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위기시대의 노동운동 8 - 노동시장 삼국지(三國志 ) - 전통적 이중구조의 분열

공식 관리자
2026-0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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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노동시장 삼국지(三國志 )

 

목차


프롤로그

왜 여전히 ‘노동 있는 민주주의’인가? 


제1장. 민주주의와 노동운동

(1) 노동조합은 민주주의 경제적 ‘Voice’ : 엘버트 허시먼의 <exit, voice, loyalty>

(2) 갈등의 매개자, 노동조합 : 샤츠.슈나이더 <절반의 인민주권>

(3) 21세기 국가와 노동조합의 관계 : 대런 애쓰모글로우의 <좁은 회랑>

(4) 노동조합은 계급의 무기만이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인프라’


제2장. 민주주의의 위기와 노동운동

(1) 불평등과 기술발전, 그리고 내부로부터 침식되는 민주주의의 위기

(2) 한국 민주주의의 위기와 노동운동

(3) 노동시장 이중구조와 민주주의 위기


제3장. 노동시장 삼국지(三國志)

(1)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삼국지로: 독립노동의 부상과 새로운 노동세계의 도래

(2) 전통적 이중구조의 균열

(3) 노동시장 삼국지의 권력구도


제4장. 노동운동의 전략적 전환: 임금에서 민주주의로

(1) 임금에서 민주주의로

(2) 여전히 노동운동이 민주주의의 희망

(3) 기후위기 시대, 노동운동의 새로운 사명 ― 정의로운 전환


제5장. 한국 민주주의의 재구성 

(1) 노동 없는 민주주의의 취약성

(2)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세 가지 기둥: 평등, 참여, 연대

(3) 노동정치의 갱신: 계급 대 결사체의 정치


에필로그

좋은 일자리를 넘어, 좋은 시민을 만드는 노동운동으로


제3장. 노동시장 삼국지(三國志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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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의 노동은 더 이상 전통적인 형식의 공장이나 사무실의 시간표 속에 갇혀 있지 않다.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과 기술혁신은 노동의 형태 자체를 급격히 바꾸어 놓고 있다. 아니, 더 나아가 공간, 시간, 그리고 노동자 본인이 느끼는 감각과 심리까지도 바꾸어놓고 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배달노동자, 플랫폼 개발자, 프리랜서 디자이너, 1인 크리에이터 등 플랫폼 기업과 함께 출현한 새로운 노동형태는 기존의 노동법·노사관계·복지제도의 경계를 넘어서고 이제는 정치적 균열까지도 바꾸고 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노동은 자유와 자율이라는 이름 아래 불안정과 무권리의 현실에 직면하고 있다. ‘노동자’와 ‘사업자’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사회보험·노동법 등 기존 제도가 포괄하지 못하는 거대한 사각지대가 생겨났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20여년간 한국 노동시장의 주요한 균열로 이해되었던 비정규직 문제와도 분명하게 결을 달리한다. ‘비정규직’이라는 단어는 ‘정규직’을 정상적 상태로 규정하고 그것이 아닌 다른 노동을 지칭하는 단어였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가장 대표적인 해법은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차별을 없애고 다수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 출현하고 있는 플랫폼 노동과 프리랜서 형식의 노동들은 이러한 해법으로 권리의 문제가 해결되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이렇게 복합적으로 바뀌어버린 현실의 변화를 따라가지 못한 전통적 노동조합운동은 새로운 세대의 노동자들에게 ‘나와는 상관없는 조직’으로까지 인식되고 주요 대기업과 공공부문에서의 영향력이 확대되고는 있지만 실제로는 전체 노동시장에서는 그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다.

 

이 장은 플랫폼·프리랜서·독립노동이라는 새로운 노동형태의 등장을 분석하며, 그것이 노동운동과 민주주의에 던지는 도전과 새로운 과제들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해외에서 나타난 새로운 조직형태—플랫폼 조합, 직업공동체, 디지털 노조—의 실험을 소개하며, 한국 노동운동이 이들과 어떻게 연대하고 제도적으로 포섭할 수 있을지 모색해 보려 한다. 결국 이 논의는 “노동이 변하면 민주주의도 변해야 한다”는 핵심명제를 구체화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1) 노동시장 이중구조에서 삼국지로: 독립노동의 부상과 새로운 노동세계의 도래

 

한국의 노동시장은 오랫동안 “이중구조”라는 말로 요약되어 왔다. 대기업 정규직 중심의 안정된 일자리와 중소기업·비정규직으로 대표되는 불안정 일자리가 병존하는 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임금·복지·노동조건·노동조합 조직률 등 거의 모든 지표에서 두 집단의 격차는 확연했고, 노동시장의 구조적 불평등을 상징하는 용어로 ‘이중구조’는 사회적 합의처럼 쓰였다. 그러나 지난 10여 년, 특히 플랫폼경제의 확산과 디지털 전환 이후 이 구분은 더 이상 현실을 충분히 설명하지 못한다. 이제 노동시장은 정규직-비정규직의 양분된 세계를 넘어, 대기업·정규직, 중소기업·비정규직, 그리고 새로운 제3의 영역인 독립노동(플랫폼·프리랜서형 노동) 으로 재편되고 있다. 말하자면 한국의 노동시장은 “이중구조”를 넘어 “삼국지三國志”의 시대로 진입했다.

 

독립노동은 전통적인 의미의 고용관계에 속하지 않는다. 근로계약서 대신 위탁계약서나 플랫폼 약관으로 일을 수행하고, 출퇴근 대신 접속으로 노동을 개시한다. “고용 없는 관계, 임금 없는 시간, 입사 없는 입직”이라는 말이 어울린다. 이들은 회사의 공간이 아닌 플랫폼과 네트워크의 공간에서 일하며, 관리자 대신 알고리즘과 계약조건이 업무를 통제한다. 노동은 더 이상 공장에서 생산라인을 타고 흐르지 않고, 데이터와 연결망을 따라 이동한다. 따라서 기존의 노동법과 복지제도가 상정하고 있는 직장개념, 노동시간, 지위와 업무지시의 관계와 책임 등이 모두 형해화 되거나 다른 형태로 바뀌게 된다.

 

배달 플랫폼의 라이더, 프리랜서 디자이너, 영상편집자, IT개발자, 콘텐츠 크리에이터, 번역가 등은 그 전형적 사례다. 관계기관들이나 연구자들 마다 이러한 노동을 규정하는 기준이 다르기 때문에 정확하지는 않지만 대부분 이들의 수는 이미 800만~1,000만 명에 달한다고 추정하고 있다. 산업·직종을 초월해 확산된 독립노동은 이제 하나의 구조적 축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전통적인 “노동”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흔들고 있다.

 

 

(2) 전통적 이중구조의 균열

 

한국 사회의 이중구조는 산업화 시기부터 이어져 왔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는 안정된 고용과 단체교섭을 통해 임금과 복지를 보장받았고,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는 그 그림자 아래에 존재했다. 정부와 기업의 노동정책도 이 구도를 전제로 설계되었다. 그러나 2010년대 중반 이후, 플랫폼 산업이 새로운 고용형태를 만들어내면서 이러한 구분은 점점 무력해졌다.

 

독립노동자는 기업의 생산체계에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법적으로는 고용관계 밖에 있다. 즉, 노동시장의 경계 바깥에서 작동하는 거대한 회색지대다. 전통적인 정규직·비정규직 구분은 더 이상 실질적인 노동 현실을 포착하지 못한다. 대기업·중소기업이라는 산업 조직의 구분 역시, 플랫폼 노동이 산업 간 경계를 허물면서 의미를 잃고 있다. 노동의 형태가 달라지자, 노동시장의 구조적 지도 자체가 바뀌고 있는 것이다.

 

최근 이러한 독립노동에 대한 연구와 자력화1)에 집중하고 있는 <아무나유니온>의 조건준 대표는 독립노동의 가장 큰 특징을 공간, 시간, 관계의 단절과 재구성이라고 지적한다.

 

첫째, 공간의 부재이다. 독립노동에는 고정된 일터가 없다. 회사 건물이나 공장 대신 개인의 방, 카페, 차량, 온라인 플랫폼이 노동의 현장이 된다. ‘출근’은 로그인이 되었고, ‘퇴근’은 접속을 끄는 순간이다. 노동은 물리적 장소가 아니라 데이터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다.

 

둘째, 시간의 유동화이다. 근로기준법이 규정해 온 ‘근로시간’의 개념이 무의미하다. 독립노동자는 언제 일하고 언제 쉬는지를 스스로 결정하지만, 동시에 일감의 불확실성과 수입의 불안정 속에 시시각각 접속을 강요받는다. 자유와 불안, 자율과 종속이 공존하는 모순된 시간 구조다.

 

셋째, 관계의 해체와 재구성이다. 동료와 관리자, 노동조합과 사측이라는 이분법적 관계 대신, 플랫폼과 이용자, 알고리즘, 클라이언트가 얽힌 복합적 네트워크가 형성된다. 노동자는 ‘소속’이 아닌 ‘연결’로 존재한다.

 

조건준 대표의 표현에 따르면 독립노동은 기존의 노동운동이 익숙한 ‘공장사회(factory society)’가 아닌 ‘사회공장(social factory)’의 형태로 움직인다고 한다. 사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산공간이 되었고, 노동은 더 이상 집단적 결속이 아니라 개인의 접속과 연결로 이루어진다는 의미이다. 이는 결국 독립노동을 포괄하는 형태로 기존의 노동관계 제도들이나 복지제도들이 변화해야 함을 의미하지만 변화의 방향성에 대해서는 날카로운 논쟁이 자리잡고 있다. 먼저 ‘독립노동’이라는 것 자체가 자본이 기존의 노동관계를 회피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고 공장사회를 규정하던 기존의 노동관계 제도로 이들을 인입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 한편에서는 독립노동의 출현을 복합적 조건에서 발생한 시대변화로 인식하고 먼저 사각지대를 최소하하기 위해 이들에 맞는 새로운 노동관계법 제정와 복지제도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다. 이 논쟁이 어려운 이유는 참고할만한 사례가 없이 빠른 시간에 일어난 변화라는 것과 해외의 주요 선진국들 역시 우리와 동시간대로 고민하고 있는 문제라는 점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적어도 21세기 중후반까지 주요국가들의 노동시장과 산업은 이 논쟁의 결과에 따라 크게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다.


1) <아무나유니온>의 조건준 대표는 노동운동에서 기존에 사용되던 ‘조직화’라는 용어 대신 ‘자력화’라는 용어를 선호한다. 그 이유는 중앙집중적이고 위계적인 조직화보다는 독립노동의 특성에 주체들의 주도성이 더 발현되는 ‘자력화’라는 용어가 더 적잡하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