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없는 민주주의 - 2

공식 관리자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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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없는 민주주의

 박상훈・김성희

 

 <대화를 시작하며> 정치 없이 존립 가능한 사회는 없다


1장. 정치 실종 시대의 11가지 모습

1. 법률가 정치 전성시대

2. 정치 안 하고 군림하는 대통령

3. 정치가 대개조,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

4. 반대할 수 없는 적폐 청산

5. 처벌과 척결의 정치

6. 여론 아첨 정치

7. 열성 지지자 동원 경쟁

8. 검찰개혁을 앞세운 정치

9. 죽음을 부르는 정치

10. 매일 국민투표 하는 민주주의

11. 독선과 오만이라는 정치의 적

 

2장. 정치 몰락을 가져온 국민주권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운명은 좋은 정치인에 달렸다

2. ‘국민주권 민주주의’가 정치의 몰락을 낳았다

(1) 예기치 않은 선택 : 촛불 혁명과 국민주권 민주주의

(2)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이유

(3)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파멸적 귀결

3. 민주공화국,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나

(1) 공화정이면서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길

(2) 정제와 확대의 원리

(3)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

(4)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의 원리

 

3장. 정치, 정치답게 제대로 하자

1. 시민 분열의 양극화 정치 대신 연합 정치의 길 열자

2 ‘대통령 뽑기 민주주의’에서 ‘좋은 정치 가능한 민주주의’로 바꾸자

3. 다원 민주주의의 길을 넓히자

4. 청와대 정부 개혁, 모든 일의 전제임을 분명히 하자

(1) 청와대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반하기 때문이다

(2) 청와대 정부로는 큰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3) 큰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을 혹사시키고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4) 정부조직법대로 하자고 해야 한다

5. 국회도 정당도 변해야 한다

(1) 국회는 입법 공장이 아니다

(2) 권력 기관화된 정당의 모습도 돌아봐야 한다

(3) 정당 책임 정치의 길로 가야 한다

(4) 인재 영입보다 인재 육성하는 당이 되어야 한다

(5) 국민경선과 캠프정치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6) 정당이 선거와 정권 인수를 주도해야 한다

6. 대통령제, 그 기원으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1) 대통령이 문제다

(2) 대통령제는 어떻게 탄생했나

(3)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과 공화주의 원칙

(4) 대통령제는 강한 정부를 위한 게 아니다

(5) 대통령제 문제보다 대통령직 수행 문제를 말해야 한다

7. 대통령직의 민주적 운영을 약속해야 한다.

(1)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 다른 정부 운영을 필요로 한다.

(2) 대통령제, 빠르고 강한 결정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3) 1987년 헌법, 5년 단임 대통령제 정부를 만든 이유를 존중하자

(4) 대통령직 인수 방법부터 달리 하자

(5) 책임 정부가 민주 정부다

 

<대화를 마치며> 다르게 살고, 느리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두 대화자 소개

박상훈과 김성희는 국회로 출근한다. 박상훈은 국회미래연구원의 초빙연구위원으로 있다. 자신을 ‘구식 정치학자’라고 생각하는 정치학자다. 정치에 있어서 잘 변하지 않는 것, 오래 가는 특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정치와 노사관계를 현대 민주주의를 이끄는 양날개로 여긴다. 김성희는 21대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왔다. 독일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관심이 있고, 이를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좀 더 나은 한국 정치를 조망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김성희와 박상훈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사단법인) 정치발전소>를 만들고 이끌어왔다. 김성희는 상임이사를, 박상훈은 정치학교장을 맡아서 정치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치학의 지혜를 강의나 토론의 형태로 공유하는 활동을 같이 해왔다. 회원들과 함께 독일 정치기행, 일본 정치기행, 이탈리아 마키아벨리 정치여행을 다녀왔고, 미국 민주주의 기행을 준비하던 중에 감염병 팬데믹 때문에 잠시 멈춘 상태다. 하지만 좋은 정치에 대한 토론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하고 있다.



1장. 정치 실종 시대의 11가지 모습

 

1. 법률가 정치 전성시대

 

“김) 정치의 실종을 걱정해야 할 때지만, 그래도 변화는 지금의 정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정치 싫다고 말하기는 쉬우나, 대안을 말하고 변화를 실현하는 일은 어렵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정치에 대해 비판하면서도, ‘냉소의 언어’가 아니라 ‘가능성의 언어’로 이야기했으면 한다. ‘가능의 예술’이라는 정치의 별칭답게, 제대로 실천하고자 하는 정치가를 격려해주는 방향이면 좋겠다.”

“박) 좋은 문제의식이다. 동의한다. 최대한 그렇게 하도록 노력하기로 하자.”

“김) 문재인 대통령 집권기도 정치 실종의 시대로 기록될 것 같다. 정치 지도자로서 역할을 해주길 바랐지만, 정치 그 위에 존재하는 국가 지도자이길 바랐다.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이어 문 대통령도 의회정치나 정당정치를 멀리했다. 대통령이 빠진 정치에서 여야는 극단적인 대리전을 벌였다. 여야가 갈등하고 대립하면서도 결국 합의를 통해 변화를 함께 만들어가는 전통적인 정치의 모습은 사라졌다. 여야 사이에서 정치의 역할이 나빠지면서 2020년 기준으로 의원 1인당 평균 5건 가까이 고소, 고발에 휘말리는 상황이 되었다. 폭로와 소송전이 빈번해졌고 서로 검찰의 기소와 법원의 처벌을 경쟁적으로 요구하는 시대가 되었다. 정치가가 역할을 해야 할 국회마저도 이젠 변호사, 검사, 판사 출신들이 주도한다. 20대 대선은 그 결정판이었다. 주요 정당의 대선 경선에 나선 후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법률가 출신이라는 데 있었다. 법학과 졸업자를 기준으로 하면 사실상 거의 모든 경선 후보들이 이에 해당한다. 승자가 된 주요 대선 후보도 법률가 출신으로, 정치의 초심자이거나 정당정치의 아웃사이더들이다. 다선 의원도, 정당 대표와 국회의장을 지낸 전업 정치가도, 총리 출신도 경선에서 완패했다.”

“박) 경선 패배 이전에 스스로 정치가다움을 버린 것이 먼저 있었던 일이 아닌가 한다. 여야 어느 쪽의 경선을 보더라도 정치의 역할을 두고 쟁점이 형성되지 않았다. 그보다는 분노나 복수심 같은, 일종의 반(反)정치적 ‘두려움의 동원(mobilization of the fear)’이 경선을 지배했다. 그런 점에서 정치의 실종은 곧 ‘정치가의 실종’을 동반한 현상이라 봐야 할 것이다.”

“김) 법은 과거에 행해진 일을 따진다. 정치는 앞으로 행해질 일을 다룬다.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논의하고 결정하는 일은 정치의 역할이다. 법정에서 판사가 우리 사회의 미래 비전을 발표하거나, 검사나 변호사가 국정과제를 두고 경합한다면 이상할 것이다. 법치(法治)는 필요하고 법률가의 역할도 중요하지만, 법치가 정치의 역할을 대신할 수는 없다고 본다. 법률가보다 정치가의 역할이 살아나야 민주주의도 미래가 있다.”

“박) 민주주의란 '정치가들이 통치하는 체제'를 뜻한다. 시민 통치나 다수 지배가 민주주의 아니냐고 항변할지 모르나, 시민도 다수도 통치하고 지배할 수 없다. 그들의 적법한 대표로서 정치가와 그들의 결사체인 정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다. 영국인들은 민주주의를 ‘가장 최근 선거에서 다수 시민의 지지를 받은 정당이 정부가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정당과 소속 정치인들이 주권을 위임받은 임기 동안 공공정책을 주도해야 민주주의라는 것이다.”

“김) 독일을 대표하는 사회학자 막스 베버의 정치관은 더 현실적이다. 베버는 민주주의를 가리켜 ‘정치가 직업이자 생업이 되는 체제’라고 정의했다. 정치하는 일이 부업이자 무급 봉사직인 체제는 귀족정의 특징이다. 세비가 없다면 돈 걱정이 없고 시간 여유가 많은 소수 집단이 정치를 지배한다. 정치가 자신의 직업 활동에 도움이 된다고 여기는 변호사들의 관직 사냥터로 정치가 전락하기도 쉽다. 따라서 베버는 가난한 시민도 가족을 건사할 소득의 기회를 상실하지 않고 정치가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때 비로소 ‘평등한 참여’와 ‘평등한 대표’의 원리가 작동하는 민주주의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왜 ‘정치가에 의한 대리 정치’냐며 ‘시민의 직접 정치’가 진정한 민주주의라고 반론하는 사람이 많다.”

“박)안타깝지만, 그 결과는 ‘참주(tyrant)’의 출현으로 이어진다. 요즘 말로 하면 '포퓰리스트'가 승자가 된다는 뜻이다. 그렇게 되면 ‘시민은 자유롭고 정치가는 책임을 진다’는 공화정의 원리는 역전된다. 통치자의 자유를 위해 시민이 통치자에게 헌신하는 정치가 된다는 뜻이다. 통치자에게 책임을 부과할 길도 없다. 오히려 그를 지켜주지 못해 시민들이 미안해해야 한다.”

“김) 정치를 이해하지 못하는 정치의 초심자나 아웃사이더들은 의회나 정당보다 여론을 따른다. 시민참여와 여론조사는 그들의 종교다. SNS와 시민 팬덤은 그들의 무기다. 그 위세가 클수록 지식인과 전문가의 굴종을 얻기도 쉽다. 여론조사만 잘 나오면 정당도 결국에 가서는 대통령 후보 개인에게 굴복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계산이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박) 정당들이 잘못해서다. 정당 책임이다. 우리 정당들은 자신의 후보를 길러낼 능력을 스스로 버렸다. 선거 때마다 정치가를 물갈이하는 것을 개혁이라 착각했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을 영입하는 것을 승리 전략으로 여겼다. 당연히 정당에 들어가 정치를 배우고 익힐 유인이나 자극이 생길 리 없다. 정치를 모르는 사람이 정치할 기회를 더 쉽게 얻는 역설의 정치가 되었다. 그 자리를 법률가들이 장악했다. 누굴 탓하랴. 정당정치를 스스로 버린 정당들의 자업자득일 뿐!”

 

2. 정치 안 하고 군림하는 대통령

 

“김)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는 대통령 중심이다. 대통령을 거의 국가와 같은 권위체로 여기는 정치 문화는 강하다. 대통령 스스로도 자신을 정치와 거리를 두고, 정치 위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대통령은 야당과 대화하지 않고 국민과 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국회에 와서 시정 연설을 할 때도, 함께 정치하는 동료들에게 연설하는 형식이 아니다. 장소와 상관없이 카메라를 앞에 두고 ‘국민 여러분’을 호명하는 연설 형식이 대통령의 말과 시선을 지배한다. 대통령은 여야 정치인들을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국가를 책임지고 국민을 대표하는 위상을 갖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 점에서 문재인 대통령도 앞선 대통령들과 다르지 않았다. 선거 당일까지만 정치인이었을 뿐, 대통령이 되는 순간 정치인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처럼 행동하는 데 금방 익숙해졌다.”

“박) 권위주의 시기라면 체제의 성격상 대통령 중심으로 돌아가는 게 자연스럽다. 민주화 이후 35년이 지나는 동안에도 여전히 그렇다면, 그건 문제다. 대통령이 법을 제정하고 집행하고 적용하는 모든 과정을 지배하는 권위주의와는 달리, 민주주의는 '원리상' 그래서는 안 된다.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수도 없는데도, 계속 그래왔기 때문에 민주주의도 잘 안 되고 대통령들도 현직 때나 퇴임 후에 모든 탓을 들어야 했다. 대통령제 민주주의가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에 대해, 우리 대통령들은 완전히 착각하거나 오해했다.”

“김) 대통령직이 큰 힘을 갖는 것처럼 보일 뿐, 사실 그렇지는 않다. 임기 초는 지지율도 높고 사람들의 기대감도 커서 쉽게 착시 현상을 갖게 한다. 하지만 지난 대통령들이 주도했던 변화나 개혁의 성과를 놓고 보면, 사실은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대통령의 성취는 빈약하다. 이명박 대통령의 4대강과 녹색성장, 박근혜 대통령의 창조경제와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가 대표적인 예이다. 문재인 대통령의 적폐청산과 검찰개혁도 별다르지 않았다. 대통령들이 감옥에 가고 탄핵도 되는 상황에서, 한국의 대통령제를 강력한 제도로 보는 것은 어딘가 이상한 일이다.”

“박) 대통령 권력은 그 자체로 강할 수가 없다. 엄밀히 말해 대통령은 행정 수반이다. 입법-행정-사법부 사이에서 상호 견제와 좋은 균형을 도모하며 실체적 변화를 이끌 때만 능력을 발휘한다. 그럴 때만 대통령의 존재는 빛난다. 그게 민주적 대통령의 모습이다. 여야와 국회가 중심이 되는 정치과정 속에서 일을 풀어가지 못하면 대통령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사실 그게 대통령제 민주주의의 가장 큰 특징이다.”

“김) 권위주의 대통령은 ‘명령’으로 일을 한다. 하지만 민주주의 대통령은 '정치의 힘'으로 일한다. 비판적 언론 앞에 서야 하고 반대하는 야당도 만나야 한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은 일주일에 평균 한 번 이상 기자들과 만나 질문에 답하는 시간을 가졌다. 오바마 전 대통령은 '8년 경험이 어땠냐'는 질문에 ‘야당 의원 만나 점심 먹고 농구공 사인해 선물하며 협조를 부탁하는 일로 대부분 시간을 보낸 것 같다.’고 말한 적이 있다.”

“박) 민주주의는 '지시하는 권력'이 아니라 '관계하는 권력'에 익숙한 대통령을 필요로 한다. 입법-사법-행정 기능 전체를 압도하는 '개혁 군주'여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정치의 방법으로 일하는 대통령을 두고 민주적 통치자라고 하기 때문이다. 야당과 국회, 언론과 거리를 두라거나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확대하라고 조언하는 참모를 멀리할수록 대통령은 민주적이 된다.”

“김) 야당과의 만남이나 기자회견이 대통령의 '연례행사'가 아니라 '일상 업무'임을 이해하는 대통령일수록 민주적이라고 본다. 민정-인사-정무수석을 두지 않는 대통령, 교수 출신 정책실장을 두지 않는 대통령, 국가안보실 대신 외교부와 통일부의 역할을 중시하는 대통령일수록 민주적이다.”

“박) 공공정책의 입안은 집권당(government party)이 주도하고 공공정책의 집행은 총리와 내각이 할 역할이라며, 그게 아니면 언제 정당 정부(party government)의 이상을 실천하겠냐고 따져 묻는 대통령일수록 민주적이다. 책임총리-책임장관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대통령일수록 민주적이다. 청와대가 '개혁의 센터'가 아니라 당정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고 보는 대통령일수록 민주적인 정치 지도자다.”

“김) 그렇게 대통령직을 수행한 사례가 많지 않다 보니, 우리 사회의 모든 힘과 열정, 에너지, 시기, 질투, 복수심, 음모, 게다가 진심과 선의, 정의감까지 ‘대통령 전쟁’에 동원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대통령제와 민주주의가 병행 발전할지, 깊이 생각해볼 때다. 대통령 자리가 민주주의 발전에 부담이 되는 일을 계속해서는 안 된다. 대통령제를 이해하는 것부터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진지하게 돌아볼 일이다.”

 

 

3. 정치가 대개조,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

 

“김) 야심 있는 대통령일수록 스스로를 국가 개조자처럼 여기는 듯하다. 정견을 달리하는 시민들과 수많은 이해 당사자들, 여야 정당과 비선출직 공직자들 사이에서 이견을 조정하는 역할이 아니라, 나라를 구하고 나라를 바꾸는 약속을 해야 대통령다운 것처럼 착각하는 것 같다. 정치가 실질과 상관없이 구호 외치기처럼 되는 문제도 생각해볼 일이다.”

“박) 정치가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게 민주주의다. 세상을 바꾸는 건 예술가, 발명가, 사회운동가, 기업가, 시인, 소설가, 스포츠선수, 언론인 같은 이들이다. 기술 문명의 혜택은 물론 문화와 사유의 풍요로움, 탁월한 신체 활동, 놀라운 인간 정신 등은 모두 이들의 특별한 발상과 도전, 문제 제기 덕분이었다. 정치는 이들이 자유로울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에 본래의 소명이 있을 뿐, 이들을 대신해 세상을 구하고 바꾸려 할 수는 없다.”

“김) 정치는 독재로 할 수 없고, 혁명의 방법으로도 될 수 없다. 그보다는 다양한 시민 집단이, 노사관계를 통해서든 창작과 창업의 형태로든 아니면 연대와 협력의 사회운동을 통해서든, 자신들의 세계를 스스로 바꿔나갈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 정치의 참된 역할은 여기에 있다. 시민 집단들 사이의 차이와 다름이 적대와 대립이 되지 않도록, 공존과 타협, 조정을 하는 것이 정치다.”

“박) 정치는 ‘옳음’이 아니라 ‘좋음’을 추구한다. 옳음을 강변하는 아버지가 자녀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존재가 되듯, 옳음을 앞세우는 정치에서는 자유도 정의도 평등도 반쪽짜리가 된다. 다름이 인정되어야 서로 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이해된다. 서로의 옳음이 오해나 음모의 산물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면 상호 공존할 수 있는 좋은 선택을 찾게 된다. ‘다 너를 위해 그런 거야.’를 앞세워 부모의 선택을 강변하는 것이 부모의 좋은 역할이 아니듯, 정치의 좋은 역할이란 시민들이 서로 다른 열정과 이해관계, 관심과 신념, 가치를 갖고 있다는 것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김) 정치는 시민을 위해서 존재한다. 시민이 정치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다. 장 자크 루소의 말로 표현하면, 정치는 '시민적 자유'를 위해 존재한다. 시민적 자유란 만인의 공권력이라 할 국가나 정부가 없는 자연 상태에서 인간이 자신의 안위를 위해 뭐든지 할 수 있는 '자연적 자유'를 상실하는 대신 얻게 된 자유를 가리킨다. 최종 결정권을 가진 시민이 주권자로서 누리는 자유를 가리킨다. 루소에 대한 강의에서 당신은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분열되어 있는 사회 속에서 시민 스스로가 할 수 없는 일이기에 국가나 정치가 하나의 시민 의지를 만들고 강제하는 역할을 해줘야 하는 것은 아닌가?”

“박) 루소가 말하고자 하는 바의 핵심은 『사회계약론』 맨 앞에 나오는 표현인 모두의 '공평한 협정'을 통해 국가를 운영하는 것에 있다. 특정 시민 집단만을 위한 국가도 아니고, 국가가 하고자 하는 일에 일부 특수 집단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 일반의 공통 의지를 실현하는 국가를 만들고 그 속에서 누구든 자유롭게 발언하고 경쟁하고 협동할 수 있는 공동체를 가꿔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것이 '일반의지'와 '민중 주권' 그리고 '사회계약'이라는 개념을 통해 루소가 진정으로 말하고자 했던 바다.”

“김) 최근의 우리 정치사에서 '루소적 모멘트'에 가까운 것이 있다면, 단연 '2016년 촛불집회'가 아닐까 한다. 잘못된 정부 운영에 항의해 진보는 물론 온건 보수까지 아우르는 시민이 참여했고 여론의 90% 이상이 지지했다는 점에서, ‘일반의지의 형성’ 내지 '시민사회적 대연정'이라 부를 만한 일을 성취해냈기 때문이다.”

“박) 그것의 다른 짝은 국회에서 만들어진 '탄핵 정치동맹'이었다. 입법부에서 대통령 탄핵에 찬성한 의원의 비율이 3분의 2를 넘었고, 여당에서도 절반 이상의 의원이 함께했다. 자연스럽게 헌법재판소 탄핵 심판을 청구한 국회의 탄핵소추는 새누리당, 민주당, 국민의당, 정의당 의원들로 추진되었다. 의회정치, 정당정치가 멋진 제 역할을 해냈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김) 이때의 4당 정치동맹을 유지하지 못한 게 못내 아쉽다. 촛불집회 직후에 있었던 19대 대선에서 승리한 후보가 투표 참여자 가운데 41%의 득표에 그쳤다는 사실도 존중되었어야 했다. 그것이 말해주는 바는 승자독식이 아닌 승자연합을 만들어 일하라는 것이었다. 그랬더라면 정치의 본래 의미가 살아났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여러 난제를 ‘갈등을 절약해’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구체제 개혁에 대한 폭넓은 '촛불 합의'를 기반으로 실질적이고 실체적인 변화를 모색할 더없이 좋은 기회가 그때 있었다. 그랬더라면 많이 달랐을 것이다.”

“박) 안타깝게도 그 기회는 실현되지 못했다. 그 이전의 친이나 친박 정치처럼, 대통령과의 거리감에 의해 이끌리는 친문 정치가 다시 나타났다. '국가의 대개조'와 '역사의 국정화'에 이어 '적폐청산'과 '촛불 혁명',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나라'와 같이, 정치가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일을 밀어붙이는 일이 반복되었다. 이 일에 유익함이 있을 리 없다. 지금 한국 사회는 그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다.”

 

 

4. 반대할 수 없는 적폐청산

 

“김) 선거 때는 협치를 외쳤던 문 대통령이 갑자기 적폐청산을 앞세워 통치한 것은 의외였다. 게다가 적폐청산은 박근혜 대통령의 언어이기도 했는데 말이다. 과거사 청산이 정치의 역할과 양립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있지만, 더 허탈한 것은 그렇게 해서 바꾼 게 뭐냐는 것이다. 이번에는 문 대통령이 적폐로 지목했던 세력이 정당성을 얻게 되고 이제 그들이 복수의 정치를 꿈꿀 기회를 갖게 된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최대 역설이다.”

“박) 민주주의를 처음 시작한 옛날 그리스인들은 대비되는 짝이 없는 정치 언어를 잘 쓰지 않았다. 자신의 의도만 일방적으로 발설하는 것으로는 누구의 생각도 바꿀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강제가 아니라 설득의 방법으로 움직인다. 설득은 말의 힘을 통해 실천된다. 말의 힘은 자신과 상대의 입장을 효과적으로 양립시키고 대조하는 것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들은 이를 대조법(antithesis)이라 불렀고 그 중요성을 강조했다. 당시 대조법을 가장 잘 표현한 사람은 그리스 최고의 수사학자 고르기아스였다.”

“김) 고르기아스라고 하면 ‘두려워서 타협하는 것이 아니라, 타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라는 표현으로 유명한 수사학자 아닌가? 그 표현은 프랭클린 루스벨트를 포함해 많은 정치가에 의해 애용된 것으로 알고 있다.”

“박) 고르기아스는 인간 감정의 흐름을 중시했던 수사학자였다. 대조를 이루는 표현을 통해 정치적 결정이 감당해야 할 현실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다. 타협은 서로 차이가 있음을 전제하는 정치 행위이다. 같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다르게 자유로울 수 있다. ‘다름의 배제’가 아니라 ‘다름의 공존’으로 더 풍요로울 수 있다. 그리스적 대조법은 현대 정치에서 갈등을 이해하는 데도 가치가 있다. 진보와 보수, 성장과 분배처럼 현대 정당정치를 설명할 때 사용되는 대표적인 표현을 생각해보자. 이런 대조어들은 정당의 이념적 특성은 물론 정당 사이의 경쟁이 어떤 내용을 갖는지를 분석할 때 유용한 지표가 된다. 진보와 보수, 분배와 성장의 가치를 둘러싸고 정당 간 갈등과 대립이 제아무리 격렬해도, 이러한 대립은 ‘민주적 가치’가 있다. 사회를 더 넓게 통합하는 효과도 있다. 이를 이해하는 사람이 정치를 해야 평화롭게 싸우고 평화롭게 변화할 수 있다.”

“김) 대립하는 복수의 관점과 입장은 ‘누가 더 공익에 부합하는가’를 두고 경쟁하는 정치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 같다. 전쟁에서와 같은 적대가 아니라, 공존의 틀 안에서 경쟁해야 하는 것이 정치 아닌가. 그런 의미에서 정치란 서로의 차이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인간 활동이라고 정의해야 한다.”

“박) 정치학자들은 이처럼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시민들이 공존하며 경쟁하는 체제를 ‘다원(多元) 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나아가 복수의 다원적 이견이 경합하는 정치가 일당제처럼 이견을 허용하지 않는 체제보다 더 자유롭고 풍요롭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고 보수나 진보 가운데 어느 한쪽만 살아남는 정치를 추구한다면, 현실에서 그것은 전체주의 이상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김)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와 무관한 현상이 아니라,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자 병리 현상이다. 민주화 이전의 비민주 체제를 흔히 권위주의라고 부른다. 반면 전체주의는 민주화 이후의 현상이며, 민주화 이전에는 나타날 수 없다. 민주주의를 한다고 하면서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억압하고자 하는 욕구를 멈출 수 없게 되면, 정치는 물론 개인 삶 역시 위태롭게 된다.”

“박) 누구에게나 이견과 다름이 불편하긴 하다. 하지만 육체와 영혼처럼 서로 다른 원리로 이루어진 것 때문에 발생하는 불편함을 피하고자 어느 한쪽을 없앨 수 없듯, 인간의 정치에서 다름과 이견은 없앨 수 없다. 분리된 육체와 영혼을 잘 양립시켜야 인간의 덕성이 좋아지듯, 노사의 다른 관점이 인정되어야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좀 더 통합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듯, 서로 다른 정견 사이의 대조를 통해 ‘정치적 이성’도 성장하고 민주주의도 번성한다. 이견을 통해 배우지 못하면, 민주주의는 없다.”

“김) 절대적으로 옳은 말, 반대할 수 없는 말은 좋은 정치 언어가 될 수 없다. 박정희정권이 앞세운 ‘구악일소’나 전두환정권의 ‘사회정화’를 생각해보자. 누가 구악이 일소되고 사회가 정화되는 것에 반대할 수 있을까?”

“박) 그 반대할 수 없는 말로 실제 한 일은 반대세력을 억압하고 배제하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여러 대통령들이 구악일소, 사회정화, 적폐청산을 추구했는데, 그게 합당한 일이 될 수는 없었다. 적폐 청산에 반대할 수 있을까? 대조어가 없는 말, 그래서 다른 의견을 가질 수 없는 말, 반대하면 적폐 옹호나 적폐 방조자 되는 말이 다원적이고 민주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는 없다.”

“김) 공직 사회 안에서 적폐청산 정책에 반대하면 ‘항명’으로 몰아붙였다. 이런 식의 적폐청산은 군사주의적 정조만 키울 뿐이었다. 적폐로 몰린 공직자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가 적지 않았다. 민주주의 하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 자체가 비극이다.”

“박) 대조어가 없는 정치 언어는 불합리한 적대를 양산한다. 싸움의 본능만 자극할 뿐, 자신의 논변을 대조적으로 더 설득력 있게 만드는 노력은 안 하게 만든다. 자신을 책임있게 돌아보는 윤리적 성찰의 힘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동료 정치인, 동료 시민 사이의 우애나 정중함 또한 사라지게 한다. 상대를 아프게 할 싸움을 하는 동안 서로의 표정은 비인간적이 된다. ‘시민을 웃게 만드는 정치’가 아니라 ‘비열한 웃음이 지배하는 정치’만 남는다. 공동체의 분열과 증오의 가속화도 피할 수 없다. 문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긴 쉬워도 치유는 어렵듯, 한번 분열된 공동체를 다시 복원하는 데는 적지 않은 시간과 고통이 따른다는 점이다.”

“김) 언제까지 ‘원한과 복수심을 자극하는 정치’를 계속할 것인가? ‘절대 용서 못한다.’라고 결의를 다지는 것이 어떻게 공동체를 합리적으로 개선하는 에너지가 되겠는가? 고대 그리스인들이 대조법의 정치 언어를 중시한 것과 관련해, 오늘날에도 돌아볼 점은 많아 보인다.”

 

 

5. 처벌과 척결의 정치

 

“김) 적폐청산의 정치가 시민들의 마음을 범죄 추궁자나 처벌 집행자처럼 만든 것도 문제다. 서로의 차이와 이견에도 불구하고 공동의 노력을 기울이게 하는 게 정치의 역할이라면 그런 역할이 발휘되기 어려운 상황이다. 상대를 악마화하고 그에 상응해 더 강력한 법적 강제와 처벌을 요구하는 사회 분위기는 여야 진영 모두에서 심화되었다. 누구든 한순간에 처벌 대상자로 몰려 불행한 운명을 맞이하게 되는 위험천만한 상황이다.”

“박) 법치’(Rechtsstaat) 없이 민주주의 없다는 것은 맞는 말이다. 강자도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 ‘법의 지배(rule of law)’ 없이 정의의 원칙을 세울 수는 없다. 하지만 법치와 정치는 엄연히 다르다. 정치의 역할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인간 사회는 없다. 법률가는 이미 행해진 과거의 행동을 다룬다. 그들은 법의 정의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을 제재하고 처벌한다. 반면 정치가로서 입법자의 시야는 미래에 있어야 한다. 시민주권을 위임받기 위해 정치가들이 내놓는 공적 약속이 과거로 향하는 경우는 드물다. 법이 과거의 부정의를 단죄함으로써 정의로운 미래를 여는 데 기여할 수는 있지만, 법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갈등과 적대 사이에서 사회를 통합하고 공동체를 한발 앞으로 이끄는 일은 정치만이 할 수 있다. 법치나 법의 지배는 권위주의나 독재 때도 작동할 수 있지만, 민주주의가 정치의 역할 없이 선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김) 2014년 세월호 침몰사고로 위기에 몰렸을 때 박근혜 전 대통령은 ‘국가 대개조’와 ‘적폐청산’을 들고 나왔다. 이 과정에서 대통령은 ‘매일 싸움질만’ 한다며 국회와 야당을 은근히 적폐 국회, 적폐 야당으로 몰아갔다. 2015년에는 한국사 국정교과서 정책을 들고 나왔다. 기존 교과서는 ‘좌편향’의 적폐 교과서가 되었다. ‘귀족 노조’와 ‘운동권 세력’은 ‘좌익 적폐’가 되었다. ‘종북 척결’도 적폐청산의 과업이 되었다. 모든 것이 ‘국가 대개조에 힘쓰는 대통령’과 이를 방해하는 ‘적폐 세력’ 사이의 싸움으로 정의되었다. 이 싸움에 적극적이지 않은 집권당 내 이견 그룹에 대해서는 ‘배신자’라는 낙인이 부여되었다. 민주 정치의 역할은 사라지고 모든 게 적폐를 청산하기 위한 역사적 투쟁으로 치환되어 버린 것이다.”

“박) 적폐(積弊)는 옛날 말 같지만 옛날 말이 아니다. 1890년대부터 해방 이전까지 60년 동안 신문에서 - 폐단이라는 말은 있었어도 - 적폐라는 단어가 등장한 예는 찾기 어렵다. 그 뒤에도 ‘조국근대화’나 ‘구악일소’라는 말은 썼지만, 적폐나 적폐청산이란 말은 잘 안 썼다. 1993년 집권한 김영삼 정권 시기 ‘신한국 건설’을 위해 ‘30년 적폐를 씻어내(자)’는 정도가 정부의 공식 담론으로는 처음이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그렇다고 적폐라는 표현이 많아진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권 이전 25년 동안 국회 발언 가운데 적폐라는 단어가 등장한 예는 단 15회에 불과했다. 반면 박근혜 정권 시기 그 빈도는 500회 가까이 되었다. 세월호 관련한 사회적 비판이나 야당의 반대를 제어하고 갈등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한 것이 그 이유였는데, 흥미로운 것은 그 결과다. 적폐청산과 국가 대개조가 앞세워지면서 대통령은 책임 있는 정치 행위자의 한 사람이 아닌, ‘정치 위의 국가’와 동일시되었다. 한 명의 정치가로서 의회나 야당과 함께 일하기보다는 자신을 ‘국가 지도자’로 잘못 여기고 정치 밖에서 정치를 향해 야단치고 지시하고 요구하기만 했다. 이를 위해 열성적인 지지자들이 대거 동원된 것도 중요한 특징이었다.”

“김) 2015년 10월 열성 지지자들이 나서서 <국회개혁범국민연합>을 결성했다. 뒤이어 천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되었다. 역사상 최초로 현직 대통령이 국회를 압박하는 이 국민운동에 참여하는 일도 이때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대통령은 스스로를 국민과 동일시하며 정치로부터 멀어졌는데, 이듬해 총선 패배와 함께 정치로부터 소외되고 말았다. 그뒤 대통령은 청와대에 은둔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끝이 무엇이었는지는 우리 모두가 잘 안다.”

“박) 3공화국 때의 구악일소나 5공화국 때의 사회정화처럼 적폐청산은 ‘반대할 수 없는 말’이다. 반대할 수 없는 것이 국가 목표가 되면 이견은 허용될 수 없다. 이견이 억압되면 토론과 협상을 생명으로 하는 민주 정치는 숨을 쉴 수가 없다. 누가 구악일소에 반대할 수 있고, 사회정화를 하지 말자고 할 수 있으며, 적폐청산은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민주주의에서 정치는 공동체의 미래를 둘러싸고 진보와 보수 사이의 창조적 경쟁을 이끌 때만 선한 효과를 발휘한다. 적폐를 둘러싼 과거사 전쟁은 적대와 증오, 분열과 상처, 원한과 복수의 열정을 키운다. 공안 당국의 위세만 키우고, 공동체를 분열시키며, 지지자들 사이에서 공격적인 심성만 자극한다. 박근혜 정권은 그 때문에 몰락했다. 이후 모든 정권은 박근혜 정권처럼 하지 않아야 할 교훈을 얻었어야 했다. 앞으로의 정권들도 예외일 수 없다. 정치는 정치답게 해야 한다.”

 

 

6. 여론 아첨 정치

 

“김) 대통령만이 아니라 국회의원들도 다른 정당 의원들을 동료 정치가로 대우하지 않는다. 정치를 잘한다는 의미가 잘 싸우고 잘 몰아붙이는 것처럼 되었다. 언론 기사에 자신의 이름이 자주 나오는 것을 정치 잘하는 것으로 착각하는 의원도 많다. 홍보나 메시지 올리는 일에 경쟁적으로 매달리는 게 우리 정치인들의 일상이 되었다. 지금 정치를 뭐라 불러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박) 국회 보좌진들과의 세미나 자리에서 ‘여의도 렉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정치권을 상징하는 ‘여의도’와 견인차를 뜻하는 ‘렉카’의 합성어로, 국회 관련 비공식 커뮤니티에서는 이미 익숙한 용어란다.”

“김) 온라인에서 이슈가 생길 때마다 짜깁기 영상을 올려 조회 수를 늘리고 그러다 아니면 말고 식의 행태를 가리키는 ‘사이버 렉카’라는 말의 '국회 판'인 것 같다.”

“박) 세미나 토론자였던 주00 비서관은 ‘여의도 렉카 현상으로 본 우리 의회정치’라는 발표문에서 여의도 렉카를 이렇게 정의했다. ‘(사고 현장에 먼저 도착하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는 렉카처럼) 단시간에 쟁점이 된 사안에 먼저 개입해 정치적 이득을 획득하고자 하는 행태 혹은 그런 행태를 보이는 정치인들을 낮잡아 이르는 신조어.’라고 말이다.”

“김) 주 비서관이 지적한 문제를 국회 보좌진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다. 렉카 정치는 몇 개의 단계 내지 구성 요소를 갖는다. 첫째는 일단 어느 한 진영의 편에 서는 것이다. 둘째는 이슈의 당사자를 향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것이다. 셋째는 관련 국가기관의 개입을 촉구한다. 넷째는 사안과 관련한 법안을 발의한다. 다섯째는 이상의 과정에서 여론의 관심을 얻고 입법 실적도 쌓았으니 그 뒤에는 사실 ‘나 몰라라’ 한다.”

“박) 주 비서관은 남들보다 빨리 이슈에 개입해 주목을 받고, 추후 발생하는 갈등과 책임은 국가기관에 떠넘기고, 또 다른 이슈에 빠르게 출동하는 것으로 정치 활동을 하는 것, 그게 렉카 정치의 본질이라고 말한다.”

“김) 렉카 정치는 심화되고 있는데, 그 원인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계량화 만능의 실적주의’다. 당 지도부는 의원들의 언론 활동과 입법 활동 등을 모두 건수로 제출하게 하는 방식으로 통제한다. 국회의 본래 기능인 갈등조정과 사회통합 기능을 중시할 여유는 사라지게 만들었다. 의원들 사이의 우애나 동료애는 찾아볼 수 없다. 법안 발의와 언론 노출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게 국회다. 의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무능을 입법 실적으로 면피한다. 언론에 자주 노출되면 무능함을 유능함으로 분식할 수 있다. 법안의 수나 언론 기사의 빈도로 의정활동이 평가되는 상황에서 렉카 정치는 효과적이다. 둘째는 정치영역이 협소해졌기 때문이다. 여야 사이의 적대와 대립이 극심해지면서 의원들이 정치력을 발휘할 공간은 좁아졌다. 여야 대결상황이 풀린다 해도 원내대표 간 일정이 합의될 때까지, 의원들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가까스로 국회 일정이 시작된다고 해도, 처리 안건은 원내 지도부와 간사 간 합의에 따른다. 개별 의원이 할 수 있는 일은 상임위 전체 회의에서 행정부에 질의하는 정도다. 의원들은 ‘스스로 빛나고 싶어 하는’ 특별한 존재다. 단시간에 이목을 끌 수 있는 어떤 이슈라도 찾으려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빛나야 한다. 의원들의 마음 상태를 이렇게 이끄는 양극화된 진영 정치가 여의도 렉카를 부른다.”

“박) 렉카라고 조롱받는 정치는 정치가 아니다. 상황이 나빠졌어도, 의원은 시민 대표이자 입법자로서 책임 있고 권위 있는 역할을 해야 한다. 여론에 아첨할 의제가 아니라 진정으로 중요한 의제를 챙겨야 한다. 법안을 남발하는 의원은 비난받아야 한다. 꼭 필요한 법안을 충분히 준비하고 검토해 발의하는 의원이 더 좋게 평가받아야 한다. 절박함을 호소하는 이해당사자를 만나고 갈등을 조율하고 현실적인 최선을 찾아내야 한다. SNS에 올린 글로 기사에 나는 렉카 의원도, 그런 기사를 쓰는 렉카 언론도, 민주 정치의 파괴자로 취급받아야 한다.”

“김) 정치인이 존경받지 못하면, 언론이 언론답지 못하면, 민주주의의 미래는 없다. 여의도 렉카라니, 우울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주 비서관이 우리 정치의 문제를 잘 지적한 것 같다.”

 

 

7. 열성 지지자 동원 경쟁

 

“김) 당내 대선 경선이 강한 의견을 가진 소수 지지자 집단에 의해 주도되는 문제가 극도로 심해졌다. 양적으로 보면 국민선거인단이나 권리당원, 사이버 당원 등 여러 형태로 시민참여는 크게 증대되었다. 그런데 정당의 자율성 내지 자생적 기반은 약화되었다. 일상적 정당 활동에 참여하는 당원의 역할만 무의미하게 만들었다. 당내 경선은 후보 진영 사이에서 서로에 대해 상처를 주는 일을 함부로 하게 만든다. 서로 간의 오해와 편견은 걷잡을 수 없다. 지지자들 사이의 갈등도 격렬하다. 큰 몫을 두고 투기적 경합을 하는 ‘떴다방 정치’ 비슷하게 되는 건 아닌지 모를 정도다.”

“박) 민주주의란 '투입 지향적인(input-oriented) 정치체제'를 가리킨다. 사회 속의 다양한 이익은 자율적 결사체들에 의해 조직되고 대표된다. 이들의 요구를 공공정책으로 집약해 내는 것은 정당의 역할이다. 입법과 예산으로 전환하는 일은 의회가 주도한다. 이익 정치, 정당 정치, 의회 정치의 삼박자가 사회적 합의 형성의 기초가 되고, 그 위에서 행정부의 산출(output) 기능이 발휘되는 것을 민주주의라 한다.”

“김) 권위주의에서 벗어난 지 34년이 지났는데도 행정 수반인 대통령이 정치과정 전반을 지배하는 일은 계속되고 있다. 당연히 대선 후보를 둘러싼 당내 경선도 사활적인 것을 넘어 기형화된 열전을 부추긴다. 대선 후보가 되려는 사람일수록 자신만의 열성 지지자를 동원할 능력이 중요해졌다. 그런 열성 지지자 동원이 기형적이라는 것은, 누가 상대 경쟁 후보를 거꾸러뜨릴 수 있는가 하는 부정적인 의미의 행위가 지배하기 때문이다.”

“박) 당내 경선이 오랜 당원이나 대의원이 아니라 일반 여론에 영향을 더 크게 받음에 따라 정당 안에서 정치인이 성장하지도, 후보가 되지도, 대통령이 되지도 못하는 시대가 열렸다. 여론을 양분시켜 한쪽에서는 적대의 대상이 되고 다른 쪽에서는 복수 의식을 자극하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시대가 되었다. 대통령이 되려는 사람은 국회와 정당 밖에서 일을 도모하려 한다. 당 밖에서 지지 여론을 만들어 당에 진입하는 것이 효과적인 시대가 되었다. 자신만을 위해 헌신하는 열정적 지지자 집단이 없으면 정당을 장악하기도, 대통령이 되기도, 대통령이 된 뒤 국회와 여론을 지배할 수도 없는 시대다.”

“김) 4,000만 유권자를 위한 대통령은 합리적 선택이 아니다. 4,000만의 1%, 아니 그 절반이면 충분하다. 20만이면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언론사의 기사 작성에 영향을 미치는 일 정도는 아주 쉽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물론 국회 입법청원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개별 의원들의 입을 막고 행동을 제어하는 것은 아무 일도 아니다. 권리당원, 국민선거인단 매집에 나서주는 열혈 지지 세력이 있는 사람이 승자가 되는 정치다. 평범한 보통사람들이 아니라 소수의 열혈 시민이 대통령을 만들고 세상을 호령한다.”

“박) 그렇게 해서 대통령이 된다 한들, '대통령직 수행'이 편해진 것도 아니다. 대통령이 모든 것을 하려 하나 모든 게 다 논란이 되고 갈등의 원인이 된다. 제대로 이루어지는 것은 하나도 없다. 지지율에 전전긍긍하고 노심초사하는 게 대통령의 일상이다. 여당 안에서 자신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나오는 것을 최고로 두려워하니, 임기가 끝나갈수록 마음은 지옥이다. 여야를 가로질러 존경받는 대통령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통령도 불행하고, 결국 모두가 불행하다. 이게 무슨 정치인지, 그 의미를 찾기가 힘들어진다. 점점.”

 

 

8. 검찰개혁을 앞세운 정치

 

“김) 검찰개혁을 무리하게 정치화한 것에서 비롯된 문제도 크다. 지금 와서 복기를 해봐도,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가 없다. 특정 집단을 범죄화하고, 결국 처벌 전쟁의 양상으로 전개되었지만, 결과는 아이러니하다. 무엇이 개선되었는지 알 수 없다. 시민단체는 도덕적 권위를 잃었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웃음거리가 되었다. 검찰개혁은 치정 드라마로 시작해서 웃지도 못할 소극(笑劇)으로 끝났다.”

“박) 사태의 본질은 권력 투쟁에 있었다. 그것만 했다. 일반 시민들의 삶을 개선하는 정치의 과업은 뒷전으로 밀렸다. 평등과 재분배, 복지와 사회통합 의제의 진전은 없었다.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졌다. 불평등은 심화되었다. 분단과 전쟁, 권위주의 산업화의 시기 동안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나이든 시민들이 빈곤, 고독사, 자살로 내몰려도 몰라라 했다.”

“김) 계급투쟁도 아니고, 진보나 보수의 싸움도 아니었다. 정당의 이념과 정견을 둘러싼 싸움도 아니었다. 서울대 법대 출신 사이의 싸움이었고, 법률 엘리트 집단끼리 치고받은 싸움이었다. 그들의 권력 투쟁에 한국 사회가 한바탕 놀아난 느낌이다. 이런 종류의 싸움은 사람이 바뀌어도 멈출 줄 모른다. 본격 대선 국면에 들어서도 그 격렬함이 약해질 리 없고, 실제로 그랬다. 앞선 대통령들의 운명에서 보듯, 이 싸움에서 패자는 곧 파멸이다. 우리 사회의 모든 추한 열정이 이 싸움에 끌어들여졌던 이유다. 추문과 욕설은 기본이다. 그와 짝을 이루는 비난과 추궁은 정치 언어보다 공안 담론에 가까웠다.”

“박) 어떤 경제, 어떤 사회, 어떤 교육, 어떤 복지가 필요한지에 대한 정책적 고민은 사라졌다. 그런 건 쓸데없다는 식이었다. 세간의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상대를 무너뜨릴 ‘지라시’가 더 중시된다. 사람들의 주목을 끌 ‘멘트’를 날려야 하고, ‘메시지’를 올려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지배한다. 오랜 준비가 필요한 정책 대안? 진지한 분석과 논의 정립? 그런 건 20세기 정치로 취급당했다. 정책은 내용보다 이목을 끌 구호나 조어(造語)를 찾는 것이 되었다. SNS 시대 정치는 이렇게 하는 거라고 과시하는 듯하다. 외양은 여론정치의 극대화이고 실제는 권력 투쟁인 것이 지금 정치의 겉과 속 같다.”

“김) 시민 일상의 파괴도 생각할 문제다. 정치 이야기는 절반이 야유나 욕설이 되었다. 대통령 이야기가 오래된 인간관계도 찢어놓았다. 증오는 혐오를, 적대는 저주를 낳았다. ‘페미’와 ‘이대남’ 같은 악마화 논쟁이 공론장을 지배했다. SNS 반응을 즐겨 기사화하는 기자들이 정치 저질화를 증폭시켰다. 대선 후보는 많아도 정치 지도자감은 살아남기 어려운 환경이 되었다. 뭔가 말을 하고 설명을 하는데, 귀를 거쳐 마음에 다가오는 내용은 없다. 모두가 지치고 나서야 사안은 흐지부지되었다. 당 안팎에서 왜 이런 정치가 아닌 다른 정치를 말한 세력은 없었는지, 그것도 모를 일이다.”

“박) 내가 만난 한 국회의원은 이 모든 게 열혈 지지자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들 생각과 조금만 다르게 말하면 공격이 쏟아진다는 것이다. 일상의 업무를 볼 수 없을 정도란다. 어쩔 수 없이 맞춰가게 된단다. 정치가가 자유롭게 말할 수 없는 시대? 박정희, 전두환 시절에도 정치가의 말은 막을 수 없었다. ‘목을 비틀어도’ 말을 했다. 지지자들의 독단에 침묵하는 정치인들이 그때 정치를 했다면 자기 말을 할 수 있었을까? 더 굴종적이었을 게 뻔하다. 민주주의 시대인데도 정치가의 역할은 없어졌다. 아니, 스스로 버렸다.”

“김) 민주주의란 정치적 평등(political equality)의 원리로 작동한다. 1원1표의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불평등 효과를 1인1표의 정치로 제어해 가는 데 민주주의의 가치가 있다. 정치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개선하기보다 권력 싸움만 하면, 민주주의는 허상이자 껍데기가 된다. 검찰개혁의 정치는 그런 허상을 통해 법률 엘리트들에게 한국 정치를 갖고 놀 기회만 주고 말았다.”

“박) 그게 끝이 아니다. 검찰개혁을 앞세운 정치는 윤리적 파국을 낳았다. 생각해보자. 공정한 입시 경쟁, 평등한 교육 기회를 진심을 담아 말할 수 있을까? 과정은 공정하고 결과는 정의로울 것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사람들이 특권과 반칙 없는 사회를 말하고, 세습 자본주의는 안 된다며 부모의 영향력과 부가 대물림되지 않게 해야 한다고 말할 때 그 진정성은 인정받을까? 전처럼 한국사회의 양심 세력으로 존경받게 될까? 2016년의 촛불집회가 보수에 대해 깊은 회의감을 표출한 계기였다면, 검찰개혁 논란은 이른바 진보개혁 세력에 대해 깊은 의구심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김) 검찰개혁과 조국 논란에 관여하는 일이 서로에게 깊은 상처를 주는 동안 모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의견이 달라도 시민적 정중함은 갖춰 대화하고, 서로의 생각을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심리적 기반은 공유했어야 했는데, 그 긴 상처의 시간 동안 대화 불가능한 상대 이름의 목록만 늘려온 그 비극적인 일에서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게 될지, 잘 모르겠다. 그간 우리는 대체 서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걸까? 누가 일을 이렇게 만든 것일까? 시민들 사이의 상처가 아물고 나면 언젠가 제대로 한번 살펴져야 할 질문이 아닐 수 없다.”

 

 

9. 죽음을 부르는 정치

 

“김) 정치의 역할이 ‘사회통합’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정치가는 없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정치가 사회를 통합하는 기능을 하는지 사회를 사납게 만드는 기능을 하는지를 묻는다면 정치가들이 뭐라 답할지 궁금하다.”

“박) 사회의 통합과 해체의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 가운데 하나는 자살률(인구 10만 명당 자살자 수)이다. 한 사회의 마음 상태랄까, 내면의 건강상태를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OECD 자살률 1위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가운데 65세 이상 노인 자살률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 평생 가족과 공동체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 가운데 절반 정도가 빈곤선 이하의 처지에서 고독사의 두려움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빼고 그 높은 자살률을 설명하기는 어렵다.”

“김) 2020년 중앙심리부검센터에서 발표한 '경기도 5개년(2013~2017) 자살사망 분석 결과보고서'에 따르면, 실직이나 소득 하락 등으로 건강보험료 면제 대상이 된 집단의 자살률은 76.6으로 전체 평균의 세 배였다. 복지 기반이 취약한 사회에서 일자리를 잃는 것과 빈곤층이 되는 것이 어떤 고통을 가져다주는지를 이보다 잘 보여주기도 어렵다.”

“박) 생명존중시민회의가 발표한 '자살대책 팩트시트'에 따르면 2020년 자살자는 1만 3,799명으로 같은 기간 코로나19로 사망한 사람(917명)보다 15배 많았다.”

“김) 자살 시도자 가운데 가장 높은 증가율을 보인 연령대는 20대였다. 2020년 9월 이은주 의원실과 남인순 의원실이 낸 국정감사 자료에 따르면, 20대 자살 시도자는 2019년 상반기 대비 2020년 상반기에 80% 이상 늘었고 자살자는 43%가 늘었다. 서비스업 분야에서 저임금의 불안정 취업 상태에 있는 이들이 전염병 사태에서도 가장 큰 희생을 겪었다.”

“박) 박종훈 경남도교육감은 2020년 코로나19로 사망한 학생은 0명인 데 반해 자살로 사망한 학생은 140명이었다며, 10대 사망 원인의 1위(37.5%)가 자살인 현실에 관심을 촉구하고 있다. 누가 더 오래 책상 앞에 앉아있느냐로 경쟁하는 교육 현실을 빼고 이를 설명할 길도 없다. 세계보건기구(WHO)는 한 사람의 자살로 5~10명이 영향을 받는다고 보고 있는데, 그에 따르면 우리는 최소 7만 명 이상의 자살 유가족이 매년 만들어지는 셈이다. 이들 유가족의 자살률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평균 8배 이상 높다. 남겨진 사람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기는 선택을 우리는 왜 줄이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제대로 생각해봐야 한다.”

“김) 2018년 1월 보건복지부는 자살률 1위 국가의 오명을 벗겠다며 대책을 발표했다. 2017년 24.3인 자살률을 2022년까지 17(2019년 OECD 평균 자살률은 11.3)까지 줄이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하지만 자살률은 줄지 않고 늘었다. 2019년 자살률은 26.9였다. 그간 발표된 잠정 수치들을 보면 앞으로도 그 수치가 목표만큼 줄어들 가능성은 없다. 지금 우리는 잘살고 있는 것일까? 구성원을 보호하는 공동체로서의 힘을 우리 사회는 왜 발휘하고 있지 못할까? 국가는 왜 있고, 정치는 대체 어디 있는가?”

“박) 혹자는 G7 가입을 앞둔 상황에서 선도 경제의 국가 비전을 말하고 있는데 무슨 '자살률 타령'이냐며 힐난하겠지만, 높은 자살률은 깊은 상실감, 불안, 무기력함, 두려움이 지배하는 사회 속에서 외쳐지는 누군가의 절박한 목소리로 읽혀야 한다.”

“김) 이런 일이 정치 문제와 무관하게 일어날 수 있을까? 자살이 대중적 현상이 된 사실에 대해 정치가들 사이에 깊은 문제의식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박)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 자살은 자신의 역할을 다하지 못한 통치자나 장군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상이었다. 그들의 자살은 고결한 행위로 상찬되었다. 반면 노예나 일반인의 자살은 처벌받는 범죄였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순교는 구원을 향한 헌신이었지만, 일반인이 따라 하는 것은 죄악시했다. 자살을 범죄시하는 태도는 오랫동안 지속되었는데, 프랑스에서는 1790년까지 자살자의 재산을 몰수하는 형법 조항이 있었고, 영국에서는 1870년까지도 자살자 재산을 몰수하는 법률이 존재했다.”

“김) 자살을 당사자의 비정상적 일탈이 아니라 집단적 사회 문제로 만든 것은 근대 상업 사회의 발달과 산업화 때문 아니었을까? 상업화에 이은 산업화의 충격은 전통사회의 구조와 규범을 빠르게 퇴화시켰다. 노동 분업은 세분화되었고 기술 발전이 뒤를 이었다. 기능 분화는 빨라지고 직업은 전문화되었다. 그러면서 자살은 집단적이고 대중적인 현상으로 나타났다고 본다.”

“박) 처음에는 ‘도시-남성-소득과 교육수준이 높은 중산층-개신교 우세지역’에서 ‘농촌-여성-사회 하층-가톨릭 우세지역’보다 압도적으로 높은 자살률이 나타났다. 그 뒤 계층 불평등이 심화됨에 따라 실업과 빈곤으로 경쟁에서 뒤처진 집단, 가족이나 공동체의 심리적 지지로부터 소외된 집단으로 자살은 확대되었다. 자살에 대한 불멸의 고전을 집필한 뒤르켐(Emil Durkheim)이 강조하듯, 현대 사회에서 자살은 개인적 요인으로 환원할 수 없는, 매우 뚜렷한 사회적 특징을 갖는다. 자살률은 나라별로 매우 일관된 패턴의 차이를 보인다. 그런 자살률을 뒤르켐은 (구성원들 사이의 결속력과 유대감을 유지시키는) '사회의 힘'을 보여주는 지표로 이해했다. 분업화된 사회 속에서 직업 생활을 하는 구성원들이 서로 협력하는 정도에 따라, 각자의 삶을 의미 있게 연결해주는 공동체 규범이 어느 정도인지에 따라 나라마다 자살률이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이다. 사회가 힘이 있어야 구성원 개인을 보호하고 통합할 수 있다.”

“김) 전쟁이나 전염병처럼 큰 위기를 겪는다고 해서, 혹은 대공황처럼 경제적 붕괴 상황에 처한다고 해서 자살이 느는 것이 아니라고 들었다. 소득이 줄고 실업이 늘고 가난해져서 자살이 증가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대개의 경우 나쁜 상황이 도래하면 자살률은 줄어든다. 사회가 절박한 대응에 나서기 때문이다. 자연히 공동체로서의 유대도 강해진다. 그러나 사회가 분열되어 있다면 그럴 수 없게 된다. 시련에 같이 맞서고 어려움을 함께 극복하려는 사회의 내적 힘이 발휘될 수 없고, 공동체 정신 대신 각자도생의 욕구만 앞설 것이다.”

“박) 지난 30년 사이에 OECD 국가의 평균 자살률은 빠르게 줄었다. 우린 거꾸로 갔다. 1990년대 말부터 자살이 크게 늘었고 그뒤 15년 가까이 자살률 1위를 지켰다. 2001년부터 2021년까지 계속된 아프간 전쟁에서 민간인 포함해 모두 17만 2천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같은 기간 한국의 자살자는 얼마나 될까? 2020년과 21년 공식 통계가 아직 발표되지 않아 정확한 수를 말하기는 어렵지만, 25만은 넘지 않을까 한다. 충청남도 공주시, 전라북도 정읍시, 경상북도 상주시가 한꺼번에 사라질 규모다. 전쟁보다 더 많이 자살하는 사회가 된 것이다.”

“김) 힘들어도 부족해도 아파도 서로 협력하고 연대할 수 있는 사회, 서로에게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질 수 있는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노력이야말로 정치가 할 일이자 최고의 자살률 대책이 아닐 수 없다. 그런 노력이 있었나? 정치가 오히려 사회를 분열시키고 공동체의 유대를 해체한 것은 아닐까?”

“박) 정치에 대한 냉소 대신 가능성을 기대하는 사람들이 적대하고 흥분하는 정치에 지쳐가고 있다. 무기력한 사회, 지친 개인은 정치가 만들고 있다.”

 

 

10. 매일 국민투표 하는 민주주의

 

“김) 여론조사 홍수다. 정치가 여론조사 결과 수치로 이리로 갔다, 저리로 갔다 한다. 한국 정치의 요물이 아닐 수 없는 게 여론조사다. 더 큰 문제는 이를 다루는 언론의 태도다. 같은 날짜 언론에 서로 충돌하는 여론조사가 보도되는데도 언론들은 아무 문제의식이 없다. 정치가 나빠지는 것도 문제지만, 한국의 언론 또한 정치 퇴행에 1등 공신이다.”

“박) 대통령 지지율이 거의 매일 조사 발표되고 그 수치에 따라 이리저리 휘둘리는 정치는 마뜩하지 않다. 그런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민주주의는 권력 정치를 키운다. 최고 통치자가 언제 힘을 잃을지 그 자리를 누가 차지할지를 두고 다투는 정치에서 남는 것은 권력에 대한 야심뿐이다. 당연히 제3정당처럼 다른 가치를 지향하는 세력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강자들 사이의 사활적 권력 게임 속에서 약자들의 여린 목소리가 들릴 리도 없다.”

“김) 정치의 문제가 여론조사 몇 퍼센트짜리 대통령, 몇 퍼센트짜리 대선 후보인가로 단순화되면, 그래서 모두가 지지율 숫자를 높이기 위해 연신 국민 여러분을 외쳐대는 정치가 되면, 민주주의는 신흥 종교와 유사해진다. 미래 권력에 자신을 의탁하려는 인간의 나약한 심리만 조장되기 때문이다. 양산되는 것은 아첨 정치가요, 보기 힘든 것은 신념의 힘과 용기를 가진 정치가다. 혹자는 여론조사야말로 민심의 향방을 보여준다며, 과학적인 방법과 절차를 준수한다면 국민의 의사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고 대꾸할지 모르겠다. 정치가들이나 정당이 그런 민심에 따르면 될 일 아니냐며 핀잔할 수도 있겠다.”

“박) 여론조사는 정치의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의 절박한 요구나 그들의 피와 땀, 수고와 눈물, 한숨을 담아내지 않는다. 정치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책임성을 가져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는 바도 없다. 같은 목적의 조사도 시점에 따라, 질문에 따라, 응답 목록에 따라 달라지는 게 여론조사다. 질문이 복잡해도 안 된다. 평가적 질문이나 윤리적 내용을 가질수록 오류 가능성은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오죽했으면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정치학자 조반니 사르토리가 여론조사 결과를 가리켜 ‘주권에 대한 가엾은 묘사’라 했겠는가.”

“김) 민심은 정치와 무관하게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그 무엇이 아니다. 정치를 통해 형성되고 변화되는 게 민심이다. 시민은 동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와 열정을 가진 다원적 집단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이익과 열정을 조직한 다양한 결사체들은 물론 정견을 달리하는 복수의 정당들이 멋지게 경합하지 않는다면 민주주의는 그 장점을 잃는다. 조사되는 민심은 시민을 수동적인 피조사자나 구경꾼으로 만들 뿐이다. 그 속에서 능동적인 변화의 가능성은 만들어질 수 없다.”

“박) 일상의 생활세계 속에서 문제를 해결하려는 활동가들과 그들의 조직이 움직이는 민주주의여야 한다. 그 과정에서 신뢰를 얻은 정치가들이 성장하고 좌절하고 후회하고 다시 노력할 수 있어야 정치다. 시민들도 다양한 결사체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회비·당비·조합비도 내고, 논의와 결정의 과정에서 목소리도 내야 한다. 그 속에서 실망도 하고 변화도 모색해보고 다른 사람의 체온과 땀 냄새를 느끼며 협력하는 것을 시민참여라 하지, 조사에 응하고 SNS에 의견 올리고 국민청원에 찬성 클릭을 보태는 것을 참여라 할 수는 없다. 책임을 함께 나누고 서로 공유할 수 없는 참여는 공허하다 못해 허망하다.”

“김) 최고 권력을 두고 매일 국민투표 하듯 여론조사가 반복되는 정치에서 남는 것은 목소리 큰 소수의 지배다. 대통령을 만들 수 있는 영향권 안에서만 정치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대통령들이 행복한 것도 아니다. 지지율이 떨어지면 감옥행이나 탄핵 같은 어두운 사망의 골짜기를 헤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끝은 결국 비극이다.”

“박)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에 의해서만 위협받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자처하는 세력에 의해서도 무너질 수 있다. 누구든 스스로를 비민주주의자나 반민주주의로 자처해 정치적으로 성공하기는 어렵다. 민주주의의 정당성은 확고하다. 하지만 민주주의는 늘 대중의 불만을 만들어내고 또 그런 불만을 ‘민주적으로’ 악용하는 세력을 만든다. 히틀러가 선거로 집권하고, 네덜란드와 오스트리아 등지에서 극우 정당이 집권 문턱까지 다가오고, 트럼프 집권이 현실이 된 것은, 이들 나라가 민주 국가이기 때문이지 민주주의가 아니어서 발생한 일이 아니다.”

“김) 여론조사란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질문’에, 주어진 ‘대답 목록’ 가운데 선택한 것을 뜻한다고 했다. 상황이 바뀌고, 질문이 바뀌고, 선택할 수 있는 대답의 목록이 바뀌면 결과는 달라진다고 말이다. 따라서 여론조사의 정보 가치가 가진 가장 큰 문제는 ‘질적인 빈곤’인데, 그런데도 여론조사가 발휘하는 권력 효과는 거의 절대적이 되었다. 이 문제에서 한국보다 심한 사례는 없어 보인다.”

“박) 정당의 지도부 선출과 공직 후보 공천에 여론조사를 적용하기 시작한 것도 꽤 됐다. 다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상상하기도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돌이키기 어려운, ‘한국 정치의 독특함’으로 자리를 잡았다. 경쟁하듯 앞다투어 여론조사를 의뢰하고 보도하는 언론들 역시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한국 정치’에 일조했다. 누가 더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지, 향후 어느 집단에게 권력을 가져다줄지에 대한 관심을 자극하는 이런 기사들은 정치 공론장을 다양한 관점과 풍부한 내용으로 만들어주지 않는다.”

“김) 누가 더 많이 지지받는지를 둘러싼 수치 싸움이 곧 정치가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수치가 높고 낮은 것이 공적 논란을 평정하는 기능을 하고, 누군가의 시민권을 공공 영역에서 배제하는 힘을 갖기도 한다. 높은 여론조사가 정치적 승리를 상징한다면, 낮은 여론조사는 정치적 사망 선고처럼 기능한다.”

“박) 그렇기에 모두가 여론을 동원하고 여론에 매달리는 한편, 적대적인 경쟁자 집단에는 낮은 수치의 저주가 부여되기를 열망하는 심리를 갖게 되었다. ‘여론조사가 지배하는 정치’는 사실상 ‘여론 동원에 매달리는 정치’와 다를 바 없다. 그것은 여론의 조사이기보다 여론의 조작과 동원에 가까운 현실로 이어진다.”

“김) 최근 스마트폰의 ‘스팸 번호 차단 어플’에서 여론조사 전화번호까지 걸러주기 시작한 것은 웃기 어려운 우리 정치의 자화상 같다. 여론조사는 오늘날 한국의 정치인들과 언론이 신봉하는 유사 신앙처럼 되었고, 그에 따라 정치는 더욱더 사나운 권력 정치로 퇴락했다.”

“박) 혈통과 가문, 그리고 계급의 원리에 기초를 두고 있는 군주정이나 귀족정과는 달리, 민주주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권의 원리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다른 체제에서 기대할 수 없는 장점과 매력이 있다. 하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하는 비용도 만만치가 않다. 다수 대중의 지지를 얻고 또 동원해 권력 자원을 획득하고자 하는 야심을 막을 길은 없다. 민주주의도 잘할 때만 가치가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민주주의는 ‘다수 지배’ 체제이지만 다수가 어떻게 만들어지느냐에 따라서는 매우 다른 정치적 결과를 만든다. ‘서로 다른 이익과 열정을 갖는 시민 집단들의 자율적인 연합체’일 때 다수는 민주주의의 튼튼한 기반이 된다. 그렇지 않고 ‘여론조사 수치로 나타나는 무정형적인 무리’가 다수가 되면 민주주의도 얼마든지 ‘다수의 전제정’으로 전락한다. 사회를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분열시키는 여론 동원의 도구가 된다. 여론조사는 꼭 필요할 때 절제해서 쓸 때만 가치가 있다.”

 

 

11. 독선과 오만이라는 정치의 적

 

“김) 정치를 사납게 만드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민주주의자로 확신한다. 시민 의견을 더 많이, 직접 들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들이 민주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왜 정치도 민주주의도 좋아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박) 민주주의는 불완전하다. 이를 인정하지 않은 정치철학자는 없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좋은 정체(政體)의 분류 안에 민주주의를 넣지 않았다. 장 자크 루소는 민주주의가 인간의 본성에 맞지 않다고 보았다. 그는 고대 아테네 민주주의를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보다는 스파르타와 로마의 경험에서 새로운 공화정의 원리를 찾고자 했다. 알렉시 드 토크빌은 민주주의의 도래를 불가피한 섭리로 이해했지만, 그 귀결은 편견과 비이성이 지배하는 여론정치일 것이라는 우울한 전망을 했다. 고대 정치철학자들은 민주주의의 단점을 ‘독선적 의견’과 ‘과도한 확신’에서 찾았다. 사실성과 타당성의 기초 없이 자신의 주장을 강요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 대안으로 플라톤은 참된 지식을 이해하는 철인(哲人)의 지배를 권했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미덕을 강조했다. 덧붙여 근대 정치철학자들은 ‘두려움’과 ‘나약함’ 같은 인간적 단점이 민주주의를 압도할 가능성을 걱정했다. 과학과 합리적 사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신이 아닌 인간이 ‘무지의 문제’를 회피할 수는 없으며, 전쟁과 전염병, 빈곤과 재난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회는 있을 수 없기에 늘 불안과 공포를 동원하는 정치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김) ‘두려움의 동원(mobilization of fear)’은 정치적 승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이 즐겨 활용하는 전략이다. 나와 다른 집단을 악마화해 그 탓으로 돌리고 이들을 제거해 두려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나약함이 그 희생양이 되곤 한다. 대중이 두려움과 나약함에 희생될 가능성은 민주주의라고 해서 줄어들지 않는다. 오히려 더 쉽게 대중적 전염병이 될 수 있고, 그로 인해 시민사회 전체가 혐오와 적대로 더 깊이 분열될 수 있다. 20세기 초 인류가 경험했던 것처럼 나치나 파시즘을 불러올 수도 있다.”

“박) 민주주의가 영어권 나라에 처음 소개된 것은 16세기였다. 그때의 민주주의는 아테네를 붕괴로 몰고 간 중우정치, 선동정치에 가까운 의미였다. 세계 최초로 민중 정부의 원리를 헌법에 담았던 1787년의 미국에서도, 전제정의 잔재를 혁명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1789년의 프랑스에서도 민주주의는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인정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내건 최초의 정치 집단이 민주공화당(Democratic Republican Party)의 이름으로 1792년 미국에서 등장한 것을 기준으로 본다면 현대 민주주의는 200년 조금 넘는 역사를 갖는다.”

“김) 미국도 처음에는 의회에서 매질로 잘못을 처벌하고 사적 린치와 결투로 갈등을 해결하는 일이 빈번했으며, 노예 문제를 둘러싼 내전을 막을 수도 없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의심과 회의는 계속되었다. 전체주의의 물결이 유럽을 지배했던 20세기 전반기 상황을 고려하면, 민주주의가 평화롭고 평등하고 자유로운 정치체제로서 도덕적 효과를 갖는구나 하는 관념이 받아들여진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고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박) 독선과 오만을 절제했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가장 중심 집단인 노사가 서로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생산의 과정과 결과를 두고 협상하고 타협하는 협력 게임을 이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견을 달리하는 좌우의 여러 정당이 자유롭게 경쟁하고 또 합리적으로 통치하는 과정에서, 서로를 적대시하고 악마화한 게 아니라 연합하고 공존하는 정치의 규범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갈등과 논쟁을 통해서도 해소되지 않는, ‘오해’가 아닌 ‘차이’를 발견하면 합의를 모색하는 정치 문화가 자리 잡은 것도 중요했다. 권력 독점이 아니라 권력 공유(power-sharing)의 원리가 제도화되었다. 서로를 자극하거나 모욕하는 언어가 줄고, 서로에게 위협적인 표정을 짓지 않는 ‘시민적 정중함(civility)’이 자연스러운 정치 예절이 된 것도 주목해야 한다.”

“김) 민주주의자가 늘어나지 않으면, 민주주의가 행위의 규범으로 자리잡지 못하면, 민주주의 정치체제는 잘 작동하지 못하는 것 같다.”

“박) 민주주의자들은 표정이 밝은 사람들이다. 차이와 갈등 속에서도 협력의 가능성을 찾고자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틀릴 수 있음을 자각하고 타인으로부터도 배우려 하며 공존의 미덕을 실천하는 사람들이다. 이들과 일하면 웃음이 많아지고, 그야말로 일이 된다. 민주주의를 나쁘게 만드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고 비열하다. 자신의 옳음을 앞세우고, 타인의 다름을 용인하지 못한다. 과도한 확신과 고집, 독선, 야유, 경멸, 냉소 때문에, 없던 갈등도 만들어지고 있던 가능성도 사라지게 만든다.”

“김) 지금 우리는 어떨까. 민주주의자들이 늘고 웃음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고 있을까, 차이를 좁히고 함께 할 수 있는 협력의 공간을 넓히기 위한 노력이 충분히 기울여지고 있는 것일까. 정말로 돌아봐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에는 ‘반성적 균형’의 힘이 절실히 요청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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