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③ 변방에서 중심으로 - 정당에는 영혼이 있다

2025-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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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변방에서 중심으로 - 정당에는 영혼이 있다


독일은 통치에 참여하는 주요 정당의 역사가 깊고 정당 지도자들의 역할이 크다는 점에서 정당국가라고도 불린다. 민주적 대중정당 자체가 독일에서 태어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독일의 기민당과 사민당 같이 유서깊은 거대 정당들은 매우 체계적이고 잘 작동하는 자체 인력 충원체계를 갖고 있다. 독일 통계청의 발표에 따르면 현재 독일 정당은 약 120만명의 당원을 보유하고 있다1). 따라서 각 정당은 폭넓은 당원 구조에 수반되는 두터운 인재풀이 있어 청년당원 시절부터 유능하다고 인정받은 사람이 착실히 단계를 밟아나가다가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연히 오랜 시간과 많은 검증의 과정이 뒤따른다.

 

이런 풍토에서 메르켈의 정치적 성장은 여러모로 예외적이라고 할 수 있다. 35세에 비로소 정당활동을 시작한 메르켈은 정치입문 1년 뒤인 1990년 12월, 통일된 독일의 첫 번째 연방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된다. 곧바로 헬무트 콜 내각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 입각하고 1994년에는 환경 장관에 임명되면서 한 단계 더 부상한다. 1998년 총선에서 기민당이 정권을 잃고 야당으로 물러난 뒤에는 당의 사무총장에 오른다. 뒤이어 메르켈은 콜의 초대형 부패 스캔들이 터지고 이로 인해 너덜너덜해진 기민당을 수습하는 당대표로 선출된다. 1990년 기민당원이 된 이래,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보수정당의 대표가 되는 데까지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40대 여성 정치인의 이런 ‘놀라운 부상’(The astonishing rise of Angela Merke)이 과연 어디까지 갈 것인지 사람들은 주목하기 시작했다.2)

 

메르켈도 인정하지만 이런 부상이 가능했던 것은 콜과의 특별한 관계나 그의 후광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3) 그러나 메르켈이 마냥 콜에게 의존했던 것은 아니다.

 

1999년 콜의 부패 스캔들이 터졌다. 콜이 재임시절 수백만 달러의 불법 기부금을 수수했다는 것이었다. 콜은 처음에는 이를 부인하며 정치적 반대자들의 음모 쯤으로 치부했다. 그러나 상황은 점점 더 악화되었다. 결국 1999년 11월 30일, 그는 ZDF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임기 동안 기민당의 회계장부 밖에서 은밀하고 불법적인 당 기부금으로 210만 마르크를 받았음을 시인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콜은 명예 대표로 여전히 당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콜은 독일을 통일로 이끌고 유럽을 통합으로 이끈 지도자이며 기민당의 16년 집권을 이룩한 당의 아버지였다. 그러나 콜이 쌓아올린 업적이 큰 만큼 그가 기민당에 드리운 그림자 역시 길고 짙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기민당은 점점 더 궁지에 몰렸다. 당이 콜과 함께 침몰할 것인가? 메르켈은 당의 사무총장으로서 책임있게 행동하기로 결심한다.

 

“나는 기민당의 사무총장이라는 직책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면 이 스캔들에 대해 정치적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미래를 바라보며 엄정하고 가차 없는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확신했다”(󰡔자유󰡕 p. 289)

 

그리고 독일연방공화국 언론史에서 가장 중요한 기사 중 하나가 될 기고문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에 보낸다. 이 기고문은 1999년 12월 22일 “헬무트 콜이 시인한 사건들이 당에 피해를 끼쳤다” 라는 제목으로 게재된다. 회고록에는 그 기고문의 일부가 인용되어 있다.4)

 

“콜이 쏘아올린 사건들이 당에 해를 입혔다. 이는 콜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자 기민당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며, 또한 그를 넘어 모든 정당에 대한 신뢰의 문제이다. 그렇다면 우리 당은 혼자 걷는 법을 배워야 하고 미래에는 헬무트 콜이 자신을 그렇게 부르듯 늙은 전마(戰馬)없이도 정치적 반대자들과 싸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우리당은 이제 사춘기 아이처럼 편안한 집과 작별하고 자신의 길을 걸어야 한다. …(중략)… 이 과정에는 상처나 아픔이 따를 수밖에 없다.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일을 우리가 배신으로 악마화할지, 아니면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자연스럽고 필요한 일로 여길지에 따라 다음 지방선거과 2002년 연방의회 선거에서 우리의 명운이 결정될 것이다. 이 과정을 받아들인다면 우리 당은 변화할 것이고, 헬무트 콜 당대표 시절부터 지켜온 훌륭한 핵심 가치와 자신감 넘치는 당원, 자랑스러운 전통, 보존할 것과 새로운 경험의 조화, 그리고 청사진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다.”(󰡔자유󰡕 pp 290-291, ※강조는 필자)

 

메르켈은 자신의 정치적 아버지인 콜의 등뒤에 칼을 꽂았다. 기고문의 파장은 즉각적이었다. 콜을 지지하는 사람들과 콜을 저버릴 수 없는 정치적 후계자들은 오이디프스의 눈을 파낼 듯이 메르켈을 향해 달려들었다. 메르켈은 “정치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견뎌내야 했다고 말한다.5)


위기 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는 것이었던 이 기고문은 기민당뿐만 아니라 메르켈 자신의 독립선언이기도 했다. 마치, 스스로를 향해 ‘이제 혼자 서야 한다’, ‘스스로 싸워야 한다’, ‘자신의 길을 가야 한다’고 다짐하는 듯했다. 메르켈이 체제 순응의 대가로 주어지게 될 익숙하고 그럭저럭 안정된 삶과 가정으로부터 탈출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던 1981년의 데자뷔였다.

 

메르켈이 보기에 콜의 문제는 단순 비리가 아니라 시민에 대한 독일정치 전체의 책임과 신뢰가 걸려 있는 민주주의 문제였다. 메르켈은 기민당이 앞으로도 기민당일 수 있기 위해서는 콜과의 탯줄을 끊고 피를 흘리더라도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정당의 책임이자 윤리라는 것을 기고문을 통해 분명히 했다.

 

“정당에는 영혼이 있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잘못을 밝힐 것인가, 유산을 지킬 것인가’라는 이분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헬무트 콜의 이미지, 그의 업적, 그리고 기민당에 대해 이야기할 때, 이 둘은 함께 가야 한다. 진실 위에서만 역사의 올바른 상이 세워질 수 있고, 진실 위에서만 미래를 건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을 헬무트 콜도, 기민당도 받아들여야 한다.”6)

 

더 이상 메르켈은 콜이 키운 온실 속의 화초이거나 동서독 정치의 통합을 상징하는 기민당의 테코레이션이 아니었다. 메르켈은 민주주의라는 공적인 가치와 직접적인 당의 이익 사이의 대립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그리고 무엇이 진정한 당의 이익인가에 대해 책임있는 정의와 퍼스펙티브를 제시함으로써 스스로를 리더십을 둘러싼 정치투쟁의 한복판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메르켈은 기민당의 중심에 서 있는 지도자가 되었다. 어차피 메르켈 스스로 만든 전장(戰場)이었다. ‘아버지를 죽인 자’Vatermörderin 또는 콜을 사법당국에 먹이감으로 던져넣었다는 당의 주요 인사들의 비난과 조롱을 정면으로 응시하며 그녀는 기민당의 대표이자 미래의 독일 총리가 되기 위한 정치적 의지를 세우기 시작했다.7)

 

메르켈은 2000년 3월 당대표 출마를 선언했다. 메르켈은 변화의 선두에 서고자 했으며, 콜 스캔들 와중에서 흔들리는 당의 2인자인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8)를 넘어서서 변화하는 기민당의 청사진을 펼쳐보였다. 메르켈은 당의 풀뿌리를 돌며 당을 뒤덮은 폭풍 속에서 당원들의 의지를 일으켜 세웠다. 4월 10일 개최된 기민당 전당대회에서 메르켈은 1001명의 대의원 앞에서 “우리 적수의 시간은 끝났다”Die Stunde unserer Gegner ist vorbei라고 외치며 “우리가 돌아왔다”Wir sind wieder da고 선언했다. 메르켈의 수많은 연설 가운데 단연 독보적인 이 투쟁적인 연설은 총선 패배와 이어진 콜 스캔들로 무기력과 분열에 휩싸여 있던 당원과 대의원들에게 변화와 집권의 자신감을 다시금 상기시켰다.9)

 

기민당을 다시 세우는 메르켈의 방법은 정적인 사민당을 적대화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기민당의 미래에 대해, 독일은 왜 기독교민주당을 다시 필요로 하며, 기민당은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에 답을 찾는 것이었다. 문제의 원인으로 취급되었던 기민당을 문제의 해결책으로 다시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콜 스캔들로 자괴감에 빠져 있던 당원들에게 메르켈의 방법은 열광적 반응을 이끌어 냈다. 메르켈은 기민당 창당 이후 최초의 여성 당대표로 선출되었다.10)

 

“내 연설에 대한 대의원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 불과 며칠 전만 해도 불가능으로 여겨지던 당원들의 자신감이 전당대회장의 천장을 뚫었다. 이어진 투표에서 동독 출신의 여성인 내가, 그것도 민주주의 각성에서 기민당으로 들어온 지 9년반밖에 안 된 내가 총 935표 중 897표를 얻어 당대표에 선출되었다. 연방공화국 설립 후 51년 동안 연방총리를 36년이나 배출한 정당이었다. 그런 정당이 기부금의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다가 이제 95.9%의 압도적인 지지율로 나를 선택했다.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였다”(󰡔자유󰡕 p. 296)

 

메르켈은 흔히 과도하게 신중하고 모호한 태도를 취하는 정치인으로 평가받는다. 총리로 재임하던 시절 메르켈의 이런 면모는 그녀의 리더십을 비판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소재이기도 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녀가 당을 이끌었던 20여 년 동안 기민당은 그녀의 리더십 아래 확실히 변화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나는 그녀가 만든 변화를 모두 동의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녀는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Ursula von der Leyen11)을 전면에 내세워 여성과 가족 정책을 개혁해 기민당의 풍토를 바꾸고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정 모델에서 벗어났다. 기민당 내에 만연해있던 연고주의와 '라인식 가부장주의', 그리고 당원들 사이의 '절대적 충성' 문화 역시 그녀가 당 대표와 총리로 재임하던 동안 많이 개선되었다. 또한 그동안 기민당이 회피해온 여러 사회문제들, 기후위기, 난민 문제 등 에 대한 대응에 있어 진보파의 눈에는 차지 않을지 모르지만, 완고한 당내 보수주의자들을 설득하며 기민당을 “매력있는 현대적 중도정당”으로 변화시켜나갔다. 메르켈은 단순히 기존의 조건에 적응하는데 머물고자 하지 않았다. 시민의 삶과 필요가 정치의 원천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녀가 사무총장 시절부터 중요한 가치로 생각했던 “삶의 가운데”Mitten im Leben에 자리잡은 정당이라는 기민당의 미래상을 당대표이자 독일총리로서 구현해 나갔다는 데 큰 이견은 없을 것이다.



1) 독일 통계청이 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발표한 당원 수이다. 각 당별로 보면 사민당(SPD)이 393,727명, 기민기사연합(UNION)이 514,583명, 녹색당(Gruene) 125,737, 자민당(FDP) 77,276 등이다.

2) https://de.statista.com/statistik/daten/studie/1339/umfrage/mitgliederzahlen-der-politischen-parteien-deutschlands/

3) 메르켈이 콜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상하리만치 회고록에는 콜의 역할이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 간혹 등장하더라도 단편적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 않을까 추측하지만, 회고록에 표현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메르켈은 콜에 대한 묵직한 마음의 빚을 짊어지고 있었음이 틀림없다. 2017년 콜 전 총리가 서거했을 때, 메르켈은 다음과 같은 강렬한 헌사로 추도사를 마쳤다. “사랑하는 헬무트 콜 총리님, 당신은 제가 이 자리에 오를 수 있게 한 결정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저에게 기회를 주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 당신은 정말 많은 것을 성취했습니다. 이제 당신의 유산을 보존하는 것은 우리의 일입니다. 저는 당신과 당신의 기억 앞에 감사와 겸허한 마음을 담아 고개 숙입니다.”Lieber Bundeskanzler Helmut Kohl, dass ich hier stehe, daran haben Sie entscheidenden Anteil. Danke für die Chancen, die Sie mir gegeben haben.… Jetzt ist es an uns, Ihr Vermächtnis zu bewahren. Ich verneige mich vor Ihnen und Ihrem Angedenken in Dankbarkeit und Demut.

https://www.bundesregierung.de/breg-de/aktuelles/rede-von-bundeskanzlerin-merkel-beim-europaeischen-trauerakt-zu-ehren-von-bundeskanzler-a-d-dr-helmut-kohl-am-1-juli-2017-in-strassburg-793108

4) 이 기사는 1면과 2면, 4면에 걸쳐 게재된다. “Die von Helmut Kohl eingeräumten Vorgänge haben der Partei Schaden zugefügt”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2. 12 1999. S, 2

5) <자유>, pp. 201-292.

6) “Die von Helmut Kohl eingeräumten Vorgänge haben der Partei Schaden zugefügt”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22. 12 1999. S, 2

7) 당시 당지도부의 주요인사들은 대부분 메르켈을 비난했지만, 메르켈을 지지하는 세력도 적지 않았다. 가장 먼저 그녀의 편에 선 사람 중 하나는 연방의회 원내 부대표였던 현 독일 총리 프리드리히 메르츠였다. 그는 "나는 그녀의 글의 모든 문장에 동의한다"며 메르켈의 입장에 전폭적으로 힘을 실었다. 기민당 청년조직인 청년유니온(Junge Union)도 메르켈을 지지했고, 동독 출신, 그리고 대도시 지역 당원들도 그녀를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무엇보다 대중 매체가 그녀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신문과 잡지, 방송 뉴스 대부분이 메르켈의 주장이 옳다고 평가했다. “메르켈의 쿠데타 10년”Ein Jahrzehnt Merkel-Putsch, 《ZEIT》 23. Dezember 2009

8) 볼프강 쇼이블레(Wolfgang Schäuble, 1942-2023)는 독일 현대 정치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으로 평가받는 기독교민주연합(CDU) 소속의 정치인이다. 그는 1972년부터 2023년까지 무려 51년간 연방의회 의원을 지낸, 독일 의회 역사상 최장수 의원이다. 콜 정부에서는 총리실장(1984년), 내무부 장관(1989년), 기민기사연합 원내대표(1991년) 등 당과 내각의 핵심으로 콜의 2인자로 자리메김되었으며, 콜 실각 후에는 당 대표로서 당을 수습하는 역할을 했다. 당내에 기반이 취약한 메르켈을 기민당 사무총장으로 불러들인 것도 쇼이블레였다. 콜의 부패스켄들 처리 문제를 두고 메르켈과 갈등을 빚었으나 메르켈 정부에서도 내부부장관, 재무부 장관을 역임하며 메르켈을 뒷받침했다. 그는 1990년 독일 통일협상의 핵심인물로 통일조약(Einigungsvertrag) 협상을 주도했으며, 1990년 암살 시도로 총상을 입어 하반신 마비가 되었음에도 정치 활동을 지속해 강한 의지를 가진 정치인의 상징적 존재적 존재가 되었다. 원칙있는 실용주의자라는 평가이며, 유로존 재정위기에서 메르켈과 함께 긴축 재정 정책을 주도한 인물이기도 하다. 메르켈은 쇼이블레에 대해 “정치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는 데 치중할 게 아니라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강하게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라며, “무한한 존경을 품고 있었지만, 한편으론 그가 드러내는 날카로운 단호함이 두렵기도 했다”고 평가했다.

9) “보스”Die Chefin

https://www.sueddeutsche.de/projekte/artikel/politik/die-chefin-angela-merkels-wichtigste-parteitage-e445506/

10) <자유> pp. 294-296.

11) 현재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다. 독일 최초의 여성 및 민간 출신 국방장관을 거쳤고 유럽 연합을 이끄는 첫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