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⑤ 메르켈의 유산과 우크라이나 전쟁

2025-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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⑤ 메르켈의 유산과 우크라이나 전쟁


6. 메르켈의 유산


메르켈이 퇴임한지 이제 3년이 넘어서고 있다. 퇴임 직후 지지율이 70%~80%에 달했던 “무티(Mutti)” 메르켈은 박수받으며 떠나는 성공한 리더의 전형이었다. 메르켈이 70세가 된 지난해(2024년) 실시된 메르켈 시대에 대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여전히 60% 이상의 독일 시민들이 메르켈 시대에 호감을 표시했다. 독일 시민 다수는 “메리켈이 총리가 아니기 때문에 독일이 더 어려워졌다”고 생각할 만큼 메르켈 시대를 그리워했다. 1)

1) https://yougov.de/politics/articles/50053-mehrheit-findet-verhaltnisse-in-deutschland-schlechter-seitdem-merkel-nicht-mehr-kanzlerin-ist


그렇다고 메르켈에게 이 모든 것이 마냥 행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많은 사랑을 받아온 메르켈 총리이지만, 현재의 독일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비춰, 16년간의 메르켈 시대는 면밀하게 재검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거듭된 위기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경제적 안정기를 구가하던 메르켈 시대와 달리, 현재 독일은 구조적이고 복합적인 위기에 직면해 있다.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한 에너지가의 급등, 그로인한 인플레이션과 금리 인상, 실질임금 감소 등 생활비 쇼크, 그럼에도 불구하고 헌법상의 부채 규제(Schuldenbremse)에 의해 강제된 긴축으로 인한 재정적 수단의 취약함, 독일 경제의 핵심 분야인 자동차 및 철강, 화학산업을 강타하고 있는 녹색 전환과 저가의 전기자동차를 앞세운 중국 자동차 업계의 위협 등 말그대로 사면초가이다. 독일의 경제적 상황은 다른 어떤 주요 경제국보다 더 나쁜 상황에 처해 있고 이로 인해 독일의 전통적인 산업지역-라인 강변의 대도시권, 뮌헨, 바뎀뷔르템베르크 등-이 경제적 직격탄을 맞고 있다.2)

2) Condition of Germany 《New Left Review》 nlr 146 March–April 2024


여기에 더해 지난해 출범한 트럼프 2기는 메르켈이 보호하고자 했던 자유주의 국제질서에 상당한 충격을 주고 있고, 유로존의 안보 역시 크게 위협받고 있다. 여러모로 유럽은 전환적 상황으로 내몰려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문제는 독일, 나아가 유럽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이 메르켈 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비판이 광범위하게 제기되고 있다는 점이다. 메르켈 시기 경제적 안정의 기반이었던 러시아, 중국에 대한 에너지(천연 가스) 및 산업(자동차) 교류는 지정학적 위험을 고려하지 못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비판받는다. 유로존의 재정위기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채용된 부채 제한 정책이 재정의 손과 발을 묶고 미래를 제한한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심혈을 기울였던 2차 민스크 협정은 푸틴의 야욕과 러시아의 부활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침략을 위한 시간만 벌어준 것이라는 비판이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와 서구 일부에서 꾸준하게 제기되고 있다. 무엇보다 결정적인 것은 메르켈이 유로존 난민위기 시 국경을 열어 난민 100만명을 수용한 것과 유로존 재정위기 과정에서 경제적으로 취약한 남유럽(특히 그리스)에 대한 가혹한 구조조정 요구이다. 이런 결정이 독일과 EU의 안정성을 크게 훼손하고 포퓰리즘과 우파 민족주의의 발호를 불러왔다는 지적이다.


회고록은 이런 일련의 비판이 확산하는 시점에 발간되었다. 메르켈은 회고록에서 자신을 향한 비판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재임 시 총리로서 내린 결정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데 회고록의 상당 부분을 할애했다. 자신의 유산이 오염되는 것에 반응하고자 하는 전 총리의 의지 역시 회고록에 담겨 있다고 생각된다. 메르켈의 이런 방어가 얼마나 성공적이었는지는 지금 당장 알기는 어려울 것 같다. 여전히 그녀에 대한 평가는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이제 현직 총리가 아니다.3) 집권기 여러 결정에 대해 어떤 평가가 나오더라도 그것을 계승하거나 교정하는 것은 메르켈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메르켈의 유산이 더러는 부채이고 또 자산이라고 해도 이제 그녀의 페이지는 끝났다. 진도를 나가야 하는 것은 다음 세대의 몫이다. 다만, 메르켈의 주장과 논점을 살펴보는 것은 정책적 평가를 떠나 통치자이자 정치가로서 어떤 의지와 윤리에 기초해 정치문제를 다뤘는지 이해하는 데 주안점이 있다. 

 3) <자유>, pp. 37-40.


전쟁은 정치와 외교의 실패 – 우크라이나 문제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의 연장이자 수단”이라고 말했지만, 메르켈은 “전쟁은 언제나 정치와 외교의 실패”라고 정의했다. 전쟁과 정치의 관계에 대해 두 현실주의자는 서로 다른 정의와 액센트로 말한다. 그렇다고 메르켈이 반전주의자는 아니다. 그녀 역시 경우에 따라 전쟁을 지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치적 방법 즉, “협상으로 폭력을 종식하기 위해 인간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포기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4)

4) <자유>, p. 510.


우크라이나를 둘러싸고 푸틴과 메르켈은 서로 대립적 입장이지만, 구사회주의권인 동독과 소련 출신인 두사람 간에는 사실 공유하는 것도 많았다. 과거의 경험도 그렇고, 심지어는 서로 협상할 수 있는 언어(러시아어와 독일어)도 공유했다. 메르켈은 푸틴과 통역 없이 대화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서방의 지도자였다. 메르켈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안보와 안정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NATO의 확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익과 푸틴의 시각을 분석하지 않은 채, NATO의 동진을 추진하는 것에는 명확히 반대했다. 


NATO와 러시아 사이의 갈등은 오랜 연혁을 갖는 문제이다. NATO의 초대 사무총장인 해스팅스 라이오넬 이즈메이경(Lord Hastings Lionel Ismay)이 잘 정리했듯 “NATO는 소련을 막고, 미국을 관여시키며, 독일을 억누르기 위해 만들어진 동맹체제”였다.5) 1991년 소련이 붕괴되고 군사동맹인 바르샤바 조약 기구가 해체되었을 때, NATO 역시 스스로를 개혁할 수 있는 실질적 조치, 예를 들면 유럽의 재래식 무기 감축조약이나 그 이상의 것을 실행해야 했고, NATO의 존립 근거와 역할 역시 새롭게 규정되어야 했다. 그러나 냉전이 끝난 이후 NATO는 그 길로 가지 않았다. 집단방위체제는 점점 형식화 되었고 존재 이유 역시 모호했다. 냉전이 사라진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NATO는 러시아를 겨냥해 구동구권 국가들로 가맹국을 늘려 나갔다. 애초 유럽의 일원이 되겠다는 의지를 밝힌 푸틴 입장에서 NATO의 동진은 러시아를 포위하고 군사적으로 압박하는 목 조르기로 이해할만한 것이다. 러시아의 이런 불만은 시간이 갈수록 더 커졌고, 이에 상응해 러시아의 위협 역시 증대됐다.

5) The Organisation…was created to “keep the Soviet Union out, the Americans in, and the Germans down.” https://www.nato.int/cps/ge/natohq/declassified_137930.htm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NATO 가입 문제는 메르켈의 책상 위에 던져졌다. 미국과 영국, 그리고 중․동유럽 국가 등 많은 NATO 회원국들이 그동안의 관성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의 NATO 가입을 위해 MAP(Membership Action Plan)6) 지위를 요구했다. 메르켈은 중부 및 동유럽 국가들이 NATO가입을 통해 서방 공동체의 일원이 되고 이를 통해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안전을 보장받고자하는 바람을 충분히 이해했다. 그 역시 과거 동독 출신이었기 때문에 동유럽 국가들이 느끼는 불안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희망과 현실은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6) MAP(Membership Action Plan) ‘회원국 행동 계획’이라고 한다. MAP는 NATO에 가입하고자 하는 개별 국가에 NATO 차원의 조언과 실질적 지원을 제공하는 NATO 프로그램을 의미한다. MAP에 참여한다고 해서 NATO 회원국이 되는 것은 아니며 미래 회원 자격에 대한 어떠한 결정도 포함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예비 NATO 회원국과 같은 정치적 의미는 충분히 갖게 된다. 


“나는 MAP 지위가 우크라이나와 조지아를 푸틴의 침략으로부터 지켜줄 거라는 가정은 착각으로 여겼다. 푸틴이 이 사태를 군말없이 받아들일 정도로 그 지위가 억제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게다가 당시 NATO 회원국들이 물자와 병력을 동원해서 군사적으로 대응하고 개입할 수 있었을까? 내가 총리로서 독일 연방의회에 독일군의 그런 임무에 동의를 요청했다면 과반수 찬성을 얻을 수 있었을까? …… 만일 동의를 받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자유>, p. 4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