⓼ 우리는 다룰 수 있다!(Wir schaffen das) - 유럽 난민 위기

2015년 9월 4일은 메르켈과 독일 그리고 유럽에게 역사적인 날로 평가받는다.
메르켈은 이 날 전쟁․기아 등 절박한 이유로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탈출해 헝거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선과 도로로 나온 난민들의 독일 국경 진입을 허용했다. 메르켈의 결정에 따라 그해 약 100만명의 난민이 독일에 직접 난민신청을 할 수 있었고 피난처를 얻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많은 수치였다. 메르켈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아직 유로존 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밀려드는 난민에 인도적 위기까지 겹쳐있던 유럽의 경계지역 국가들은 마침내 숨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또한 난민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유럽의 중심국가들에게는 난민위기 해소를 위해 더 인도적 방향으로 입장을 바로잡는 전기가 되었다. 독일의 결정은 유럽공동체의 연대감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메르켈은 자유주의 세계에서 영향력뿐만 아니라 윤리성까지 겸비한 지도자로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들어오던 해로와 육로에서 발생한 연이은 비극 소식1)에 큰 충격을 받은 독일 시민과 유럽인들에게 메르켈의 결정은 큰 환영을 받았다. 메르켈의 결정으로 독일로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게 되자 독일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차역으로 달려가 음식과 옷을 나누고, 쉼터를 제공했다. 이것으로 메르켈은 독일 시민들에게 휴머니즘적 자부심을 되살려 주었고 언론들은 독일 시민과 정치 지도자가 이처럼 긴밀하게 일치됐던 적은 없다며 높게 평가했다.
1) 회고록에 언급된 대표적 사례로는 2013년 10월 지중해에서 발생한 선박 전복으로 수백명이 사망한 사고, 2015년 4월 18일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던 보트 전복 사고로 수백명이 사망한 사고, 2015년 8월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의 컨테이너 안에서 발생한 난민 71명의 질식 사망 사고 등이다. 자유 pp. 523-531.
난민 문제는 2015년에 막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왔다. 멀게는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등으로 급격히 증가해 왔다. 당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가 거듭 밀려오고 있는 와중이었다. 메르켈은 헝거리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경계로 밀려드는 난민의 행렬을 보면서 1989년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으로 밀려들던 동독의 난민을 떠올렸다고 한다. 정치 이전에 인간의 문제였다. 난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매르켈이 했던 고민의 흔적은 회고록 곳곳에 남아 있다. 메르켈은 스스로 되새기고 다짐했다. 독일 기본법 1조2)의 의미, 기독교라는 이름을 당명으로 쓰고 있는 정당에서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정치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3)
2) 독일 기본법 1조: (1)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2) 그러므로 독일 국민은 이 불가침·불가양의 인권을 세계의 모든 인류공동체, 평화 및 정의의 기초로 인정한다. (3) 다음에 열거하는 기본권은 직접적인 효력을 갖는 권리로서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을 구속한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국회도서관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국회도서관, 2018. p. 3.
3) 난민 수용 결정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자유 pp. 523-547. 참조.
“기독교 민주당(CDU)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 C는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을 인간 존엄의 원칙에 맞게 대우하라는 의무이자 소명과 다름없었다” 자유 p. 543.
메르켈은 경제위기 등 다른 어떤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의 가치를 함께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유럽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4) 난민의 독일입국을 허용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파장과 우려, 발생할 여러 가지 문제들도 감안해야 했다. 이 결정으로 메르켈은 자신이 많은 책임과 논란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독일에는 난민문제에 대해 자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의 말에 용기를 얻는 사람이 충분히 많으리라고 믿었다.
4) 자유 pp. 523-529.
이런 의지와 믿음의 표현이 “우리는 다룰 수 있다”(Wir schaffen das)는 말이다.5) 원래 이 말은 발언 당사자인 메르켈도, 또 이를 전하는 언론도 처음에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민들의 독일 입국을 결정한 이후 쏟아진 수많은 문제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메르켈과 독일의 의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이제는 역사책에 남는 아포리즘이 되었다.6)
5)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단언컨대 독일은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임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왔고 우리는 이것 역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룰 것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할 것입니다”“Deutschland ist ein starkes Land. Das Motiv, mit dem wir an diese Dinge herangehen, muss sein: Wir haben so vieles geschafft – wir schaffen das! Wir schaffen das, und dort, wo uns etwas im Wege steht, muss es überwunden werden, muss daran gearbeitet werden”.
6)메르켈은 2015년 8월 31일, 독일 총리의 정례 여름기자회견에서 난민문제의 심각성을 말하며 이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당시 기자회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의 유로존 퇴출(‘그렉시트’)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2015년 중반까지는 유로존 위기가 가장 큰 이슈였기 때문이다.
환희와 열정의 끝에는 차가운 청구서가 남는다. 메르켈은 자신이 비정부기구나 시민단체의 대표가 아니라 정치가이자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난민 수용 결정은 인도주의적 비상상황에서 내려진 긴급한 결정이었지만 독일은 정당과 정치, 시민사회가 협력하고 역량을 끌어모아 조율된 행동과 합의된 결정을 통해 운영되는 나라이다. 따라서 결정 이후 메르켈이 감담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결정에 대한 컨센서스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기사당의 반발이 컸다. 기사당 대표 호르스트 제호퍼는 난민 유입이 독일의 사회적 안전를 파괴한다고 비판하며 “메르켈의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갈등의 골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고, 급기야 기사당은 난민 정책을 불법의 지배(Herrschaft des Unrechts)7)라는 강한 언사를 동원해 비판하고 난민정책의 노선을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두 자매 정당 사이의 갈등이 이런 정도로 공식화되어 표출되는 것은 1980년대 이후 전례없는 일이었다. 8)
7) 불법 통치(Herrschaft des Unrechts)라는 표현은 독일에서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비민주적 독재 정권이나 억압적인 체제, 예를 들어 동독(구 동독, GDR) 같은 국가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불법국가(Unrechtsstaat)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8 )기사당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자유, p. 541, pp. 564-572. 참조.
오래전 볼프강 쇼이블레는 메르켈에게 “기민당과 기사당 사이에서만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 항상 기민당 내에서 파열음이 함께 발생한다”고 말해주었다. 오랜 정당활동에서 녹아나온 교훈이었다.9) 기사당 이전에 기민당내에서 이미 메르켈의 난민정책에 대해 비판과 함께 회의론이 퍼지고 있었다. 난민 문제처럼 예민하고 갈등적인 문제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당(기민당)의 단단한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사당과의 전례없는 갈등은 물론이고, 언론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견을 설득하고 조정하는 일도 어려웠다. 메르켈은 회의론의 핵심과 정면 승부를 선택한다. 이것은 단지 권력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자유와 다원성 아래 통합된 공동체로서 독일은 물론 유로존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르켈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10)
9) 자유, p. 307.
10) 메르켈의 난민 수용 결정에 대해 당시 독일 언론과 비평가들은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했다.(슈피겔) 그러나 메르켈은 통치자로서 자신의 해야 할 일도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이 감당해야할 책임도 잘 이해했다. 메르켈은 종교적 윤리가 아니라 정치가의 윤리로서 이문제를 다뤘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치는 윤리로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윤리적인 힘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2015년 12월 14일 칼스루에(Karlsruhe)에서 개최된 기민당 전당대회(Parteitag)였다. 메르켈은 당내에서 확산되는 난민정책에 대한 다양한 우려, 비판을 넘어, 당의 합의와 일치된 결의를 끌어내야 했다. 전당대회는 메르켈에게 무척 중요했다. 이날 전당대회에는 난민정책의 향배 뿐만 아니라 메르켈의 정치적 미래까지 걸려있었다. 메르켈은 약 1,000명의 대의원 앞에서 꼬박 7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선 채로 진행된 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메르켈은 그동안 독일과 유럽이 해온 일들과 겪은 일들, 직면한 위기에 대해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15년째 CDU를 이끄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고 “나조차도 이런 해는 처음”이라며 2015년을 회고했다.
“유럽은 단 한순간도 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난 10년간 직접 경험한 바도 그렇고, 그 이전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지금까지 모든 시험을 통과해왔습니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막판에 간신히, 그렇지만 결국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도 그 과정에 기여할 것입니다.”11)
11) CDU, Protokoll 28.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 14.–15. Dezember 2015 · Karlsruhe, p. 27.
이어 역대 기민당 총리들의 업적을 언급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약간의 자유”(etwas Freiheit)가 아니라 “자유 자체”(Die Freiheit)를 선택했고, 루트비히 에어하르트 총리는 “거의 모든 사람의 번영”(Wohlstand für fast alle)이 아니라 “모두의 번영”(Wohlstand für Alle)을 이뤘으며,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동독 몇몇 지역의 활력이 아니라 동독지역 전체를 활력있는 곳으로 바꿔냈음을 강조했다. 뒤이어 메르켈이 “기민당과 기사당은 독일의 정치적 성공의 역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난 66년 중 46년간 우리는 정권을 책임져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독일과 유럽을 위해, 우리가 중요합니다.” 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가득찼다. 이어 난민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룰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일부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논란이 있었다며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일을 해내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정체성이기 때문”(Zur Identität unseres Landes gehört es, Großes zu leisten)이라고 답했다.12)
12) 위의 자료집, pp. 28-29.
메르켈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수많은 난민 문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이지만 “우리는 단지 걱정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을 바꾸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정당이고,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이번 선언문(Karlsruher Erklärung zu Terror und Sicherheit, Flucht und Integration : 테러와 안보, 난민과 통합에 대한 칼스루에 선언)은 그 사명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메르켈은 칼스루에 선언에 담길 대안과 프로그램을 충분히 설명한 후, “‘우리가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고 이 두려움은 곧 “변화에 대한 불안”이라며 회의론을 품거나 이를 확산시키는 당내 일부를 향해 “솔직해지자”라며 회의론의 핵심을 예리하게 치고 들어갔다. 13)
13)위의 자료집, pp. 29-36.
“오늘 우리가 이렇게 강한 이유는 낙관주의와 확신이 언제나 신중함과 위험 및 위기에 대한 인식과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독일은 25년 후에도 여전히 나의 독일이자 우리의 독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훌륭한 품성과 강점을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나라, 빛나는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분명히 독일다운 독일. 우리의 독일.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 최고의 독일. 이를 위해서는 기민당과 기사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14)
14)위의 자료집, pp. 43-44.
연설이 끝났을 때, 대의원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는 9분간 이어졌다. 결국 메르켈이 연단으로 다시 나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로 분위기를 진정시켜야 했다. 이런 열정적 분위기는 기민당과 매르켈 모두에게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그녀의 연설이 특별했고,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그 리듬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건 의무적인 박수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박수였다. 나는 정말 중요한 상황에서 내 당을 나의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유 p. 570.
메르켈은 위기의 순간에 당의 의지를 통합했다. 당이 가져야 하는 공적이며 윤리적인 책임감을 고양시킴으로써, 독일과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당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일이었을까? 메르켈은 당내의 회의론을 진정시키고 당을 우군으로 만들었지만, 난민을 둘러싼 논란의 마무리는 아니었다. 메르켈의 마지막 임기가 가까워지도록 난민과 이주민을 독일 사회로 통합 문제는 바람만큼 속도를 내지못했다. 거기에 연이어 테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독일내 반이민 정서와 이로 인한 충돌의 위험은 더 커졌다. 어느새 메르켈의 “우리는 다룰 수 있다”는 말조차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를 조롱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유입되는 난민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으로 인한 독일 내부의 혼란과 갈등은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그 만큼 메르켈을 원망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그러나 2015년 9월 메르켈에게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인도적 위기를 방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반사실적 가정에 대해 비판자들 역시 설득력있는 대안을 말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독일의 정치 의제 대부분은 조율과 타협에 기초한다. 독일이 이주민과 난민 문제를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전부터였다. 사회적 토론과 점진적 제도 개혁을 통해 2005년 초 이민법을 제정하고 ‘이민통합국가(Einwanderungs und Integrationsland)를 선언한다. 이건 독일 공동체가 함께 결정한 것이다. 메르켈의 난민 수용과 난민 정책은 바로 이런 결정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룰 수 있다”는 말은 이제 온갖 조롱과 비난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회고록에 이 말은 반복된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의 표현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5년에는 해야 한다는 정치적 가능주의를, 그리고 지금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치적 소명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⓼ 우리는 다룰 수 있다!(Wir schaffen das) - 유럽 난민 위기
2015년 9월 4일은 메르켈과 독일 그리고 유럽에게 역사적인 날로 평가받는다.
메르켈은 이 날 전쟁․기아 등 절박한 이유로 중동과 아프리카로부터 탈출해 헝거리와 오스트리아의 국경선과 도로로 나온 난민들의 독일 국경 진입을 허용했다. 메르켈의 결정에 따라 그해 약 100만명의 난민이 독일에 직접 난민신청을 할 수 있었고 피난처를 얻었다. 유럽연합 내에서 가장 많은 수치였다. 메르켈의 전격적인 결정으로 아직 유로존 위기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밀려드는 난민에 인도적 위기까지 겹쳐있던 유럽의 경계지역 국가들은 마침내 숨돌릴 여유를 갖게 되었다. 또한 난민문제에 대해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던 유럽의 중심국가들에게는 난민위기 해소를 위해 더 인도적 방향으로 입장을 바로잡는 전기가 되었다. 독일의 결정은 유럽공동체의 연대감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메르켈은 자유주의 세계에서 영향력뿐만 아니라 윤리성까지 겸비한 지도자로서 국제적 주목을 받았다.
그동안 난민들이 필사적으로 탈출하기 위해 들어오던 해로와 육로에서 발생한 연이은 비극 소식1)에 큰 충격을 받은 독일 시민과 유럽인들에게 메르켈의 결정은 큰 환영을 받았다. 메르켈의 결정으로 독일로 난민들이 들어올 수 있게 되자 독일 시민들은 너나 할 것 없이 기차역으로 달려가 음식과 옷을 나누고, 쉼터를 제공했다. 이것으로 메르켈은 독일 시민들에게 휴머니즘적 자부심을 되살려 주었고 언론들은 독일 시민과 정치 지도자가 이처럼 긴밀하게 일치됐던 적은 없다며 높게 평가했다.
1) 회고록에 언급된 대표적 사례로는 2013년 10월 지중해에서 발생한 선박 전복으로 수백명이 사망한 사고, 2015년 4월 18일 리비아에서 이탈리아로 향하던 보트 전복 사고로 수백명이 사망한 사고, 2015년 8월 오스트리아 고속도로의 컨테이너 안에서 발생한 난민 71명의 질식 사망 사고 등이다. 자유 pp. 523-531.
난민 문제는 2015년에 막 발생한 것이 아니라 사실 오래전부터 축적되어 왔다. 멀게는 아프카니스탄 전쟁에서 아랍의 봄, 시리아 내전 등으로 급격히 증가해 왔다. 당시는 미국발 금융위기와 유로존 위기가 거듭 밀려오고 있는 와중이었다. 메르켈은 헝거리와 그리스, 이탈리아 등 유럽 경계로 밀려드는 난민의 행렬을 보면서 1989년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으로 밀려들던 동독의 난민을 떠올렸다고 한다. 정치 이전에 인간의 문제였다. 난민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매르켈이 했던 고민의 흔적은 회고록 곳곳에 남아 있다. 메르켈은 스스로 되새기고 다짐했다. 독일 기본법 1조2)의 의미, 기독교라는 이름을 당명으로 쓰고 있는 정당에서 정치인이 추구해야 할 정치윤리에 대해서도 생각했다.3)
2) 독일 기본법 1조: (1)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2) 그러므로 독일 국민은 이 불가침·불가양의 인권을 세계의 모든 인류공동체, 평화 및 정의의 기초로 인정한다. (3) 다음에 열거하는 기본권은 직접적인 효력을 갖는 권리로서 입법권·행정권·사법권을 구속한다. 인간의 존엄은 침해되지 아니한다. 모든 국가권력은 이를 존중하고 보호할 의무를 진다. 국회도서관 독일연방공화국 기본법. 국회도서관, 2018. p. 3.
3) 난민 수용 결정 전후 상황에 대해서는 자유 pp. 523-547. 참조.
“기독교 민주당(CDU)이라는 이름의 첫 글자 C는 독일에 도착한 난민들을 인간 존엄의 원칙에 맞게 대우하라는 의무이자 소명과 다름없었다” 자유 p. 543.
메르켈은 경제위기 등 다른 어떤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유럽의 가치를 함께 실현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 유럽 스스로 증명하는 것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4) 난민의 독일입국을 허용했을 때, 예상할 수 있는 파장과 우려, 발생할 여러 가지 문제들도 감안해야 했다. 이 결정으로 메르켈은 자신이 많은 책임과 논란을 떠안아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메르켈은 독일에는 난민문제에 대해 자신처럼 생각하고 느끼고, 자신의 말에 용기를 얻는 사람이 충분히 많으리라고 믿었다.
4) 자유 pp. 523-529.
이런 의지와 믿음의 표현이 “우리는 다룰 수 있다”(Wir schaffen das)는 말이다.5) 원래 이 말은 발언 당사자인 메르켈도, 또 이를 전하는 언론도 처음에는 크게 주목하지 못한 말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난민들의 독일 입국을 결정한 이후 쏟아진 수많은 문제들을 다루는 과정에서 메르켈과 독일의 의지를 상징하는 말이 되었고, 이제는 역사책에 남는 아포리즘이 되었다.6)
5) 원문은 다음과 같다. “단언컨대 독일은 강한 나라입니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임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은 분명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어려움을 헤쳐왔고 우리는 이것 역시 다룰 수 있습니다. 우리는 다룰 것입니다. 어떤 장애물이 있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해결할 것입니다”“Deutschland ist ein starkes Land. Das Motiv, mit dem wir an diese Dinge herangehen, muss sein: Wir haben so vieles geschafft – wir schaffen das! Wir schaffen das, und dort, wo uns etwas im Wege steht, muss es überwunden werden, muss daran gearbeitet werden”.
6)메르켈은 2015년 8월 31일, 독일 총리의 정례 여름기자회견에서 난민문제의 심각성을 말하며 이 표현을 사용한다. 그러나 당시 기자회견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리스의 유로존 퇴출(‘그렉시트’)을 막아내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었다. 2015년 중반까지는 유로존 위기가 가장 큰 이슈였기 때문이다.
환희와 열정의 끝에는 차가운 청구서가 남는다. 메르켈은 자신이 비정부기구나 시민단체의 대표가 아니라 정치가이자 독일연방공화국의 총리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난민 수용 결정은 인도주의적 비상상황에서 내려진 긴급한 결정이었지만 독일은 정당과 정치, 시민사회가 협력하고 역량을 끌어모아 조율된 행동과 합의된 결정을 통해 운영되는 나라이다. 따라서 결정 이후 메르켈이 감담해야 할 일 중 가장 중요한 일은 결정에 대한 컨센서스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기사당의 반발이 컸다. 기사당 대표 호르스트 제호퍼는 난민 유입이 독일의 사회적 안전를 파괴한다고 비판하며 “메르켈의 결정은 되돌릴 수 없는 실수”라고 분명히 못 박았다. 갈등의 골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고, 급기야 기사당은 난민 정책을 불법의 지배(Herrschaft des Unrechts)7)라는 강한 언사를 동원해 비판하고 난민정책의 노선을 수정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두 자매 정당 사이의 갈등이 이런 정도로 공식화되어 표출되는 것은 1980년대 이후 전례없는 일이었다. 8)
7) 불법 통치(Herrschaft des Unrechts)라는 표현은 독일에서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여지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비민주적 독재 정권이나 억압적인 체제, 예를 들어 동독(구 동독, GDR) 같은 국가를 묘사할 때 사용하는 불법국가(Unrechtsstaat)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8 )기사당과의 갈등에 대해서는 자유, p. 541, pp. 564-572. 참조.
오래전 볼프강 쇼이블레는 메르켈에게 “기민당과 기사당 사이에서만 갈등이 발생하는 경우는 드물고, 거의 항상 기민당 내에서 파열음이 함께 발생한다”고 말해주었다. 오랜 정당활동에서 녹아나온 교훈이었다.9) 기사당 이전에 기민당내에서 이미 메르켈의 난민정책에 대해 비판과 함께 회의론이 퍼지고 있었다. 난민 문제처럼 예민하고 갈등적인 문제를 잘 다루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자신의 당(기민당)의 단단한 지지가 필수적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기사당과의 전례없는 갈등은 물론이고, 언론을 비롯한 사회 곳곳에서 나오는 다양한 이견을 설득하고 조정하는 일도 어려웠다. 메르켈은 회의론의 핵심과 정면 승부를 선택한다. 이것은 단지 권력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자유와 다원성 아래 통합된 공동체로서 독일은 물론 유로존의 미래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메르켈의 소신에 따른 것이었다.10)
9) 자유, p. 307.
10) 메르켈의 난민 수용 결정에 대해 당시 독일 언론과 비평가들은 목사였던 그녀의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기독교적 가치에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추측했다.(슈피겔) 그러나 메르켈은 통치자로서 자신의 해야 할 일도 잘 알고 있었고, 이로 인해 자신이 감당해야할 책임도 잘 이해했다. 메르켈은 종교적 윤리가 아니라 정치가의 윤리로서 이문제를 다뤘다는 데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정치는 윤리로만 할 수 없는 일이지만, 윤리적인 힘 없이는 하기 어려운 일이다. 이것을 보여준 것이 2015년 12월 14일 칼스루에(Karlsruhe)에서 개최된 기민당 전당대회(Parteitag)였다. 메르켈은 당내에서 확산되는 난민정책에 대한 다양한 우려, 비판을 넘어, 당의 합의와 일치된 결의를 끌어내야 했다. 전당대회는 메르켈에게 무척 중요했다. 이날 전당대회에는 난민정책의 향배 뿐만 아니라 메르켈의 정치적 미래까지 걸려있었다. 메르켈은 약 1,000명의 대의원 앞에서 꼬박 7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선 채로 진행된 연설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메르켈은 그동안 독일과 유럽이 해온 일들과 겪은 일들, 직면한 위기에 대해 언급하며 연설을 시작했다. 15년째 CDU를 이끄는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일이 일어난 해”였고 “나조차도 이런 해는 처음”이라며 2015년을 회고했다.
“유럽은 단 한순간도 쉬운 곳이 아니었습니다. 제가 지난 10년간 직접 경험한 바도 그렇고, 그 이전도 아마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지금까지 모든 시험을 통과해왔습니다. 때로는 아슬아슬하게, 때로는 막판에 간신히, 그렇지만 결국은 해냈습니다.
그리고 저는 앞으로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도 그 과정에 기여할 것입니다.”11)
11) CDU, Protokoll 28. Parteitag der CDU Deutschlands, 14.–15. Dezember 2015 · Karlsruhe, p. 27.
이어 역대 기민당 총리들의 업적을 언급했다.-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는 “약간의 자유”(etwas Freiheit)가 아니라 “자유 자체”(Die Freiheit)를 선택했고, 루트비히 에어하르트 총리는 “거의 모든 사람의 번영”(Wohlstand für fast alle)이 아니라 “모두의 번영”(Wohlstand für Alle)을 이뤘으며,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동독 몇몇 지역의 활력이 아니라 동독지역 전체를 활력있는 곳으로 바꿔냈음을 강조했다. 뒤이어 메르켈이 “기민당과 기사당은 독일의 정치적 성공의 역사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지난 66년 중 46년간 우리는 정권을 책임져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한번, 독일과 유럽을 위해, 우리가 중요합니다.” 라고 말했을 때, 장내는 우레와 같은 박수 소리로 가득찼다. 이어 난민문제에 대해 “우리는 다룰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일부에서는 “도대체 어떻게 '우리는 다룰 수 있다'는 것인가?”라는 의문과 논란이 있었다며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은 “위대한 일을 해내는 것은 바로 우리나라의 정체성이기 때문”(Zur Identität unseres Landes gehört es, Großes zu leisten)이라고 답했다.12)
12) 위의 자료집, pp. 28-29.
메르켈은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과제—수많은 난민 문제—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엄청난 규모”이지만 “우리는 단지 걱정을 듣는 데서 그치지 않고, 현실을 바꾸고, 해결책을 찾아가는 정당이고,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며, 이번 선언문(Karlsruher Erklärung zu Terror und Sicherheit, Flucht und Integration : 테러와 안보, 난민과 통합에 대한 칼스루에 선언)은 그 사명을 잘 반영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메르켈은 칼스루에 선언에 담길 대안과 프로그램을 충분히 설명한 후, “‘우리가 이 모든 걸 해낼 수 있을까?’라는 회의감 이면에 존재하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이고 이 두려움은 곧 “변화에 대한 불안”이라며 회의론을 품거나 이를 확산시키는 당내 일부를 향해 “솔직해지자”라며 회의론의 핵심을 예리하게 치고 들어갔다. 13)
13)위의 자료집, pp. 29-36.
“오늘 우리가 이렇게 강한 이유는 낙관주의와 확신이 언제나 신중함과 위험 및 위기에 대한 인식과 결합되었기 때문입니다.…독일은 25년 후에도 여전히 나의 독일이자 우리의 독일이어야 합니다. 우리의 훌륭한 품성과 강점을 보존해서 다음 세대에 물려줄 수 있는 나라, 빛나는 문화적 전통을 간직하면서도 세계를 향해 열려 있고 다양성을 포용하는, 분명히 독일다운 독일. 우리의 독일. 우리가 가진 가장 아름답고 최고의 독일. 이를 위해서는 기민당과 기사당은 반드시 필요합니다.”14)
14)위의 자료집, pp. 43-44.
연설이 끝났을 때, 대의원들의 열광적인 박수갈채는 9분간 이어졌다. 결국 메르켈이 연단으로 다시 나와 “고맙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에겐 해야 할 일이 남아 있습니다”라는 말로 분위기를 진정시켜야 했다. 이런 열정적 분위기는 기민당과 매르켈 모두에게 이례적인 경험이었다. 그녀의 연설이 특별했고, 성공적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이었다.
“연설이 끝나자 박수가 쏟아졌다. 그 리듬을 통해 알 수 있듯이, 이건 의무적인 박수가 아니라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박수였다. 나는 정말 중요한 상황에서 내 당을 나의 든든한 우군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자유 p. 570.
메르켈은 위기의 순간에 당의 의지를 통합했다. 당이 가져야 하는 공적이며 윤리적인 책임감을 고양시킴으로써, 독일과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당의 리더십에 대한 신뢰를 이끌어냈다.
이것이 카이로스의 머리채를 잡아끄는 일이었을까? 메르켈은 당내의 회의론을 진정시키고 당을 우군으로 만들었지만, 난민을 둘러싼 논란의 마무리는 아니었다. 메르켈의 마지막 임기가 가까워지도록 난민과 이주민을 독일 사회로 통합 문제는 바람만큼 속도를 내지못했다. 거기에 연이어 테러가 발생하고, 이로 인해 독일내 반이민 정서와 이로 인한 충돌의 위험은 더 커졌다. 어느새 메르켈의 “우리는 다룰 수 있다”는 말조차 책임을 다하지 못하는 정치를 조롱하는 말이 되어버렸다. 유입되는 난민의 숫자가 현저하게 줄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난민으로 인한 독일 내부의 혼란과 갈등은 규모가 더 커지고 있다. 그 만큼 메르켈을 원망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커진다. 그러나 2015년 9월 메르켈에게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인도적 위기를 방치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이런 반사실적 가정에 대해 비판자들 역시 설득력있는 대안을 말하는 것은 어려워 보인다.
독일의 정치 의제 대부분은 조율과 타협에 기초한다. 독일이 이주민과 난민 문제를 사회통합적 관점에서 다루기 시작한 것은 2000년 이전부터였다. 사회적 토론과 점진적 제도 개혁을 통해 2005년 초 이민법을 제정하고 ‘이민통합국가(Einwanderungs und Integrationsland)를 선언한다. 이건 독일 공동체가 함께 결정한 것이다. 메르켈의 난민 수용과 난민 정책은 바로 이런 결정에 대한 신뢰와 자신감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다룰 수 있다”는 말은 이제 온갖 조롱과 비난으로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24년 회고록에 이 말은 반복된다. 오류를 인정하지 않는 고집의 표현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2015년에는 해야 한다는 정치적 가능주의를, 그리고 지금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정치적 소명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