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⓵ 나는 총리로 태어나지 않았다 – 메르켈 회고록 <자유>(Freiheit)

2025-07-27
조회수 895

⓵ 나는 총리로 태어나지 않았다 – 메르켈 회고록 <자유>(Freiheit) 

※2024년 연말 독일의 前총리 앙겔라 메르켈의 회고록  <자유>(Freiheit)가 출간되었다. 메르켈 전 총리에 대한 평가는 퇴임 직후와 지금은 많이 달라져 있기도 하다. 하지만 독일 최연소 총리로서 그리고 여성총리로서 그가 걸어온 정치인생과 성과와 한계들은 독일의 복잡한 민주주의 역사를 놓고 바라보지 않더라도 세계 민주주의 역사에서 주목해볼 만한 내용이라 생각한다. 

정치발전소의 김성희 전 이사장이 메르켈의 회고록<자유>(Freiheit)에 대한 긴 서평을 작성해 기고했다. 
회원 및 독자들과 함께 읽기 위해 연재를 시작한다. - 정치발전소



앙겔라 메르켈 회고록 ‘자유’를 읽고. 

“자유라고 쓰고 민주주의라고 읽는다.”


지난해 연말, 앙겔라 메르켈의 회고록인 󰡔자유󰡕(Freiheit)가 많은 이들의 주목 속에 출간되었다.1) 메르켈은 16년 동안 독일 총리로 재임하며 독일은 물론, 유럽 및 국제정치에 큰 영향을 끼쳐온 정치지도자이다. 총리 재임 중, 또 퇴임 이후를 막론하고 메르켈에 대한 평전이나 분석서는 독일에서만 수십 권이 출간되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메르켈 관련 서적이 십여 권 이상 출간되었다. 이처럼 메르켈은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정치인이고 그녀에 대해서 비교적 상세하게 알 수 있는 여러 자료가 있지만, 정작 본인이 직접 남긴 기록은 연설문이나 인터뷰, 약간의 기고문을 제외하면 지금까지 거의 없었다. 평생 자서전만 5권을 남긴 사민당의 전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에 비교할 것은 아니지만, 한 시대를 이끌었던 정치지도자를 제삼자의 관찰에 의존해 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었다. 16년이란 오랜 기간을 독일과 유럽, 세계정치의 중심적 행위자였던 정치가 메르켈의 생생한 경험과 그 시대를 이끌었던 지도자의 내면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이 많은 이로 하여금 이 책을 주목하게 한 이유일 것이다. 나 역시 그런 기대와 궁금증을 갖고 메르켈의 회고록을 기다렸다. 


책을 다 읽은 독자로서 말한다면, 이 책은 "검은 빵(Schwarzbrot)"2)같은 책이다. 드라마보다는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메르켈은 대단히 갈등적인 사안이나 중요한 협상, 국가 정상들 간의 밀고 당기기 같은 내밀한 싸움을 다룰 때조차 주관적인 감상이나 평가를 절제하고 균형감을 유지하며 사실과 맥락 중심으로 꼼꼼하면서도 담담하게 회고록을 기술했다. 아마 약간의 예외가 있다면, 그나마 개인사를 중심으로 기술된 정치인 메르켈 이전의 동독에서의 35년을 담은 회고록의 전반부일 것이다.3) 무엇인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에피소드나 흥미진진한 정치의 막전막후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아마 이 책은 그 기대에 부합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만, 회고록이 드라마처럼 쓰일 수 없었던 것은 리더 한 명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체제와 달리 시민사회와 정치사회, 정당들 사이, 그리고 정당 내부 이견들 사이에서 여러단계에 걸쳐 조율되고 합의된 결정으로 운영되는 독일정치의 면모가 투영된 것으로 보고 싶다. 개인 메르켈이 함부로 다룰 수 없는 실체로서의 정치와 정치가들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아무리 “검은 빵” 같은 책이라도 회고라는 인간의 행위는 삶의 뼛속까지 내려가야 되는 일이기 때문에 그레텔의 빵가루처럼 내면의 흔적은 남기 마련이다. 이런 단서들의 찾아 인간 메르켈을 재구성해보는 상상까지 이 책이 막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여러모로 이 책은 곱씹어 읽어볼 만하다.


계엄과 탄핵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 사회는 마치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불타는 삼계화택(三界火宅)4) 같다. 이때 다른 나라 정치지도자의 회고록을 읽는다는 것이 한가하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자신만이 정의를 대표한다는 독선으로 인해 정치가 타협의 가능성을 잃고 정치 밖의 냉혹한 수단에 의존하게 될 때, 공동체에 대한 시민의 신뢰는 깨지고 분열은 가속화된다. 혼란한 시대일수록 정치가 마땅히 추구할 목적과 왜 정치가 필요한지에 대한 공적 확신은 무뎌지고, 눈앞의 권력 이익을 좇다 보면 공동체의 분열은 더 커진다. 이런 악순환을 막기 위해서 잠시 멈추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정치의 목적과 정당성이란 근본적 물음을 성찰적으로 되돌아보는 시간도 필요하다. 



과거의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나라마다 정치와 정치가의 외양은 다를지라도, 정치의 본질을 관통하는 규범과 정신까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것이 역사로부터 배우고, 당대의 민주정치를 이끌어가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배워야 하는 이유라고 생각한다. 


한편, 책을 읽기 시작한 순간부터 거기에는 메르켈의 삶과 독일 정치만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경험해 온 현실 정치, 그리고 한국 민주주의의 아픈 현실이 텍스트 아래에서 시나브로 차 올라왔다. 독서란 텍스트를 따라가는 것이라기보다 어느 정도는 스스로를, 나의 공동체를, 우리 정치와 민주주의를 다시 생각해보는 과정이다. 이 글은 그런 고민의 결과이다. 애초 짧은 독후감 정도로 생각했던 글이 길어졌다.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을 위해 메르켈이라는 한 민주적 정치지도자에 대한 주석을 단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1. 정치를 하기 위해 태어나지 않은 소녀. 

 

앙겔라 도로테아 메르켈(Angela Dorothea Merkel)5), 우리가 흔히 메르켈이라고 부르는 이 기민당(CDU) 출신의 전 독일 총리의 정치 이력은 여러모로 흥미롭다. 무엇보다 눈에 띄는 것은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통독 이후 선출된 최초의 동독 배경 총리’, ‘독일의 최연소 총리’ 등 그녀를 수식하는 말속에 등장하는 “최초”라는 타이틀이다. 여성이자 동독 출신, 거기에 물리학 박사이자 이공계 연구원 출신이라는 경력을 가진 그녀의 프로필은 서독을 중심으로 통합된 정치의 세계에서라면 주류가 되기 위한 자격조건과 한참 동떨어져 보인다. 그러나 그녀는 전후 독일에서 헬무트 콜(Helmut Kohl)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재임기간을 가진 총리(총 5,860일, 헬무트 콜 총리보다는 열흘이 빠진다)이다. 메르켈 재임 기간 미국은 4명의 대통령이 지나갔고, 프랑스 역시 대통령 4명, 영국은 5명의 총리를 거쳤다. 현대 유럽과 독일을 정초한 메르켈의 시대(The Merkel Years)라는 표현도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이런 상징적인 사실들은 그녀가 굉장한 권력의지의 소유자로서 거침없는 승부사이거나 정치투쟁에 능한 시쳇말로 독한 사람이 아닐까하는 선입관을 갖게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자서전을 통해 말하고 있는 바, 그리고 그가 재임기간 보여주었던 정치적 실천을 생각하면 이런 인상비평은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자서전에는 그녀의 성장과정을 담은 몇장의 사진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어디를 만져도 베일 곳이 없어 보이는 둥글둥글한 외모와 호기심이 담긴 눈망울은 정치가라고 하면 쉽게 떠올릴 법한 투쟁심이나 뾰족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상대방의 무장을 해제시키는 다정함, 그리고 웃음을 머금은 눈매에서 느껴지는 순진한 듯한 유머러스함은 탁월함보다는 평범함에 훨씬 더 가깝게 느껴지게 한다. “나는 총리로 태어나지 않았다”(Ich wurde nicht als Kanzlerin geboren)라는 자서전의 첫 장 제목은 나의 직관에 대한 메르켈의 대답처럼 느껴졌다.


메르켈은 동서독 분단 이후 약 5년이 지난 1954년 7월 17일 헤를린트와 호르스트 카스너(Herlind & Horst Kasner)의 1남2녀 중 맏이로 태어났다.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메르켈의 출생지는 동독이 아니라 서독의 함부르크였다. 개신교 목사였던 아버지는 패전으로 나치의 지배가 끝나자 기독교 신앙에서 비롯된 평화윤리에 대한 신념에 따라 메르컬이 생후 약 6주가 되었을 때 소련이 점령 중이던 동독으로 이주했다. 자신과 같은 종교인이 더 필요한 곳은 서독이 아니라 동독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같은 분단 국가인 우리로서는 이런 이주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전후 독일은 1949년부터 두 개의 국가가 존재했다. 그러나 1961년 베를린 장벽이 건설되고 국경이 폐쇄되기 이전에는 동서독 주민들은 비록 깐깐한 검색을 거쳐야 했지만 허가받은 여행이나 친지 방문, 이주도 가능했다. 매우 엄격해지긴 했지만 1961년 국경 폐쇄 이후에도 동서독 주민 간 교류는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엄격한 통제에도 불구하고 통일 전까지 서독으로 여행한 동독인은 약 500만명에 달했다. 이런 교류는 동독 시민들에게 서독, 나아가 서구 민주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메르켈 가족의 동독 이주가 쉬운 결정이었던 것은 아니다. 메르켈의 부모들이 공유했던 단단한 신념윤리와 특별한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쉽게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특정한 윤리와 소명의식을 가진 ‘목적있는 삶’에 대한 지향은 종교와는 다른 방법으로 메르켈의 내면에 깊이 자리잡았음은 분명하다. 6)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다르다고 한다. 사람들은 훗날 정치적 거인으로 성장한 인물은 어렸을 때부터 그 탁월함을 나타내는 징표들을 가진다고 믿는다.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남다른 지적 호기심과 재능으로 이미 10대에 웬만한 서양 고전을 독파했던 빌리 브란트나 전쟁으로 아버지를 잃은 유복자로 태어나 불우한 10대를 보내면서도 굴하지 않는 의지로 변호사가 되고 사민당의 미래세대로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냈던 게하르트 슈뢰더 전 사민당 총리는 그런 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메르켈의 회고록에서는, 그녀의 겸손함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떡잎의 면모는 거의 찾을 수 없었다. 동독 체제에서 개신교 가족으로 산다는 것은 어느 정도의 제약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었음은 분명하고, 메르켈 스스로도 그에 대한 불편한 자의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부친은 동독시설 ‘붉은 카스너’라고 불릴 만큼 좌파적이었고, 공산화가 되었다고 해도 개신교 국가 프로이센의 전통이 여전히 강력했던 나라에서 종교활동에 대한 직접적 억압이 있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공산당국의 종교에 대한 처분은 서로의 역린을 건들지 않는 선에서 데면데면했다. 성장하면서 메르켈에게 동독 체제의 불합리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성장하거나 슈타지(Stasi)7)와 같은 동독 전체주의 정부의 은밀한 손길에 위축되는 일도 있었다. 또 진학이나 사회적 지위를 형성하기 위한 교육과정에서 목사의 딸에 대한 보이지 않는 제약 등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메르켈에게 이런 체제적인 문제를 대처하는 데 미래의 기민당 총리가 될 사람으로서의 징표가 될만한 도드라진 면모는 없었다. 무언가 있었다해도 독자인 내가 보기에는 대체로 평범한 사람의 범위를 벗어나진 않았다. 오히려 메르켈의 성장기는 평온한 가족, 공동체에서의 원만한 삶이 만들어내는 정서적 안정감, 또 거기서 길러졌을 것이 분명한 다정함과 낙관이 더 도드라져 보였다. 성장기 그녀의 모습에서 유럽정치를 이끈 보수정치의 거목을 대하는 경계심을 느낄 수 없었다. 오히려 장삼이사의 동류의식이라고 할 수 있는 동질감이 그녀와 나 사이의 경계를 허물었다.



2. 왜 정치를?


메르켈의 수업시대


막스 베버는 정치 리더십의 유형을 제도적 법적 권위와 전통적 권위, 그리고 카리스마적 권위로 유형화했다. 독일정치, 그것도 기민-기사연합이라는 보수적 정당의 아웃사이더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출신 배경을 갖는 메르켈에게 전통적 유형의 권위를 형성할 수 있는 자원은 취약했고, 같은 이유로 법적 권위에 접근할 수 있는 기회의 공간도 크지 않았다. 그렇다고 메르켈에게 결단주의에 이끌리는 카리스마적 면모가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최소한 자서전에 묘사된 그의 면모와 성정은 결단주의적인 것과 거리가 멀게 느껴졌다. 메르켈 스스로도 정치인이 된다는 것은 자신의 상상력 밖에 있었다고 회고했다. 평범함, 그리고 기질적으로 정치적인 것과 거리가 있었던 그의 ‘수업시대’(Lehrjahre)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리고 왜 정치가가 되었고 무엇이 통치자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감당하도록 했는가는 자서전을 읽으며 계속 따라다닌 질문이었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독일은 물론이고 유럽, 나아가 전 세계적으로 중대한 변화의 상징이자 기폭제였다. 35세의 메르켈은 그 역사의 현장(베를린)에 있었다. 이 순간은 메르켈이라는 한 인물에 있어서 삶의 모든 것이 재정렬되는 중대한 계기였다. 메르켈이 그때 베를린에 있었다는 것은 단지 우연만은 아니었다. 메르켈은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했고, 계속 더 공부하기 위해 일메나우 공대에서 박사과정을 밟고자했다. 그러나 그의 개신교학생회 활동과 종교적 배경은 걸림돌이 됐다. 동독체제는 그녀에게 어느 선 이상의 길은 허용하지 않았다. 이런 일은 동독에서 살면서 성장의 고비마다 부딪혔던 장벽이었지만, 그녀는 늘 그랬듯 좌절하지 않았다. 메르켈은 차선의 길을 부지런히 찾았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베를린(베를린 과학 아케데미)으로 왔다. 


그녀는 마치 “회전 경기에 나선 스키 선수처럼 슬로프를 유연하게 우회”하며 스스로를 성장시키고 길을 찾았다. 메르켈은 자신의 성장 과정을 다음과 같이 술회한다. “(나는) 불리한 여건에서도 최선을 찾으려 했고, 호기심과 진취성을 잃지 않으려 했으며, 누구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으려 했고, 내 능력의 한계까지 스스로를 밀어붙이려 했다.” 지극히 현실적이고 명민했던 메르켈은 자신이 살아가야 할 체제의 조건을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했고, 또 이것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따라서 동독체제가 그녀 앞에 걸어 놓은 숫한 장애물들은 그녀에게 좌절의 이유가 되지 않았다. 유연하게 넘어서야 하는 하나의 관문이었을 뿐이다. 8) 


정치의 조건들


베를린 장벽의 붕괴라는 격변은 그간 그녀의 삶에서 움직일 수 없는 조건들의 전복을 의미했다. 메르켈의 삶도 이제 송두리째 급변했다. 그녀에게 장애물이었던 조건들은 한 순간에 기회의 문이 되었고, 난관 속에서 충실하게 다져졌던 기질적 적극성과 유연함이 그 문을 여는 열쇠였다. 


나는 메르켈이 정치인으로 변모하고 성장하는 데 대체로 세가지 배경이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배경들은 동독체제에서 그녀의 삶을 방해하는 결정적 한계였다. 그러나 동독 혁명 이후 이것은 메르켈에게 보내진 정치의 초대장으로 바뀐다. 


첫째는 그녀가 이공계 출신의 지식인 그룹의 일원이었다는 것이다. 

직업적 특성상 비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이공계 출신은 당시 동독 지배체제의 운영에 직접 개입할 여지가 크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과정에서 그녀가 동독 기득권 체제 외부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직업적 특징은 오히려 정치 참여의 좋은 조건이 된다. 


이공계 지식인은 동독 체제의 책임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집단이었고 그러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비판적 일관성을 비교적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격변은 흠결 없는 정치자원을 요구했고, 이공계 지식인은 여기에 가장 잘 부합했다. 동독 붕괴과정에서 새롭게 형성된 정치그룹과 시민운동의 주도적인 인사들 상당수는 이공계 출신 지식인이었다. 이런 특징을 잘 보여주는 것이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에 창당된 동독 사민당이다. 동독 사민당은 서독 사민당의 자매정당이 아니다. 동독 사민당은 이름과 달리 전전 독일 동부지역에서 융성했던 사민주의의 전통에 연원을 두고 있지 않다. 동독 사민당은 동독 독재체제에 대한 저항적 정서를 공유하는 지식인들의 대안적 공동체에서 출발했고, 주도그룹은 자연과학자, 기술자, 목사 등이었다. 이들을 가로지르는 공통점은 이공계 출신이라는 것이었다.9) 

  

이공계 지식인들이 격변에 능동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이들이 국제 정보와 정세에 밝아 균형적 판단이 가능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통제가 엄격했던 정치, 사회분야와 달리, 이공계는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다양한 정보를 손에 넣을 수 있었고, 학회․세미나 등을 매개로 서방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지식인 집단과의 교류 역시 가능했다. 물론 메르켈의 회고록은 이런 과정도 쉬운 것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마치 007작전을 떠올리듯 스릴 넘치는 과정을 거쳐 정보와 흐름을 공유했지만, 동독 사회의 다른 부분보다 월등하게 정보 접근에 이점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둘째는 그녀의 종교적 배경이다. 

전체주의적 동독 체제에서도 교회만큼은 시민들의 자율적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물론, 교회가 동독에서 일정한 자율성을 누리는 과정이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동독 정권은 1949년 분단 직후부터 교회에 대한 일체의 지원이나 보조를 폐지했다. 또 다양한 방법으로 동독에서 종교의 영향력을 축소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유형, 무형의 압박과 탄압 속에서 1950년 전체 동독 국민의 81.6%에 달하던 교인 비중은 1970년에는 40% 수준으로 절반 넘게 감소했다. 10)그럼에도 동독 교회는 때로는 정권과 타협적인 방법으로, 때로는 다소 갈등적인 방법으로 종교공동체의 독립성을 지켰고 이를 통해 교회는 동독 국가와 분리된 자율적 영역으로 전국적으로 체계화된 독립적 거버넌스를 형성할 수 있었다. 국가보안국(Stasi)과 같은 기관의 탄압과 감시 속에서도 교회는 분단 이후 줄곧 체제 비판적인 사람들의 숨쉴 공간이었다. 또 동독 붕괴 과정에서는 대안적 지식 공동체와 시민 정치운동의 강력한 거점이 되었다. 동독 혁명 전후에 창당된 동독 사민당과 동맹90 같은 다양한 정치단체들은 한결같이 교회의 보호와 기반하에서 출범할 수 있었다.11)


메르켈은 신망받는 목사의 딸이었고, 성장기 그녀의 삶 역시 종교적 기반 위에 있었다. 교회가 동독 사회에서 가진 위상과 역할을 볼 때, 메르켈의 종교적 배경과 뿌리는 동독 붕괴 과정의 개방된 정치공간에 접근하는 데 매우 좋은 조건이었다. 메르켈이 정치를 처음 시작한 정치단체인 ‘민주주의 각성’(Demokratischer Aufbruch)12) 역시 정치적으로 활동적인 교회 그룹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셋째는 서독 태생, 동독 출신이라는 존재의 양면성이다. 

메르켈은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다. 함부르크에는 메르켈의 할머니를 비롯해 친척들이 살고 있었고, 동독 정착 후에도 서독의 친척들과 줄곧 교류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전에는 당국의 허가를 받아 서독 전역을 여행하기도 했다. 메르켈은 동독 체제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정체성 안에는 억압된 동독 주민이라는 현실과 자유로운 서독을 향한 잠재된 귀소의식이 함께 존재했던 것 같다. 메르켈은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이전까지 동서독의 시민권이 완전히 구분되어 영원히 동독 주민으로 고착되는 상황에 대해 언제나 불안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13)


“장벽이 무너지고 독일이 통일되지 않았다면 내 삶이 어떻게 되었을지 추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건 아무도 모른다. 다만 지금도 분명히 기억나는 것이 있다. 동독 주민은 최소한 이론적으로는 출국 신청서만 쓰면 동독을 떠나 서독 시민이 될 수 있었는데, 이런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내게는 어떤 식으로든 안심이 되었다는 점이다. 최악의 상황에서 언제든 빠져나갈 수 있는 일종의 비상구 같은 것이었다.” <자유>, p. 113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동독과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서독 사이에서 메르켈은 무엇보다 자유에 대한 예민한 감각을 키워나갔을 것이다. 그렇다고 그녀가 동독 체제를 정면에서 거부하거나, 이탈하는 것을 선택한 것도 아니다. 메르켈은 동서독 어디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단된 독일 체제의 경계인이었고 이로 인해 개인적으론 많은 내적 갈등과 불안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양면성은 독일 사회(동-서독 모두)를 일정한 거리감을 가지고 균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시야와 능력을 키워주었다. 그녀는 동독 체제를 능숙하게 견뎠지만, 동시에 그녀의 불안정성에 대한 자기 인식은 인정할 수 없는 현실에 안주하기보다 분명한 목표를 향해 삶의 변화를 꾸준하게 밀고 나가는 집요함을 낳았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정치인 메르켈을 설명하고 이해하는 데 중요한 키워드라고 생각한다.



1) Freiheit: Erinnerungen 1954 – 2021󰡕이란 제목으로 2024년 11월 26일 출간되었다. 저자는 앙겔라 메르켈과 그녀의 평생의 참모 베아테 바우만(Beate Baumann)의 공동 저작이며 화자는 메르켈이다. 전 세계 약 20여 나라에서 동시에 출간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박종대 선생님의 번역으로 한길사에서 나왔다. 

2) 검은빵(Schwarzbrot)은 독일에서 주식으로 먹는 호밀로 만든 짙은 색의 전통적인 독일 빵을 말한다. 은유적으로는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을 의미한다.

3) 회고록의 1부, 2부 부분에 해당한다. 현재 기준으로 메르켈 삶의 절반인 35년간에 해당하는 이 부분은 많은 독일 기자들과 작가들에 의해 추적되었으나, 기록이 적을 뿐만 아니라, 개인 생활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메르켈의 특징 때문에 독일에서도 단편적인 내용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4) 법화경에 나오는 말. 중생들이 사는 세계(三界)가 불에 타고 있는 집과 같다는 뜻. 《법보신문》(https://www.beopbo.com)

5) 결혼 전 메르켈의 이름은 앙겔라 도로테아 카스너 Angela Dorothea Kasner 이다.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만난 첫 번째 남편 울리히 메르켈 Ulrich Merkel 과 1977년 결혼하면서 성이 Merkel로 바뀌었다. 그 뒤 메르켈은 첫 남편과 이혼하고 재혼도 했지만 계속 메르켈이라는 이름을 고수했다. 

6) 분단이후 독서독간 교류의 경험과 베를린 장벽 건설 이후 변화에 대해서는, Angela Merkel · Beatte Baumann, 박종대 역, <자유>(한길사, 2024년) pp 57~60, pp. 112~113.

7) 슈타지(Stasi)는 동독의 국가보안성(Ministerium für Staatssicherheit)의 약자. MfS라고도 부른다. 1950년에 설립된 슈타지는 구동독의 비밀경찰이자 국내외 정보기관으로, 집행 권한을 지니고 있었다. 슈타지는 동독사회주의통일당(SED)의 지시에 따라 광범위한 협력자 네트워크를 통해 사실상 전 국민에 대한 전면적 감시를 수행했다. 동독의 슈타지는 전체주의 독재정권의 테러도구로 역할을 하는 비밀경찰조직이었다.

8) <자유>, p. 145. 

9) 현재의 작센주를 중심으로 한 독일 동부지역은 전전 ‘붉은 왕국 작센’, ‘붉은 아성’으로 불릴 만큼, 사회민주주의 세력이 강력했던 지역이었다. 그러나 동독 건국 과정에서 이들 사회민주주의 세력은 체계적으로 제거 되었다. 그 과정이 얼마나 철저했는지에 대해 “동독 사회주의체제의 가장 큰 성공이 사회민주주의 노동운동에 대한 동독 독재의 승리”라고 헬가 그레빙은 평가한다. 헬가 그레빙, <독일노동운동사> pp. 301~303. 

10) Lexikon-Institut Bertelsmann(Hrg.), Tatsachen ueber Deutschland

11) 동독 사민당은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인 1989년 10월 7일 오라닌부르크(Oranienburg)지역의 슈반테(Schwante)라는 마을의 목사관에서 창당됐다. 당시 정당을 창당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어서 창당대회 중 슈타지의 침탈을 대비해 비밀 탈출로까지 마련해 두어야 했다고 한다. 동독 사민당은 동독에서는 집권당의 독점을 깨뜨리고자 하는 최초의 정당 창당이었다. <독일노동운동사> p.297.

12) 민주주의 각성(DA)은 1989년 10월 베를린 장벽 붕괴 직전 동독 혁명이 진행 중이던 시기에 창립된 동독(GDR)의 정치단체이다. 원래 여러 시민단체가 결성한 사회운동 연합체로 출발했고 당시 동독체제에 비판적 활동을 이끌었던 저명한 목사인 라이너 에펠만Rainer Eppelmann과 프리드리히 쇼레머Friedrich Schorlemmer, 변호사인 볼프강 슈누르Wolfgang Schnur 등 주로 교회 대표들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동독의 첫 번째 민주적 선거인 1990년 인민의회 선거를 앞두고 정당으로 변모한다. 메르켈은 이 단체의 대변인이었다. 민주주의 각성은 인민의회 선거에서 0.9%의 낮은 득표율을 기록했다. 이후 1990년 8월 구 동독 기민당과 합당했고 10월 1일 서독 기민당과 합당해 현 기민당의 일원이 된다. 여기서 동독 기민당은 서독 기민당의 자매정당이 아니라 원래 동독 사회주의통일당의 위성정당이다. 동독 혁명 과정에서 동독 사회주의통일당과의 관계를 끊고 독립된 정당조직이 된다.  

13) 당시 서독의 기본법 제116조(국적조항)는 동독주민도 독일국적을 가진다고 규정했고, 또 기본법 제11조는 모든 독일국민은 거주이전의 자유가 있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동독주민이 서독으로 넘어 올 경우 서독주민과 동등한 대우를 받도록 보장했다. 즉 동독 시민권을 인정하지 않고 동독 주민도 여전히 독일인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서독 내에서는 동독 시민권을 인정해야 한다는 요구도 적지 않았다.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Freiheit> p.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