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르켈 회고록 <자유> ⑫메르켈과 중도 정치 ⓶

2025-1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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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과 중도 정치 ⓶

아마도 메르켈의 정치에 대한 가장 현실적인 도전은 메르켈의 정치관과 대치되는 극우정당 ‘독일을 위한 대안’(AfD)의 급속한 성장일 것이다. AfD는 2013년 메르켈의 유로존 구제금융 정책에 반발해 창당되었다. 찻잔 속의 태풍에 불과할 것 같던 이 정당은 2015년 난민 수용 조치 이후 난민 증가와 난민정책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을 동원해 급속히 성장해 2017년 총선에서 제3당으로 도약한다. AfD의 부상은 기민/기사 연합에는 현실적인 위협으로 받아들여졌고, 또 당내 일각에서는 이른바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의 유산(Franz Josef Straußs Vermächtnis)’1)을 훼손한 것으로 보기도 했다. 메르켈은 중도 노선을 수정하라는 당내 보수파들의 강한 압박을 받게된다. 이에 대해 메르켈은 슈트라우스 인용구가 “우리의 본질을 이루고, 우리 신념의 핵을 차지하는 원칙들까지 상대화하거나 심지어 포기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된다면 그 발언(슈트라우스 인용구)는 내게 해당되지 않는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또한 AfD에 대해서도 “입에 거품 물지 말고”(ohne Schaum vorm Mund) 논리적 주장으로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대응해야 한다고 거듭해 강조했다. 메르켈은 AfD의 유권자를 모욕하는 말로 억눌러서는 안된다며 “우리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향하는지, 어떤 신념이 우리를 지탱하는지”를 더욱 분명히 설명할 것을 기민당 소속 정치인들에게 촉구했다. 2)


메르켈이 총리에서 퇴임한지 3년 뒤, 적-녹-황 연정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2025년 2월 치러진 독일 총선에서 AfD는 20.8%라는 기록적 득표율로, 16.4%를 득표한 사민당을 누르고 제2당으로 올라섰다. 메르켈 재임시에 치러진 2021년 총선에서는 10.8%로 원내 5당에 머물렀던 정당이 3년만에 독일의 주축정당 중 하나인 사민당을 밀어낸 충격적인 결과였다. 2000년대 후반부터 극우 포률리즘이 정당의 형태로 유럽 전역을 휩쓰는 와중에도 메르켈 시대의 독일은 정치적 안정성을 유지했고 극우 포률리즘을 어느 정도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독일도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아마 메르켈은 이런 선거결과에 가장 가슴 아파했을 사람 가운데 한명일 것이다. 


회고록은 2024년에 출간되었지만, 어느 정도는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것일까. 메르켈은 회고록에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극우정당 AfD가 실제로 얼마나 강해질지는 민주 정당들의 역할에 달려 있다. 만일 민주 정당들이 AfD가 제기하는 문제들만 줄기차게 이야기하면서 문제에 대한 실질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한 채 말로만 AfD를 누르려고 한다면 이들 세력은 억제할 수 없다. 반면에 민주 정당들이 우리 시대의 도전들에 대해 현실적인 대응책을 개발해 실천에 옮길 능력을 갖춘다면, 그것도 당파적인 책략을 떠나 문제의 본질에 맞는 올곧고 절제있는 정책을 추진해나간다면 유권자들도 분명히 알아줄 것이다.”(󰡔자유󰡕 p. 686)


메르켈이 재정의한 중도의 정치는 이제 어떤 운명을 맞게 될까. 신임 독일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Friedrich Merz)는 여러모로 메르켈과 대비되는 인물이다. 메르켈과 동갑인 메르츠는 기민당의 청년조직인 JU(Jungen Union, 청년 유니온)에서 성장한 기민당의 주류였다. 특히 이른바 “안데스 협약”(Anden-Pakt)3)이라는 기민당 내 비밀 권력 사조직의 회원이기도 하다. 2000년 메르켈이 당대표 출마 시 쇼이블레의 후임으로 기민당 원내대표였으나 이후 당내 권력투쟁 과정에서 밀려나고 뚜렷하지 않은 이유로 정계를 떠났다. 한동안 재계에 머물기도 했지만, 2018년 메르켈의 영향력이 현저하게 쇠퇴하자 정계에 복귀했다. 강한 보수 성향으로 알려져 있는 그가 메르켈이 구축해 놓은 기민당의 정치적 질서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어떤 정치를 추구할지는 조금 더 지켜봐야 할 것 같다.


여러 면에서 메르켈의 리더십과 메르켈 시대에 대한 재평가가 진행되고 있지만, 지금 나오는 평가의 내용이 최종적인 평가가 되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한다. 트럼프 등장 이후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변해 버린 국제정치에서 외교적 논점이든 유럽정치나 독일정치에 대한 입장이든 균형있는 판단 내리기는 점 점 더 어려워졌다. 독일 역시 국내정치나 경제가 이전과는 달리 매우 어려운 시기을 맞고 있다. 독일의 통치는 총리 한 사람이 좌우하는 초집중화된 방식이 아니라, 정치와 사회가 협력하고 역량을 끌어모아 조율된 행동과 합의된 결정을 만들어가는 체제이다. 결국 독일의 미래는 독일 공동체가 어떤 능력과 합의를 만들 수 있는지에 따라 그 모습이 달라질 것이다. 메르켈 시대는 위기의 시대였다. 이제 독일은 위기 이후의 위기라는 또 다른 조건에서 독일 모델의 가능성과 내구성을 시험하는 전후 가장 중요한 시기를 보내게 될 것이다.


1)이른바 슈트라우스의 인용구(Strauß-Zitat)로 불리는 것으로 1987년 기사당(CSU) 대표였던 프란츠 요제프 슈트라우스Franz Josef Straußs가 말한 “Rechts von der Union darf es keine demokratisch legitimierte Partei geben”(기민-기사연합의 오른편에는 선거로 합법화된 정치세력이 생겨서는 안된다)라는 인용구이다. 슈트라우스가 이 발언을 하게 된 배경에는 1970년 말부터 전개된 콜과 슈트라우스간의 격렬한 주도권 갈등이 있다. 슈트라우스의 이 말은 사실상 콜과의 싸움에서 물러나면서 던진 일종의 패전을 인정하는 성격의 말이다. 당시 콜은 이 말을 어떤 교리로 이해하지 않았고, 그의 후계자인 메르켈 역시 마찬가지였다. 다만 연합내의 보수파들은 이를 슈트라우스의 정치적 유산으로 수용해, 기민-기사당의 우파적 본질을 절대화하는 원칙으로 의미를 재생산했다. 슈트라우스 인용구의 정치적 맥락에 대해서는 “Wie rechts darf die Union sein?”(연합은 어디까지 우파일 수 있는가?)《F.A.Z》. 30. 05. 2016.

2) “Merkel: Müssen AfD mit Argumenten und "ohne Schaum vorm Mund" begegnen”(메르켈:  “AfD에 감정 섞지 말고, 논리적으로 대응해야”),《Welt》 03.05.2016. 

3)안데스 협약은 안덴 파크트(Anden-Pakt) 또는 팩토 안디노(Pacto andino)라고 불리는 기민당내 비밀 권력조직을 말한다. 1979년 초 기민당 청년조직 청년 유니온(Jungen Union, JU)내 출세욕이 강했던 청년 남성들이 콘라트 아데나워 재단 후원의 교육 여행 중 안데스 산맥을 넘어가는 비행기에서 장차 기민당 대표직과 총리직을 자신들 안에서 선정하고, 갈등 상황에서 정당성 여부와 상관없이 서로 험담하지 않겠다는 비밀협약을 맺은 것이 이 모임의 시초이다. 이후 이 모임은 기민당내 권력을 좌우하는 남성 권력동맹으로 발전한다. 비공식적 비밀 회합과 해외여행을 통해 긴밀한 네트워크를 유지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모임은 특별한 노선이나 이념을 추구하는 모임이 아니라 권력과 이익을 나누기 위해 결사된 비밀 사조직이다. 회원들은 모두 서독 출신 백인 남성이고, 대부분 가톨릭이며, 정치적 성향은 기민당내 강한 우익 편향의 입장을 취했다. 명단이 공개된 적은 없지만, 독일 언론의 집요한 취재로 대략적인 인물의 면모는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현 독일 총리인 프리드리히 메르츠를 비롯해, 이 모임의 간사였던 베른트 후크(Bernd Huck), 크리스티안 불프 (Christian Wulff) 전 연방 대통령, 폴커 보우피어(Volker Bouffier) 전 헤센주지사, 롤란트 코흐(Roland Koch) 전 헤센주지사, 페터 뮐러(Peter Müller) 전 연방헌법재판소 재판관, 하인리히 하자스(Heinrich Haasis) 전 독일 저축은행재단 국제협력회 이사장, 프란츠 요제프 융 (Franz Josef Jung) 전 독일 국방장관, 프리드베르트 플뤼거(Friedbert Pflüger) 전략 컨설팅 회사 Pflüger international GmbH 설립자 등 독일 정재계 전반의 실력자들이 넓게 포진되어 있다.  

   https://www.spiegel.de/politik/der-maennerbund-a-2475e027-0002-0001-0000-0000274971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