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은 어떻게 그들의 무기가 되었나 - 시사IN 680호
공정 논란은 우리 사회의 블랙홀이다. 논란에 불이 붙으면 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의사 파업과 인천공항 정규직화 논란에서 드러난 공정 담론을 생각해보는 좌담을 마련했다.
의사 파업을 촉발한 것은 ‘정원 확대’였다. 의대 정원을 10년간 연 400명씩 늘리면 의사 수가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진다는 우려 때문이다. 이 자체는 정부가 특정 직종의 면허 숫자를 늘리려 할 때 이해 당사자들로부터 나오기 마련인 ‘고전적인 반대’에 가깝다. 정부가 내놓은 또 다른 계획인 ‘국립 공공의대 설립’은, 폐교된 서남의대 정원 49명을 이왕이면 나라에서 교육시켜, 현재 지원자가 모자란 감염내과 전문의, 역학조사관 등을 양성한다는 내용이다. 이 분야에 관심이 없는 다른 의사들이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정원 확대보다 오히려 공공의대 설립이 의대생과 전공의 등 ‘젊은 의사’들을 더욱 화나게 한 것으로 보인다. 공공의대 학생을 ‘시·도지사 추천제’로 뽑는다는 대목이 문제였다. 보건복지부는 “시·도지사가 개인적인 권한으로 특정인을 임의로 추천할 수 없”으며 “전문가·시민사회단체 관계자 등이 참여하는 중립적인 시·도 추천위원회”를 구성할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오히려 논란이 커졌다. 심지어 ‘586 권력자’들이 친인척을 공공의대 학생으로 밀어 넣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퍼졌다.
당초 공공의대는, 지금의 의료 인력들이 가지 않는 지방 및 기피 부문의 의사를 어떻게 충원할 것인가라는 문제의식에서 나왔다. 의사로 성장한 뒤 수도권으로 옮기지 않고 지방에서 일할 필수의료 부문의 인력을 뽑는 문제였기 때문에 ‘그 지역 행정 수장(시·도지사)의 추천’이 거론되었던 것이다. 즉 공공의대는 ‘지역 간 의료 격차’와 ‘필수의료 부문의 의사를 지방에 머물게 하는 방법’에 대한 문재인 정부 나름의 해법이었다. 그러나 사회적 논의는 ‘추천제라는 경로로 의대에 들어가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날선 반발로 이어졌을 뿐 정작 문제의 핵심은 비켜가고 말았다.
한국 사회는 비슷한 구조의 사건을 알고 있다. 인천국제공항 정규직화 과정에서 보안검색 요원 1902명을 직접고용하기로 하자 ‘공채 없는 직접고용은 불공정하다’는 반발이 튀어나왔다. 해당 보안검색 요원들이 얼마나 오랜 기간 문제없이 일해왔는지, 보안검색 업무가 인천공항을 이용하는 시민들의 안전에 밀접한 업무인지 아닌지, 인천공항 정규직과 하청업체 노동자 사이의 임금 격차가 정당했는지 따위의 질문은 ‘다른 경로는 불공정하다’는 외침 앞에 무력했다.
이쯤 되면 공정은 우리 시대의 블랙홀이다. 일단 ‘불공정 논란’에 불이 붙으면, 논의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논의를 뒤엎을 힘이 있는 의사 집단은 자신들의 의지를 실제로 관철했다. 의사 파업은 인천공항 정규직화 논란의 극단화된 버전이라 할 만하다. 〈시사IN〉은 두 사건에서 드러난 공정 담론을 생각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의료 쪽에서는 의사 파업에 비판적 목소리를 내온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원진녹색병원 재활의학과 전문의), 노동 쪽에서는 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하며 청년들의 반대와 맞닥뜨렸던 조성주 전 서울시 노동협력관(현 정치발전소 대표), 공정 담론을 연구해온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 교수(커뮤니케이션학)가 참여했다. 좌담은 9월9일 〈시사IN〉 편집국에서 진행했다.
ⓒ시사IN 신선영(왼쪽부터)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전 서울시 노동협력관),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 교수.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
‘매년 전교 1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학창 시절 공부에 매진한 의사’와 ‘성적은 한참 모자라지만 추천제로 공공의대에 입학한 의사’ 중 누구를 고르겠냐고 물은 대한의사협회 산하 의료정책연구소의 카드뉴스가 논란이 되었다.
정형준:현실을 알면 ‘내부 총질’이다. 기성세대 의사들이 그 카드뉴스를 보고 기함을 했다. 1992년 자연계열 학력고사 배치표가 SNS에서 화제였는데, 당시 지방의대에 가는 성적이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의 웬만한 과들보다 낮았다. 전에도 학벌주의나 서열주의는 있었지만, 의과대학이 그 정점에 서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불안정 노동이 확산되면서다. 제가 그 전에 의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잘 안다(웃음). 의과대학 입학 성적의 인플레이션은 한국 사회 노동환경 변화와 관련 있는 현상이다. 고학력자가 의사가 되어야 더 기여할 수 있다는 합의가 우리 사회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성주: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둘러싸고 ‘공정’ 담론이 튀어나온다. 그게 세대의 표피를 쓰고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노동시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진행할 때, 같은 민주노총 조합원인데도 20~30대 조합원의 반발을 40~50대 조합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 40~50대 조합원들 입장에선 정규직화되는 저 사람들이 예전에 다 자기들과 같이 일하던 동료이고 외환위기 이후 외주화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20~30대 조합원들에겐 그게 아닌 거다. 나이 든 조합원들이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김정희원:저성장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젊은 세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예전만큼 질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고, 학벌이나 자격증이 더 이상 괜찮은 직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밥그릇 싸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의사나 (공기업) 정규직 같은 일자리를 노력해서 얻게 되었는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공공의대 같은) 구조적 개입이 ‘나’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린다며 일단 반발하고 본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때 공정성을 들이대는 건 굉장히 문제적이다. 사실 그 공정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내 밥그릇을 빼앗아가거나 내 노력을 보상해주지 않아서 불공정하다’는 것이지 사회적 공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들이대면서도 ‘절차적 공정성이 문제’라며 이를 은폐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흔히 ‘웨포나이즈(weaponize:무기화)’라고 한다. 담론 싸움에서 (공정성 같은) 특정 단어를 무기화하는 거다. 사실 공공의대가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가? 이 정책을 둘러싸고 검토해야 할 갈등이나 세부사항이 정말 많다. 인천공항 정규직화 역시 풍부하고 섬세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의제인데, 공정성이라고 말하는 순간 논의가 활발해지는 게 아니라 차단되어버린다. 나아가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이 말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은 ‘절차적 공정성’ 같은 정의로워 보이는 개념을 들고나온다. 그 순간, 비정규직은 갑자기 불공정하게 수혜를 입은 것처럼 되어버린다. 결코 그렇지 않은데도.
조성주:(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당시) 20대 후반의 정규직 신입사원들은 그 업무를 1년도 채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은 똑같은 업무를 7년 동안 했다. 30대 초반으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다. 경영진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비정규직을 뽑는 게 맞다. 7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그 일을 해왔으니까. 비정규직의 숙련도가 높으니 임금도 더 높아야 된다. 하지만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왜? 정규직들이 ‘나는 시험 쳐서 들어왔으니 더 공정한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입직 과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근속을 덜 쳐주고 임금도 더 낮게 줘야 한다.
의사든 공기업 정규직이든 정부 정책에 따른 소득 감소를 우려할 수 있다. 밥그릇 싸움을 할 수 있다. 지난해 비슷한 구조의 사건이 있었다. 현대차 노동조합이 광주형 일자리(광주에 현대차가 투자하는 자동차공장을 지어 경형 SUV를 연간 10만 대 생산하는 정책. 노동자들은 적정시간 일하고 적정임금을 받는다)에 반대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나더라도 이 공장이 생기면 현대차 노동자들의 잔업·특근 물량이 떨어져 소득이 줄어들 수 있으니까. 여기선 공정성 담론이 나오지 않았다. 광주형 일자리를 반대하는 주력인 50대 현대차 노조 조합원 처지에서는 공정성 담론을 무기화할 수 있는 ‘자기 서사’가 없는 거다. 반면 청년 세대에겐 자기 서사가 있다. ‘나는 노력하고 고생해서 시험 치고 경쟁했다.’ 노동시장 변화가 강요한 서사이기도 하다.
김정희원:공정성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집단이 누군지 들여다보면, 거의 항상 그 맥락에서 기득권자들이다. 이미 의사라든지 이미 정규직인 사람들이다.
ⓒ연합뉴스
2017년 8월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의사나 공기업 정규직은 한국 사회에서 높은 소득을 올리는 사람들이다. 시험을 잘 본 ‘능력’ 있는 이들만이 의사나 공기업 정규직이 될 자격이 있다는 논리가 읽힌다.
정형준:대한의사협회의 카드뉴스가 드러낸 건 지난 20년간 양성된 의사 집단의 엘리트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다. 우리가 그만큼 성적이 좋은 엘리트들이고, 한번 이겼기 때문에 계속 모든 걸 독점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지적한 것처럼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특히 이번에 공공의대나 의사 증원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 휴진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전면에 나선 집단이 필수의료를 공급하는 대학병원의 전공의였다는 건, 기본적인 직업윤리나 ‘전문가주의’조차 잠식당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양성한 의사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적이고 공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조성주:고어 비달이라는 미국의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성공이라면, 공정을 들고나오는 것은 단순히 소득 감소를 우려해서만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엘리트가 되고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고생했고 고난을 거쳤지만, 그 경쟁을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서사로 작동한다. 그 과정을 못 이겨낸 사람들은 패배자로 있어야 자신이 정당해진다. 내가 소득을 많이 올려 성공하는 것보다 남들이 패배자의 위치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구분이 안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때 불공정하다고 앞장서서 반대하던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 사람은 20대 내내 계약직과 파견직으로 살았는데 너무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억울해서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갔다. 3년을 공부해서 30대 초반에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이 되었다. 이 사람은 비정규직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안다. 20대 때 자신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런데 쟤네가 그냥 들어와? 눈앞에서 불공정하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반박을 잘 못하겠더라.
김정희원:흔히 수능시험이 어떤 사람의 학업성취도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측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든,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든, 교육제도 전반에 걸쳐서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일정한 구조 안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수능이란 객관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기보다는 이 교육제도 안에서 혜택받은 사람이 더 잘하게 되어 있는 구조인데, 그걸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스템 자체가 이미 편향되어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능력주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강남 8학군에서 족집게 과외를 받아 대학에 가는 아이와, 정말 명석하지만 그 사실이 이웃들에게마저 드러나지 않는 농어촌 아이 사이에 공정 경쟁이 어떻게 가능한가?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의사나 공기업 정규직)은 어떤 ‘진공상태’에서 자신의 노력 대비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 비뚤어진 신념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런 식의 불평등을 해소해주는 기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사임한 박지현 대한전공의협의회장이 부동산정책, 인천공항 정규직화 논란을 언급하며 “과정의 공정성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정부에 맞서 저희는 이 땅의 청년들과 연대하려 한다”라고 밝혔다.
김정희원:과정과 절차의 공정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과정과 절차가 공정하다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할 의무가 있다. 그걸 말해버리면 어이없는 결론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입시나 취직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건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한 걸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야 한다’라는, 일종의 통속화된 버전의 ‘공정 룰(rule)’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정(equity)’은 ‘정의(justice)’를 구성하는 여러 원리 중 하나에 불과한데,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개념이 되어버려 사람들이 좀처럼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조성주:공공의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정이 수능이라면, 인천공항 정규직화에서는 그게 공채다. 공채를 거쳐야 공정하다는 논리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 7년 동안 무사고로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숙련도가 높아도. 수능과 공채의 공통점은 결국 시험이다. 그 근간에는 ‘너는 어떤 경쟁을 통과해서 왔느냐’는 물음이 깔려 있다. 수치화되는 점수로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다 판별하겠나.
정형준:공정을 무기화한다는 측면에서 두 사건이 비슷하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인천공항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의사 집단은 훨씬 큰 힘을 갖고 있다. 의사들이 이번에 벌인 집단 휴진은 이들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국민 건강을 책임지고 있기에 가능했다. 정부가 사실상 백기 투항한 이유도 대안이 없어서다. 의사는 국민들이 보기에도 명백한 특권층이다. 의사 집단이 특권층이 아니라면 ‘수능 1등부터 3000등까지 의대 간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겠나. 공채로 공기업에 갔든 시험 쳐서 공무원이 되었든, 공공부문의 젊은 노동자들과 의사들의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다르다. (‘이 땅의 청년들과 연대하겠다’는 박지현 회장의 발언을 보면), 의사들이 마치 그들(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공공부문의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고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좀 코미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면 모든 걸 독점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얼마 전 영화 〈벌새〉를 보니 선생님이 ‘너네 공부 안 하면 청소부 된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끝장판을 보는 것 같다. 의사라는 직업은 윤리성과 헌신성도 필요하기 때문에 성적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는 트랙도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기회는 평등할 것입니다. 과정은 공정할 것입니다. 결과는 정의로울 것입니다.” 문재인 대통령 취임사가 공정이 논란이 될 때마다 인용된다.
조성주: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때 ‘북한으로 가라’는 악성 메일을 많이 받았는데 늘 첫 문장이 그 취임사였다(웃음). 생각해보면 그 취임사가 진짜 달성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 교육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을 보면, 근간에 자리 잡고 있는 건 ‘불평등’이다. 그런데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회가 평등할 리가 있나? 과정이 공정할 수 있나? 산출된 결과를 정의롭다고 하면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닥치고 받아들여’라고밖에 안 들릴 수 있다.
촛불 이후 공정 담론이 불거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불평등이었다. 이 문제를 많이 다루지 못한 것 같다.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정규직화 두 가지로 모든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를 퉁쳐버렸다. 나머지 문제가 다뤄지거나 개선된 느낌이 없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악이고, 정규직은 선인가? 이를테면 어떤 산업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임금이 지금처럼 차이 나는 것 자체가 맞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정규직화된 사람들이 연대의 원리를 실현할 거라 기대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해당 기업 안에 갇혀서 ‘우리 것’을 지키는 데 몰두하기 쉽다. 불평등에 대한 사고를 훨씬 깊게 하지 않으면,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은 취업시장의 서열에 따라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임용고시에서, 공기업 공채에서 또 반복될 것이다. 취업시장의 서열이란 그 앞의 교육 불평등에 따른 서열일 거고, 그건 아마 부모 소득의 서열과 맞아떨어지지 않겠나? 이렇게 가는 구조를 계속 둘 것인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정형준: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주는 건 결국 재분배 정책이고 복지 시스템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기본적인 사회 최저선을 보장해주고, 어떤 일에 실패해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어떨까?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전문직이어야 살아남는다’는 이유로 무한경쟁해서 의사가 되려 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선 의사가 노동자 임금보다 세 배 정도를 더 받지만, 힘든 일이고 노동시간도 길다는 인식이 있다. 주치의가 되면 밤에도 전화를 받거나 응급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대신 무상교육이다.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 의사들은 사회에 공헌한다. 성적 좋은 사람들이 다 의사가 된다기보다는 공부를 좋아하고, 힘든 일을 하더라도 존경받고 싶은 사람들이 의사가 된다. 국가에서 세금을 써서 공공 의료기관을 확충하고 여기서 일할 사람을 공공 부문에서 키워내야 한다. 나아가 재분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김정희원:동의한다. ‘기회는 평등하고…’라는 슬로건은 마치 우리가 이미 평평한 운동장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굉장히 텅 빈 것처럼 들려서, 정확하게 이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무화하는 슬로건이다. 정부는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 게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 해소 정책을 펴야 한다. 미국에서 그런 밈(meme, 다양하게 복제되는 파급력을 지닌 콘텐츠)이 돈 적이 있다. 키가 다른 세 사람이 축구 경기를 보는데 장벽이 쳐져 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세 사람에게 똑같은 높이의 디딤돌을 받쳐줘서 키가 작은 사람은 경기를 보지 못한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키 작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디딤돌을 받쳐줘서 모두가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장벽 자체를 없애는 게 핵심이다. 그게 진정으로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건 애초부터 장벽이 없는 사회, 그래서 개인의 핸디캡이 실제로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 사회다.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멘탈리티는 ‘원자화(atomization) 모델’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1등 하고, 성공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 외의 모든 경로는 부당하다. 이러면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불평등은 지워지고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만 남는다. 개개인이 자신을 하나의 기업가로 여기는 것이다. 원자화 모델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시급히 강조되어야 하는 가치는 연대다. 왜 연대해야 할까? 혼자만 언제까지나 잘나갈 사람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의사라는 직업도 AI(인공지능)로 대체될 수 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대안적 가치로서의 사회적 연대와 유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정형준:이번에 젊은 의사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의사들도 노동계급의 비정규직처럼 추락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내부의 강성 우파들이 퍼뜨렸기 때문이다. ‘의사 증가율이 지금도 높은데 정원 확대되면 다 죽는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자료가 대표적이다. 내가 의대에 다니던 1990년대 후반에도 선배나 교수들이 그런 얘길 많이 했다. ‘좋은 시절 다 끝났다, 너희들은 취직할 데도 개원할 데도 없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건 일자리가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이다.
조성주:그런 공포감이 비논리적이지만 통하는 건 명확한 비교군이, 압도적 다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개만 딱 돌리면 보이잖나. 한국 노동시장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려 있으니까, 조금만 삐끗하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 아는 거다.
김정희원:궁극적으로는 구조적 이유로 실직해도 별 문제 없이 먹고살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국가의 책임이다.
*이 기사는 주간지 시사IN에 실린 기사입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903
‘공정’은 어떻게 그들의 무기가 되었나 - 시사IN 680호
ⓒ시사IN 신선영(왼쪽부터) 조성주 정치발전소 대표(전 서울시 노동협력관), 김정희원 미국 애리조나 주립대학 교수. 정형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공의료위원장,
정형준:현실을 알면 ‘내부 총질’이다. 기성세대 의사들이 그 카드뉴스를 보고 기함을 했다. 1992년 자연계열 학력고사 배치표가 SNS에서 화제였는데, 당시 지방의대에 가는 성적이 서울대나 연세대, 고려대의 웬만한 과들보다 낮았다. 전에도 학벌주의나 서열주의는 있었지만, 의과대학이 그 정점에 서게 된 것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비정규직이 양산되고 불안정 노동이 확산되면서다. 제가 그 전에 의대에 들어갔기 때문에 잘 안다(웃음). 의과대학 입학 성적의 인플레이션은 한국 사회 노동환경 변화와 관련 있는 현상이다. 고학력자가 의사가 되어야 더 기여할 수 있다는 합의가 우리 사회에 있는 것도 아니었다.
조성주:소득이 높고 안정적인 일자리를 둘러싸고 ‘공정’ 담론이 튀어나온다. 그게 세대의 표피를 쓰고 나타나는 것은, 실제로 노동시장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에서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진행할 때, 같은 민주노총 조합원인데도 20~30대 조합원의 반발을 40~50대 조합원들이 이해하지 못하더라. 40~50대 조합원들 입장에선 정규직화되는 저 사람들이 예전에 다 자기들과 같이 일하던 동료이고 외환위기 이후 외주화되었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20~30대 조합원들에겐 그게 아닌 거다. 나이 든 조합원들이 굉장히 당황스러워했다.
김정희원:저성장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젊은 세대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았다. 예전만큼 질 좋은 일자리가 많지 않고, 학벌이나 자격증이 더 이상 괜찮은 직업을 보장해주지 않는다. 밥그릇 싸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의사나 (공기업) 정규직 같은 일자리를 노력해서 얻게 되었는데,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나 공공의대 같은) 구조적 개입이 ‘나’의 노력을 헛수고로 돌린다며 일단 반발하고 본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 사회적 불평등이나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지 않고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이때 공정성을 들이대는 건 굉장히 문제적이다. 사실 그 공정성은 자신이 속한 집단의 이해관계를 반영할 뿐이다. ‘내 밥그릇을 빼앗아가거나 내 노력을 보상해주지 않아서 불공정하다’는 것이지 사회적 공정성을 말하는 게 아니다. 자신의 이해관계를 들이대면서도 ‘절차적 공정성이 문제’라며 이를 은폐한다. 미국에서는 이런 현상을 흔히 ‘웨포나이즈(weaponize:무기화)’라고 한다. 담론 싸움에서 (공정성 같은) 특정 단어를 무기화하는 거다. 사실 공공의대가 얼마나 복잡한 문제인가? 이 정책을 둘러싸고 검토해야 할 갈등이나 세부사항이 정말 많다. 인천공항 정규직화 역시 풍부하고 섬세한 사회적 논의가 필요한 의제인데, 공정성이라고 말하는 순간 논의가 활발해지는 게 아니라 차단되어버린다. 나아가 다른 집단에 속한 사람이 말할 자격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들은 ‘절차적 공정성’ 같은 정의로워 보이는 개념을 들고나온다. 그 순간, 비정규직은 갑자기 불공정하게 수혜를 입은 것처럼 되어버린다. 결코 그렇지 않은데도.
조성주:(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당시) 20대 후반의 정규직 신입사원들은 그 업무를 1년도 채 하지 않았다. 비정규직은 똑같은 업무를 7년 동안 했다. 30대 초반으로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다. 경영진 입장에서 냉정하게 생각하면 비정규직을 뽑는 게 맞다. 7년 동안 아무 문제 없이 그 일을 해왔으니까. 비정규직의 숙련도가 높으니 임금도 더 높아야 된다. 하지만 그 원리가 작동하지 않는다. 왜? 정규직들이 ‘나는 시험 쳐서 들어왔으니 더 공정한 절차를 거쳤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비정규직은 입직 과정이 다르다는 이유로 근속을 덜 쳐주고 임금도 더 낮게 줘야 한다.
의사든 공기업 정규직이든 정부 정책에 따른 소득 감소를 우려할 수 있다. 밥그릇 싸움을 할 수 있다. 지난해 비슷한 구조의 사건이 있었다. 현대차 노동조합이 광주형 일자리(광주에 현대차가 투자하는 자동차공장을 지어 경형 SUV를 연간 10만 대 생산하는 정책. 노동자들은 적정시간 일하고 적정임금을 받는다)에 반대했다. 사회 전체적으로 일자리가 늘어나더라도 이 공장이 생기면 현대차 노동자들의 잔업·특근 물량이 떨어져 소득이 줄어들 수 있으니까. 여기선 공정성 담론이 나오지 않았다. 광주형 일자리를 반대하는 주력인 50대 현대차 노조 조합원 처지에서는 공정성 담론을 무기화할 수 있는 ‘자기 서사’가 없는 거다. 반면 청년 세대에겐 자기 서사가 있다. ‘나는 노력하고 고생해서 시험 치고 경쟁했다.’ 노동시장 변화가 강요한 서사이기도 하다.
김정희원:공정성이라는 개념을 자신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 사용하는 집단이 누군지 들여다보면, 거의 항상 그 맥락에서 기득권자들이다. 이미 의사라든지 이미 정규직인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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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서울교통공사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반대 집회에서 참석자들이 피켓을 들고 있다.
정형준:대한의사협회의 카드뉴스가 드러낸 건 지난 20년간 양성된 의사 집단의 엘리트주의, 능력주의, 성과주의다. 우리가 그만큼 성적이 좋은 엘리트들이고, 한번 이겼기 때문에 계속 모든 걸 독점해야 한다는 논리인데, 지적한 것처럼 공정이나 정의 같은 단어를 갖다 붙였을 뿐이다. 특히 이번에 공공의대나 의사 증원에 반대하기 위해 집단 휴진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전면에 나선 집단이 필수의료를 공급하는 대학병원의 전공의였다는 건, 기본적인 직업윤리나 ‘전문가주의’조차 잠식당했다고 봐야 한다. 이렇게 양성한 의사들이 과연 우리 사회에서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필수적이고 공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지 심각한 의문을 던져주었다.
조성주:고어 비달이라는 미국의 작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성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남들이 패배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많이 버는 게 성공이라면, 공정을 들고나오는 것은 단순히 소득 감소를 우려해서만은 아니라고 본다. 내가 엘리트가 되고 성공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하다. 고생했고 고난을 거쳤지만, 그 경쟁을 통과하는 과정 자체가 자신이 얼마나 능력 있는 사람인지 증명해주는 서사로 작동한다. 그 과정을 못 이겨낸 사람들은 패배자로 있어야 자신이 정당해진다. 내가 소득을 많이 올려 성공하는 것보다 남들이 패배자의 위치에 있는 게 더 중요하다. 이런 구분이 안 될 수 있다는 위기감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
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때 불공정하다고 앞장서서 반대하던 사람 중 한 명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정말 가슴이 아팠다. 그 사람은 20대 내내 계약직과 파견직으로 살았는데 너무 차별을 많이 당했다고 한다. 억울해서 노량진 고시원에 들어갔다. 3년을 공부해서 30대 초반에 서울교통공사의 정규직이 되었다. 이 사람은 비정규직 차별이 얼마나 심한지 안다. 20대 때 자신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그런데 쟤네가 그냥 들어와? 눈앞에서 불공정하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반박을 잘 못하겠더라.
김정희원:흔히 수능시험이 어떤 사람의 학업성취도를 객관적이고 공정하게 측정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문제를 내는 사람이든, 사교육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든, 교육제도 전반에 걸쳐서 모든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일정한 구조 안에 놓이게 된다. 그래서 수능이란 객관적으로 누군가를 평가하기보다는 이 교육제도 안에서 혜택받은 사람이 더 잘하게 되어 있는 구조인데, 그걸 보지 못한다. 어떤 사람의 능력을 평가하는 시스템 자체가 이미 편향되어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기 때문에, 진정한 의미의 능력주의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강남 8학군에서 족집게 과외를 받아 대학에 가는 아이와, 정말 명석하지만 그 사실이 이웃들에게마저 드러나지 않는 농어촌 아이 사이에 공정 경쟁이 어떻게 가능한가? 애초에 기울어진 운동장이다. 그런데도 이 사람들(의사나 공기업 정규직)은 어떤 ‘진공상태’에서 자신의 노력 대비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믿는 비뚤어진 신념체계 속에서 살고 있다. 오히려 한국 사회의 문제는 이런 식의 불평등을 해소해주는 기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이다.
김정희원:과정과 절차의 공정성을 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과정과 절차가 공정하다는 게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구체적으로 제시할 의무가 있다. 그걸 말해버리면 어이없는 결론이 나온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입시나 취직 프로세스를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사회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이 사람들이 말하는 건 ‘내가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 그리고 내가 한 걸 다른 사람도 똑같이 해야 한다’라는, 일종의 통속화된 버전의 ‘공정 룰(rule)’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정(equity)’은 ‘정의(justice)’를 구성하는 여러 원리 중 하나에 불과한데, 한국 사회에서 공정성이 널리 받아들여지는 개념이 되어버려 사람들이 좀처럼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다.
조성주:공공의대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공정이 수능이라면, 인천공항 정규직화에서는 그게 공채다. 공채를 거쳐야 공정하다는 논리다.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 7년 동안 무사고로 열심히 일하고 아무리 숙련도가 높아도. 수능과 공채의 공통점은 결국 시험이다. 그 근간에는 ‘너는 어떤 경쟁을 통과해서 왔느냐’는 물음이 깔려 있다. 수치화되는 점수로 사람의 능력을 어떻게 다 판별하겠나.
정형준:공정을 무기화한다는 측면에서 두 사건이 비슷하다는 데 동의한다. 다만 인천공항 정규직 노동자에 비해 의사 집단은 훨씬 큰 힘을 갖고 있다. 의사들이 이번에 벌인 집단 휴진은 이들이 독점적이고 배타적으로 국민 건강을 책임지고 있기에 가능했다. 정부가 사실상 백기 투항한 이유도 대안이 없어서다. 의사는 국민들이 보기에도 명백한 특권층이다. 의사 집단이 특권층이 아니라면 ‘수능 1등부터 3000등까지 의대 간다’는 이야기가 왜 나오겠나. 공채로 공기업에 갔든 시험 쳐서 공무원이 되었든, 공공부문의 젊은 노동자들과 의사들의 소득이나 사회적 지위는 완전히 다르다. (‘이 땅의 청년들과 연대하겠다’는 박지현 회장의 발언을 보면), 의사들이 마치 그들(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반대하는 공공부문의 젊은 정규직 노동자들)과 비슷한 과정을 겪었고 자신들의 특권을 내려놓고 ‘연대’할 수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는데, 좀 코미디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를 잘하면 모든 걸 독점할 수 있다고 가르쳐왔다. 얼마 전 영화 〈벌새〉를 보니 선생님이 ‘너네 공부 안 하면 청소부 된다’고 하더라. 이런 이야기가 만연한 한국 사회의 끝장판을 보는 것 같다. 의사라는 직업은 윤리성과 헌신성도 필요하기 때문에 성적이 아닌 다른 부분을 보는 트랙도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조성주:서울시 산하 공기업 정규직화를 추진할 때 ‘북한으로 가라’는 악성 메일을 많이 받았는데 늘 첫 문장이 그 취임사였다(웃음). 생각해보면 그 취임사가 진짜 달성될 수 있는 건지 잘 모르겠다. 지금 한국 사회의 모든 문제, 교육이나 노동시장에서의 차별을 보면, 근간에 자리 잡고 있는 건 ‘불평등’이다. 그런데 불평등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기회가 평등할 리가 있나? 과정이 공정할 수 있나? 산출된 결과를 정의롭다고 하면 지금의 불평등한 구조에서 아래쪽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그냥 닥치고 받아들여’라고밖에 안 들릴 수 있다.
촛불 이후 공정 담론이 불거졌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했던 우리 사회의 근본적 문제는 불평등이었다. 이 문제를 많이 다루지 못한 것 같다. 최저임금 인상, 공공부문 정규직화 두 가지로 모든 노동시장 불평등 문제를 퉁쳐버렸다. 나머지 문제가 다뤄지거나 개선된 느낌이 없다. 그런데 비정규직은 악이고, 정규직은 선인가? 이를테면 어떤 산업에서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의 임금이 지금처럼 차이 나는 것 자체가 맞는지부터 물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비정규직으로 있다가 정규직화된 사람들이 연대의 원리를 실현할 거라 기대하지만 많은 경우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해당 기업 안에 갇혀서 ‘우리 것’을 지키는 데 몰두하기 쉽다. 불평등에 대한 사고를 훨씬 깊게 하지 않으면, 공정성을 둘러싼 논란은 취업시장의 서열에 따라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임용고시에서, 공기업 공채에서 또 반복될 것이다. 취업시장의 서열이란 그 앞의 교육 불평등에 따른 서열일 거고, 그건 아마 부모 소득의 서열과 맞아떨어지지 않겠나? 이렇게 가는 구조를 계속 둘 것인지 종합적으로 봐야 한다.
정형준:기울어진 운동장을 평평하게 만들어주는 건 결국 재분배 정책이고 복지 시스템이다. 만약 한국 사회가 기본적인 사회 최저선을 보장해주고, 어떤 일에 실패해도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사회라면 어떨까? 과연 수많은 사람들이 ‘전문직이어야 살아남는다’는 이유로 무한경쟁해서 의사가 되려 할까?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영국에선 의사가 노동자 임금보다 세 배 정도를 더 받지만, 힘든 일이고 노동시간도 길다는 인식이 있다. 주치의가 되면 밤에도 전화를 받거나 응급상황에 대응해야 한다. 대신 무상교육이다. 그런 교육을 받았으니 의사들은 사회에 공헌한다. 성적 좋은 사람들이 다 의사가 된다기보다는 공부를 좋아하고, 힘든 일을 하더라도 존경받고 싶은 사람들이 의사가 된다. 국가에서 세금을 써서 공공 의료기관을 확충하고 여기서 일할 사람을 공공 부문에서 키워내야 한다. 나아가 재분배에도 적극 나서야 한다.
김정희원:동의한다. ‘기회는 평등하고…’라는 슬로건은 마치 우리가 이미 평평한 운동장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다. 굉장히 텅 빈 것처럼 들려서, 정확하게 이 각각의 표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어보고 싶을 정도다. 현실에 존재하는 불평등을 무화하는 슬로건이다. 정부는 이렇게 두루뭉술하게 말할 게 아니라 훨씬 더 적극적으로 불평등 해소 정책을 펴야 한다. 미국에서 그런 밈(meme, 다양하게 복제되는 파급력을 지닌 콘텐츠)이 돈 적이 있다. 키가 다른 세 사람이 축구 경기를 보는데 장벽이 쳐져 있다. 첫 번째 그림에서는 세 사람에게 똑같은 높이의 디딤돌을 받쳐줘서 키가 작은 사람은 경기를 보지 못한다. 두 번째 그림에서는 키 작은 사람에게 가장 높은 디딤돌을 받쳐줘서 모두가 경기를 볼 수 있게 해준다. 그런데 사실은 그게 아니라 장벽 자체를 없애는 게 핵심이다. 그게 진정으로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한다는 의미다. 궁극적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건 애초부터 장벽이 없는 사회, 그래서 개인의 핸디캡이 실제로 불리하게 작용하지 않는 사회다.
한국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멘탈리티는 ‘원자화(atomization) 모델’이다. 내가 열심히 노력했으니까 1등 하고, 성공하고, 좋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 외의 모든 경로는 부당하다. 이러면 개인의 노력만으로 설명될 수 없는 구조적이고 역사적인 불평등은 지워지고 능력주의에 대한 맹신만 남는다. 개개인이 자신을 하나의 기업가로 여기는 것이다. 원자화 모델을 탈피하기 위해 한국 사회에서 시급히 강조되어야 하는 가치는 연대다. 왜 연대해야 할까? 혼자만 언제까지나 잘나갈 사람은 없다.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의사라는 직업도 AI(인공지능)로 대체될 수 있다. 언제 없어질지 모른다. 대안적 가치로서의 사회적 연대와 유대를 끊임없이 이야기해야 한다.
정형준:이번에 젊은 의사들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아직까지 한국 사회에서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는데, ‘의사들도 노동계급의 비정규직처럼 추락할 것’이라는 두려움과 공포감을 내부의 강성 우파들이 퍼뜨렸기 때문이다. ‘의사 증가율이 지금도 높은데 정원 확대되면 다 죽는다’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자료가 대표적이다. 내가 의대에 다니던 1990년대 후반에도 선배나 교수들이 그런 얘길 많이 했다. ‘좋은 시절 다 끝났다, 너희들은 취직할 데도 개원할 데도 없다.’ 그 기저에 깔려 있는 건 일자리가 없어질 거라는 두려움이다.
조성주:그런 공포감이 비논리적이지만 통하는 건 명확한 비교군이, 압도적 다수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고개만 딱 돌리면 보이잖나. 한국 노동시장이 너무나 극명하게 갈려 있으니까, 조금만 삐끗하면 어떻게 살아가는지 다 아는 거다.
김정희원:궁극적으로는 구조적 이유로 실직해도 별 문제 없이 먹고살 수 있게 만들어줘야 한다. 그게 국가의 책임이다.
*이 기사는 주간지 시사IN에 실린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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