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 선고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은 왜 실패했을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계엄을 시도한 이들의 무능력함을 질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그리고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즉각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 모두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는 군대는 군통수권자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며, 공권력을 통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권위주의’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루어낸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연합뉴스) 김도훈 기자 = 서울 종로구 헌법재판소 앞에서 더불어민주당 백혜련 의원(오른쪽)과 국민의힘 수원시을 홍윤오 당협위원장이 각각 윤석열 대통령 파면 촉구 및 탄핵 반대 1인 시위를 하고 있다. 2025.3.21
|민주주의, 가장 위험한 파괴는 내부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금 악의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필자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공격’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야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가 처음 시작되던 당시 이런 질문을 마주했었다. ‘민주주의라는 야수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길들여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것인가?’
|’야수 민주주의’를 길들인 울타리들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야수성’을 길들이기 위한 여러 가지 ‘우리’들을 고안해 냈다. 감시와 공론장으로서의 언론, 정당과 정치의 책임성, 사법부의 독립성, 시민성의 증진을 위한 노력 등.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야수성’을 길들였던 그 ‘우리’들이 부식되고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서 삐져나온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야수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 음모론의 역습, 조롱할 뿐 논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SNS나 온라인상에서 시작되어 거리를 휩쓰는 ‘음모론’이 그렇다. 마녀사냥의 중세 암흑시대나 왕위찬탈 음모론이 떠돌던 왕조시대가 아닌 현대 민주주의에서 ‘음모론’이 민주주의 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진실의 여부보다는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서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하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음모론’은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킬 수는 있다. 사실과 합리성에 기초한 토론과 논쟁이 ‘선비질’, ‘진지충’ 등의 단어로 조롱 되면서 공론장이 피폐해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조롱할지언정 논쟁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부른 극단주의,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괴물들
확대되어 가는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킬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과도한 ‘불평등’은 언제나 ‘극단주의’가 발생하는 저수지의 역할을 한다. 과거의 낡은 혁명론들은 불평등의 확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불평등의 확대가 극단주의를 불러오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양쪽 끝에서부터 부식시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정당들의 책임성 실종, 정치 규범의 파괴, 언론의 오락화 등 역시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키고 ‘야수’들이 날뛰게 하는 요소들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가장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
| 광장과 SNS, 연대의 공간에서 진영의 전쟁터로
두 번에 걸친 탄핵 과정에서 한국 사회 역시 이를 목도하고 있다. 권위주의에 맞서는 ‘광장의 집회’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광장은 진영 간 대결의 장으로 바뀌었다. SNS와 뉴미디어는 주류와 레거시 미디어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의 소통과 공론의 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은 혐오와 증오, 음모론의 진원지가 되어버렸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주주의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절제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스스로를 공격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줄이고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로 후퇴하면 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시 민주주의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복구하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의 언어와 규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빗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저서에서 민주주의는 ‘규범’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며 ‘정치규범’의 회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맞다. 그러나 규범의 회복말 고도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많다. 변화된 경제 환경에 맞는 정책과 제도, 좀 더 신중한 절차들과 정치규범, 더 좋은 시민성을 증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 적절한 수준의 평등,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참여 등이 모두 조금씩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온 각자의 버팀목들이었다.
|탄핵선고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곧 있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이후 우리 사회는 미증유의 혼란속으로 돌입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약점들이 속속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거나 냉소하기보다 그 약점들을 보완해 나갈 실천의 방법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민주주의 안에 있는 야수성을 이용하는 방법인 것처럼 민주주의를 지켜낼 가장 확실한 방법 역시도 민주주의 안에 있다.
탄핵 선고 이후의 한국 민주주의의 과제
윤석열 대통령의 계엄은 왜 실패했을까? 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어떤 이들은 계엄을 시도한 이들의 무능력함을 질타하기도 한다. 또 어떤 이들은 시민들이 거리에서, 그리고 정치인들이 국회에서 즉각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이러한 이야기들 모두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의 한국 민주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는 군대는 군통수권자가 명령을 내린다고 해도 그것을 제대로 이행할 수 없으며, 공권력을 통해 언론이나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도 사실상 불가능하다. 달리 말하면 ‘권위주의’의 방법으로 ‘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무너뜨리는 것은 이제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한국의 민주주의가 이루어낸 성취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민주주의, 가장 위험한 파괴는 내부에서 시작된다
그렇다면 조금 악의적으로 상상력을 발휘해서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방법을 생각해 본다면 어떤 것이 가능할까? 필자는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민주주의가 스스로 민주주의를 공격’하게 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민주주의’는 그 자체로 평등과 자유에 대한 열정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야수성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많은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가 처음 시작되던 당시 이런 질문을 마주했었다. ‘민주주의라는 야수에 잡아먹힐 것인가? 아니면 그것을 길들여 평등과 자유로 나아갈 것인가?’
|’야수 민주주의’를 길들인 울타리들
현대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야수성’을 길들이기 위한 여러 가지 ‘우리’들을 고안해 냈다. 감시와 공론장으로서의 언론, 정당과 정치의 책임성, 사법부의 독립성, 시민성의 증진을 위한 노력 등.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민주주의의 야수성’을 길들였던 그 ‘우리’들이 부식되고 흔들리고 있다. 그리고 우리에서 삐져나온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야수가 역설적으로 민주주의 그 자체를 공격하고 있다.
| 음모론의 역습, 조롱할 뿐 논쟁하지 않는다
예를 들면 SNS나 온라인상에서 시작되어 거리를 휩쓰는 ‘음모론’이 그렇다. 마녀사냥의 중세 암흑시대나 왕위찬탈 음모론이 떠돌던 왕조시대가 아닌 현대 민주주의에서 ‘음모론’이 민주주의 그 자체를 무너뜨리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너무나 많은 정보가 넘쳐나고 진실의 여부보다는 더 자극적인 것을 찾아서 상대를 곤란하게 하는 것에 쾌감을 느끼게 하는 지금의 미디어 환경에서 ‘음모론’은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킬 수는 있다. 사실과 합리성에 기초한 토론과 논쟁이 ‘선비질’, ‘진지충’ 등의 단어로 조롱 되면서 공론장이 피폐해지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미 우리는 조롱할지언정 논쟁하지 않는다.
|불평등이 부른 극단주의, 민주주의를 갉아먹는 괴물들
확대되어 가는 ‘불평등’이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킬 수도 있다. 역사적으로 과도한 ‘불평등’은 언제나 ‘극단주의’가 발생하는 저수지의 역할을 한다. 과거의 낡은 혁명론들은 불평등의 확대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새로운 단계를 가져온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불평등의 확대가 극단주의를 불러오고 오히려 민주주의를 양쪽 끝에서부터 부식시켜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정당들의 책임성 실종, 정치 규범의 파괴, 언론의 오락화 등 역시 민주주의의 우리를 부식시키고 ‘야수’들이 날뛰게 하는 요소들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민주주의는 민주주의에 의해서 가장 확실하게 무너뜨릴 수 있다.
| 광장과 SNS, 연대의 공간에서 진영의 전쟁터로
두 번에 걸친 탄핵 과정에서 한국 사회 역시 이를 목도하고 있다. 권위주의에 맞서는 ‘광장의 집회’는 민주주의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이제 광장은 진영 간 대결의 장으로 바뀌었다. SNS와 뉴미디어는 주류와 레거시 미디어에서 소외된 목소리들의 소통과 공론의 장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제 이곳은 혐오와 증오, 음모론의 진원지가 되어버렸다. 정당 역시 마찬가지다.
|민주주의는 오직 민주주의로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할까? 무절제한 민주주의가 민주주의 스스로를 공격하는 역설적인 상황에서 민주주의를 줄이고 권위주의와 엄숙주의로 후퇴하면 이 문제들이 해결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해야 하는 것은 다시 민주주의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복구하는 것이다. 지금 시대에 맞는 민주주의의 언어와 규범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의 저자들인 스티븐 레빗츠키와 대니얼 지블렛은 저서에서 민주주의는 ‘규범’으로 지켜지는 것이라며 ‘정치규범’의 회복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맞다. 그러나 규범의 회복말 고도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은 많다. 변화된 경제 환경에 맞는 정책과 제도, 좀 더 신중한 절차들과 정치규범, 더 좋은 시민성을 증진하기 위한 교육의 역할, 적절한 수준의 평등,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과 참여 등이 모두 조금씩 우리의 민주주의를 지켜온 각자의 버팀목들이었다.
|탄핵선고 이후, 어떻게 할 것인가?
곧 있을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헌법재판소의 탄핵 선고 이후 우리 사회는 미증유의 혼란속으로 돌입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도 높다. 그 과정에서 한국의 민주주의의 약점들이 속속들이 드러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쉽게 좌절하거나 냉소하기보다 그 약점들을 보완해 나갈 실천의 방법들을 고민해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민주주의 안에 있는 야수성을 이용하는 방법인 것처럼 민주주의를 지켜낼 가장 확실한 방법 역시도 민주주의 안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