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3월 13일, 청소년기후행동 청소년 원고 19명 기후변화를 방치하는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헌법 소송 제기
<사진, 청소년기후행동>
한국에서는 화성에 홀로 남은 우주비행사이자 연구원이 고군분투하며 살아남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션’의 작가인 ‘앤디 위어’의 최근작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지음 /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는 또 한번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양빛을 잡아먹는 우주미생물이 발견되어 지구를 비롯한 여러 항성계가 위험에 처하고, 지구에서 전대미문의 이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는 합심하여 급하게 지구 구하기 프로젝트를 발족한다. 전작인 ’마션‘에서도 보여주었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유머를 잃지 않는 책의 이야기 전개는 재미있지만 문득 이 지구 구하기 프로젝트에서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들을 보게 된다. 지구문명 자체가 멸망앞에 서있기에 ’민주주의‘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약간의 초반부 스포일러가 있음). 심지어 지구온난화가 아닌 지구가 차가워지는 ‘지구냉각화’를 막기 위해 남극을 부숴버리는 미친 것 같은 결정을 할 때에도 민주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속하고 과감한 문제해결의 과정을 방해하는 귀찮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일면 철저하게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테크노크라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최근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그의 저서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How democracy ends)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에서 파격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재앙적 수준의 기후위기’나 ‘펜데믹’, ‘핵전쟁’과 같은 ‘실존적 위기’ 앞에서 그다지 원활하게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한 위기 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성원들은 당장의 생존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선택하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급하고 큰 문제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유권자는 변덕스럽고’ ‘위기는 급박’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는 잿더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겠지만” 정작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해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실존적 위기를 빠르고 명료하게(사실 민주주의는 빠르고 명료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해결하지 못한 채 위기가 지속된다면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에 대해서 런시먼은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환경문제에 대처하는 실용주의적 독재와 비교하면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느리고 우유부단해 보인다. 민주주의는 선택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How democracy Ends” 그렇다. 실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기후위기’를 해결해준다면 권위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 답변이 무려 절반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조효제(2020), 『탄소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이미 우리가 중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권위주의는 ‘장기적 이익’을 희생해서 ‘단기적 성과’를 보여주고 약속을 이행하는데에는 때로 탁월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린뉴딜(Green Newdeal)의 선두그룹에 중국이 위치해 있음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19 펜데믹에서 보았듯이 ‘속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권위주의는 빠르고 민주주의는 느리다. 심지어 런시먼이 지적했듯이 민주주의는 변덕스러워서 지름길을 앞에 두고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후위기’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인류가 탄생한 작금의 ‘실존적 위기’의 초입부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해야 한단 말일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다. 우리는 당면한 모순과 문제해결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거나 부차적인 ‘절차’ 따위로 여겼을 때 어떤 거대한 비극과 인간성의 말살이 일어났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지구의 유일한 종(種)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의견을 모으고 결정을 내리는 절차의 알고리즘이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기능이 민주주의 내에 디자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그 과정이 진지하게 진행되었을때 사회에 가져오는 진짜 중요한 효과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우리들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자유로운 반대의견과 논쟁이라는 소통의 과정 속에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배우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한다. 그래서 때로 민주주의가 느리고 답답하게 보이면서도 의외의 위대한 선택을 해온 것이 아닐까?
만약 지금 민주주의가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가 가진 약점에서 기인한 면도 일부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현실의 정치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말하듯이 기후가 아닌 정치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진짜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민주주의가 더 민주주의다워 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세기, 민주주의의 확대가 가져온 폭력의 감소와 자유와 인권의 신장, 그리고 불평등의 완만한 해소라는 과거의 영광에 빠져 민주주의 그 자체를 성숙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시민은 서로가 서로를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관계임을 잊지 말자. 우리가 권위주의의 유혹에 눈을 돌리기에는 아직 민주주의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은 현장과 이론이 만나는 연구소 '생태지평' 연재 칼럼 '정경유착(정치와 환경의 유착)에 실린 칼럼입니다.
원문보기 : https://ecoin.or.kr/xe/column/23360
2020년 3월 13일, 청소년기후행동 청소년 원고 19명 기후변화를 방치하는 정부와 국회를 상대로 헌법 소송 제기
<사진, 청소년기후행동>
한국에서는 화성에 홀로 남은 우주비행사이자 연구원이 고군분투하며 살아남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 ‘마션’의 작가인 ‘앤디 위어’의 최근작 “프로젝트 헤일메리 앤디 위어 지음 / 강동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 는 또 한번 흥미로운 이야기로 시작한다. 태양빛을 잡아먹는 우주미생물이 발견되어 지구를 비롯한 여러 항성계가 위험에 처하고, 지구에서 전대미문의 이 실존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세계는 합심하여 급하게 지구 구하기 프로젝트를 발족한다. 전작인 ’마션‘에서도 보여주었던 진지하면서도 유쾌한 유머를 잃지 않는 책의 이야기 전개는 재미있지만 문득 이 지구 구하기 프로젝트에서 멈칫하게 만드는 순간들을 보게 된다. 지구문명 자체가 멸망앞에 서있기에 ’민주주의‘는 부차적인 것이 되어버린다(약간의 초반부 스포일러가 있음). 심지어 지구온난화가 아닌 지구가 차가워지는 ‘지구냉각화’를 막기 위해 남극을 부숴버리는 미친 것 같은 결정을 할 때에도 민주주의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것은 신속하고 과감한 문제해결의 과정을 방해하는 귀찮은 무엇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일면 철저하게 과학자들과 공학자들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테크노크라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최근 세계적으로도 주목받고 있는 영국의 정치학자 ‘데이비드 런시먼’은 그의 저서 “쿠데타, 대재앙, 정보권력(How democracy ends) 데이비드 런시먼 지음 / 최이현 옮김 / 아날로그”에서 파격적인 분석을 내놓는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재앙적 수준의 기후위기’나 ‘펜데믹’, ‘핵전쟁’과 같은 ‘실존적 위기’ 앞에서 그다지 원활하게 작동하는 체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거대한 위기 자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구성원들은 당장의 생존과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선택하고 판단하려고 하기 때문에 시급하고 큰 문제들을 외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조금 더 냉정하게 말하면 ‘유권자는 변덕스럽고’ ‘위기는 급박’하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자는 잿더미 속에서도 최선을 다해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하겠지만” 정작 그것이 우리가 직면한 ‘위기’를 해결해주는 것과는 관계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서 ‘민주주의’가 실존적 위기를 빠르고 명료하게(사실 민주주의는 빠르고 명료하지 않은 것이 장점이다!) 해결하지 못한 채 위기가 지속된다면 시민들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이에 대해서 런시먼은 우울한 전망을 내놓는다. “환경문제에 대처하는 실용주의적 독재와 비교하면 민주주의는 복잡하고 느리고 우유부단해 보인다. 민주주의는 선택을 유보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머뭇거리다가 때를 놓칠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How democracy Ends” 그렇다. 실제 최근 조사에 따르면 유럽의 많은 젊은이들은 ‘기후위기’를 해결해준다면 권위주의를 선택할 수 있다고 한 답변이 무려 절반 가까이 되었다고 한다.(조효제(2020), 『탄소사회의 종말』, 21세기북스)
이미 우리가 중국을 비롯한 몇몇 국가들의 사례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권위주의는 ‘장기적 이익’을 희생해서 ‘단기적 성과’를 보여주고 약속을 이행하는데에는 때로 탁월함마저 보여주고 있다. 그린뉴딜(Green Newdeal)의 선두그룹에 중국이 위치해 있음을 부정하기가 쉽지 않다. 코로나19 펜데믹에서 보았듯이 ‘속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권위주의는 빠르고 민주주의는 느리다. 심지어 런시먼이 지적했듯이 민주주의는 변덕스러워서 지름길을 앞에 두고 길을 돌아가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미 ‘기후위기’로 삶을 마감해야 하는 인류가 탄생한 작금의 ‘실존적 위기’의 초입부에서 우리는 ‘민주주의’를 잠시 유보해야 한단 말일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위험하다. 우리는 당면한 모순과 문제해결을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하거나 부차적인 ‘절차’ 따위로 여겼을 때 어떤 거대한 비극과 인간성의 말살이 일어났는지를 뼈저리게 경험한 지구의 유일한 종(種)이다.
민주주의는 단순히 의견을 모으고 결정을 내리는 절차의 알고리즘이 아니다. 적어도 그러한 기능이 민주주의 내에 디자인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그 과정이 진지하게 진행되었을때 사회에 가져오는 진짜 중요한 효과는 ‘최선의 결정’을 내리는 것 말고도 다른 것이 있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우리들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정치체제라는 점이다. 자유로운 반대의견과 논쟁이라는 소통의 과정 속에서 시민들이 서로에게 배우고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더 깊이 이해하도록 한다. 그래서 때로 민주주의가 느리고 답답하게 보이면서도 의외의 위대한 선택을 해온 것이 아닐까?
만약 지금 민주주의가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 그 자체가 가진 약점에서 기인한 면도 일부는 있겠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실행하고 있는 현실의 정치가 중요한 문제들을 다루는 방법을 잊어버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흔히들 말하듯이 기후가 아닌 정치를 바꾸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진짜 중요한 문제를 다루기 위해 민주주의가 더 민주주의다워 져야 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어쩌면 우리는 지난 세기, 민주주의의 확대가 가져온 폭력의 감소와 자유와 인권의 신장, 그리고 불평등의 완만한 해소라는 과거의 영광에 빠져 민주주의 그 자체를 성숙시키는 노력을 게을리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민주주의라는 정치체제와 시민은 서로가 서로를 성숙시키고 발전시켜 나가는 관계임을 잊지 말자. 우리가 권위주의의 유혹에 눈을 돌리기에는 아직 민주주의의 시간은 끝나지 않았다.
이 글은 현장과 이론이 만나는 연구소 '생태지평' 연재 칼럼 '정경유착(정치와 환경의 유착)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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