⓾ 메르켈과 정당 ⓶

메르켈은 1998년 독일총선에서 슈레더의 사민당에게 패배에 야당으로 물러난 기민당의 사무총장이 된다. 당시 당대표는 볼프강 쇼이블레였다. 쇼이블레는 메르켈이 가진 상징성, 즉 동독 출신,1) 여성이라는 배경, 청소년과 환경 영역을 담당했던 장관으로서의 경력 등을 높게 사, 그녀를 사무총장에 낙점했다. 그러나 이 상징성은 곧 보수정당인 기민당내에서 메르켈의 취약한 정치적 입지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무총장이라는 중요한 당직에 메르켈 선임한 것은 당시에 다소 모험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메르켈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적인 당 주류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당 사무총장의 직무를 중요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기민당을 새롭게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번번이 당내 보수적 주류와 갈등을 불러왔다.
메르켈은 당시 기민당이 당연시하던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라는 전통적 핵가족 관념을 허물고, 한부모 가정, 맞벌이 부부, 동거 부부, 비혼 부모 등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개념을 도입했다. 여기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지원이라는 여성의 기본권 신장과 함께 기민당으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동성 공동체의 인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 메르켈은 당시 기민당의 지지아래 전개된 해센주의 이중국적 반대운동2)에 대해 당 주류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당내 주류를 불편하게 했다. 갈등의 화룡정점은 뭐니뭐니해도 헬무트 콜의 부패 스켄들을 둘러싸고 쇼이블레를 포함한 당 주류와의 충돌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갈등이 더 적대적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더 나은 방향에서 통합되어질지는 전적으로 정당지도자의 정치적 책임성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메르켈은 이런 갈등을 현실로 인정하고, 오히려 갈등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당을 끌어올리고자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항상 의견이 같지 않지만 항상 같은 길을 간다”는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3)
독일은 정당 다원주의의 모범같은 나라이고, 각자의 이념, 비전에 따라 광범위하게 시민을 조직한 대중정당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연정을 통해 정부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독일의 정당들은 사회를 부분으로 대표하는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이 이념으로 뭉쳐진 일괴암(monolith) 같은 조직은 아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정당 안에서도 때로는 아주 사소하거나 때로는 꽤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당내의 견해 차이를 승인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한 정당의 모양 뿐만 아니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양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적전분열(敵前分裂)이라는 이유로 당내 이견을 억압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정당들의 체제라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에서 허용될 수 있는 다원주의 폭 역시 협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정당내부의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가 존중되고, 타협과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에서 정당의 단결이 이루어진다면, 그 나라의 다원주의는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메르켈이 의도했건 아니건, 기존 기민당 주류에 대한 메르켈의 이견은 궁극적으로 기민당의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것은 메르켈의 기민당 개혁의 조건이 되었다. 4)
따라서 “항상 의견이 같지 않지만 항상 같은 길을 간다”란 슬로건은 민주적 정당의 실체적 정의이기도 하지만, 정당내부 다원주의의 가치를 보여주는 윤리적 언어이기도 하다. 메르켈은 사무총장일 때는 당내 주류에 맞서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요구했고, 당대표와 총리가 되어서는 본인 스스로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메르켈은 사무총장 시절 자신과 대립했던 쇼이블레를 내각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내무장관과 재무장관에 입각시켜 16년간 함께 정부를 운영했다. 메르켈 내각은 누군가를 위해 코드를 맞춘 획일적 내각이 아니라 당밖, 당내의 이견들로 구성된 라이벌들의 내각이기도 했다. 정치의 목적이 무수히 다양한 의견, 시각, 이해관계를 결국 하나의 결정으로 통합하는 데 있다면, 메르켈의 정부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메르켈은 동독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Mecklenburg-Vorpommern) 주를 지역적 기반으로 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주는 동독주들 가운데 가장 GDP가 낮고 독일 전체를 보았을 때는 자알란트(Saarland)와 한자도시인 브레멘(Bremen)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2)"헤센주의 이중국적 반대운동"이란 일반적으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독일에서 논쟁이 되었던 이중국적 허용 문제와 관련해, 특히 보수 성향의 헤센주 정부(당시 총리: 롤란트 코흐, CDU)가 주도한 이중국적 확대 반대 캠페인이다. 이 운동은 독일 사회에서 외국인의 통합, 시민권, 정체성 문제를 둘러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3)<자유>, pp. 283-291.
4)정당내부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는 하나의 정당 내부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나 입장, 가치관, 이념적 흐름 등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당 내 의견 다양성이나 다양한 정치적 흐름의 내포를 뜻한다. 메르켈은 2007년 기민당 하노버 전당대회(21.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에서 "Union(기민-기사연합)은 1945년 이래로 다양한 흐름들의 집합체입니다: 기독교-사회적, 보수적, 그리고 리버럴이 그것입니다."Die Union ist seit 1945 ein Sammelbecken verschiedener Strömungen: christlich-sozial, konservativ und liberal“이라며 기민당의 정당내부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원칙을 다시한번 천명했다. CDU, Protokoll.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 3.–4. Dezember 2007, Hannover
메르켈은 1998년 독일총선에서 슈레더의 사민당에게 패배에 야당으로 물러난 기민당의 사무총장이 된다. 당시 당대표는 볼프강 쇼이블레였다. 쇼이블레는 메르켈이 가진 상징성, 즉 동독 출신,1) 여성이라는 배경, 청소년과 환경 영역을 담당했던 장관으로서의 경력 등을 높게 사, 그녀를 사무총장에 낙점했다. 그러나 이 상징성은 곧 보수정당인 기민당내에서 메르켈의 취약한 정치적 입지을 상징하기도 한다. 사무총장이라는 중요한 당직에 메르켈 선임한 것은 당시에 다소 모험적인 결정으로 받아들여졌다. ‘메르켈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라는 회의적인 당 주류의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메르켈은 그들의 생각보다 훨씬 더 당 사무총장의 직무를 중요하고 무겁게 받아들였다. 그녀는 기민당을 새롭게 만들고자 했다. 이것은 번번이 당내 보수적 주류와 갈등을 불러왔다.
메르켈은 당시 기민당이 당연시하던 결혼을 통한 가족 구성이라는 전통적 핵가족 관념을 허물고, 한부모 가정, 맞벌이 부부, 동거 부부, 비혼 부모 등의 다양한 형태의 가족개념을 도입했다. 여기에는 여성의 경제활동 확대 지원이라는 여성의 기본권 신장과 함께 기민당으로서는 혁명적이라 할 수 있는 동성 공동체의 인정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또 메르켈은 당시 기민당의 지지아래 전개된 해센주의 이중국적 반대운동2)에 대해 당 주류의 입장을 지지하지 않았다. 이것 역시 당내 주류를 불편하게 했다. 갈등의 화룡정점은 뭐니뭐니해도 헬무트 콜의 부패 스켄들을 둘러싸고 쇼이블레를 포함한 당 주류와의 충돌일 것이다. 이런 종류의 갈등이 더 적대적으로 이어질지 아니면 더 나은 방향에서 통합되어질지는 전적으로 정당지도자의 정치적 책임성에 달려있는 문제이다. 메르켈은 이런 갈등을 현실로 인정하고, 오히려 갈등을 통해 더 나은 방향으로 당을 끌어올리고자했다. 이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 바로 “항상 의견이 같지 않지만 항상 같은 길을 간다”는 슬로건이라 할 수 있다. 3)
독일은 정당 다원주의의 모범같은 나라이고, 각자의 이념, 비전에 따라 광범위하게 시민을 조직한 대중정당들이 서로 경쟁하거나 연정을 통해 정부 운영에 직접적으로 관여한다. 독일의 정당들은 사회를 부분으로 대표하는 뚜렷한 정체성을 갖고 있지만, 그렇다고 정당이 이념으로 뭉쳐진 일괴암(monolith) 같은 조직은 아니다. 같은 정체성을 가진 정당 안에서도 때로는 아주 사소하거나 때로는 꽤 심각한 견해 차이가 있을 수 있다. 당내의 견해 차이를 승인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한 정당의 모양 뿐만 아니라 그 나라 민주주의의 양상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면 적전분열(敵前分裂)이라는 이유로 당내 이견을 억압하는 것이 당연시되는 정당들의 체제라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에서 허용될 수 있는 다원주의 폭 역시 협소할 수밖에 없다. 반면, ‘정당내부의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가 존중되고, 타협과 공통분모를 찾는 과정에서 정당의 단결이 이루어진다면, 그 나라의 다원주의는 더 확대될 가능성이 높다. 메르켈이 의도했건 아니건, 기존 기민당 주류에 대한 메르켈의 이견은 궁극적으로 기민당의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확대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이것은 메르켈의 기민당 개혁의 조건이 되었다. 4)
따라서 “항상 의견이 같지 않지만 항상 같은 길을 간다”란 슬로건은 민주적 정당의 실체적 정의이기도 하지만, 정당내부 다원주의의 가치를 보여주는 윤리적 언어이기도 하다. 메르켈은 사무총장일 때는 당내 주류에 맞서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요구했고, 당대표와 총리가 되어서는 본인 스스로 정당내부 다원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메르켈은 사무총장 시절 자신과 대립했던 쇼이블레를 내각의 가장 중요한 자리인 내무장관과 재무장관에 입각시켜 16년간 함께 정부를 운영했다. 메르켈 내각은 누군가를 위해 코드를 맞춘 획일적 내각이 아니라 당밖, 당내의 이견들로 구성된 라이벌들의 내각이기도 했다. 정치의 목적이 무수히 다양한 의견, 시각, 이해관계를 결국 하나의 결정으로 통합하는 데 있다면, 메르켈의 정부는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1)메르켈은 동독 중에서도 가장 취약한 지역인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Mecklenburg-Vorpommern) 주를 지역적 기반으로 했다. 메클렌부르크포어폼메른 주는 동독주들 가운데 가장 GDP가 낮고 독일 전체를 보았을 때는 자알란트(Saarland)와 한자도시인 브레멘(Bremen)을 제외하고 가장 낮다.
2)"헤센주의 이중국적 반대운동"이란 일반적으로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에 독일에서 논쟁이 되었던 이중국적 허용 문제와 관련해, 특히 보수 성향의 헤센주 정부(당시 총리: 롤란트 코흐, CDU)가 주도한 이중국적 확대 반대 캠페인이다. 이 운동은 독일 사회에서 외국인의 통합, 시민권, 정체성 문제를 둘러싼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었다.
3)<자유>, pp. 283-291.
4)정당내부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는 하나의 정당 내부에 서로 다른 정치적 견해나 입장, 가치관, 이념적 흐름 등이 공존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정당 내 의견 다양성이나 다양한 정치적 흐름의 내포를 뜻한다. 메르켈은 2007년 기민당 하노버 전당대회(21.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에서 "Union(기민-기사연합)은 1945년 이래로 다양한 흐름들의 집합체입니다: 기독교-사회적, 보수적, 그리고 리버럴이 그것입니다."Die Union ist seit 1945 ein Sammelbecken verschiedener Strömungen: christlich-sozial, konservativ und liberal“이라며 기민당의 정당내부 다원주의(Binnenpluralismus)원칙을 다시한번 천명했다. CDU, Protokoll.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 3.–4. Dezember 2007, Hann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