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있는 민주주의와 절반의 인민주권 ②
- 갈등의 대변자에서 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의 노동운동
고립되어 버린 전통적 노동조합들
20세기 후반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흐름은 사회를 파괴하고 국가를 축소시키는 것을 그 스스로의 핵심전략으로 했다. 북유럽 복지국가부터 동아시아의 발전국가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말 그대로 국가의 축소와 함께 사회의 파괴가 함께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국가를 굶기기’라고 불렀다. 이에 가장 먼저 대응한 것은 보통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들은 나름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힘겨운 싸움에 후퇴를 거듭했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노동조합의 힘이 이전과 같지 않아서 그런건지는 불확실하다.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 흐름은 점차 역전되었고 이제는 반대로 권위주의적 국가의 억압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모든 곳에서 국가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조합 역시 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의 재부상은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한국은 예외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극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심도있는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이미 노동시장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아닌 플랫폼, 프리랜서, 비정규직 등의 노동자들이 다수인 노동시장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이들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유의미한 조직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동조합들은 이제 기술발전,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산업전환이라는 신자유주의보다 훨씬 거대한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에 놓여 있다.
사회가 없는 노동자들의 출현과 정치적 위험의 증가
프리랜서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들을 합쳐 이하 독립노동자)에게는 사실상 사회가 없다. 전통적인 의미로는 이들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조직하여 정치의 분재, 국가의 재분배에 개입할 수단이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 당장에 목소리들의 경쟁에서 제조업 위기와 기술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통적인 노동조합들의 목소리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다보니 정당들이나 관료조직의 선의에 기대야만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코로나19 펜데믹처럼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여 그 주목도가 상승하고 국가가 먼저 선의로 이들에 대한 재분배 정책을 집행 하더라도 이는 지속되기 어려우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일방적으로 주어진 권리는 실질적 권리와 해방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결국은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목소리의 크기를 키우던가 목소리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조직화 없이 분배와 재분배에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는 그만큼 어렵다. 조직화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어려운 초기단계를 돌파할 만큼의 최소자원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싸움에서 한 번의 패배는 그대로 절망이기 때문에 패배와 조직화 그리고 승리라는 기존 노동조합이 성장하는 변증법이 작동기가 너무 어렵다.
나아가 현대정치의 관점에서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려움에 처한 문제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는 바로 이 곳이 정치적 극단화의 저수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유 때문이다. 조직화로 자신들의 이해요구를 국가와 정치에 반영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진 채로 존재하는 이 노동시장의 다양한 노동자들은 극단주의 정치 또는 포퓰리즘의 저수지가 되기 쉽다. 이 저수지의 다수 시민이 어떤 나라에서는 이민자들일지도 모르고, 어떤 나라들에서는 청년들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놓고보면 마치 기존의 노동조합이 사회에서 고립되어 버렸고 조직화되기 어려운 독립노동자들의 대거 출현이 정치적 극단주의의 저수지가 되는 암울한 미래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이는 기존 노동운동의 큰 전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전환은 ‘노동있는 민주주의’라는 노동의 오래된 꿈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전환이 될 수 있다. 이제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자원분배, 정책개입 등은 지난 시기 조합원들의 이해대변을 넘어서 사실상 극단주의의 도전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는 현대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수호하고 나아가 재활성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이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규모있는 사회조직은 여전히 노동조합과 정당외에는 없다. <계속>
노동있는 민주주의와 절반의 인민주권 ②
고립되어 버린 전통적 노동조합들
20세기 후반 불어닥친 신자유주의 흐름은 사회를 파괴하고 국가를 축소시키는 것을 그 스스로의 핵심전략으로 했다. 북유럽 복지국가부터 동아시아의 발전국가까지 대부분의 국가에서 말 그대로 국가의 축소와 함께 사회의 파괴가 함께 진행되었다. 누군가는 이것을 ‘국가를 굶기기’라고 불렀다. 이에 가장 먼저 대응한 것은 보통은 노동조합이었다. 노동조합들은 나름 적극적으로 대응했지만 힘겨운 싸움에 후퇴를 거듭했다. 신자유주의의 흐름이 워낙 강했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노동조합의 힘이 이전과 같지 않아서 그런건지는 불확실하다. 둘 다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 흐름은 점차 역전되었고 이제는 반대로 권위주의적 국가의 억압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모든 곳에서 국가의 귀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노동조합 역시 한 숨을 돌릴 여유가 생겼는지 모른다. 하지만 대부분의 국가에서 노동조합의 재부상은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는다.(한국은 예외적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노동조합 조직률이 극적으로 상승하고 있다. 이에 대해서는 별도의 심도있는 토론이 필요하다고 본다) 이는 이미 노동시장이 전통적인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아닌 플랫폼, 프리랜서, 비정규직 등의 노동자들이 다수인 노동시장으로 바뀌어버렸기 때문이다. 각국의 노동조합들이 이들을 조직하기 위한 노력에 힘을 기울이고 있지만 유의미한 조직적 성과가 나타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동조합들은 이제 기술발전, 그리고 기후변화로 인한 산업전환이라는 신자유주의보다 훨씬 거대한 변화에 대응해야 하는 과제에 놓여 있다.
사회가 없는 노동자들의 출현과 정치적 위험의 증가
프리랜서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프리랜서 노동자와 플랫폼 노동자들을 합쳐 이하 독립노동자)에게는 사실상 사회가 없다. 전통적인 의미로는 이들이 조직되어 있지 않다는 말과 같다. 자신들의 목소리를 조직하여 정치의 분재, 국가의 재분배에 개입할 수단이 거의 없거나 미미하다. 당장에 목소리들의 경쟁에서 제조업 위기와 기술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전통적인 노동조합들의 목소리에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보통이다. 이러다보니 정당들이나 관료조직의 선의에 기대야만하는 어려움이 존재한다. 코로나19 펜데믹처럼 특수한 상황이 발생하여 그 주목도가 상승하고 국가가 먼저 선의로 이들에 대한 재분배 정책을 집행 하더라도 이는 지속되기 어려우며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일방적으로 주어진 권리는 실질적 권리와 해방으로 이어지기 어렵다.
결국은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중요하다는 결론에 이를 수 밖에 없다. 목소리의 크기를 키우던가 목소리의 강도를 높이는 것이 방법일 것이다. 조직화 없이 분배와 재분배에 개입할 수 없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는 그만큼 어렵다. 조직화 규모를 확대하기 위한 어려운 초기단계를 돌파할 만큼의 최소자원을 확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약자들의 싸움에서 한 번의 패배는 그대로 절망이기 때문에 패배와 조직화 그리고 승리라는 기존 노동조합이 성장하는 변증법이 작동기가 너무 어렵다.
나아가 현대정치의 관점에서 독립노동자들의 조직화가 어려움에 처한 문제가 가지는 특별한 의미는 바로 이 곳이 정치적 극단화의 저수지가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는 이유 때문이다. 조직화로 자신들의 이해요구를 국가와 정치에 반영하지 못하고 뿔뿔히 흩어진 채로 존재하는 이 노동시장의 다양한 노동자들은 극단주의 정치 또는 포퓰리즘의 저수지가 되기 쉽다. 이 저수지의 다수 시민이 어떤 나라에서는 이민자들일지도 모르고, 어떤 나라들에서는 청년들일지도 모른다.
지금까지의 상황을 놓고보면 마치 기존의 노동조합이 사회에서 고립되어 버렸고 조직화되기 어려운 독립노동자들의 대거 출현이 정치적 극단주의의 저수지가 되는 암울한 미래만이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관점을 조금 달리하면 이는 기존 노동운동의 큰 전환이 필요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전환은 ‘노동있는 민주주의’라는 노동의 오래된 꿈에 직접적으로 도전하는 전환이 될 수 있다. 이제 노동운동의 조직화와 자원분배, 정책개입 등은 지난 시기 조합원들의 이해대변을 넘어서 사실상 극단주의의 도전을 받아 위기에 처해 있는 현대민주주의를 직접적으로 수호하고 나아가 재활성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는 의미를 가진다. 그리고 현대 민주주의에서 이것을 가장 잘 할 수 있는 규모있는 사회조직은 여전히 노동조합과 정당외에는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