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⓶ 정치인 메르켈의 탄생 - 메르켈이 담배를 처음 배웠을 때

2025-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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⓶ 정치인 메르켈의 탄생

  • 메르켈이 담배를 처음 배웠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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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정치를? 


메르켈을 둘러싸고 있는 시대적이면서도 개인적인 요소들은 그녀가 통독 이후 정치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좋은 진입로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것이 “왜 정치를 시작했는가”에 대한 직접적 답변은 되지 못한다. 아무리 조건이 좋다 하더라도 그녀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메르켈은 1989년 11월 말경에 삼십 대 중반의 나이로 정치 참여를 결정하고 곧바로 정치단체 ‘민주주의 각성’에 가입했다. 보통 십 대에 당원이 되어 정당 활동을 시작하는 서구의 기준으로 보면 매우 늦은 출발이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줄곧 정치와 무관했던 이공계 연구원이라는 그의 경력이 믿기지 않을 만큼 빠르게 정치 영역에서 자신의 실력과 존재감을 드러냈다. 메르켈은 입당 후 3개월 만에 ‘민주주의 각성’의 대언론 관계를 책임지는 대변인 되어 1990년 인민의회 선거에 지휘부의 일원으로 참여했다. 또 짧은 기간이었지만, 동독 마지막 정부의 부대변인으로 임명되어 동서독의 재통일 협상 과정을 현장에서 지켜봤다. 정부 부대변인으로서 메르켈은 “타고난 꼼꼼한 성격 덕”에 통일을 앞두고 쏟아지는 이슈와 정책, 수백건의 법안을 막힘없이 설명하고 언론의 쏟아지는 질문에 능숙하게 대응했다. 이 일은 수십년 경력의 정치인에게도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메르켈은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고 이로 인해 통일을 향해 가는 독일 정치권에서 조금씩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다.


특히 통일조약 체결만큼 역사적인 사건이었던 ‘2+4’회담에 참여해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ich Genscher, FDP) 서독 외무 장관과 함께 각각 동서독 정부를 대표해 내외신 기자들 앞에서 협정 초안을 브리핑했다. 35세의 정치 초년생 메르켈은 정치 경력의 시작과 거의 동시에 중대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 국제정치 무대에 데뷔한 것이다. 1974년부터 독일의 외무부 장관이었던 65세의 겐셔는 이미 독일은 물론 유럽정치의 거목이었다. 당연히 이 공동 기자회견에서 동서독 정부를 대표하는 두 정치인의 경험과 연륜, 안목의 차이는 확연하게 드러났다. 메르켈은 조약의 쟁점에 대한 기술적이고 세부적인 문제들을 꼼꼼하게 나열하는 데 그쳤지만, 겐셔는 디테일 보다 통일 협정의 역사적 의미와 비전을 묵직한 언어로 설명했다. 이런 안목의 차이는 동독쪽 파트너였던 메르켈의 얼굴을 달아오르게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순간은 메르켈의 성장에 있어 매우 뜻깊은 계기였다. 메르켈은 당시 자신은 “외교의 ‘별의 순간’(Sternstunde)이자 역사의 행복한 순간에 함께하고 있다는 감정”에 흠뻑 빠져 있었다고 회고했다. 동시에 그의 대등한(?) 파트너였던 겐셔에게서 깊은 인상을 받았고, 평생을 간직하게 될 교훈을 얻었다. 메르켈은 “목표를 정하고, 큰 그림을 명확하게 한 다음 세부 사항으로 들어가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메르켈은 마치 스펀지처럼 정치의 지혜를 흡수하며 자신의 면모를 정치인답게 바꿔나갔다. 정치를 시작한지 1년여 만에 마치 오랫동안 정치를 준비해 온 사람처럼 능숙하게 통일 전후의 복잡한 독일 정치에 적응하며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정치는 무엇보다 의지를 세우는 일이다. 이름이 알려진 정치가들 대부분은 ‘왜 정치를 하는가’에 대한 분명한 자기 정의가 있다. 그것은 하나의 드라마적 방법일 수도 있고, 선언일 수도 있다. 그러나 메르켈의 자서전에서는 얼마나 능숙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정치적 과업을 수행했는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만, 정치 참여 과정에서 자신이 세운 의지에 대해서는 거의 말하지 않는다. 다만 메르켈은 정치 참여를 결정하던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동독 혁명 과정에서)개인적으로 이 모든 것이 내게 어떤 의미가 있을지도 아직 모호했다. 다만 그 와중에도 한가지는 확실히 느껴졌다. 현재의 발전 과정에 내가 전율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나는 확신했다. 여기서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나고 있고, 나도 그 과정에 동참하고 싶고, 나의 경험과 삶, 능력, 소망이 그것에 도움이 될 수 있으리라고.……나는 새로운 얼굴로서 기존 정치 지형을 바꾸는 데 힘을 보태고 싶었다.”󰡔자유󰡕, p. 158)


35세라는 나이에 그동안 살아온 방법과 분야를 떠나 정치라는 낯선 길을 선택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단지 스펙타클한 격변이 주는 열정에 취해서 선택한 것은 아닐 것이다. 이것은 이후 그녀가 보여준 삶의 궤적을 볼 때, 메르켈적이지도 않다. 그러나 회고록은 ‘왜’에 대한 설득력 있는 답변을 주지 않는다. 모두에게 그렇듯 중요한 선택을 그냥 하지는 않는다. 꽤 오랜 기간 내면의 갈등을 거쳐 결심으로 이어지고, 이런 결심을 현실에 타진하는 긴 과정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회고록은 그녀의 내면 깊숙한 곳을 더듬어 보려는 독자들의 욕망을 냉정하게 거절한다. 그녀의 결심을 파악하는 것은 오직 독자들의 몫으로 던져진다. 이런 불친절함에 불만이 생길 때 즈음, 메르켈 회고록의 서평을 다룬 한 독일 언론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메르켈이 처음 담배를 피웠을 때”Als Angela Merkel sich erst mal eine Zigarette anzündete라는 서평으로서는 좀 생뚱맞은 제목이었다.  회고록에서 메르켈은 자신이 담배를 끊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자세하게 말하고 있다. 이건 당시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차이퉁》등 독일의 주요 언론에 꽤 많이 보도된 유명한 일화였다. 그러나 그녀가 언제부터 담배를 피웠는지는 회고록에 단 두문장으로 무뚝뚝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이다.


매르켈이 담배를 처음 피웠을 때


“나는 약 10년 전 첫 남편의 집에서 나온 뒤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당시 ‘클럽’이라는 상표의 담배를 하루에 한 갑 정도 피웠다”(󰡔자유󰡕 p. 211)


기호품인 담배를 언제 피웠는지가 뭔 대수일까? 그러나 담배는 그녀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단서라고 생각한다. 메르켈이 말한 10년 전은 그녀가 베를린 과학 아카데미에 자리를 얻어 베를린에 정착했고, 결혼한지도 5년이 지난 1980년대 초였다. 1년 반을 공들인 신혼집의 수리도 끝난 상태였다. 대체로 개인적 차원에서는 모든 것이 안정되었던 시기라고 말할 수 있겠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1980년대 초는 동구권의 체제적 모순이 심화되던 시기였다. 소련을 포함한 동구권 전체가 흔들렸다.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체제는 아래로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1981년 자유 노조 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폴란드에 게엄령이 내려졌다. 억압이 클수록 이에 맞선 저항과 개혁적 열망 역시 커졌다. 이공계 지식인으로서 갖게 된 다양한 국제적 연결망을 통해 메르켈은 체제적 모순의 심화와 변화의 움직임을 감지할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안정된 시기였지만, 메르켈의 내적 갈등은 절정에 이르렀다. ‘계속 이렇게 살아가야 할까?’라는 실존적 물음에 괴로워했다.


“더 근본적인 의문도 있었다. 이 나라에서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연구에 몰두해야 할까? 그건 결국 내가 비판적으로 생각하는 동독이라는 국가를 더욱 강화하지 않을까? …(중략)… 이런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고, 이는 남편과의 관계를 어렵게 했다.”(󰡔자유󰡕 p. 122)


물리학자로서 자신이 열심히 일한다는 것이 “끊임없이 건강한 상식에 반하는 행동을 하고, 개인의 욕구를 억누르는” 동독 국가를 도와주는 것이라면 이런 삶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메르켈에게 동독은 “소심하고, 편협하며, 무미건조하고 유머 감각조차 없는 체제”였다. 메르켈은 동독 국가가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사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데로 생각이 모아졌다. 이것은 동독이 강요해 온 집단주의적 규범에서 벗어나는 것이었고 동시에 그 체제가 제공할 수 있는 혜택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메르켈은 이기적이라는 비난과 차별을 받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메르켈의 이런 결심은 “삶을 근본적으로 바꾸려는 소망”으로 이어졌다고 술회했다. 


1981년 봄, 메르켈은 남편과 별거했다. 체제가 제공하는 그럭저럭 보장된 삶의 상징이었던 마리엔가의 보금자리를 가방 하나만 달랑 챙겨 미련 없이 떠났다. 이 이별과 탈출 그리고 새 출발은 메르켈의 전환을 말해주는 가장 적절한 메타포라고 생각한다. 덧붙인다면 메르켈이 굳이 언급한 ‘클럽’이라는 담배 브랜드 역시 상징적이다. ‘클럽’은 당시 동독에서는 흔하지 않은, 미국에서 생산된 생담배를 서독 회사를 통해 직수입해서 만든 고급 필터담배였다. 베를린에서만 구할 수 있던 이 담배는 동독에서는 ‘계급의 적으로부터 직접 온 담배’(Die Tabake kamen direkt vom Klassenfeind)로 불렸다.


메르켈이 동독 체제가 보장하는 그럭저럭 안정된 삶을 박차고 나와 계급의 적으로부터 온 담배를 처음 피우기 시작했을 때, 오랜 기간 누적되어 온 동독 사회에서의 삶에 대한 불안과 불만이 바야흐로 ‘동독국가에 대한 저항’과 ‘자유’에의 추구라는 새로운 의지로 방향을 잡았음이 분명하다. 메르켈은 이제 자신의 새로운 목표를 향한 자기 방식의 싸움을 시작한 것이다. 


정치가 메르켈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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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메르켈은 신중하지만 단호하게 삶의 방법을 전환한다. 메르켈은 비판적 지식인들과의 교류를 넓혀갔다. 이러한 협력은 비단 동독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게엄령에 저항하는 폴란드의 개혁적 지식인들과 교류했다. 러시아어와 영어를 모두 구사할 수 있었던 메르켈은 소련과 서방의 정보에도 관심을 기울였다. 학회를 명목으로 서방 지식인들과 편지와 자료를 주고 받기도 했다. 지적인 훈련도 있었다. 동독 사회주의의 문제에 대한 비판적 인식은 깊어졌고, 서독의 사회적 시장경제에 대한 통찰과 이해도 높아졌다. 동독 혁명 이전까지 8년여의 기간은 신중한 인내와 준비의 시간이었다. 메르켈의 안목도 높아지고 있었다. 메르켈은 동독의 비판적 지식인 속에서도 독립적 시각과 전망을 갖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통일을 둘러싼 대논쟁 과정이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국가들의 연쇄적인 혁명과정에서 동독의 미래를 어떻게 만들어가야 할지에 대한 큰 논쟁이 동서독 양측에서 있었다. 논쟁은 크게 두 개의 방향으로 전개됐는데 하나는 신속한 독일 통일을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 다른 하나는 통일은 일단 장기 목표로 남겨두고 동독의 개혁과 재건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논쟁의 초기에는 준비 없는 조속한 통일은 거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현실성 없어 보였다. 동독 개혁파의 지배적 견해는 통일보다는 동독의 독립적 재건과 개혁이 우선이라는 입장이었다. 서독 진보파인 사민당 역시 통일 문제에 미온적이었다. 그러나 메르켈은 이러한 지배적 견해에 의견을 달리했다. 오랜 기간 동독 체제에 대한 예민한 관찰자였던 그녀는 동독은 개혁으로 뭔가 변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판단했고, 동독 개혁이라는 제3의 길은 환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메르켈의 이런 전망이 오히려 현실적이라는 점이 증명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다수 개혁파가 추구했던 동독 혁명 이후 개혁과 재건은 성과를 내지 못한 반면, 1990년 헬무트 콜은 국제정치에 ‘기회의 창’이 열린 격변의 순간을 낚아채 누구도 확신하지 못했던 독일의 통일을 현실로 만들었다. 동독과 서독, 그리고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한 통찰력만으로 이런 현명함은 기대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오랜 시간 동독과 서독 모두를 일정한 거리감을 갖고 균형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능력과 감각을 키워왔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메르켈은 동독 개혁, 재건에 대한 주변의 논쟁을 뒤로 하고 자신의 목표인 신속한 통일을 향한 정치적 행보를 밀어 붙였다. 시대의 흐름을 예리하게 감지하고, 통일이라는 실질적인 결과를 만들어 내기 위해 주도적으로 움직이고 있던 헬무트 콜의 기민당에 메르켈이 합류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로 보인다. 메르켈은 독일 통일조약이 맺어지기 직전에 기민당의 일원이 된다. 


메르켈이 정치 참여는 격변이 주는 불모의 열정에 취한 상태에서 내려진 결정은 아니었다. 오랜 준비와 기다림, 다양한 협력을 누적해 온 결과였다. 차근차근 정치를 향해 접근해 갔고, ‘별의 순간’이 왔을 때, 주저함 없이 뛰어들었다. 또한 거침없이 나아갔다. 회고록은 말하지 않지만, 이 때, 정치가 메르켈이 탄생한 것이다.



1) 동독의 마지막 정부로 동독 기민당의 로타르 드메지에르가 총리(각료 평의회 주석)를 맡아 독일 통일 조약을 체결했다. 존속기간은 1990년 4월 12일-1990년 10월 2일

2) 2+4 조약(독 Zwei-plus-Vier-Vertrag)은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2차 세계대전 전승국인 영국, 프랑스, 미국, 소련 4개국과 동·서 독일 사이에서 체결된 조약이다. 1990년 5월부터 4차례 진행된 2+4 회담의 최종 합의 문서이다. 이를 통해 통일 독일에 대한 국제적 지위를 결정하고 독일의 영토와 군사 문제-특히 소련군의 철수 문제- 등의 쟁점을 다뤘다.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Vertrag über die abschließende Regelung in Bezug auf Deutschland이라고도 한다.

3) Hans-Dietrich Genscher(한스-디트리히 겐셔, 1927-2016) 독일 자민당(FDP)의 정치인이다. 1974년부터 1992년까지 독일의 외무 장관이자 부총리로서 동방정책 추진 및 독일 통일을 지휘한  독일통일의 설계자 중 한명으로 평가되고 있는 외교의 거물이다. 겐셔는 독일의 외교 뿐만 아니라 동구권 붕괴 이후 현재의 유럽정치 질서의 기틀을 잡은 중심인물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하다.

4) Sternstunde(슈테른슈툰데, 별의순간)은 오스트리아 작가 슈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 1881-1942)의 잘 알려진 저서 『인류의 별의 순간들(Sternstunden der Menschheit)』(1927년 출간)에 나오는 표현으로 인생이나 역사 속에서 매우 특별하고 결정적인 순간 또는 운명적인 전환점이나 찬란하게 빛나는 순간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다. 

5) https://www.n-tv.de/politik/Als-Angela-Merkel-sich-erst-mal-eine-Zigarette-anzuendete-article25392511.html

6) <자유> 203-211. 통독 후 1991년 연방의회 의원이자 연방정부의 여성청소년부 장관으로서 정력적으로 일하기 시작할 때, 여성의 실직 위험에 대한 혜택이 비슷한 조건의 남성 노동자들에 비해 부족하게 제공되는 관행을 바꾸기 위해 꽤 열심히 일했다. 그러나 그의 이런 노력보다는 그녀가 회의석상에서 담배를 꼬나문 것이 더 큰 이슈가 되었다. 독일의 유력언론 《F.A.Z》은 “여전히 공공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는 콜 내각의 막내”라는 제목으로 그녀를 비난했다. 이 날 이후 메르켈은 담배를 피지 않았다.

7) <자유> p. 123. 

8)  당시 외환위기 상태였던 동독은 계급의 적이 생산한 생담배를 무상으로 공급받는 대신 화학물질과 설탕 등의 동독 생산 중간제품을 서방에 보상했다. 또 서방의 원자재로 동독에서 생산된 서방취향의 클럽 같은 담배는 베를린 호텔의 인터숍(intershop)을 통해 다시 서방에 재수출했다. 이것은 일종의 보상무역 방식이었다고 한다.

https://www.tagesspiegel.de/wirtschaft/immobilien/club-filter-zigaretten-made-in-pankow-1821424.html (2025년 1월 21일 검색)

9)  당시 서독 사민당의 총리후보였던 오스카 라퐁텐을 위시한 주류는 1990년대 말까지 통일 문제에 대해 유보 또는 거부 입장이었다. 그레고어 쇨겐, 김현성 역 󰡔빌리 브란트󰡕, pp. 323-332

10) <자유>, p.1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