. 이는 국민주권의 권위가 추락하고 형해화된 것이 낳은 직접적인 결과가 아닐 수 없다. 모두가 국민주권을 금과옥조로 삼는 동안 사회 갈등은 더 격렬해졌다. 정상적인 정치과정은 작동하지 않았다. 시위와 직접 행동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김) 사람들은 쉽게 화를 내고 쉽게 분노한다. 더 성급해지고 더 조급해한다. 절차와 과정보다 당장의 빠른 해결책을 얻고자 하는 욕구만 커졌다. 모두가 안달하고 모두가 억울해한다. 청와대와 국회 앞, 집권당 앞으로 달려갔지만 정작 해결되는 문제는 별로 없다. 한강을 사이에 두고 광화문 집회 참가자와 검찰청 앞 집회 참가자가 서로 국민주권을 실천하고 있다고 말하는 역설도 발생했다. 정당의 지도부가 정치를 버리고 국민에게 직접 호소하겠다며 단식하고 농성하는 일도 많아졌다.”

“박) 정치가는 정치를 버렸고 시민은 서로에게 사나워졌다.”

“김) 공론장의 역할이 나빠진 것이 큰 걱정이다.”

“박) '언론 공론장의 피폐화'는 정말 큰 문제다. 우리 언론은 정치의 역할을 존중하지 않는다. 반(反)정치주의야말로 우리 언론의 정체성이다. 그들은 가장 파당적인 견해를 가장 초당적인 자세로 말한다.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지를 알려주는 역할을 하는 게 아니고, 자신들 의견을 앞세우고, 더 많은 댓글 피드백을 받고자 경쟁하기 바쁘다. 그 점에서 우리 언론은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또 다른 주역이다.”

“김) 유력인의 SNS를 증폭해 전달하는 저질 기사를 내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언론이 되었다. 여론조사의 과도한 동원은 우리 언론의 고질병이다. 여론조사 기관마다 편차가 큰 조사 결과가 공론장에 미치는 혼란과 폐해에는 관심이 없다. 최고 권력의 향배에 관심이 큰 독자들의 약한 마음을 악용하는 것을 절제하지 못한다. 대통령 권력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싶다는 그들의 무의식이 이런 일을 하게 만들고 있다.”

“박) 과거에는 학자나 연구자들의 경우 한국 정치를 연구하기 위해 신문을 읽었다. 신문은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풍부한 자료였다. 지금은 그렇지가 않다. 신문은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와 관련해 말해주는 바가 너무 적다. 캠프정치가 문제라면 각 후보 캠프의 규모, 구조와 체계, 인적 구성, 의사 결정 방식, 당과의 관계, 정당별 캠프의 특성과 차이, 다른 나라와의 비교 등을 분석하는 취재 기사가 있어야 하는데, 그런 기사는 볼 수 없다.”

“김) 취재 기반이 약하니, 대개는 제목부터 인용문이 너무 많다. 인용도 사실 관련된 인용보다는 발화자의 일방적 의견을 담은 인용이 대부분이다. 사실보다는 도그마를 정당화하는 기사들이다. 기사작성자의 정치적 의도는 알 수는 있어도 지금 사태가 어찌 돌아가고 있는지에 대한 객관적 지식이나 정보는 너무 빈약한 결과, 신문을 당대 역사에 대한 기록물로 보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외국어 표현, 인터넷 줄임말, 소집단 은어 등이 그대로 사용된다. 신문이 좋은 한국어 문장의 표준일 때가 있었다. 지금도 그래야 한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언론의 언어는 너무 나빠진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박) 언론은 말을 다루는 일을 한다. 말이 나쁘면 그 말에 사실과 지식을 제대로 담을 수 없다. 사실에 대한 취재보다 의견이 압도하는 기사가 많아지면서, 지식과 정보 전달력은 급격히 줄었다. 듣고 싶은 말, 보고 싶은 사실만 공급한다. 정치만 양극화 내지 진영화되는 게 아니라 언론도 그렇게 되었다. 언론 자유의 다른 얼굴이라 할 ‘비판적 다원주의’가 어떻게 가능할지 걱정이다.”

“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실패'를 이야기할 때가 아닌가 한다. 민심이 주권이고, 국민의 뜻이 곧 민주주의 아니냐며 당심이 아니라 민심이 중요하고 여론조사로 민심을 알 수 있다는 식의 민주주의론은 해악적이었다. 이를 국민주권 민주주의라고 규정했는데, 그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아니라 전체주의에 가까운 민주주의다.”

“박) 국민주권은 시민이 자신들의 적법한 대표를 선출할 최종적 권리를 갖는다는 원론적인 의미로 이해되어야 할 뿐, 그것이 일상의 정치과정을 지배하면 안 된다. 정치학자들은 주권을 정치를 탄생시킨 ‘아버지 원리’라 본다. 남성과 중산층만이 아니라 모든 사회구성원이 주권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에서 국민주권은 민주주의를 탄생시킨 ‘어머니 원리’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일단 성인이 되면 아주 가끔 급한 상황에서만 부모의 권위에 의존해야 하듯, 국민과 주권을 시도 때도 없이 앞세워서는 안 된다. 국민주권을 앞세워 기본권을 위협하고, 국민주권을 앞세워 의회주의나 정당 책임 정치, 입헌주의, 삼권분립 같은 정치 원리를 무시하면 민주주의는 균형을 상실하고 만다. 일상의 민주주의 운영은 정치가와 정당에 맡겨야 한다. 적법하게 선출된 시민 대표로서 정치가나 정당에 자율적인 역할을 할 기회와 권한을 주지 않으면 민주주의는 제 일을 할 수가 없다.”

“김)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집약해 표현하면 이런 것 같다. 국민이 직접 참여하고 결정에 직접 영향을 미치는 일이 많아지면 사람들 사이에 적대와 대립, 증오와 배제의 문화는 커질 수밖에 없다. 좋은 정치가는 성장할 수 없고, 정치해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승자가 된다. 적대와 증오를 동원하는 그들은 정치만 망치는 게 아니고, 사회도 분열시키고, 시민의 마음도 상하게 한다. 정치가의 역할과 시민의 역할이 서로 존중되어야 민주주의는 사회를 통합하는 좋은 역할을 한다. 그렇지 않고 시민이 정치가의 역할을 대체하려 하면 할수록 민주주의는 사회를 해체하는 역할을 한다.”

“박) 다시 강조하건대 민주주의란 시민이 적법한 대표에게 일정 기간 일을 맡기고, 그 결과에 따라 일을 계속 맡길지 아니면 다른 시민 대표를 고용할지를 결정하는 체제다. 좋은 냉장고를 쓰고 싶은데 냉장고 회사들이 우릴 속일지 모른다며 우리 스스로 냉장고 만드는 법을 배우자고 해서 소비자주권이 실현될까? 그 일을 냉장고 회사에 맡기되 질 낮은 냉장고를 만드는 회사를 망하게 하는, 최종적 결정권자의 역할을 하는 게 훨씬 더 주권자답다.”

“김) 정당들이 자신의 후보를 스스로 육성하고 길러내야 민주 정치다. 공직 후보자 지명을 민심에 맡기자는 것은 국민주권도 아니고 민주주의도 아니다.”

“박) 공직 후보자를 제대로 공천한 정당에게 다시 일을 맡기고 그렇지 않은 정당을 처벌하는 최종 결정자의 역할을 해야 국민주권이 온전해진다. 노동조합을 생각해보자. 조합의 위원장 선출을 국민이 직접 결정하게 하자. 그러면 좋은 조합장이 선출되고 신뢰받는 조합이 될까? 반노조 여론만 격화될 뿐, 책임 있는 후보가 선출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노동조합의 일은 조합과 조합원이 스스로 하듯, 정당도 스스로 공직 후보를 길러내야 하고 스스로 선출해서 책임 있게 시민 총회에 내보내야 한다.”

“김) 정당을 직접 민주주의로 운영하겠다는 것만큼 자가당착도 없다. 그 일에 국민주권을 허비하게 되면 정치도 망가지고 사회도 분열시키는 일은 피할 수 없다.”

“박) 정당 스스로 책임져야 할 자당의 경선에 국민을 연루시켜 모두를 공범자로 만드는 ‘국민참여경선’은 국민주권과도 아무 상관이 없고 무엇보다도 민주주의가 아니다.”

“김) 대통령이 직접 민주주의를 말하며 국민 참여를 주도하려 하면 민주 정치는 위험에 처한다는 점을 다시 강조해야 한다. 여론 동원 정치로의 퇴락은 막을 길이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권력투쟁의 승자 자리를 두고 극단적 다툼이 되는 것도 순식간이다. 그러면 민주주의는 함부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상대를 동료 시민이나 동료 정치인으로 여기기보다 공격해야 할 대상으로 몰아붙여도 되는 일이 된다. 그런 것이 관행이 될 때쯤이면 민주주의는 권력 투쟁만 남는다. 공존과 타협의 민주주의 규범을 준수하는 사람, 한마디로 말해 '정치하는 정치인'은 힘을 쓸 수가 없게 된다.”

“박) 대통령이 정당정치를 지배하기 위해 독자적인 대중 지지를 직접 동원하는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크나큰 위협요인이 아닐 수 없다. 정치가 의회나 정당이 아닌 대통령 당파에 의해 압도되면 정견이나 이념, 신념의 가치는 나타날 수가 없게 된다. 정책 논쟁이든 제도 논쟁이든 대통령 당파에 의한 유, 불리 판단이 모든 결정을 압도하기 때문이다. 친문이냐 비문이냐의 구분에서 보듯, 당내 권력이 능력도 대표성도 아닌 대통령과의 거리에 의해 배분되는 일은 피할 수 없다. 여론 공론장을 지배하려는 열성 지지자 집단을 제어할 수도 없게 된다.”

“김) 국민주권 민주주의에 유혹을 느끼는 많은 이들이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론’을 이야기한다.”

“박) 한계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현대 대의 민주주의는 인간의 한계에 대한 자각 위에 서 있다. 완전한 민주주의를 지향하지 않았기에 대의 민주주의는 전 세계 120개 안팎의 국가에서 채택하고 있는 정치 원리가 될 수 있었다. 대의제 대신 다른 원리를 도입하기보다, 대의제를 민주적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했기에 이런 일은 가능했다. 인간의 역사에서 대의 민주주의보다 더 많은 시민참여, 더 많은 직접 참여를 가져온 것도 없다. 덕분에 여성도 노동자도 민주주의에 직접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김) 노예 없는 정치를 실현한 것도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대 민주정이든 공화정이든 모두 노예의 희생 위에 세워졌고 운영되었다. 직접 참여할 수 있었던 시민권자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그에 비해 사회구성원의 다수가 평등한 시민권을 갖게 된 것은 대의 민주주의에서 처음으로 이루어졌다. 노예 없는 민주주의, 노예 없는 공화정 역시 현대 대의 민주주의에서 처음으로 구현되었다.”

“박) 모든 시민이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자유롭게 결사체를 만들 수 있게 된 것도,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출하는 것을 당연한 권리로 받아들인 것도 대의 민주주의였다. 대의 민주주의를 통해 사민주의도 복지국가도 실천할 수 있었다.”

“김) 국민주권을 최고 통치자의 의지를 통해 실현하려는 실험은 전체주의를 낳았을 뿐, 그것이 민주적으로 가치 있는 결과를 낳은 적은 없었다. 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해보기도 전에 대통령 권력자와 그를 추종하는 시민들이 주도한 국민주권 민주주의로 인해 정치도, 사회도, 개인도 위태롭게 된 것은 여간 안타까운 일이 아니다. 한국 민주주의는 길을 잃었다. 제 길을 찾아야 할 때다.”

“박) 대통령이 없어도 민주주의는 가능하다. 하지만 의회나 정당정치가 없는 민주주의는 없다. 국민주권만으로 운영되는 민주주의는 정치의 파괴를 가져온다. 내가 좋아하는 정치가만 기회를 갖는 민주주의는 필연적으로 파멸한다. 의회 없는 민주주의는 존재하지 않는다, 야당 없는 정당정치는 일당체제밖에 없다, 권력의 견제와 균형이 없다면 국가의 무모함을 막을 평화적인 방법은 없다, 개인의 기본권 없는 자유 사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유로운 결사체들과 다원적 의견들이 공존하고 협력할 수 있도록, 좋은 균형체제를 만드는 데 있어서 정치가들의 기예와 역할이 빛나야 민주주의가 산다. 이 모든 것은 현대 대의 민주주의를 제대로 운영할 때 기대할 수 있는 것들이다.”

 

 

3. 민주공화국,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나

 

(1) 공화정이면서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길

 

“김) 민주공화국은 우리 모두의 합의다. 그런데 그게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논의가 뒤따르지 않았다. 국민주권 민주주의를 민주공화국과 같은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도 있고, 민주공화국을 ‘국민의 지배’와 동일시하면서 그것의 이상적 모습을 ‘직접 민주주의’에서 찾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이는 민주공화국에 대한 ‘지나치게 단순한 이해’이자, 거기에 그치지 않고 현실의 민주주의를 잘못된 길로 이끄는 부작용을 낳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민주공화국의 문제를 그 기원으로부터 살펴봤으면 한다.”

“박) 민주공화국은 18세기의 산물이다. 당시까지만 해도 공화국이나 공화정 옹호론은 많았으나 민주주의에 대해서는 부정론이나 유보론이 압도적이었다. 대표적으로 장 자크 루소가 있다. 공화주의자였던 그는 자신의 책 『사회계약론』을 통해 ‘민주정은 신의 세계에나 어울릴만한 정부 형태’라고 했다. 루소는 민주정이 고대 아테네에서 보듯 ‘정치의 과거’일지는 몰라도 ‘정치의 미래’일 수는 없다고 잘못 생각했다.”

“김) 사실 신의 세계라면 민주정은 물론 정부 자체가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민주정은 신이 아니라 인간의 체제다. 좀 더 자유로운 사회에 대한 인간의 열망이 공화정은 물론 민주정을 향한 진보를 멈출 수 없게 할 거라는 점을, 루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박) 그게 바로 루소가 죽은 뒤 역사상 최초로 헌법을 통해 새로운 국가를 설계하게 되면서 미국의 정치가들이 맞닥뜨려야 했던 문제였다. 민주주의든 공화주의든 정부는 필요하다. 시민 스스로 자신이 동의한 정부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결심을 한 것, 그것의 궁극적 귀결이 공화정이고 또 민주정이었다. 정부가 없는 자연 상태나 무정부 상태보다 적법한 절차에 따라 선출된 정부하에서 시민이 더 자유로울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정부는 구속력 있는 결정을 강제하는 공권력이다. 그 힘의 본질이 폭력인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시민이 정부를 통제할 수 없다면 정부는 시민에 대한 책임성의 굴레를 벗어던지고자 할 것이고, 그렇게 해서 자유로워진 정부는 시민의 자유를 위협한다는 것 또한 역사 속의 수많은 사례가 실증하는 바다.”

“박) 문제의 어려움은 바로 거기에 있었다. 정부는 필요하고, 시민은 정부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자유와 생명 그리고 노동을 통해 획득한 재산’을 좀 더 안전하게 지킬 것이라 믿고 피치자가 되는 것에 자발적으로 동의했으며, 그런 이유로 무국가 혹은 무정부의 자연 상태로 돌아가는 길을 스스로 차단했는데, 그렇다면 어떻게 그 믿음을 확고한 것으로 만들 수가 있겠는가? 지금으로부터 2백 년 하고도 34년 전 헌법 설계를 통해 미합중국 정부를 공화정으로 만들어야 했던 제임스 매디슨은 이 문제를 두고 씨름했다.”

“김) 세습 군주도, 귀족이라는 신분 집단도 인정할 수 없었던 당시의 미국에서 공화정은 불가피했을 것이다. 시민의 동의 없는 정부는 상상할 수 없었을 것 같다.”

“박) 그렇기에 오로지 선택은 선출직 시민 대표가 정부를 이끄는 것이었다. 그런 정부를 어떻게 설계할 것인가? 매디슨은 이렇게 말했다. ‘먼저 정부가 피치자를 통제할 수 있도록 해야 하고, 그다음으로는 정부가 그 자신을 통제하게 해야 한다.’ 현대 공화정, 현대 민주정은 바로 여기에 그 핵심이 있다.”

“김) 민중이 정부를 직접 통제하는 방안이나 직접 운영하는 제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없었을까?”

“박) 헌법제정자들은 그런 선택에 반대했다. 그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한 사람이 매디슨이다. 그는 고대 아테네의 직접 민주주의를 순수 민주정(pure democracy)이라 불렀다. 그런 정치체제에서는 ‘파벌의 난폭함’과 ‘정부의 타락’이라고 하는 ‘도덕적 질병’을 피할 수 없을 거라고 보았다. 민중이 직접 통치에 나선다면 실제 일어날 일은, 더 많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권력을 추구하는 파벌들의 선동정치라는 것이다. 민중은 선동에 희생될 뿐, 그들이 직접 통치하는 민주주의는 실현될 수 없다. 실제로는 자의적이고 독단적인 파벌의 지배로 귀결될 것이다. 이것이 매디슨의 생각이었다.”

“김) 매디슨 이전에 루소는 자신의 책 『사회계약론』에서, 통치는 소수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자연법칙’이라 말한 바 있다. 매디슨은 이를 따른 것인가?”

“박) 적어도 다수 대중이 통치자의 역할을 맡을 수 없다는 점에서 매디슨은 루소를 따랐다. 핵심은 그 소수가 세습제나 신분제의 원리로 통치하느냐 아니면 선출직 공화정의 원리로 움직이느냐에 있다. 민중도, 시민도, 다수도 통치할 수 없다. 통치는 그들을 대표하는 소수의 인물과 집단이 한다. 그래서 공화정은 확고한 대의제여야 한다고 매디슨은 생각했다.”

 

 

(2) 정제와 확대의 원리

 

“김)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테네 같은 작은 도시국가가 아니라 그와는 비교할 수 없이 규모가 큰 국민국가에서 민주주의를 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대의제를 한다는, 기존의 상식화된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 매디슨은 자각적이고 확고하게 직접 민주주의나 순수 민주정보다 대의제나 공화정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했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는 공익에 부합하는 결정은 민중의 직접 통치가 아니라 민중의 대표에 의한 통치체제에서 더 잘 도달된다는 데 있다. 직접 민주주의가 목소리 큰 파벌의 지배를 가져오는 것에 비해, 대의제는 ‘선택된 집단들’ 혹은 그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매개로 ‘공중의 의견’을 더 현명한 방향으로 이끌 수 있다는 것이다. 매디슨은 대의제가 갖는 이러한 효과를 ‘정제(refinement)’라 불렀다. 직접 통치는 선동의 방법으로 작동하고 대의 정치는 정제의 방법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김) 문제는 정제의 효과가 어떤 조건에서 더 잘 발휘되느냐에 있다. 잘못된 대표는 공중의 의견을 정제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편협한 관점이나 소수의 독선을 고수할 수 있다.”

“박) 그래서 대의제가 공중의 의견을 더 잘 정제할 수 있으려면 이 과정에 참여하는 집단이 많아야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이유인데, 매디슨은 이를 ‘확대(enlargement)’라 불렀다. 무리를 짓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이는 자유의 원천이기도 하다. 대의제는 이런 결사의 자유에 기초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그런 결사가 다양한 이익과 열정을 더욱 풍부하게 표출될 기회를 제공한다. 결사의 확대는 하나의 파벌이 ‘부도덕한 술책’을 부릴 가능성을 줄이는 효과를 낳는다. 요컨대 대의제는 직접 민주주의에 비해 공익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공공의 의견을 정제하게 하고, 선택된 결사체의 수와 범위를 확대시켜 ‘다수의 폭정’이 나타날 여지를 줄여준다는 것이다. 다양한 결사체들이 공공의 의견을 나눠서 표출하고 집약해낸다면 최종적으로 만들어질 다수는 하나의 동질적인 다수가 아니라 ‘여러 소수들로 이루어진 다수(majority of minorities)’일 것이기 때문이다.”

“김) 중요한 논점이 아닐 수 없다. 고대 민주주의는 규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었다. 작은 도시국가를 넘어설 수 없었기에 ‘아테네 민주주의’는 있었어도, ‘그리스 민주주의’는 존재한 적이 없다. 도시국가 안에서도 문제가 있었다. 시민들이 모여서 공적 사안을 결정하는 동안 생산과 재생산의 기능을 노동자(노예)와 여성이 감당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직접 민주주의는 전체 인구 가운데 제한된 일부만으로 운영될 수밖에 없는 단점이 있었다.”

“박) 바로 문제를 돌파해 냈다는 점에서 매디슨의 공화정 설계는 혁신적이었다. 규모를 도시에서 국가로 확대해도 문제가 없는 정치체제 이론이 처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의 주장은 당시뿐만이 아니라 미래를 위해서도 혁신적이었다. 흑인 노예든 농민이든 노동자든 여성이든 자신들의 결사를 만들고 대표를 파견해 공적 의견 형성과정에 참여하고 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3)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

 

“김) 매디슨의 공화정 설계에서 대의제와 결사의 자유는 결정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 같다. 많은 결사체가 공중의 의견을 정제해주고 확대해준다. 나아가 시민이 정부를 더 잘 통제하게 해 주는 동시에 정부가 시민의 자유를 위협할 가능성을 획기적으로 낮춘다.”

“박) 현대 정치학에서는 이를 정부와 시민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수직적 책임성’의 원리라 부른다. 수직적 책임성이 있다면 ‘수평적 책임성’도 있다는 뜻일 텐데, 이 역시 매디슨의 공화정 설계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김) 앞서 ‘정부가 그 자신을 통제하게 해야 한다.’는 매디슨의 말을 언급한 바 있는데, 수평적 책임성의 핵심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박) 매디슨은 정당, 이익집단, 언론 등 수많은 자율적 결사체들이 시민을 대표해 정부를 통제하는 수직적 책임성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정부의 힘은 강하다. 시민의 동의에 의해 탄생한 정부는 더 강하다. 따라서 정부를 쪼개고 그렇게 분리된 정부 기관 사이에서 서로를 견제하는 ‘보완적 예방책’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김) 그것은 권력분립의 원리가 아닌가?”

“박) 그런데 이 부분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매디슨이 주안점을 둔 것은 삼권을 분립하는 제도적 측면보다 ‘개인적 동기’에 있었다. 이 점이 특별하다. 매디슨은 그 핵심을 이렇게 표현했다. ‘오직 정의와 공공선만을 고려해 결정을 내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각자가 서로에 대한 견제 수단이 될 수 있고, 모든 개인의 사적 이익이 공적 권한의 파수꾼이 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각각의 직책을 배분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해 개인의 선의에 의존하는 도덕적 접근이 아니라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이었다.”

“김) 사익에 대한 개개인의 관심이 결과적으로 공익을 지키는 감시자나 견제자 역할을 하게 하자는 접근으로 이해된다. 입법부의 선한 의지나 대통령의 도덕성, 사법부의 정의감을 신뢰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는 각자의 욕구가 서로를 수평적으로 견제함과 동시에, 그것의 결과로 균형 있는 정부 정책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접근 같다.”

“박) 그게 핵심이다. 그런 원리가 비단 ‘정부의 내부 구조’에 대한 설계에만 적용된 것은 아니다. 매디슨에 따르면 ‘공화국에서는 사회를 통치자들의 억압으로부터 보호하는 것뿐만 아니라 사회의 한 부분을 다른 부분의 침해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정부 기관 사이의 견제와 균형만이 아니라 정당들 사이에서도, 나아가 사회 집단들 사이에서도 다양성과 다원성이 작동해야 한다. 이를 매디슨은 ‘모든 계급 구성원의 권리를 지키는 최선의 안전장치’라 불렀다.”

“김) 흡사 이런 논리로 이해된다. 이익이 있는 곳에 결사를 있게 하자. 열정이 있는 곳에 당파를 만들 수 있게 하자. 서로를 견제하게 하고 동시에 균형을 찾아가게 하자. 누군가의 야심을 다른 누군가의 야심을 통해 견제하게 하자. 누군가의 영향력을 다른 누군가의 영향력을 통해 제어하게 하자. 한 집단 이익을 다른 집단의 이익을 통해 독점하지 못하게 하자.”

“박) 매디슨의 공화정 설계 내지 사회 설계는 그 같은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데, 그것이 인간과 사회를 도덕적으로 만들자는 무력한 주장보다 훨씬 더 실효적이라고 보았다. 오늘날 다원주의라고 불리는 사회 조직 원리는 이런 식으로 현대 공화제 헌법 안에서 자리를 잡았다.”

 

 

(4)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의 원리

 

“김) 아마 이런 원리로 정부를 운영하고 사회를 움직여 나간다면 공적 결정에 도달하는 일은 매우 고통스럽고 오래 걸리는 일이 될 것 같다.”

“박) 그런데 놀랍게도 매디슨은 그게 필요하다고 말한다. 다시말해 ‘느리게 하는 것’의 가치를 강조한 것이다. 직접 민주주의는 사람들의 마음을 성급하게 만든다. 민중의 의지를 바로바로 확인하고 곧바로 실행하자는 조급한 열정을 부추기는 문제가 있다. 민중의 직접 통치에서 서로 다른 이익과 열정 간 심의와 조정, 협의와 타협은 일어나기 어렵다. 그에 반해 시민의 의지를 여러 중간 집단들에 의해 다양하게 조직하고 표출하고 서로 균형을 만들어 가게 하는 대의제나 공화정의 접근은 상호 공존과 절제, 관용을 필요하게 만든다. 오래 걸리지만 오래 가는 변화는 이런 조건에서만 가능하다.”

“김) 조급하게 이루어진 결정, 관련 이해당사자들의 숙고와 합의가 충분하지 않은 결정은, 빠르다는 장점은 있을지 모르나 그 결정을 집행하는 단계에서 더 많은 갈등 비용과 더 많은 시간의 소요를 불가피하게 만든다. 일방적으로 추구된 변화는 혼란을 거듭하다가 '현상의 고착'으로 이어질 때가 많다.”

“박) 결정의 과정에서 숙고와 합의의 비용을 치르게 되면 집행의 과정은 안정된 협력을 통해 더 적은 갈등과 더 짧은 시간에 추진될 수 있다. 매디슨의 민주 공화정이 지향했던 것은 바로 이런 정치, 이런 사회였다.”

“김) 국회의 긴 심의 과정에서 보듯, 공적 사안은 '숙고된 결정'을 필요로 한다. 민주주의 국가들의 입법은 숙려, 심사, 청문, 조정 등의 과정을 거쳐 느리게 이루어지도록 까다로운 절차를 갖는다. 그렇지 않고 한 나라의 법이 빨리, 많이 만들어진다면 그것은 ‘긴급명령체제’에 가깝게 될 뿐 민주주의로부터는 멀어지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박) 그래서 공적 결정의 집행은 ‘합의된 변화’라는 성격을 갖는 것이다. 선한 의지를 가진 사용자라 해도 노사 간 교섭과 협상 없이 큰 규모의 기업을 운영할 수는 없듯, 정의감을 가진 다수당이라 해도 입법을 혼자 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럴 수만 있다면 의회 없이 당정관계를 통해 정부를 운영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하지만 의회 없는 체제를 누구도 민주주의라고는 하지 않는다. 민주주의에서라면 중요한 정책일수록 여야는 물론 그로 인해 혜택을 보는 시민 집단과 불이익을 받는 시민 집단 사이에서 충분한 조정을 거쳐 집행되어야 구속력을 갖는다. 여당과 그 지지자만 정당성을 인정하는 입법이 많아지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불안해진다. 빨리한다고 좋은 것은 아니다. 최소한 정치는 그렇다.”

“김) 속도로 따지자면 권위주의나 전체주의를 따라갈 수 없다. 그에 비해 대의 민주주의는 느리고 복잡한 절차와 과정을 거쳐 결정과 집행이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어떤 체제보다 더 오래 지속되고 있고,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사회를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민주정도 공화정도 완전할 수 없겠지만 그간 인간이 만든 체제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었다.”

“박) 더 보완하고 발전시켜야 하겠지만, 현대 민주 공화정을 그 원리에 맞게 더 심화, 발전시켜야 할 이유는 아직 많이 남아있는 게 아닌가 싶다. 아직은, 아니 앞으로도 상당 기간은 대의 민주주의, 민주 공화정의 시대일 것이다.”

“김) 민주공화정의 역사적 기원과 기본 원리를 이해하는 데 유익한 대화였다. ‘대표 있는 민주주의’, ‘좋은 정치가가 이끄는 민주주의’를 이론적으로 옹호할 수 있는 논의가 아니었나 싶다.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우리 정치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꿔갔으면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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