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 노동있는 민주주의] 기후위기 시대, 성장에서 성숙으로 - ‘탈성장사회’와 ‘성숙사회’
2022년 말 국회의장 산하 연구소인 <국회미래연구원>은 중장기 국가발전을 위한 한국사회의 미래선호상으로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였다. 연구자들은 “성숙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는 “몸집만 커지는 양적성장을 넘어서 세계인에게 매력적인 사회적 성장, 환경적 성장을 일궈내는 사회, 미래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 미래세대에게 짐을 떠넘기지 않는 사회, 성장의 부정적 효과를 치유하는 사회”1) 라고 설명한다.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방향성은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홍세화 선생은 2023년 초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화두를 던지며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0여년전인 2014년에 하버드대 드와이트 퍼킨스 교수와 UC버클리대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 고려대 신관호 교수는 공동 저술한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를 통해 한국경제가 과거의 기적적 성장처럼 “경제성장률을 파격적으로 높이는 손쉬운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제 한국경제는 “성숙”의 단계로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전환의 단계에 도달한 한 사회의 ‘대안사회 비전’으로 “성숙사회”라는 개념이 제시된 것은 국회미래연구원의 보고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성숙’이라는 개념은 경제발전단계나 진영정치가 강화되고 잇는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도 유효하겠지만 ‘기후위기’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기후운동 진영에서는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주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기존의 성장주의적 체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닥친 문명적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통렬한 반성에 기초한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수준까지 탐욕을 극대화했던 성장지상주의와 기존 체제가 오늘날의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낳았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전환을 위해 시민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과연 대중적 설득력을 얼마나 가질 수 있는가는 분명히 토론해볼 지점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탈성장’보다 오히려 앞서 제시되었던 ‘성숙’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해보는 것을 제안한다.
‘탈성장’은 대안사회로 가는 우리의 목표보다는 우리가 수용해야 할 상황을 의미하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에 비해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방향성은 ‘탈성장’보다는 급진적 상상력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지금까지 우리사회와 시민이 함께 일구어온 것들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로 수용가능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성숙’은 시민이 가지는 현실의 욕망을 설득하는데에도 장점이 있다.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시민의 평범한 욕망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은 ‘탐욕’이지 ‘욕망’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산업화 시대의 욕망은 무한한 탐욕에 가까웠다. 성숙은 이러한 탐욕이 발생시킨 부작용들을 반성하고 오히려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다양한 존재들과의 공존을 도모하며 더 나은 시민이 되려하는 긍정적 욕망을 자극할 수도 있다.
물론 운동적 차원에서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급진적 상상력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다. 더 급진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탈주의 방향성을 탐구하는 것은 늘 대안적 미래를 구성하는 첫 걸음이다. 다만 현실의 “기후정치” 에서 우리의 대안비전과 레토릭도 조금은 더 정치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멸론’, ‘위기담론’, ‘변혁론’이 아닌 것으로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세계와 삶의 형태에 대한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설득을 할 수 있을 때 다수를 설득하는 “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 우리의 대안비전과 언어도 성장주의 시대 저항운동의 방식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다양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각주>
1) 대한민국 미래전망 연구 / 박성원 등 / 2022. 국회미래연구원
[조성주 노동있는 민주주의] 기후위기 시대, 성장에서 성숙으로 - ‘탈성장사회’와 ‘성숙사회’
2022년 말 국회의장 산하 연구소인 <국회미래연구원>은 중장기 국가발전을 위한 한국사회의 미래선호상으로 “성장사회에서 성숙사회로의 이행”이라는 슬로건을 제시하였다. 연구자들은 “성숙사회”라는 개념을 제시하면서 이는 “몸집만 커지는 양적성장을 넘어서 세계인에게 매력적인 사회적 성장, 환경적 성장을 일궈내는 사회, 미래세대에게 희망이 되는 사회, 미래세대에게 짐을 떠넘기지 않는 사회, 성장의 부정적 효과를 치유하는 사회”1) 라고 설명한다.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방향성은 처음 등장한 것은 아니다. 홍세화 선생은 2023년 초 한겨레 신문에 기고한 칼럼에서 “소유에서 관계로,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화두를 던지며 “자연과 인간, 동물과 인간, 인간과 인간의 관계는 성장하는 게 아니라 성숙하는 것이다.”라고 성찰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이미 10여년전인 2014년에 하버드대 드와이트 퍼킨스 교수와 UC버클리대 배리 아이켄그린 교수, 고려대 신관호 교수는 공동 저술한 책 《기적에서 성숙으로》를 통해 한국경제가 과거의 기적적 성장처럼 “경제성장률을 파격적으로 높이는 손쉬운 마법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이제 한국경제는 “성숙”의 단계로 들어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다만 전환의 단계에 도달한 한 사회의 ‘대안사회 비전’으로 “성숙사회”라는 개념이 제시된 것은 국회미래연구원의 보고서가 처음이 아닌가 싶다.
‘성숙’이라는 개념은 경제발전단계나 진영정치가 강화되고 잇는 민주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서도 유효하겠지만 ‘기후위기’ 시대를 어떻게 통과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시민에게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최근 기후운동 진영에서는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주요하게 논의되고 있다. 기존의 성장주의적 체제를 벗어나지 않은 채 우리에게 닥친 문명적 위기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통렬한 반성에 기초한다. 지구가 감당할 수 없을 수준까지 탐욕을 극대화했던 성장지상주의와 기존 체제가 오늘날의 불평등과 기후위기를 낳았음은 주지의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전환을 위해 시민을 설득해야 하는 ‘정치’의 차원에서 말한다면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과연 대중적 설득력을 얼마나 가질 수 있는가는 분명히 토론해볼 지점이 있다. 그런 측면에서 필자는 ‘탈성장’보다 오히려 앞서 제시되었던 ‘성숙’이라는 키워드를 활용해보는 것을 제안한다.
‘탈성장’은 대안사회로 가는 우리의 목표보다는 우리가 수용해야 할 상황을 의미하는 것에 더 가까워 보인다. 그에 비해 “성장에서 성숙으로”라는 방향성은 ‘탈성장’보다는 급진적 상상력은 다소 떨어질지 몰라도 지금까지 우리사회와 시민이 함께 일구어온 것들의 성과를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로 갈 수 있다는 긍정적 메시지로 수용가능한 장점이 있다고 생각된다. ‘성숙’은 시민이 가지는 현실의 욕망을 설득하는데에도 장점이 있다. 조금 더 풍요로운 삶을 살고자 하는 시민의 평범한 욕망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우리가 지양해야 하는 것은 ‘탐욕’이지 ‘욕망’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그렇게 보면 오늘의 기후위기를 만들어낸 산업화 시대의 욕망은 무한한 탐욕에 가까웠다. 성숙은 이러한 탐욕이 발생시킨 부작용들을 반성하고 오히려 지속가능한 삶에 대한 욕망, 그리고 다양한 존재들과의 공존을 도모하며 더 나은 시민이 되려하는 긍정적 욕망을 자극할 수도 있다.
물론 운동적 차원에서 ‘탈성장’이라는 개념이 가지는 급진적 상상력을 굳이 제한할 필요는 없다. 더 급진적으로 세계를 해석하고 탈주의 방향성을 탐구하는 것은 늘 대안적 미래를 구성하는 첫 걸음이다. 다만 현실의 “기후정치” 에서 우리의 대안비전과 레토릭도 조금은 더 정치해질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파멸론’, ‘위기담론’, ‘변혁론’이 아닌 것으로도 시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세계와 삶의 형태에 대한 의미를 완전히 부정하지 않으면서도 지금보다는 더 나은 변화가 가능하다는 설득을 할 수 있을 때 다수를 설득하는 “정치”가 작동할 수 있다. 우리의 대안비전과 언어도 성장주의 시대 저항운동의 방식보다는 조금 더 성숙해지고 다양해질 필요도 있지 않을까?
각주>
1) 대한민국 미래전망 연구 / 박성원 등 / 2022. 국회미래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