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편│① 일본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미군정의 점령 개혁

정혜윤
2019-05-22
조회수 3211

한국의 일본 이해에서 가장 큰 편향은 전전(戰前)과 전후(戰後)일본을 구분하지 않고 연속선상에서 바라본다는 점이다. 전후 일본에 대한 이해가 전전에 함몰되다보니 일본이 1945년 패전 이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왔다는 점은 포착되지 않는다.

굴절된 일본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수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지면을 가로지르는 정치 기행"을 연재하며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좋은 정치와 좋은 시민이 필요하다. 정치발전소는 이를 위해 매년 다른 나라의 민주주의를 이해하고 체험하는 강의와 기행을 이어 오고 있다. <지면을 가로지르는 정치 기행>에서는 강의와 기행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많은 독자들에게 강의만큼 알차고, 여행만큼 유쾌한 지적 경험을 제공할 수 있는 글을 소개하고자 한다. 각국의 민주주의를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글, 그리고 ‘에디터의 눈으로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번갈아 가며 소개할 예정이다. 에디터의 안내를 따라 민주주의의 세계를 뚜벅뚜벅 읽어 내려가다 보면, 어느새 다른 나라의 요동치는 정치 한복판에서 ‘우리를 고민하고 있는 자신’을 만나게 될 것으로 믿는다._정치기행 에디터 김지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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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을 가로지르는 정치 기행 ① 일본편

일본 현대 민주주의의 출발점: 미군정의 점령 개혁

글쓴이 ㅣ정혜윤 박사


일본에 대한 한국의 굴절된 시각

한국에서 일본에 대한 언급은 과거사 문제가 주를 이룬다. 한국의 근대사가 일제 식민지 기간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고, 현재에도 양국 관계에서 과거사가 주요 쟁점이 되는 이상, 이는 불가피한 현상이다. 그러나 일본의 현대사를 한국과 관련된 불행한 역사만을 통해 바라보다 보니 일본 이해가 편향적인 것도 사실이다. 한국과 특수한 관계가 있는 부분은 과대·과장 해석하는 반면, 관련이 없는 일본에 대해서는 무관심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가운데에서도 가장 큰 편향은 전전(戰前)의 일본과 전후(戰後)의 일본을 구분하지 않고 현대 일본을 군국주의 국가의 연장선으로 이해한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일본이 1945년 패전 이후 민주주의 국가로 발전해 왔다는 점은 잘 포착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일본을 보편적인 사회과학적 틀로 분석하기보다는 ‘특수론’이나 ‘문화론’의 입장에서 하나의 단일한 사회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다. 특히 자민당 장기집권에만 초점을 맞추어, 일본 정치 세력들 간의 다양한 차이나 경쟁은 주목하지 않는다. 사실 자민당은 농민·중소상공인·대기업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 집단을 대표하며 서로 다른 정책을 지향하는 파벌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민당은 민주적인 선거 경쟁에서 파벌 간 권력 교체를 통해 정치세력으로서의 건전성을 유지할 수 있었고, 국민들의 지지를 얻어 장기 집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이처럼 일당이 장기적으로 우위를 차지하는 현상은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라 스웨덴이나 인도 같은 민주주의 국가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자민당 일당 독재’라는 정확하지 않은 수사가 빈번히 사용된다. 즉 정권 교체 없는 일본의 민주주의를 한국의 1987년 이전 권위주의 체제와 등치시켜 사고하는 경향도 존재한다.


이런 시각은 일본이나 미국에서 축적된 많은 연구들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또한 일본에 대한 우리의 굴절된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 관계에도 일정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1)


물론 전전과 전후가 연속되는지 단절되는지는, 일본에서도 중요한 학술적 쟁점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어떤 논의도 일본 전후 민주주의 역사를 무시하고, 전전 군국주의 국가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다. 단절론은 전후 미군정의 민주적 개혁으로 일본이 전전과 다른 민주주의 질서를 가지게 되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반면 연속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전전 다이쇼데모크라시(大正デモクラシー)2) 시기에 이미 전후 민주주의 질서를 위한 민주·개혁적 요소가 존재했다고 주장한다. 어떤 주장이 타당한지를 떠나, 일본 민주주의 역사의 분기점이 1945년부터 1952년까지 존재한 미군정의 점령 통치 기간이라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굴절된 일본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수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분기점으로서 미군정의 점령 통치 : 비군사화와 민주주의를 위한 개혁의 시대

일본에 대한 미국의 점령 통치는 1945년 8월 30일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Arthur)가 미군과 함께 일본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시작되었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연합군 총사령부(GHQ)는 맥아더의 지휘 아래 과감한 개혁을 실시해 일본 전후 체제의 근간을 만들었다. 한국도 1945년부터 1948년까지 미군의 점령 통치를 경험했다. 그러나 두 나라에서 미군의 통치 방식 및 목표는 큰 차이가 있었고, 현대사에서 갖는 의미도 달랐다.


남한에 주둔한 미군은 소련과 협의를 통해 잠정적으로 신탁통치(직접 통치)를 했고, 남한 사회와 정치를 안정시키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 냉전 질서가 고착되어 갈수록 미국은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에 관심을 두었으며, 개혁 정책에는 상대적으로 무관심했다. 특히 남한을 통치한 점령 세력은 순수한 군사 조직에 가까웠으므로, 식민지를 경험한 한반도의 특수성이나 남한 내 정치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미군정은 일제 시기 관료와 경찰 기구들을 적극 활용했다. 이들이 제공한 정보를 토대로 남한 내 자발적 조직에서 주류를 이루었던 좌파 조직을 탄압했다. 즉 남한에서는 구식민지 국가기구가 ‘민주개혁’의 과정 없이 복원되었다.


반면 일본에서 점령 정책을 주도한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국가가 되도록, 전전의 군국주의 체제를 해체하는 비군사화와 민주주의 도입 및 개혁에 역점을 두었다. 또한 미국에는 상대적으로 지일(知日) 전문가들이 존재했고, 기존 일본 사회에 대한 이해를 토대로 새로운 사회로 전환시키는 데 중요한 정보들을 제공했다. 특히 일본 점령 초기 정책을 주도한 이들은 뉴딜주의자들이었고, 본토에서 파견된 행정관, 법률가, 학자 중심의 민정국(GS)이 통치 정책의 입안과 실행을 주도했다.


민정국은 비군사화 조치로 일본의 군대를 해산(국내 220만 명)시켰고, 해외 군대 330만 명도 무장해제했다. 육군성·해군성·군수성 등의 군사적 관료 기구는 물론 군국주의와 관계된 대정익찬회(大政翼賛会)3) 등의 단체들도 모두 해체되었다. 군수산업도 모두 금지되어 관련 공장 가동이 중단되었다. 아울러 극동 전범 재판이 열려, 전쟁 발발과 수행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한 이들 중 7명이 교수형 당했고 4,370명이 유죄를 받았다. 군인뿐 아니라 정치인·관료·사업가·언론인 중 전쟁 책임자에 대한 광범위한 공직 추방이 이루어져, 총 22만 명이 공직에서 쫓겨났다. 공직 추방은 무혈혁명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 정계와 재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미군정은 일본의 상당수 군국주의 국가기구를 폐지했고 행정적인 관료 기구 일부만 통치에 이용했다.


굴절된 일본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수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일본에서 미군정의 대(對)좌익 정책

물론 일본이나 한국에서 미군정이 민주주의적 기본 질서를 이식하려 한 점은 근본적으로 같다. 일본이나 남한 모두, 미군정에 의해 여성참정권을 비롯해 보통선거권이 전면 도입되었다. 당시 이승만을 비롯한 한국의 우파들은 비자유주의적 권위주의 질서를 선호했고, 사회 하층 및 청년층의 참정권 제한, 유권자 등록 서명, 월남인(越南人)을 위한 특별 선거구 설치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선거법 제정을 주장했다. 그러나 미국과 유엔은 이러한 제한선거를 인정하지 않았고, 일체의 선거권 제한 조항을 배제한 보통‧평등 선거제도를 받아들이도록 강제했다(박찬표 1996).


그러나 한반도에 주둔한 미군정은 민주적 제도와 질서를 수용하도록 했지만, 정치적 자유를 모두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와 일본을 점령한 미군정의 가장 큰 차이는 좌익에 대한 정책이었다. 이는 결국 양국의 정치적 자유의 수준, 나아가 민주주의의 출발점을 다르게 했다.


일본에서는 미국 점령 초기에 일본 공산당 간부를 포함한 2천4백여 명의 정치범들이 모두 석방되었다. 또한 언론과 사상을 통제한 <치안유지법>을 비롯해 모든 악법이 철폐되었다. 특히 점령 초 미군정을 지배한 정책 입안자들은 일본이 다시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국가가 되려면 ‘민주주의의 학교’라고 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그에 기반을 둔 좌파 정당이 사회의 기본 조직으로 필요하다고 보았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은 반공주의자였지만 일본에서 노동운동이 활성화되어야 반(反)군국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전통이 정착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일본노동조합법>은 헌법(1946년 11월)보다 앞선, 1945년 12월에 통과된다. 미군정이 노동조합의 결성을 장려하자 일본 노동운동도 활발해졌다. 3만5천 개의 노동조합에 650만 명의 노동자들이 가입했다. 좌파 정당도 크게 부흥하며 신헌법 아래 최초로 실시된 선거에서 사회당이 제1당이 되면서 사회당·민주당 내각이 수립될 수 있었다.


반면 한국을 통치한 미군정은 정치 공백 상태에서 대안 정부를 자임한 ‘조선건국준비위원회’나 ‘조선인민공화국’ 등 온건한 좌파 세력이 포함된 자발적 민족 운동 조직까지 모두 공산주의자 조직으로 보고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했다. 따라서 미군정은 좌파를 견제할 수 있는 반공적이고 폭력적인 우파 세력을 적극 지원하고 노조를 탄압했으며, 우파 정당과 어용 노조를 적극 육성했다.


굴절된 일본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수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일본의 정치 및 경제 질서의 재편

일본 현대사에서 미 점령기를 가장 중요한 분기점으로 보는 이유는, 결국 메이지 헌법을 개정해 정치적 질서의 재편을 가져오는 신헌법이 성립됐고, 경제 질서 방면에서도 구질서가 해체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전전 일본 경제를 이끌어 온 재벌이 해체되었다. 미군정은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스다(安田) 등 재벌 위주의 경제체제가 1930~40년대 팽창주의와 군국주의에 기여했다고 보고, 재벌 해체가 비군사화의 핵심이라고 여겼다. 4대 재벌은 자회사와 본사까지 모두 해체되며 재벌 가족 소유의 자산은 동결되고 수많은 작은 회사로 분할되었다. 미쓰이 물산은 2백 개 독립 회사로, 미쓰비시 상사는 130개 사로 분할되었고, <독점금지법>과 <상속세법>, <소득세법>이 제정되었다. 이를 계기로 일본 전후 경제는 소니(ソニー), 스바르(スバル), 혼다(ホンダ), 마쓰시타(松下) 같은 새로운 기업이 성장하게 되었다. 이후 일본의 기업들은 은행 상호 출자를 통해 기업의 계열화가 이루어지며 기업집단이라고 불리는 구조가 만들어지기는 했지만, 전전과 같은 재벌 체제나 가족 경영 형식은 사라졌다.


가장 중요한 변화는 헌법이었다. 원래 일본 내각은 미군정의 요청에 의해 헌법안 요강을 만들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일본 지도부가 제시한 헌법 개정안이 기존 군국주의 시기의 헌법과 유사하다고 보고 이를 거부했다. 맥아더 사령부에서 민주화 정책을 담당하는 민정국은 일본 정부에 신헌법안의 개요를 직접 작성해 제시했다. 일본 정부는 미군정이 제시한 개요를 토대로 초안을 작성했고, 이것이 결국 일본의 신헌법으로 공포되었다.


신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첫째, 국민주권주의이다. 천황은 국가와 국민 통합의 상징으로 제한(통치권 없음)되었다. 국가 지도자는 이제 천황의 지시가 아니라 국민의 손에 의해 선출되도록 민주정치의 틀이 도입되었다. 둘째, 신헌법의 중요한 점은 육해공군을 포함해 여하의 전쟁 수단도 유지할 수 없으며 전쟁을 영원히 포기하고 군비와 교전권을 부정하는 9조를 보유했다는 것이다. 이 9조 때문에 일본의 헌법은 ‘평화헌법’이라고 불리게 되었고, 일본의 자위대나 해외파병은 계속 ‘위헌’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사실 천황의 전쟁범죄에 대한 처벌과 천황제 존속 여부는 연합국 간 국제적 쟁점이었다. 그러나 지일(知日) 미국 관계자들은 천황을 전범 재판에서 제외시키고 천황제를 존속시키는 편이 일본에서 민주주의 개혁을 추진하는 데 효과적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쇼와(昭和) 천황은 전쟁에 대한 책임으로 처벌받는 대신, 상징적 존재로 역할을 바꾸며 생존할 수 있었다.


그 밖에도 미국의 개혁정책에 따라 토지개혁이 실시돼 지주-소작농 관계가 사실상 해체되었으며, 모든 군국주의 교육이 폐지되고 민주적 교육제도가 도입되었다. 지방자치도 시작돼 지방의회 의원과 자치단체 수장을 주민의 투표로 선출하는 등 현대 일본 민주주의 체제의 근간을 이루는 제반 개혁 조치가 시행됐다.


굴절된 일본 이해는 현재 한일 간 갈등관계에도 일정하게 영향을 주고 있고, 더 큰 문제는 일본의 현실 민주주의로부터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수많은 교훈과 함의를 놓친다는 데 있다반개혁(역코스) 시기와 구체제 회귀의 실패

전 세계적으로 냉전 질서가 심화되고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일본 미군정의 정책 역시 1940년대 후반이 되면 ‘역코스’(逆コース)라 불리는 반(反)개혁 바람에 휩싸인다.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에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견고한 방벽이자, 경제적으로 강력한 자립적 국가로 만드는 방향으로 전환했다. 특히 연합군 사령부 내에서 뉴딜주의자 중심의 민정국이 헤게모니를 잃고, 정보·보안·검열을 주요 임무로 하는 군인 중심의 정보참모부(G2)가 주도권을 얻었다.


미군정은 1947년 2월 1일 총파업 중지를 명령하고 1949년 7월에는 공무원의 쟁의를 금지시켰다. 재벌 해체 작업은 중지되고 기업의 자유경쟁이 독려됐다. 또한 1949년부터 공무원, 기업체, 교육계 및 언론계에서 공산당 계열 인물이 추방되면서 정부 기관에서는 9천 명, 민간에서는 2만 명이 축출되었다. 반면 현 아베 수상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를 비롯, A급 전범으로 분류되었던 이들이 석방되고 전전 군국주의 세력으로 분류되었던 20만 명의 보수계 인사들이 공직 추방에서 해제돼 정계로 복귀했다.


역코스 이후 복권된 상당수의 전전 세력은 끊임없이 구체제 회귀를 시도했다. 가령 1955년부터 1956년까지 수상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나 1957년부터 1960년까지 수상이자 전전 세력의 중심인 기시 노부스케는 구질서로 돌아가는 조치들을 취하며 사회당·공산당 및 노동조합들과 대립했다. 이들은 사회당의 주요 기반인 교직원 노동조합을 통제하는 근무 평가 정책을 실시하거나 경관의 권한을 큰 폭으로 강화하려는 법안을 추진해 커다란 사회적 반발을 야기했다. 나아가 일본이 다시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가 되는 것을 꿈꿨다. 먼저 평화헌법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1951년 맺어진 미국과 일본 사이의 안보 조약을 개정하고자 했다. 기시 수상은 안보 조약 개정을 위해 1958년부터 미국과 협상에 들어갔다. 새로운 안보 조약에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군사적으로 좀 더 적극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조항이 포함됐다. 즉 궁극적으로는 헌법 9조를 개정해, 일본을 군사력을 보유할 수 있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구체제로 회귀하려는 시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 설명> 1960년 일본 안보투쟁 당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시위대. 신미일안보조약 체결을 둘라싸고 일본 현대사에서 예외적인 격렬한 대중시위가 전개되었다._출처 위키미디어 
<사진 설명> 1960년 일본 안보 투쟁 당시 국회의사당을 포위한 시위대. 신미일안보조약 체결을 둘러싸고 일본 현대사에서 예외적인 격렬한 대중 시위가 전개되었다.
_출처: 위키미디어


시민혁명의 전통이 없는 일본은 격렬한 대중투쟁이 드문 국가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1959년부터 1960년까지 격렬하게 전개된 안보 투쟁만큼은 예외다. 1959년 3월에 사회당을 비롯한 노동조합과 시민 단체는 ‘안보 조약 개정 저지 국민회의’를 조직했고, 학생과 지식인층이 운동에 광범위하게 참가했다. 1959년 말부터는 미쓰이(三井) 광산 노동자 127명에 대한 지명 해고로 촉발된, 미쓰이·미이케(三井․三池) 투쟁이라는 거센 파업 투쟁이 일어나 총자본과 총노동의 대결로 이어졌다. 안보 투쟁은 1960년 5월과 6월에 절정을 이뤘다. 노동자・학생・지식인 및 주부들까지 모여 국회의사당과 수상 관저 밖에서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다. 6월 4일에는 전국 445곳 560만 명이 데모에 참가했다. 가장 중요한 구호는 미일 안보 조약을 반대하는 것이었지만, 단순히 조약 자체의 문제는 아니었다. 시위가 격렬하고 광범위하게 전개된 이유는, 전쟁의 참상을 경험한 일본 국민이 다시 권위적이고 전쟁이 가능한 전전 체제로 돌아갈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불과 15년간의 신헌법 체제를 경험했지만, 시민들 사이에는 민주주의는 더 이상 거스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폭넓게 존재했다.


신미일 안보 조약은 날치기로 통과되며 성립되었지만, 결국 기시 내각은 정국 안정을 위해 물러나야 했다. 이후 자민당 수상들은 더 이상 헌법 개정이나 안보 문제 같은 주제를 정치적 쟁점으로 삼지 않았다. 일본 자민당 주류가 ‘보수 본류 노선(일본의 방위 부담은 미국에 의존해 최소한으로 억제하고, 경제성장에 집중)’을 택하게 된 것은 1960년의 투쟁이 큰 교훈이 되었기 때문이다. 자민당 정부는 민주적 질서인 신헌법 체제를 수용하며 경제 발전을 중시하는 정책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안보 투쟁에서 알 수 있듯 일본 국민들은, 비록 민주적 질서와 평화헌법이 미군정에 의해 위로부터 주어진 것이었지만, 이를 상당 부분 수용하고 전전 체제로 돌아가는 것에 반대했다. 특히 ‘과거 회귀’를 반대하는 사회당·공산당과 그 기반인 노동조합을 비롯한 시민사회 세력이 지난 15년간 빠르게 형성되었다.


일본에서 미군정의 통치는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다. 1945년부터 1952년까지 7년 통치의 전반기는 일본을 다시는 전쟁을 일으킬 수 없는 특수하고도 평화로운 민주주의국가로 재편하려 했던 뉴딜주의자들의 시도가 중심을 이뤘다. 점령 후반기를 통치한 미군들은 일본을 냉전 질서에 편입시키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방벽으로서, 군대를 보유한 보통 국가로 되돌리고자 했다. 이 점령 통치의 이중성은 이후 보수-혁신이라는 자민당과 사회당 간 정치 대립 구도로 이어지며 ‘55년 체제’를 형성한다.


헌팅턴은 ‘일본 민주주의는 미군 주둔의 산물’이라고 주장했다(Huntington 1991, 24). 그의 설명대로 미국의 직접적인 개입이 없었다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이 민주주의국가로 이행했을지 여부는 분명 논쟁의 소지가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일본 민주주의 역사에서 미군정 시기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는 좀 더 깊이 현대 민주주의 국가 일본을 이해할 필요가 있으며 그 출발점은 1945년부터 7년간 이루어진 미군정의 점령 통치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나아가 같은 시기 남한의 국가 형성을 되짚어 보는 것은 곧 일본과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 민주주의의 궤적을 알아보는 길이기도 하다.


<끝>


주석

1) 한국에서 굴절된 일본 이해에 대한 보다 자세한 논의는 박철희(2015, 21-28)를 참고할 것.

2) 1911-1925까지 다이쇼천황 즉위 기간 동안, 일본에서 정치, 사회, 문화 각 방면에서 나타난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경향을 말한다.

3) 1940년 10월부터 1945년 패전까지 존재했던 일본 제국의 관제 국민통합 단일기구이다. 모든 정당들을 해산하고 군부 관료 우익세력까지 포괄해 대정익찬회를 결성했다.


참고문헌

● 박찬표. 1996. “제헌국회 선거법과 한국의 국가형성.” 『한국정치학회보』29(3), 69-90.

박철희. 2016. 『자민당 정권과 전후 체제의 변용.』.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Huntington, Samuel P. 1991. "Democracy's Third Wave." Journal of Democracy 2(2). 12-34.


정혜윤 ㅣ박사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일본학과(일본정치)에서 석사학위를 거쳐, 2018년 정치외교학과에서 박사 학위(논문명: “정치개혁기 일본의 노동정치 : 민주당과 렌고(連合)의 연계를 중심으로”)를 취득했다. 연구 논문으로 “일본 민주당과 렌고 간 연계 형성과 지속의 정치과정”(『국제정치논총』, 2018), “일본의 파견법 개정 과정을 통해 본 노동 정책 과정의 변화: 비정치적 심의회 정책 결정에서 당파성 정치로의 변화”(『평화연구』, 2018), “일본 유니온 운동의 현황과 정치적 역할”(『비교민주주의 연구』, 2014)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