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있는 민주주의와 절반의 인민주권 ①

현대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시민들은 ‘사회’를 통해서 자원을 분배하는 게임, 그러니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또는 이 사회를 통해 국가에 재분배를 요구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사회란 조직을 말한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든, 무슨무슨 협회든, 아니면 시민단체이든. 결국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은 사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본격적으로 자원의 분배에 개입하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노동조합을 조직한다는 것은 곧 사회를 조직한다는 말이다. 노동시민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을 하기도 하지만(노동운동) 노동조합과 관계 맺은 정당이라는 통로를 통해 국가를 대상으로도 재분배를 요구하고 실현하기도 한다.(노동정치)
한국의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주요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대기업 또는 공공부문에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조직노동이라 명칭되는 주요 노동조합은 이미 스스로 자본과의 분배투쟁에서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고, 정당을 통해 국가의 정책에 의미있는 개입을 하고 있다. 적어도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있어서는 흔히들 말하는 ‘노동있는 민주주의’ 가 실현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이야기일까? 노동조합이 국가정책에 그만큼 의미있게 개입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고 여전히 한국의 주요정당들은 노동에 배제적이거나 큰 관심이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주요 대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들과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의 경우 굳이 노동조합을 통한 재분배 요구보다 각자가 중산층의 정치적 시민으로서 지지정당을 통해 재분배를 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부동산정책, 교육정책, 각종 세금정책(금투세, 증여세, 세액공제 논쟁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등에 있어서 말이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 중산층 노동자들의 주요한 요구사항들은 굳이 노동조합이 정당과 관계 맺어 정책적 개입을 하는 노동정치라는 민주주의의 고전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정치인들에게 슈퍼챗을 보내고 문자폭탄을 던지고 때로는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참석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 직접 정당과 관계를 맺어 획득가능해 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국가와 관계 맺는 ‘사회’로서의 기능이 아닌 오로지 사업장에 국한되어 임금인상을 최대한 달성하는 ‘임금인상 기계’로만 기능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 ‘상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를 위해 국가정책에 개입해야 하는 필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만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정치’를 수행한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조합원만이 아닌 다수 시민의 조직적 대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힘은 현대사회의 그 어떤 조직보다도 여전히 강력하다. 분배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이를 압박할 수 있는 물리력과 조직력, 중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활동해 갈 수 있는 충분한 물질적 기반 등은 현대사회의 그 어떤 조직도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이다. 아마도 ‘기업’정도가 이에 대응하는 또는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힘을 어디에 집중해서 사용할 것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주요 대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경우는 임금, 복지, 고용 등에 있어서 여타의 노동선진국의 노동자들 이상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해외 선진국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한국의 주요 노동조합이 맺은 단체협약을 보며 그 수준이 너무 높아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오히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조직력과 정책개입력 등은 조합원이 아닌 조합 외부의 노동시민들을 향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20세기 신자유주의와 21세기 자본주의가 합작하여 만들어낸 ‘사회가 없는 노동시민’들에게 다시금 사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이 현대사회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없는 노동시민’들이 어떤 이들을 지칭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예상할 수 있다.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비정규직, 반복실업자 등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이야 말로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유동하는 노동시민들이다. 20세기가 노동자 조합원들의 대표로서 노동조합이 자본과의 분배투쟁과 국가를 향한 재분배 요구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노동조합은 아직 ‘시민’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하지 못한 채 ‘절반의 인민주권’ 상태에 있는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을 ‘사회’로 조직(노동조합으로 조직한다는 말과 조금 다른 의미로)하고 대표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역할일 것이다.
노동있는 민주주의와 절반의 인민주권 ①
현대 민주주의에서 우리는 국가와 사회, 그리고 개인의 관계를 통해 존재한다. 시민들은 ‘사회’를 통해서 자원을 분배하는 게임, 그러니까 정치에 참여할 수 있다. 또는 이 사회를 통해 국가에 재분배를 요구하고 이를 실현할 수 있다. 그런데 결국 사회란 조직을 말한다. 그것이 노동조합이든, 무슨무슨 협회든, 아니면 시민단체이든. 결국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개인들은 사회를 통하지 않고서는 본격적으로 자원의 분배에 개입하기 어렵다. 그래서 결국 노동조합을 조직한다는 것은 곧 사회를 조직한다는 말이다. 노동시민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자본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을 하기도 하지만(노동운동) 노동조합과 관계 맺은 정당이라는 통로를 통해 국가를 대상으로도 재분배를 요구하고 실현하기도 한다.(노동정치)
한국의 노동운동을 대표하는 주요 노동조합들은 대부분 대기업 또는 공공부문에 조직되어 있다. 이러한 조직노동이라 명칭되는 주요 노동조합은 이미 스스로 자본과의 분배투쟁에서 상당한 수준의 성과를 거두었고, 정당을 통해 국가의 정책에 의미있는 개입을 하고 있다. 적어도 대기업과 공공부문에 있어서는 흔히들 말하는 ‘노동있는 민주주의’ 가 실현되어 있다고 말한다면 너무 낙관적인 이야기일까? 노동조합이 국가정책에 그만큼 의미있게 개입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는 반론도 충분히 가능하고 여전히 한국의 주요정당들은 노동에 배제적이거나 큰 관심이 없다는 비판도 가능하다.
그런데 또 한편 생각해보면 주요 대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들과 공공부문 노동조합의 노동자들의 경우 굳이 노동조합을 통한 재분배 요구보다 각자가 중산층의 정치적 시민으로서 지지정당을 통해 재분배를 달성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이 들 때가 많다. 부동산정책, 교육정책, 각종 세금정책(금투세, 증여세, 세액공제 논쟁들을 떠올려 보면 된다) 등에 있어서 말이다. 거칠게 말하면 한국 중산층 노동자들의 주요한 요구사항들은 굳이 노동조합이 정당과 관계 맺어 정책적 개입을 하는 노동정치라는 민주주의의 고전적인 단계를 거치지 않고 스스로 정치인들에게 슈퍼챗을 보내고 문자폭탄을 던지고 때로는 촛불과 응원봉을 들고 거리에 참석하는 정치적 시민으로서 직접 정당과 관계를 맺어 획득가능해 진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노동조합은 노동자들이 국가와 관계 맺는 ‘사회’로서의 기능이 아닌 오로지 사업장에 국한되어 임금인상을 최대한 달성하는 ‘임금인상 기계’로만 기능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러한 비관적 ‘상상’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노동조합이 전체 노동자를 위해 국가정책에 개입해야 하는 필요는 생각보다 크다. 그것은 노동조합이 조합원만 대표하는 조직이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노동정치’를 수행한다고 했을 때 노동조합은 조합원만이 아닌 다수 시민의 조직적 대표로서 기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서 노동조합의 힘은 현대사회의 그 어떤 조직보다도 여전히 강력하다. 분배에 합법적으로 개입할 수 있는 권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이를 압박할 수 있는 물리력과 조직력, 중장기적 전망을 가지고 활동해 갈 수 있는 충분한 물질적 기반 등은 현대사회의 그 어떤 조직도 가지고 있지 못한 능력이다. 아마도 ‘기업’정도가 이에 대응하는 또는 상회하는 힘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문제는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힘을 어디에 집중해서 사용할 것인가를 판단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재 주요 대기업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의 경우는 임금, 복지, 고용 등에 있어서 여타의 노동선진국의 노동자들 이상의 권리를 확보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해외 선진국의 노동조합 활동가들이 한국의 주요 노동조합이 맺은 단체협약을 보며 그 수준이 너무 높아 입을 다물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다. 오히려 현재 한국의 노동조합이 가지고 있는 탁월한 조직력과 정책개입력 등은 조합원이 아닌 조합 외부의 노동시민들을 향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20세기 신자유주의와 21세기 자본주의가 합작하여 만들어낸 ‘사회가 없는 노동시민’들에게 다시금 사회를 만들어주는 역할이 현대사회 노동조합의 가장 중요한 역할인지도 모른다. ‘사회가 없는 노동시민’들이 어떤 이들을 지칭하는지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예상할 수 있다. 플랫폼노동자, 프리랜서, 비정규직, 반복실업자 등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이야 말로 ‘사회’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유동하는 노동시민들이다. 20세기가 노동자 조합원들의 대표로서 노동조합이 자본과의 분배투쟁과 국가를 향한 재분배 요구를 통해 ‘시민’으로서의 자격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다면, 이제 노동조합은 아직 ‘시민’의 자격을 온전히 획득하지 못한 채 ‘절반의 인민주권’ 상태에 있는 노동시장의 외부자들을 ‘사회’로 조직(노동조합으로 조직한다는 말과 조금 다른 의미로)하고 대표하는 것이 가장 주요한 역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