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없는 민주주의 - 1

공식 관리자
2022-02-16
조회수 810



정치 없는 민주주의

 박상훈・김성희

 

 <대화를 시작하며> 정치 없이 존립 가능한 사회는 없다


 1장. 정치 실종 시대의 11가지 모습

1. 법률가 정치 전성시대

2. 정치 안 하고 군림하는 대통령

3. 정치가 대개조, 대전환을 이룰 수 있다는 착각

4. 반대할 수 없는 적폐 청산

5. 처벌과 척결의 정치

6. 여론 아첨 정치

7. 열성 지지자 동원 경쟁

8. 검찰개혁을 앞세운 정치

9. 죽음을 부르는 정치

10. 매일 국민투표 하는 민주주의

11. 독선과 오만이라는 정치의 적

 

2장. 정치 몰락을 가져온 국민주권 민주주의

1. 민주주의의 운명은 좋은 정치인에 달렸다

2. ‘국민주권 민주주의’가 정치의 몰락을 낳았다

(1) 예기치 않은 선택 : 촛불 혁명과 국민주권 민주주의

(2) 국민주권이 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될 수 없는 이유

(3) 국민주권 민주주의의 파멸적 귀결

3. 민주공화국, 어떤 원리로 만들어졌나

(1) 공화정이면서 민주적인 정부를 향한 길

(2) 정제와 확대의 원리

(3) 대표와 책임성의 원리

(4) 숙고된 결정과 합의된 변화의 원리

 

3장. 정치, 정치답게 제대로 하자

1. 시민 분열의 양극화 정치 대신 연합 정치의 길 열자

2 ‘대통령 뽑기 민주주의’에서 ‘좋은 정치 가능한 민주주의’로 바꾸자

3. 다원 민주주의의 길을 넓히자

4. 청와대 정부 개혁, 모든 일의 전제임을 분명히 하자

(1) 청와대 정부는 헌법과 법률에 반하기 때문이다

(2) 청와대 정부로는 큰 변화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3) 큰 청와대 비서실은 대통령을 혹사시키고 소외시키기 때문이다

(4) 정부조직법대로 하자고 해야 한다

5. 국회도 정당도 변해야 한다

(1) 국회는 입법 공장이 아니다

(2) 권력 기관화된 정당의 모습도 돌아봐야 한다

(3) 정당 책임 정치의 길로 가야 한다

(4) 인재 영입보다 인재 육성하는 당이 되어야 한다

(5) 국민경선과 캠프정치의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6) 정당이 선거와 정권 인수를 주도해야 한다

6. 대통령제, 그 기원으로부터 다시 생각해 보자

(1) 대통령이 문제다

(2) 대통령제는 어떻게 탄생했나

(3) 미국의 대통령 비서실과 공화주의 원칙

(4) 대통령제는 강한 정부를 위한 게 아니다

(5) 대통령제 문제보다 대통령직 수행 문제를 말해야 한다

7. 대통령직의 민주적 운영을 약속해야 한다.

(1) 민주주의는 권위주의와 다른 정부 운영을 필요로 한다.

(2) 대통령제, 빠르고 강한 결정을 위해 만든 게 아니다

(3) 1987년 헌법, 5년 단임 대통령제 정부를 만든 이유를 존중하자

(4) 대통령직 인수 방법부터 달리 하자

(5) 책임 정부가 민주 정부다

 

<대화를 마치며> 다르게 살고, 느리게 살 수 있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두 대화자 소개

박상훈과 김성희는 국회로 출근한다. 박상훈은 국회미래연구원의 초빙연구위원으로 있다. 자신을 ‘구식 정치학자’라고 생각하는 정치학자다. 정치에 있어서 잘 변하지 않는 것, 오래 가는 특징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그는 정당정치와 노사관계를 현대 민주주의를 이끄는 양날개로 여긴다. 김성희는 21대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있다. 민주노동당에서 시작해 정의당에 이르기까지 진보정당에서 활동해왔다. 독일의 민주주의와 정당정치에 관심이 있고, 이를 비교의 기준으로 삼아 좀 더 나은 한국 정치를 조망해 보는 것을 좋아한다.

김성희와 박상훈은 10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함께 <(사단법인) 정치발전소>를 만들고 이끌어왔다. 김성희는 상임이사를, 박상훈은 정치학교장을 맡아서 정치가로 성장하는 데 필요한 정치학의 지혜를 강의나 토론의 형태로 공유하는 활동을 같이 해왔다. 회원들과 함께 독일 정치기행, 일본 정치기행, 이탈리아 마키아벨리 정치여행을 다녀왔고, 미국 민주주의 기행을 준비하던 중에 감염병 팬데믹 때문에 잠시 멈춘 상태다. 하지만 좋은 정치에 대한 토론은 다양한 형태로 계속하고 있다.




<대화를 시작하며> 정치 없이 존립 가능한 사회는 없다

 

1.

“김성희)한 가지 제안이 있다. 꼭 받아들여 주길 바라는 제안이다.”

“박상훈)내가 감당할 수 있는 제안이기를 바란다.”

“김)물론이다. 내 제안은 이렇다. 2016년 말의 촛불집회 이후 5년의 시간이 지나고 있다. 그 사이 당신이 쓴 글에는 일관된 주제가 있다. 정치의 역할이 축소되고 시민이 분열되는 것에 대한 걱정이 그것이다.”

“박)촛불집회나 대통령 탄핵은 민주주의의 결과다. 하지만 그 뒤 민주주의는 잘못된 방향으로 치달았다. 민주주의는 두 차원을 갖는다. 하나는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다. 민주주의의 이 두 차원 사이에는 쉽게 해소되기 어려운 갈등이 있다. 이 갈등을 잘못 다루면 정치의 역할은 최소화되고 시민사회는 적대와 증오로 더 깊이 분열된다는 사실을 경고하고자 했다.”

“김)내가 제안하려는 것은 바로 그 문제를 더 깊이 생각해보는 대화를 가져보자는 것이다. 민주주의란 무엇이고, 민주주의를 오해하거나 잘못 다룬 것의 결과가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나쁜 상황을 개선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자는 것이다. 당신은 정치 밖의 관찰자로서 민주주의 이론을 말 할 수 있다. 나는 정치의 현장 안에 있는 내부자로서 경험을 이야기할 수 있다.”

“박)대화는 나를 덜 편협한 사람이 되도록 도울 것이다. 게다가 민주주의와 정치를 실제로 그 내부에서 다루고 있는 당신과의 대화는 더없이 유익한 기회를 나에게 줄 것이라 기대한다.”

“김)대화는 가장 오래된 정치학의 방법인 것으로 알고 있다. 플라톤이 열어젖힌 정치철학은 모두 대화의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박)아리스토텔레스도 마찬가지다. 거닐며 대화하는 방식으로 정치학을 했다. 그래서 그와 그 제자들을 가리켜 소요학파( Peripatetic school; 逍遙學派)라고 한다. 그런데 ‘건전한 회의주의자’를 지향하는 나로서는 대화가 일관된 주제로 잘 진행될지 걱정이 된다.”

“김)당신이 그간 다양한 매체에 기고한 글을 잘 활용하면 생각보다 짜임새 있는 대화를 진행할 수 있다.”

“박)알겠다. 당신이 주도하는 대로 따라보겠다.”

 

2.

“김)촛불집회에서 시작해 대통령의 탄핵과 파면으로 이어진 결과는 민주주의의 결과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민주주의는 ‘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와 ‘정치체제로서의 민주주의’가 있는데, 민주주의에 대한 이 두 생각이 잘못 뒤엉켜 나쁜 양상으로 발전하면 ‘정치 축소’와 ‘시민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이 주제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했으면 한다.”

“박)이념으로서의 민주주의는 국민주권을 이상화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국민주권이란 popular sovereignty를 뜻하는데, 인민주권이나 민중주권 내지 시민주권으로 이해해도 좋다. 우리 사회의 정치 언어는 지나칠 정도로 나라 국(國)자를 많이 쓴다. 표현을 바꾸면 좋겠다고 보지만, 그러기에는 너무 굳어진 용법이라 그냥 쓰기로 하자. 아무튼 이념으로서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국민의 의지(will of people)에 따르는 것이라 보는 것을 뜻한다. 대개는 민심을 따른다, 민생을 우선시한다, 국민 여론과 국민 여망을 받들어야 한다는 등의 논리로 나타난다. 이런 생각이 민주주의가 아닌 것은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국민주권의 이름으로 정치인, 정당, 의회, 언론, 이익집단 등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몰아붙일 때 나타난다. 정치인, 정당, 의회, 언론, 이익집단의 역할을 민주주의에 반(反)하는 것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그것이 지나치면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적 방향으로 치닫게 된다.”

“김)공산주의든 나치즘이든 모두 국민, 인민, 민중, 민족을 앞세운다는 것에서 공통점이 있다. 인민 정부, 민중 정권, 민족 사회주의는 그들이 표방했던 민주주의 이념의 핵심이다. 국민주권이나 인민주권에 정당성의 토대를 두고자 한다는 점에서 그들 역시 민주주의 이념을 따른 것은 맞다.”

“박)하지만 그들이 운영하는 정치체제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국민주권(인민주권)이라는 민주주의 이념을 내세웠지만, 정체체제로서의 민주주의는 아니었다. 우리가 민주주의 정치체제의 요건으로 간주하는 것들, 예컨대 경쟁하는 복수의 정당들, 여야 사이의 심의와 조정으로 이루어지는 국회,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는 헌법, 입법-행정-사법 기능 사이의 견제와 균형, 결사의 자유에 기초를 둔 집단들 사이의 자율교섭 등을 그들은 허용하지 않는다.”

“김)인민주권이나 국민주권 같은 민주주의 이념으로 민주주의가 아닌 정치체제를 만들 수 있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문제는 오묘하다. 민주주의의 이념으로서 국민주권론은 하나의 국민 의지를 중시하고, 이에 이견을 가진 집단을 반민주나 반민족 세력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박)이념화된 민주주의론은 ‘하나의 옳음’에 경도되기 쉽다. 자신의 판단에 과도한 확신을 갖게 하고, 이견에 억압적인 태도를 불러일으킨다. 반민주나 반민족만이 아니라 반공, 반평화, 반성장, 반페미 등의 용어가 쉽게 동원될 수 있는 심리적 분위기를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념화된 민주주의론의 가장 큰 특징은 ‘가치 일원주의’에 있다. 달리 말하면 ‘이견과의 공존’을 중시하는 다원주의에 억압적이다. 같은 세력 안에서도 생각이 달라지거나 이견을 표출한 사람에 대해 ‘내부의 적’ 내지 ‘내부 총질’이라 비난한다. 이탈 세력에 대해 ‘배반’ 내지 ‘배신’이라는 낙인을 붙이기 쉽다. 민주주의가 국민주권으로 단순화되면 될수록 정치인과 정당, 의회, 언론, 이익집단 등의 역할에 부정적인 것은 물론, 자신이 옳다고 보는 정치인이나 정당, 언론 이외에 다른 정치인, 정당, 언론에 공격적이기 쉽다. 민주주의를 ‘반민주 세력과의 싸움’으로 보면 볼수록 정치의 역할을 사라지고 언론과 시민단체를 포함해 사회 전체가 양극화되고 분열되는 일을 피할 수 없다.”

“김)결국 민주주의는 일원주의가 아니라 다원주의와의 결합이 튼튼해질 때 발전할 수 있는 정치체제로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서로 다른 이해관계나 열정을 갖는 시민 집단들의 요구가 정치적으로 잘 대표되는지, 여야의 복수 정당들이 사회의 다양한 의견을 잘 조직해 공적 토론을 풍요롭게 만들고 있는지, 서로 이견을 가진 정치인들이 정치가다운 말과 행위로 의미 있게 경쟁하면서 갈등을 조정하는지 등의 문제가 더 중요하다. 정당이나 정치인들이 ‘국민 여러분!’을 외치며 민심이나 민생, 국민 여망 같은 공허한 구호를 앞세우는 것은 정치의 역할을 스스로 나쁘게 만든다.”

“박)민주주의를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국민이든 시민이든 민중이든 인민이든 민주주의의 주권자는 수많은 차이와 이견, 갈등하는 이해관계와 열정을 가진 다원적 구성체이다. 이들이 민주주의라고 하는 정치체제 안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고 안전하고 건강하고 평화롭게 자신의 요구를 표출하고, 토론하고, 조정하고, 결정을 이끌어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민주주의론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국가나 국민은 ‘여러 다른 것들로 이루어진 하나’로 이해되어야 한다. 민주주의이기 때문에 다수의 목소리가 공적 결정을 주도하는 것이라 해도, 그때의 다수 역시 ‘여러 소수들의 연합체’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생각이 민주주의의 기초를 튼튼하게 해 줘야 좋은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3.

“김)지금 우리 사회에서 민주주의는 확고한 정당성을 자랑하고 있다. ’정치가 뭐 이래?‘라고 말하는 이는 많지만, 민주주의가 아닌 정치를 말하는 사람은 없다. 통치권이 세습이 아니라 선출의 원리로 결정되니, 민주주의인 것은 맞다. 당신과 같은 정치학자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가장 짧은 정의는 ‘불확실성의 제도화’ 아닌가? 선거 결과가 확실하다면 민주주의가 아닐 것이다. 복수의 정당 후보가 경쟁하며 누가 승자가 될지 불확실하다는 점에서, 민주적 정치 과정의 기본 요건을 갖춘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군부 쿠데타의 가능성 때문에 비상한 대비를 해야 할 상황도 아니고, 좌파 혁명은 물론 우파 보수혁명을 두려워해야 할 일도 없다. 과정은 어떠하든, 대통령은 민주적으로 선출될 것이다. 민주주의는 확실히 민주주의다.”

“박)민주주의는 ‘정치에서 승부를 보는 체제’를 가리킨다. 사회 체제를 가리키는 것도 아니고 경제체제를 가리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이념도 아니다. Democratism이나 Democraticism이 아니라 Democracy다. 접미사 –cracy는 통치(rule)나 권력(power), 정부(government)에 가까운 의미를 갖는다. 이념을 구현하는 게 민주주의가 아니라, 좋은 정부를 이끌고 공권력을 선용하는 정치의 역할에 기대를 거는 게 민주주의다. 정치가 제 역할을 해야 민주주의의 가치는 살아난다. 그 어떤 민주주의에서도 여러 시민 집단들 간의 이해관계와 열정은 갈등적이다. 정치는 갈등 속에서 일한다. 차이를 조정한다. 해결할 수 없는 요구 사이에서 공존과 타협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도달한 공적 결정이라야 정치는 권위를 갖는다. 그래야 행정 관료제는 물론 경제 권력의 순응을 얻을 수 있다. 정치의 역할 없이 공동체의 통합을 이끌 수 있는 민주주의는 없다. 그런 민주주의가 정치의 역할 없이 운영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우리는 민주주의 국가다’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로되 왜 더 부자유스럽고 더 불안하고 더 위태롭고 더 위험한 한국 사회가 되고 있느냐 하는 질문을 해야 한다.”

“김)당신의 판단대로라면, 지금 우리 앞에는 정치의 역할이 최소화된 민주주의가 있다. 정치의 역할을 부정적으로 보는 ‘국민주권 중심의 편협한 민주주의관’, 정당은 물론 정치가나 당원 대신 국민이 공천을 하게 하고 국민이 국회의원을 소환하고 국민이 법을 만들게 하자는 민주주의관을 앞세우는 사람들이 한동안 세상을 지배했던 것의 결과다. 당신 말마따나 그들은 모두 국민을 찾고, 민생을 말하며, 민심을 쫓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를 이상화한다. 각자의 신념과 차이가 존중되지도, 토론되지도, 조정되지도 않는 민주주의의 길로 가고 있다. 승자가 정의를 독점하는 민주주의 시대다. ‘가치의 다원성’이 인정될 수 없는 민주주의다. 정신적으로는 일당제 민주주의에 가깝다. 잘 생각해 보면, 좀 이상한 민주주의인데 정당과 정치가들은 물론 지지자들도 이에 굴종했다.”

“박)그것이 가져온 결과는 참혹하다. 정당은 싸움밖에 할 줄 모르게 되었다. 모두가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를 말하며 적대와 증오를 동원하는 일을 정치라고 하게 되었다. 자신들만이 옳아야 하기에 스스로의 잘못은 돌아볼 의사가 없다. 상대 당에 대한 말과 행동은 때로 야비해 보일 정도로 나빠졌다. 정치가다움이 느껴지는 풍모나 기품을 가진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시민도 마찬가지다. 정치에 관심이 많은 시민일수록 무례하다. 혐오감을 일으킬 정도로 사나운 열성 지지자들이 사나운 말과 사나운 행동으로 호령하고 다니는 세상이다. 현기증 일으킬 정도로 출렁이는 여론조사에서 승기를 잡아야 한다는 조바심만 있다. 모두가 여론조사만 보고 있다. 정치는 없고 여론조사가 민주주의를 지배한다. 마치 국민의 주권적 판단이 여론조사로 표현된 것인 양 여긴다. 정치의 자율적 역할이 발휘될 상황이 아니게 된 것이다. 정치의 역할이 사라진 민주주의에서 남는 것은 적대적 양극화뿐이다.”

“김)사실 그 모든 것을 정당과 정치인들이 만들었다. 누군가 우리 정당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묻는다면 답하기 곤혹스럽다. 갈등의 통합자는 확실히 아니다. 공익의 증진에 기여하는지도 모르겠고, 공직 후보자를 양성하는 기관인 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러니 대통령 선거 경쟁이 이상한 방향으로 치닫게 된 것은 당연하다. 정당의 캠프들은 한동안 외부 인사 영입 경쟁으로 유권자를 혼란에 빠뜨리더니, 갑자기 후보 중심이라며 정당의 역할을 보조기구로 만들었다. 당신 말대로 사회를 통합하는 정치의 기능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분열과 실망을 배가시키는 정치 아닌 정치가 들어섰다. 정치해서는 안 될 인물들이 여론조사로 대통령 후보가 되고, 대통령이 되는 사회가 되었다. 분명 정당의 후보들이 경쟁하는 대통령 선거라는데, 정당도 정당정치도 기능하지 않는다. 정당은 권력 투쟁에서 승리를 거머쥐기 위한 선거 관리 조직 이상 그 무엇인지 모르게 되었다.”

“박)과거 누군가는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표현을 썼지만, 지금 우리는 죽은 정치의 사회, 정치가 사라진 민주주의를 두고 어떻게든 회생과 복원의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정치 없는 민주주의는 누구에게도 유익함이 없다.”

 

4.

“김)당신은 정치 비판론자인가? 사실은 그렇지 않은데, 자칫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다.”

“박)나는 정치 예찬론자다. 그 점은 당신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정치의 좋은 역할 없이는, 모두가 바라는 좀 더 자유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안전하고 평화로운 삶은 기대할 수 없다고 본다. 정치의 꽃은 정치가다. 민주주의의 꽃은 정당이다. 좋은 정치가를 길러낼 수 없는 사회는 불행하다. 좋은 정당이 정치의 중심을 잡아주지 못하면 민주주의도 함부로 운영될 수 있다.”

“김)말 그대로 ‘함부로 운영되는 민주주의’가 되었다. 그래도 우리는 좋은 정치가에게 용기를 줄 수 있는 정치론, 좋은 정당에게 기회가 제공되는 민주주의론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박)인간은 정치를 통해 ‘자연적 존재’에서 ‘사회적 존재’가 되었다. 자연의 법칙에 따른 생존 투쟁의 삶에서, 동료 시민들과 함께 정의로운 공동체를 만들고 ‘목적 있는 삶’을 추구하는 것은 ‘정치 이후’에 시작된 일이다. 정치가 사회구성원들 사이의 갈등에도 불구하고 공존과 협력을 가능케 해주었기 때문이다. 법이 존재하지 않는 ‘자연적 자유’와 ‘자연적 평등’을 넘어, ‘시민적 자유’와 ‘시민적 평등’이 만인의 권리가 된 것도, 인간이 정치라는 공적 활동을 손에 쥔 덕분이었다.”

“김)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한 신뢰로부터 정치는 시작되었다고 본다. 자연의 법칙이나 운명의 변덕에 굴종하는 수동적 존재에서 벗어나, 인간 스스로 자연의 제작자가 되어 세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끄는 주권자가 된 것은 그때부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까 한다.”

“박)그 모든 일은 인간이, 과거에는 도시나 왕국으로 불렸고 지금은 국가라고 하는, 정치 공동체를 만든 것에서 비롯되었다. 정치 공동체를 통해 구속력 있는 공적 결정을 내리고 집행함으로써 인간은 신에 버금가는,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을 닮은 신을 창조해낼 정도로 놀라운 문명을 이루고 그 속에서 변화로 가득 찬 역사를 만들 수 있었다. 노동의 결과 가운데 일부를 세금으로 걷고 이를 기초로 공공정책을 기획하고 실행하는 '정치의 역할'이 없었다면 이런 대단한 성취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인간을 가리켜 ‘정치적 동물’이라 불렀다고 들었다.”

“박)그에 따르면 인간은 정치를 통해 목적 있는 삶을 추구하는 유일한 피조물이다. 이성과 덕성을 갖춘 삶은 오로지 인간만이 추구하는 목적이고, 공동체에 속하지 않는 고립된 조건에서는 그런 삶의 가치는 인식될 수조차 없는 일이며, 정치란 인간 공동체를 그런 방향으로 이끄는 자각적 활동을 가리킨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의 역할 없이 가치 있는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 자가 있다면 그는 ‘인간 이하이거나 인간 이상일 것’이라 말했다.”

“김)정치철학의 최초 질문은 ‘좋은 정치가 좋은 시민을 만드는가, 아니면 좋은 시민이 좋은 정치를 만드는가’에 있다고, 언젠가 당신은 말한 바 있다. 정치철학자들의 한결같은 대답은 좋은 정치 없이 좋은 시민의 삶은 어렵다는 데 있다고도 했다. 오늘날 시리아나 예멘 같은 나라의 예에서 보듯, 정치가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인간 사회에서 자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상상하기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박)사적 권리를 보장하고 공적 의무를 부과할 수 있는 정치체가 없는 삶이란, 의심과 두려움이 지배하는 ‘자연 상태(state of nature)’일 수밖에 없다고 말한 이는 토머스 홉스였다. 자연 상태(state)가 ‘자연 국가(state)’와 같은 의미라는 사실은 흥미롭다. 국가나 정부를 포함해 인간의 정치체는 모두 인위적인 동의나 합의의 산물인바, 좋은 정치라는 것이 결코 자연스러운 귀결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효과적으로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덕성을 갖추지 못한 인간은 야수보다 못하다고 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홉스는 야수보다 못한 인간의 문제를 국가라고 하는, 모두에게 공통된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서 찾았다. 혈연 공동체나 믿음의 왕국이 아닌 세속 국가의 문제에 관한 한, 인간의 타고난 본성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 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정치를 좋게 만들려는 인간의 인위적 노력 없이는 달라지는 일이 없다는 것, 지금 우리가 바로 그런 생각을 해야 할 때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나는 민주주의 역시 정치라고 하는 더 넓은 인간 활동의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본다. 민주주의를 한다고 해도 정치의 역할이 없는 민주주의라면, 그때의 민주주의는 그 어떤 정치체제보다도 더 비극적인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반(反)정치적 민주주의는 인간 공동체를 파멸로 이끈다.”

“김)나 역시 지금의 한국 정치가 정치 본래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가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감을 갖는다. 정치가 정치답게 제대로 실천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이 대화를 이어갈까 한다. 서론 격의 대화가 자꾸 길어지는 것 같긴 하지만, 잠시 쉬었다가 정치와 윤리의 문제를 짚고 나서 본론으로 들어가면 어떨까 한다.”

“박)휴식은 언제나 좋다.”

 

5.

“김)많은 이들이 정치는 곧 권력 투쟁 아니냐고 말하고, 권력 투쟁에서 승자가 될 수 있도록 강해져야 한다고 권고한다. 그 자체는 틀린 말은 아니라고 보는데, 그래도 반도덕적인 권고가 되지 않으려면 강력한 권력 의지로 정치를 하는 것의 윤리적 기초는 세워야 하지 않을까 한다.”

“박)권력을 추구하고, 그 과정에서 패자가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정치가의 실존적 목표인 것은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 적극적 권력 투쟁이 정치의 방법론이 되어야 하는 것은 맞다. 하지만 권력 투쟁에서의 승리 그 자체가 정치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좋은 가치나 신념에 의해 이끌리지 않는 권력 투쟁은 정치를 파멸로 몰고 갈 수 있다는 점도 생각해야 한다. 이는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가 (정치가가 지향해야 할 윤리로서) ‘책임 윤리’를 강조한 것의 진정한 의미이기도 하다.”

“김)베버가 ‘신념 윤리’와 ‘책임 윤리’를 중심 개념으로 정치 윤리가 가진 특징을 이론화한 것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 신념 윤리는 대의에 충실한 목적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목적 윤리’라고도 불린다. 베버는 정치적 윤리의 본질은 신념 윤리보다 책임 윤리에서 찾은 것으로 안다. 그렇다면 책임 윤리는 목적보다는 수단의 선택과 관련된 윤리론이 아닐까 싶다.”

“박)그게 핵심이다. 다만 베버가 말하는 책임 윤리가 신념 윤리에 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의 한계와 제한된 현실 속에서 신념이나 목적의 윤리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하는 분투노력, 책임 윤리의 진정한 의미는 거기에 있다. 한마디로 신념 윤리를 인간이 직면한 현실 속에서 최선을 다해 실천하고자 하는 몸부림이 책임 윤리라 할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정치라는 인간 행위에 소명의식이나 책임감이 깃들 수 있겠는가? 정치란 권력과 힘이라고 하는 악마의 무기를 손에 쥐는 일을 회피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렇다고 악마의 마음으로 악마의 수단을 손에 쥐면 정치가는 악마가 되고 만다.”

“김)그래서 베버는 제대로 된 정치가라면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필요한 자질과 능력을 갖춰야 한다고 권고한 것 같다. 옳은 일을 하겠다는 신념이 현실 속에서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단단한 내면’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 것도 베버다. 외적으로는 선한 목표나 사회적 대의를 구체화해서 제시할 수 있는 자질과 실력을 갖춰야 한다고도 말했다.”

“박)그래야 권력을 선용할 수 있다는 것이 베버의 믿음이었다. 그래야만 권력을 추구하는 일에서 늘 직면하게 마련인 사악한 유혹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고 또 동료 시민의 삶을 지키는 호민관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정치하는 일이 늘 윤리적 딜레마와 고통스러운 긴장을 동반하더라도, 언제든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외치며 좀 더 인간다운 정치의 길을 낼 수 있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다. 독일어로 dennoch라고 하는데,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는 베버의 강연 내용을 담은 책 『소명으로서의 정치』의 맨 끝부분에 나오는 매우 유명한 표현이다. 주어진 상황과 현실의 제약 속에서 굴하지 않고 변화를 만들어가는 존재로서 정치가를 베버만큼 예찬한 사람도 드물다.”

“김)혹자는 마키아벨리를 인용하며, 정치가는 윤리적으로 의심스러운 수단일지라도 과감하게 손에 쥐어야 하고 이를 두려워하면 파멸한다고 하지 않았냐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이 역시 틀린 이야기는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역시 그 전에 해둘 것이 있을 것 같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정치 윤리의 핵심을 비르투(Virtù)라는 개념으로 집약해 표현하지 않았나? 영어의 virtue에 가까운 이 말은 미덕이나 덕목을 뜻한다. 그 점에서 마키아벨리를 반도덕적이라거나 비윤리적 정치론의 옹호자로 볼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박)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 도덕의 분리를 주장한 적이 없다. 다만 기존 정치 윤리론의 중심 개념인 덕, 즉 Virtù에 용기와 자신감, 적극성 등의 의미를 덧붙였다. 요컨대 정치적 미덕이나 덕목은 정치가의 용기와 자신감, 적극성을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는 것이 마키아벨리가 말하고자 하는 핵심이라 하겠다. 이로써 마키아벨리는 정치에서의 도덕성은 반(反)권력론이 아니라 권력 선용론을 통해 실천될 수 있다는 과감한 주장을 발전시켰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마키아벨리는 가장 도덕적인 정치론을 가장 적극적인 의미로 옹호한 사람이라 해야 할지 모른다.”

“김)마키아벨리를 읽으면서 느낀 것은 그가 옹호한 정치의 목적은 오해할 여지가 없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그는 타국의 지배로부터 국가의 자유를 지키고 귀족의 탐욕으로부터 민중의 자유를 보호하는 정치를 한결같이 옹호하고 있었다.”

“박)죽을 때까지 그랬다. 마키아벨리가 남긴 모든 글과 실제의 행적 가운데, 국가의 독립과 시민의 자유를 벗어난 지향을 말한 바는 없다. 그렇지 않고 군주나 정치가가 국가나 공동체가 아니고 자신의 안위를 위해 권력을 남용하고 동료 시민을 속이고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결코 비르투라고 부를 수 없다’라고 보았다. 가톨릭 군주였던 당시의 교황처럼, 가장 도덕적인 척을 하지만 실제로는 자신을 위한 권력의 추구에 몰두하는 일을 마키아벨리처럼 경멸한 사람도 없었다. 한마디로 마키아벨리는 ‘자유의 정치가’였다. 죽을 때 남긴 말은 ‘하루를 살더라도 자유롭게’였다.”

“김)지금 우리 정치인들의 문제는 권력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권력을 가치 있게 쓰고자 하는 도덕적 열정이 없어서 문제가 아닌가 한다. 반도덕적인 권력추구만 있을뿐, 신념의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가치 있는 변화를 추구하려는 정치가로서의 분투노력은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더 문제는 그런데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부끄러워하고 과오를 인정하는 것을 권력 투쟁에서 패배하는 일로 여기며 더 뻔뻔해지고 더 자기기만적인 말과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이것도 정치라고 해야 한다면, 잘못된 정치라고 분명히 표현해야 맞다. 도덕적으로나 윤리적으로 저열한 인간들이 정치를 망치고 사회를 분열시키고 시민들 사이를 적대와 증오로 대립시키는 일을 멈추게 하지 못하면, 정치가 오히려 사회 공동체에 부담이 될 것이다.”

“박)정치는 좋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 누군가 나쁜 정치라도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동의할 수가 없다. ‘정치, 그렇고 그런 거지 뭐 특별한 뭐가 있는 게 아니다.’ 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반대할 것이다. 존재하는 정치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 사실 정치에 관심 가질 일도 없고, 정치를 좋게 하려는 열정을 발휘할 이유는 더더욱 없게 될 것이다.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 아니라 찬사의 대상이 되어야 하고, 어떻게든 정치를 좋게 만들려고 노력하는 것을 중단할 수 없다.”

“김)나쁜 국가라도 국가는 있어야 할까? 악법도 어쨌든 법이라고 인정해야 할까? 이런 오래된 논쟁은 정치의 역할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누군가 ‘나쁜 국가라도 있는 게 낫다’ 라거나 ‘악법도 무법보다 낫다’고 주장한다면 어떻게 응수해야 할까?”

“박)나쁜 국가가 무국가보다 낫다거나, 무법보다는 악법이라도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정당화할 수 있는 윤리적 기준은 만들 수 없다고 본다. 무국가 못지않게 나쁜 국가 또한 받아들일 수 없다. 무법 못지않게 악법에도 항의해야 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사람을 가장 많이 살해한 것도, 자연환경을 가장 많이 훼손한 것도 국가였다. 그 모든 일을 국가는 법의 이름으로 행했다. 누구도 악법과 나쁜 국가의 통치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난민의 길을 나서는 사람에게 그래도 나쁜 국가라도 있는 게 낫지 않느냐고 말할 수 없으며, 나쁜 국가에 대한 반란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저항을 멈추라고 요구할 수 없다. 악법에 항의해 시민 불복종에 나서는 사람들에게 그래도 법을 지켜야 한다고 할 수 없다. 나쁜 국가와 악법의 지배는 정치가 실패한 결과다. 나쁜 정치가 나쁜 국가를 만들고 악법을 낳는다. 무국가나 무법천지가 돼도 좋으냐는 식으로 강박하는 주장을 받아들일 의사는 없다. 나쁜 정치를 정당화하려는 시도에 대한 저항을 멈출 의향도 없다.”

“김)나 역시 같은 생각이다. 국가든 법이든 좋을 때만 가치를 갖는다. 정치 역시 정치답게 제대로 실천될 때만 옹호되고 예찬될 수 있다. 정치가 기대되는 역할을 못할 때마다 개선을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박)비록 그것이 영원히 반복될 수밖에 없는 ‘시시포스의 신화’와 같다 하더라도, 결국 헛수고 아니냐는 냉소에 직면하게 되더라도 멈출 수 없다. 그러기보다는 시시포스와 함께 돌을 떠받치고 그의 등을 지지하는 선택을 기꺼이 해야 한다는 것, 우리의 신념은 그 언저리 어딘가에 있어야 할 것이다.

“김)서론 격의 논의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 싶다. 이제 우리의 민주주의 현실, 우리의 정치 현실에 대한 비판자의 역할을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기로 하자. 누군가 지금 같은 나쁜 정치의 관성을 이어가기보다 정치, 정치답게 제대로 해보고 싶어 하는 미래 정치인이 있다면 그에게 자신감을 갖게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해보자는 것이다.”

“박)지난해 언젠가 국회의원회관 앞에서의 짧은 대화를 잊을 수 없다. 모두가 정치에 절망하고 냉소하면서 각자도생을 도모하고 있을 때였다. 그때 국회 보좌진 역할을 하고 있던 박00은 이렇게 말했다. ‘정치를 욕하는 대신 나서서 바꿔보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다. 지금부터 착실하게 선출직 정치가의 길을 준비해보려 한다. 좋은 정치를 만드는데 책임감을 갖고자 한다.’ 갑자기 주변이 밝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상쾌했다. 우리 정치엔 그런 친구들의 도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의 시대를 기대하고 기다리는 마음 간절하다.”


2022년 1월

박상훈, 김성희

 

계속보기(2회로 바로가기) 

 

1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