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⓽ 메르켈과 정당 ⓵

2025-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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⓽ 메르켈과 정당 ⓵

메르켈이 정당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발전시켰을까? 회고록에는 그녀가 어떻게 정당에 대한 인식을 형성해 왔는지에 대해서는 정리되어 있지 않다. 다만, 문득 문득, 정당조직과 정당에 대한 생각을 드러내기도 한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뒤늦게 정당활동을 시작한 그녀이지만, 아주 일찍부터 정당에 대한 자신만의 관점을 갖고 있었다는 점이다. 두 개의 에피소드는 이것을 말해 준다. 


# “정당은 결정을 내릴 때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회고록에는 메르켈이 정치참여에 의지를 정한 것은 1989년 11월 즈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처음에는 정치참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정당을 떠올린 것은 그 뒤에 일이다. 메르켈이 처음 찾아간 정당(정치단체)은 동독 사민당이다. 직장 상사와 함께 동독 사민당의 행사에 참여했는데, 직장 상사는 그 자리에서 입당을 결정했지만, 메르켈은 마음을 정하지 못했다. 1)


“아직 모르겠어요. 긴가민가해요. 좀더 둘러보고 다른 정당도 알아보고 싶어요” 

<자유> p. 159


정당은 아직 메르켈에게 추상적인 것이었음이 분명하다. 메르켈은 ‘정당 물색’ 후에 이제 막 정당이 되고 있던 ‘민주주의 각성’에 입당한다. 이것이 1989년 12월의 일이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민주주의 각성의 대표였던 볼프강 슈누르(Wolfgang Schnur)2)는 눈에 띄는 신입당원인 메르켈을 당의 언론담당 대변인에 임명한다. 신입당원에게 당대변인? 좀 이상한 일이지만, 체제변혁기 동독에서 정치의 많은 일이 정상적인 수순으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터다.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메르켈이 대변인 일을 막 시작했을 무렵, 슈누르 대표는 한 언론인에게 당의 회의와 행사 등 당 대표의 모든 일정을 따라다닐 수 있도록 했다. 슈누르 대표가 왜 자신의 모든 활동을 기자에게 공개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당시 동독은 최초의 자유 총선거(1990년 3월 18일)를 앞두고 있었고 그는 “동독 총리만 될 수 있다면 못할 것이 없는” 야심가였다. 언론을 통해 자신을 더 투명하고 두드러지게 내보이고자 한 것이거나 자신이 민주화된 동독에 더 적합한 총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있다. 메르켈의 생각은 달랐다. 메르켈은 외부인인 기자에게 당의 중요한 논의와 당내 사정까지 공개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다. 메르켈은 그의 마음을 돌려야 한다고 마음먹고 슈누르 대표에게 독대을 신청한다. 3)


“정당은 결정을 내릴 때 자기만의 은밀한 공간이 필요합니다.” <자유> p. 171. 


슈누르에게는 당돌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를 초보당원 메르켈의 ‘이견’은 가볍게 무시되었다. 메르켈은 자신의 이견이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데 대해 상처를 받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 메르켈의 우려는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현실화됐다. 선거를 얼마 남겨두지 않았던 3월초, 볼프강 슈누르가 슈타지의 정보원4)이었다는 과거 행적이 투명하게 공개되었다. 그는 결국 정치를 떠나야 했고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5)


정당과 정치를 보는 초보당원 메르켈의 안목은 인상적이다. 메르켈이 당 대표 슈누르에게 ‘정당이 결정을 내릴 때 필요한 은밀한 공간’을 보호해야 한다고 말했을 때, 이 말은 언뜻 공개성과 투명성이라는 민주주의의 원칙에 반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정치의 모든 것이 공개적인 무대에서 이루어진다면, 민주주의는 유지되기 어렵다. 비공개․비공식적인 논의의 공간, 은유적으로 표현되는 ‘담배 연기 자욱한 밀실’(smoke-filled rooms) 또는 ‘뒷방에서의 정치’(Hinterzimmerpolitik)는 정치적 협상과 타협의 장이며, 실제로는 민주주의가 작동하기 위한 필수적 장치라고 말할 수 있다. 정당 내에서도 이는 마찬가지이다. 권위있는 결정을 준비하고 보장하기 위해서는 무대 뒤에서 조율과 협상이 가능한 공간이 필요하다. 메르켈이 지적한 것은 바로 이것이다. ‘뒷방에서의 정치’는 독일 민주주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조율된 행동과 합의된 결정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비공개가 보장된 공간은 반드시 필요하다. 독일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 행위인 ‘연정협상’ 역시 연정협약을 산출하기 위한 대표적인 밀실협상의 사례이다. 


# “항상 의견이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항상 같은 길을 간다”


좋은 정치언어는 늙지 않는다. 시간이 갈수록 더 풍부한 의미로 재생되며 공동체를 풍성하게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는 정치의 세계에서 흔하지는 않다. 특히 정치가 나빠지는 것의 징후는 보통 정치룰 둘러싼 언어가 나빠지는 것으로 나타난다. 메르켈이 기민당의 사무총장이었던 1999년 유럽의회 선거를 앞두고 기민당이 채택한 선거포스터의 슬로건은 그 흔치 않은 좋은 정치언어의 사례 중 하나이다. 그 포스터에는 앙겔라 메르켈과 볼프강 쇼이블레가 등을 맞대고 나란히 서 있다. 선거 포스터에는 다음과 같은 슬로건이 적혀 있다


“유럽은 우리와 같다: 항상 의견이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항상 같은 길을 간다!” 

(Europa ist wie wir: Nicht immer einer Meinung, aber immer ein gemainsamer Weg!)


선거 슬로건이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신선하게 느껴지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처음 게시되는 순간부터 이미 식상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1999년, 메르켈의 기민당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멋지게 사용할 수 있는 하나의 작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회고록은 이 멋진 슬로건이 사실은 심각한 당내 갈등의 산물이라고 말해준다. 


1)<자유>, pp. 158-159.

2) 볼프강 슈누르(Wolfgang Schnur 1944년~2016년) 당시 그는 동독의 인권 변호사이자 복음주의 교회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유태계 혼혈이었던 그는 전쟁고아로 태어나 전후 보호기관을 전전하며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냈다. 이후 입양되어 양부모 밑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다 고교시절 자신의 모친이 서독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서독으로 모친을 찾아 나섰다가 동독 당국에 의해 “공화국 탈출죄”로 처벌받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여러면에서 매우 뛰어났던 그는 입지전적인 과정을 거쳐 변호사가 되었다, 이후 반체제 인사의 변호를 도맡아가며 반체제 운동의 지도자 중 한명으로 부상했다. 그는 동독혁명 과정에서 서구의 정당을 모델로 한 ‘민주주의 각성’을 창당하고 그 지도자가 되었으며, 당시는 동독의 가장 유력한 총리 후보라는 데 이견이 없을 만큼 전도양양한 정치인이었다.  

3)<자유>, pp. 161-171. 

4)동독이 붕괴하기 직전(1989년 10월 31일), 슈타지 공식 요원의 수는 총 91,000명으로 주민180명당 1인의 공식요원이 배치되어 세계에서 인구수 대비 비밀요원의 수가 가장 많은 조직이었다. 당시 KGB(러시아의 국가보안위원회)요원 일인당 주민 수가 600명이었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면 동독공식 요원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잘 알 수 있다. 또 슈타지는 공식 요원과 별도로 비공식 요원을 포섭해 관리했는 데 이들의 규모는 최대 174,000명으로 주민 100명당 1인 꼴로 비공식 요원이 존재했다. 동독의 모든 영역에 걸쳐 전방위적인 요원 포섭과 정보수집, 감시체계가 작동했다고 볼 수 있다. Karsten Dümmel 외, 통일연구원 편역, 󰡔슈타지:그들의 정체는 무엇이었나?󰡕, Konrad Adenauer Stiftung, 2011.  

5)<자유>, pp. 171-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