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별교섭 이전에 더 다양한 교섭을
- 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몇 년 전 한 공기업 산하 자회사의 노사갈등을 중재한 적이 있다. 같은 업무를 하는 민간과 비교하더라도 저임금이 분명했고 인사·노무 관리의 부재로 인한 체불임금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노사 간 현안을 조율하려 해도 대부분 모회사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는 점이다. 한정된 모회사의 자원을 놓고 내려야 하는 판단이기에 결국은 모회사 노동조합의 동의가 필요했다. 같은 상급단체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회사 노동조합과 자회사 노동조합의 협력이나 조율은 없었다. 자회사 경영진과 노동조합의 갈등은 더 격화되기만 했다.
얼마 전에는 한 IT 기업 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났다. 눈에 띄게 초췌해진 위원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달에만 ‘노사 교섭’을 30번을 넘게 들어갔다고 했다. 최근에 IT 기업들은 신규 서비스가 론칭될 때마다 별도의 독립법인을 만든다. 자회사와 손자회사가 한 기업 내에 50개가 넘는 경우도 많다. 노동조합은 정작 자회사·손자회사 여부에 상관없이 단일 노동조합으로 조합원들을 받아들이고 활동하는데, 회사는 이 모든 법인들과 ‘개별 교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다 보니 노동조합 위원장이 한 달에 무려 30번 넘게 노사 교섭에 들어가야 하고 이로 인해 책임성 있는 교섭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 괴롭히기’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고 하겠다.
‘근본적 처방’이란 게 존재할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노사관계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를 지적한다. 공감한다. 기업별 노조 체제는 조합원들을 기업의 울타리 속에 가두게 되고, 결국은 기업 내부의 노동조건 향상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한국 사회 불평등의 주요 원인인 이중노동시장 구조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 대안으로는 늘 ‘산업별 교섭 체제(이하 산별교섭)’가 제시되어왔다. 보건의료 영역이나 금융권에서 산별교섭의 성과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산별교섭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기업별로 차이가 큰 임금과 복지 등 기업 단위 조합원들과 기업 지부들이 예민해하는 문제를 책임성 있게 다룰 수 있을지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당장에 산별교섭이 아니어도 노동운동이 새롭게 시도하고 또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교섭의 형태와 사례는 많이 있다. 모회사와 자회사 또는 계열사들의 노동조합이 공동교섭하는 모델이 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IT 기업들이 자회사·손자회사 식으로 모두 분리해서 교섭하는 방식은 ‘신종 노동조합 괴롭히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위원회가 적극적인 해석으로 공동교섭을 하도록 판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사한 업무를 하는 업종별로도 교섭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플랫폼 노동 중에서도 배달, 가사서비스 같은 영역은 ‘업종별’ 교섭 모델을 시도해볼 가치가 있고 성과를 낼 가능성도 높다. 전국의 각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도시철도의 경우 종사자들이 거의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전국 차원의 공동교섭을 통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를 해봄직하다.
물론 산업별 교섭 체제는 우리 노동운동과 노사관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교섭에 대한 실험과 연구 그리고 경험의 축적이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반복되어왔던, ‘먼저 산별교섭이 되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근본적 처방’을 담은 주장은 정작 현실에서 약간의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회피해버리는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사실 복잡한 현실에서 ‘근본적 처방’과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들을 조금씩 ‘시도’해보며 그를 통해 약간이나마 ‘개선’하고 성과를 ‘축적’해나가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 길고 다양한 경험과 성과의 추세선을 우리는 ‘변화’라고 부른다.
*이 글은 시사IN '지금 여기에 노동'에도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003
산별교섭 이전에 더 다양한 교섭을
- 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몇 년 전 한 공기업 산하 자회사의 노사갈등을 중재한 적이 있다. 같은 업무를 하는 민간과 비교하더라도 저임금이 분명했고 인사·노무 관리의 부재로 인한 체불임금 규모도 만만치 않았다. 문제는 이러저러한 노사 간 현안을 조율하려 해도 대부분 모회사의 동의를 얻어야 했다는 점이다. 한정된 모회사의 자원을 놓고 내려야 하는 판단이기에 결국은 모회사 노동조합의 동의가 필요했다. 같은 상급단체를 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모회사 노동조합과 자회사 노동조합의 협력이나 조율은 없었다. 자회사 경영진과 노동조합의 갈등은 더 격화되기만 했다.
얼마 전에는 한 IT 기업 노동조합 위원장을 만났다. 눈에 띄게 초췌해진 위원장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더니 그 달에만 ‘노사 교섭’을 30번을 넘게 들어갔다고 했다. 최근에 IT 기업들은 신규 서비스가 론칭될 때마다 별도의 독립법인을 만든다. 자회사와 손자회사가 한 기업 내에 50개가 넘는 경우도 많다. 노동조합은 정작 자회사·손자회사 여부에 상관없이 단일 노동조합으로 조합원들을 받아들이고 활동하는데, 회사는 이 모든 법인들과 ‘개별 교섭’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다 보니 노동조합 위원장이 한 달에 무려 30번 넘게 노사 교섭에 들어가야 하고 이로 인해 책임성 있는 교섭이 불가능한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새로운 형태의 ‘노동조합 괴롭히기’라 불러도 할 말이 없다고 하겠다.
‘근본적 처방’이란 게 존재할까
많은 사람들이 한국 노사관계의 큰 문제 중 하나로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를 지적한다. 공감한다. 기업별 노조 체제는 조합원들을 기업의 울타리 속에 가두게 되고, 결국은 기업 내부의 노동조건 향상에만 집중하게 만들어 한국 사회 불평등의 주요 원인인 이중노동시장 구조를 강화하는 측면이 있다. 그 대안으로는 늘 ‘산업별 교섭 체제(이하 산별교섭)’가 제시되어왔다. 보건의료 영역이나 금융권에서 산별교섭의 성과들이 없는 것은 아니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까지 큰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정말로 산별교섭이 실현된다고 하더라도 기업별로 차이가 큰 임금과 복지 등 기업 단위 조합원들과 기업 지부들이 예민해하는 문제를 책임성 있게 다룰 수 있을지 회의적 시각도 존재한다.
당장에 산별교섭이 아니어도 노동운동이 새롭게 시도하고 또 의미 있는 성과를 낼 수 있는 교섭의 형태와 사례는 많이 있다. 모회사와 자회사 또는 계열사들의 노동조합이 공동교섭하는 모델이 더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IT 기업들이 자회사·손자회사 식으로 모두 분리해서 교섭하는 방식은 ‘신종 노동조합 괴롭히기’에 지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노동위원회가 적극적인 해석으로 공동교섭을 하도록 판정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생각한다. 유사한 업무를 하는 업종별로도 교섭이 활성화되어야 한다. 플랫폼 노동 중에서도 배달, 가사서비스 같은 영역은 ‘업종별’ 교섭 모델을 시도해볼 가치가 있고 성과를 낼 가능성도 높다. 전국의 각 지방정부가 운영하는 도시철도의 경우 종사자들이 거의 동일한 업무를 하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전국 차원의 공동교섭을 통해 공통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도를 해봄직하다.
물론 산업별 교섭 체제는 우리 노동운동과 노사관계가 지향해야 할 목표다. 하지만 다양한 형태의 교섭에 대한 실험과 연구 그리고 경험의 축적이 함께 진행될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반복되어왔던, ‘먼저 산별교섭이 되어야 문제가 해결된다’라는 ‘근본적 처방’을 담은 주장은 정작 현실에서 약간의 노력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들을 회피해버리는 ‘알리바이’로 작동한다. 사실 복잡한 현실에서 ‘근본적 처방’과 같은 것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가능한 것들을 조금씩 ‘시도’해보며 그를 통해 약간이나마 ‘개선’하고 성과를 ‘축적’해나가는 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 길고 다양한 경험과 성과의 추세선을 우리는 ‘변화’라고 부른다.
*이 글은 시사IN '지금 여기에 노동'에도 실린 글입니다. 원문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5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