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진 신세계와 시시한 노동시장정책
- 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많은 국가에서 언제부터인가 ‘능력주의’ ‘공정’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보통 진보는 ‘불평등의 심화’가 불러온 현상이라고 이야기하고, 보수는 ‘진보의 내로남불과 조급증’이 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미국의 능력주의가 상당 부분 ‘일의 존엄’을 무시한 미국 진보파에게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흥미로운 사실은 샌델 교수가 이런 ‘일의 존엄’을 무시함으로써 발생했다고 보는 미국판 ‘능력주의 및 공정 담론’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라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과 AI’ ‘기본소득’ ‘국가일자리보장제’ ‘그린뉴딜’ 등이 논의되는 작금의 시대에 반세기 전 제기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라니. 시시하다. 하지만….
<그림 : 윤현지>
각종 보험료는 보험 비용 아닌 연대 비용
일반적으로 노동시장정책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분류한다. 전자는 공공고용서비스, 각종 직업훈련, 직접일자리사업, 고용장려금 등을 말하고 후자는 실업급여, 실업부조 등을 일컫는다. 한국은 노동시장정책에 GDP 대비 약 0.6%(2017년 기준)를 지출하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증가했지만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다. 한국보다 노동시장정책에 지출을 적게 하는 나라는 일본(0.3%)과 미국(0.24%) 정도다. 덴마크·핀란드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의 4분의 1 수준이며 독일의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샌델이 지적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분리하면 어떠할까? GDP 대비 약 0.3%로 여전히 최하위권이다. 역시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함께 최하위권을 구성하고 있다. 실업급여로 대표되는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순위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실상 한국 사회는 ‘실업’과 ‘일자리’에 대해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제대로 대응해본 적이 없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 기술변화와 불평등의 심화로 발생한 일자리의 위기와 그 대안을 얘기할 때 진보는 어느 순간부터 ‘멋진 신세계’만을 시민들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일자리는 이제 AI가 얼마든지 대체할 것이니 공부해서 다른 일을 하셔야 합니다. 못하겠으면 걱정 마세요. 저희가 기본소득을 드릴 테니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살아가세요. 필요하다면 일자리도 국가에서 보장하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이다. 고용과 실업에 대한 노동시장정책에 OECD 최하위의 재정지출을 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웅장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시민의 권리’로 국가에 ‘보장’을 주장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민들 간의 ‘연대’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일할 권리’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또 한편 다른 시민의 권리보장과 삶의 평안을 위해 연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시장정책에 사용되는 우리가 내는 각종 보험료 등은 사실은 ‘보험 비용’이 아니라 시민들 간의 ‘연대의 비용’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 사회는 그 연대의 비용이 부끄러울 정도로 매우 작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쓰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 간의 연대의 비용은 ‘MMT(현대화폐이론)’나 ‘재벌·부자 증세’로 대체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주장만 난무하고 시민들 간의 연대는 점점 형해화(形骸化)된다면 남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혹여 모든 시민들이 국가에 매달린 채 만인이 만인에게 “나도 권리가 있고 내가 더 힘들고 내가 더 먼저 받아야 한다”라고 서로 악다구니를 쓰는 ‘진보판 지옥도’는 아닐까?
시시하겠지만 일자리는 일자리다. 실업은 실업이다. 노동시장정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양적·질적으로 부족한 공공고용서비스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직업훈련 시스템,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실업급여 규모와 거대한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그냥 두고 결코 ‘멋진 신세계’로 갈 수 없다. 시시함을 극복하지 않고서 위대함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이 글은 시사IN 714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원문은 링크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16
멋진 신세계와 시시한 노동시장정책
- 조성주 정치발전소 상임이사
많은 국가에서 언제부터인가 ‘능력주의’ ‘공정’을 둘러싼 논쟁이 치열하다. 보통 진보는 ‘불평등의 심화’가 불러온 현상이라고 이야기하고, 보수는 ‘진보의 내로남불과 조급증’이 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마이클 샌델 교수는 최근작 〈공정하다는 착각〉에서 미국의 능력주의가 상당 부분 ‘일의 존엄’을 무시한 미국 진보파에게서 비롯된 측면이 있다며 비판의 날을 세운다. 흥미로운 사실은 샌델 교수가 이런 ‘일의 존엄’을 무시함으로써 발생했다고 보는 미국판 ‘능력주의 및 공정 담론’의 대안으로 제시하는 것이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라는 점이다. ‘4차 산업혁명과 AI’ ‘기본소득’ ‘국가일자리보장제’ ‘그린뉴딜’ 등이 논의되는 작금의 시대에 반세기 전 제기된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이라니. 시시하다. 하지만….
<그림 : 윤현지>
각종 보험료는 보험 비용 아닌 연대 비용
일반적으로 노동시장정책은 ‘적극적 노동시장정책’과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분류한다. 전자는 공공고용서비스, 각종 직업훈련, 직접일자리사업, 고용장려금 등을 말하고 후자는 실업급여, 실업부조 등을 일컫는다. 한국은 노동시장정책에 GDP 대비 약 0.6%(2017년 기준)를 지출하고 있다. 10년 전과 비교하면 증가했지만 OECD 국가 중에서 최하위권이다. 한국보다 노동시장정책에 지출을 적게 하는 나라는 일본(0.3%)과 미국(0.24%) 정도다. 덴마크·핀란드 같은 북유럽 복지국가의 4분의 1 수준이며 독일의 2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샌델이 지적하는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으로 분리하면 어떠할까? GDP 대비 약 0.3%로 여전히 최하위권이다. 역시 미국과 일본이 한국과 함께 최하위권을 구성하고 있다. 실업급여로 대표되는 소극적 노동시장정책의 순위가 어떠하리라는 것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사실상 한국 사회는 ‘실업’과 ‘일자리’에 대해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제대로 대응해본 적이 없고 현재도 그러하다.
그러나 최근 기술변화와 불평등의 심화로 발생한 일자리의 위기와 그 대안을 얘기할 때 진보는 어느 순간부터 ‘멋진 신세계’만을 시민들에게 말하고 있다. ‘당신의 일자리는 이제 AI가 얼마든지 대체할 것이니 공부해서 다른 일을 하셔야 합니다. 못하겠으면 걱정 마세요. 저희가 기본소득을 드릴 테니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살아가세요. 필요하다면 일자리도 국가에서 보장하겠습니다’와 같은 말들이다. 고용과 실업에 대한 노동시장정책에 OECD 최하위의 재정지출을 하는 나라에서 참으로 웅장한 포부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시민의 권리’로 국가에 ‘보장’을 주장하고 말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지만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시민들 간의 ‘연대’다. 우리는 시민으로서 ‘일할 권리’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누릴 권리’를 보장받아야 하지만 또 한편 다른 시민의 권리보장과 삶의 평안을 위해 연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런 의미에서 노동시장정책에 사용되는 우리가 내는 각종 보험료 등은 사실은 ‘보험 비용’이 아니라 시민들 간의 ‘연대의 비용’이다. 앞서 살펴본 대로 우리 사회는 그 연대의 비용이 부끄러울 정도로 매우 작고, 필요한 사람들에게 충분히 쓰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시민들 간의 연대의 비용은 ‘MMT(현대화폐이론)’나 ‘재벌·부자 증세’로 대체할 수 없는 가치와 의미가 있다.
모든 것을 국가가 보장해야 한다는 요구와 주장만 난무하고 시민들 간의 연대는 점점 형해화(形骸化)된다면 남는 것은 어떤 모습일까? 혹여 모든 시민들이 국가에 매달린 채 만인이 만인에게 “나도 권리가 있고 내가 더 힘들고 내가 더 먼저 받아야 한다”라고 서로 악다구니를 쓰는 ‘진보판 지옥도’는 아닐까?
시시하겠지만 일자리는 일자리다. 실업은 실업이다. 노동시장정책에서 시작해야 한다. 양적·질적으로 부족한 공공고용서비스와 취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직업훈련 시스템, 아직도 턱없이 부족한 실업급여 규모와 거대한 고용보험 사각지대를 그냥 두고 결코 ‘멋진 신세계’로 갈 수 없다. 시시함을 극복하지 않고서 위대함으로 나아갈 수 없는 법이다.
이 글은 시사IN 714호에 실린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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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44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