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가는 변화는 어떻게 가능한가? - 더 크라운과 로벤스 보고서

공식 관리자
2023-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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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드라마 <더 크라운>은 영국 엘리자베스 2세의 일생을 소재로 영국 현대사를 다룬다. 영국 특유의 다소 딱딱하면서도 우울한 분위기가 드라마 전반에 흐르지만 <빌리 엘리어트>, <더 리더 : 책읽어주는 남자> 등의 명작을 연출한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날카로운 연출과 문제의식이 빛나는 ‘정치 드라마’의 수작이다.

 

<더 크라운> 시즌3는 1960년대에서 70년대까지를 배경으로 하는데 해당 시즌의 세 번째 에피소드는 1966년 영국 노동당 집권 시기에 사우스웨일스 에버밴(Aberfan)에서 일어난 비극적 사고 ‘애버밴 석탄폐기물 산 붕괴사고’를 다루고 있다. 시작부터 사고는 반드시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처럼 석탄산과 작은 마을을 둘러싼 ‘불길함’을 노골적으로 보여주는데 사고의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무언가 일이 터지겠구나 하고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그리고 영국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고로 일컬어지는 에버밴 석탄쓰레기 산 붕괴사고와 그 이후를 보여준다.



1966년 10월 22일 영국 웨일스 에버밴. 연합뉴스1966년 영국 사우스웨일스의 에버밴이라는 인구 5,000명 규모의 마을에서 일어난 사고는 50년이 넘은 지금도 전 세계의 산업현장, 학계, 법정 등에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어린이 116명, 성인 28명 총 144명의 시민들과 노동자들이 사망한 비극적 사고 이후 영국사회가 산업현장의 노동자와 시민들의 안전을 위해 무엇을 바꾸어야 하는지 진지하게 고민했고, 6년이 지난 1972년 ‘로벤스 보고서’라는 결과를 낳았다. ‘로벤스 보고서’는 영국의 산업안전보건법 제정 및 산업안전청 설립, 그리고 노동안전 패러다임을 처벌과 규제 중심의 제도가 아니라 현장 노동자들과 기업가의 참여와 권리확대로 변화시켰다. 영국은 당시만해도 매년 1,000명 가까운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사망하던 위험한 국가에서 가장 모범적인 노동안전보건체계를 갖춘 국가로 탈바꿈했다. 얼마 전 국내에도 처음 번역이 완료된 ‘로벤스 보고서’⑴는 영국만이 아니라 지금까지도 전 세계 노동안전의 표준이자 모범이 되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⑴ 국회 이은주 의원실과 국회의원 연구모임인 국회시민정치포럼은 로벤스 보고서 발간 50주년을 기념하고 한국의 노동안전 문제의 패러다임 전환을 모색하기 위해 로벤스 보고서를 한국어로 완전번역해서 발간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드라마에는 이름만 등장하는 정도지만 영국의 노동안전의 패러다임을 바꾼 로벤스 보고서를 주도했던 ‘로벤스’(Lord Robens)가 바로 에버밴 석탄산 붕괴사고의 책임자였다는 것이다. 사고의 책임을 지고 질타받고 매장되어야 마땅할 영국석탄청 이사장이자 영국 노동당의 유력정치인이었던 로벤스는 1970년 노동당 정부하에서 영국의 산업안전보건 체계의 근본을 변화시킬 대안수립을 요청받게 되지만 곧 보수당으로 정권이 교체되고 보수당 정부 하에서 2년여의 활동 끝에 1972년 ‘로벤스 보고서’가 제출한다. 그리고 그 보고서는 1974년 다시 영국 노동당 정부하에서 실질적인 법제도적 정비로 꽃을 피우게 된다.

 

‘로벤스 보고서’가 노동안전보건 분야에 가지는 특별한 의미에 대해서는 별도의 지면을 통해 자세히 소개될 필요가 있겠지만  필자가 오늘 하고 싶은 이야기는 로벤스 보고서의 훌륭하기 그지 없는 내용들은 아니다. 좋은 변화, 확실한 변화를 만드는 기반에 대한 이야기이다. 

 로벤스 보고서는 1966년 에버밴의 비극으로부터 8년의 시간동안 진보에서 보수로 다시 진보로 무려 3개의 정부를 거쳐가며 완성되고 실현된 보고서다. 노동당 정부하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고와 그 책임자가 주도하는 정부위원회가 보수당 정부하에서도 실질적인 활동을 할 수 있었고 다시 그 결과가 노동당 정부에서 법제도적 정비와 기관설립 등으로 효과를 낼 수 있었던 것은 결국은 ‘정치’의 힘이 아닐 수 없다. 로벤스 보고서는 진보나 보수 어느 한쪽이 당파적인 목적으로만 안건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다고 말 할 수 도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오히려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정부들을 거쳤기 때문에 오래가는 실질적 변화를 만들 수 있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3개의 정권을 거치면서 진보와 보수가 모두 문제의 본질과 실질적인 해결방향에 합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 정치는 각 정당들이 사회의 각 부분을 당파적으로 대표함으로서 다양한 의견과 이해관계의 조율을 통해 사회를 통합하는 효과를 가진다. 우리 공동체의 너무나도 중요한 문제들은 여야, 진보와 보수가 공동의 노력과 과제로 해결책을 모색해나가야 하는 경우가 많다. ‘정답’을 확신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것은 ‘안전’의 문제인데 국가 차원에서는 ‘외교안보’ 문제일 것이고 시민들의 생활에서는 ‘노동안전’의 문제일 것이다. 

 

우리 공동체에 필요한 개혁은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자기들끼리 모여 추진해서 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가끔 선거때마다 ‘개혁을 완수하기 위해 여당을 찍어달라’는 구호나 ‘완전한 개혁을 위한 20년 집권론’ 따위의 오만이 등장하는데 이는 민주주의에 대한 완전한 오해라 할 수 있다. 다르기 때문에 정치가 존재하는 것이고 그 다름에도 불구하고 서로간에 합의되었을 때 진짜 변화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까지 합의할 수 있는 공통의 공감대가 마련되고 현실적용이 가능한 구체적이지만 작은 변화들이 꾸준히 축적되었을 때 오히려 더 오래가고 더 튼튼한 변화가 가능하다. 정권이 바뀌면 이전 정부들의 모든 정책과 정무적 판단이 부정되고 서로의 노력을 ‘적폐’라는 단어로 절멸시켜야 할 무엇으로 규정하는 것을 5년마다 반복해서는 우리사회의 진짜 변화는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오로지 증오와 적대감만 키울 뿐이며 결국 시간이 지나도 한 걸음도 개선되지 않는 현실로 인해 시민들에게 거대한 공허함만 줄 뿐이다. 

 

드라마에서도 언급되지만 실제로도 엘리자베스2세는 평생 가장 후회하는 일 중 하나로 당시 에버밴 사고현장을 일찍 방문하지 않은 것을 꼽았다고 했다. 영국왕실의 입장에서 정치적 유불리와 여론의 섬세함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치가 진짜 시민들을 위로하고 또 사회를 좋은 방향으로 변화시키는 순간은 늘 ‘정치적 계산으로는 불리한 결단’에서 시작된 경우가 많다. 정치적으로는 불리한 선택들에서 출발되어 끈질기게 반대자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었을 때 오래가는 변화가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미국의 인종분리 정책을 끝낸 린든 존슨 대통령의 ‘민권법’이 그러했고 결국은 독일의 통일을 이끌어낸 빌리브란트의 ‘동방정책’이 그러했다. 만약 우리 사회에도 정말 필요한 개혁이 있다면 그것이 ‘노동개혁’ 또는 ‘연금개혁’, ‘사법개혁’이든 진짜 개혁과 변화는 다른 생각을 가진 정치적 상대방까지 함께 참여하고 추진하는 ‘개혁’일 때만이 가능할 것이다.


*이 글은 플랫폼 얼룩소에도 게재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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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alook.so/posts/o7tlp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