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성주_노동있는 민주주의] 우리는 서로의 기후다

공식 관리자
2023-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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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서로의 기후다



우연히 블로그에서 누군가가 ‘타인은 날씨와 같은 것이다’라고 쓴 글을 보았다. 그 블로거는 타인이라는 존재는 날씨와 같아서 바꿀 수 없고 비가 오면 우산을 쓰듯이 그에 대비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무언가 말랑하고 다소 염세적인, 인간관계에 대한 얇은 성찰로서 눈길을 잠시 멈추게 하는 문장이다. 하지만 필자의 시선이 유독 그 문장에 잠시 멈췄던 이유는 문득 코로나19 펜데믹 과정에서 지인의 추천으로 읽고 인상 깊었던 한 책의 문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율라 비스’라는 칼럼니스트가 지은 ‘면역에 관하여’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리가 많은 불안과 개인의 선택이라는 자유에도 불구하고 꼭 ‘백신’을 맞아야 하는 이유로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기 때문이라는 말을 한다. 거대한 자연과 사회구조만이 아니라 개인개인이 다른 타인에게 ‘환경’이기에 더 안전한 환경을 제공해야 할 의무가 개인들에게도 있을 수 밖에 없으며 백신을 맞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를 가진다는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타인’만이 아니라 ‘환경’과 같은 것이라는 성찰은 단순히 인간관계의 지혜를 넘어 공동체의 문제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만든다. 

사실 ‘기후위기’와 ‘펜데믹’은 매우 닮아있는 문제다. 그것이 개별의 존재들에게 별도로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 나아가 국가단위까지 넘어서 전지구적인 문제로 다가온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한편 현대민주주의가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말 그대로 난제에 해당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문제해결을 위해서 수 만개의 의견들의 차이를 좁혀나가며 천천히 갈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의 특성보다는 시급한 대처를 위해 빠르고 단호하게 의견을 집중시켜야 하는 문제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때문에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민주주의는 실존적 위험을 제어 할 수 없다”고까지 단언한다. 이유로 민주주의정치의 유권자는 “먹고사는 문제”에 관심을 기울이지 “세상의 종말”에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라고 서늘하게 일갈한다. 그러나 달리보면 ‘기후위기’는 무엇보다 앞서 율라 비스가 ‘펜데믹’과 ‘백신접종’을 두고 성찰했듯이 문제해결을 위해서 개인들이 서로의 환경이 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난 겨울 ‘난방비 논쟁’을 둘러싸고 지금까지도 우리 정치는 전기요금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명확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다. 정치가 명확한 결론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기요금을 인상해야 하는 과제가 있지만 이것이 사회의 다른 집단들의 이해관계와 충돌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기후위기가 적절한 시점에 적절한 속도로 해결되어 가기 위해서는 국가정책의 변화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삶의 방식도 변화해야 한다. 아니 오히려 민주주의 정치를 체택하고 있는 국가들에서는 주권을 가진 개인들이 스스로에게 익숙한 삶의 방식을 변화하겠다는 판단을 하지 않고서는 국가의 정책도 쉽게 바뀌기 어렵다. 펜데믹과 백신접종의 관계에서 이미 보았듯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은 최소화하면서, 또는 나는 조금도 변화하지 않거나(사회적 거리두기를 거부하는 것 처럼) 공동체를 위한 리스크(백신부작용의 위험같은)를 부담하지 않고서 ‘펜데믹’이 그러했듯 ‘기후위기’라는 ‘인류의 실존’ 차원의 문제는 해결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한국사회의 구성원들은 기후위기를 마치 90년대 중반 ‘세계화’처럼 거대한 외부환경의 변화와 같은 것으로 인식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기후위기는 국가가 방향을 결정하고 대응해야 하는 문제이지 그 구성원들이 서로에게 무언가의 위험과 부담을 나누는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정치인과 정당들도 대부분 국가가 잘 대응할 것을 강하게 촉구할뿐 시민 개개인이 어떻게 다른 시민들을 위해 스스로의 삶의 방식을 변화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위험과 부담도 함께 지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그러나 코로나19 펜데믹에서 이미 경험했듯이 우리는 서로의 환경이다. 우리가 바로 타인의 날씨이고 에너지이며 기후다. 우리가 함께 위험과 변화를 부담하지 않으면 민주주의 정치는 이 어려운 결정을 끊임없이 미룰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는 코로나19 펜데믹 과정에서 백신접종을 정치와 시민들이 서로에게 설득했던 것처럼 기후위기를 위한 변화를 함께 설득하고 부담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기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