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③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백두혈통 김여정

2019-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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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여정은 최룡해에게도 반말을 하며 직함 없이 그냥 ‘최룡해’라고 부른다. 최룡해도 김여정 앞에선 쩔쩔맨다.”

몇 가지 단편적인 사례만으로도 김여정은 김정은이 없는 자리에서 김정은을 대신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겨우 서른 살을 넘긴 김여정은 어떻게 이런 권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는 누구인가?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를 연재하며

앞으로 인물이라는 창을 통해 북한 정치를 이해하는 글을 연재할 계획이다. 이번 호에는 세번째로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백두혈통 김여정”을  다룬다. 앞으로 이어질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1부의 집필 계획은 다음과 같다.

  1. 북핵 협상 대표 김영철
  2. 김정은 시대의 2인자 최룡해
  3.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백두혈통 김여정
  4. 혜성처럼 나타난 총리 김재룡
  5. 뚝심 있는 외무상 리용호
  6. 막후의 실력자 당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조용원


***


인물로 보는 김정은 시대의 북한 정치 ③ 
김정은의 최측근이자 백두혈통 김여정

글쓴이ㅣ이대근 경향신문 논설고문


김여정에 쩔쩔매는 최룡해, 김영남

“김여정은 최룡해에게도 반말을 하며 직함 없이 그냥 ‘최룡해’라고 부른다. 최룡해도 김여정 앞에선 쩔쩔맨다.” 국가정보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유성옥 원장이 2016년 5월 한 언론사 인터뷰에서 한 말이다(동아일보 2016/5/21). 당시 66세인 최룡해는 당 최고 의사 결정 기관인 정치국 상무위원으로 당 공식 서열 2위였고, 당시 29세 정도인 김여정은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이었다. 나이, 공식 지위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김여정은 최룡해와 비교할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럼에도 반말을 했다는 것은 두 사람 사이에 공식 지위는 아무 의미가 없음을 말해 준다.


2018년 2월 9일 김여정과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평창 동계 올림픽 개막식 참석 차 인천공항에 도착한 뒤 귀빈실로 들어올 때였다. 김 위원장이 먼저 들어왔지만, 자리에 앉지 않고 눈치를 보며 기다리더니 뒤늦게 들어온 김여정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김여정이 김정은의 특사 자격으로 온 만큼 그 상황상 서열이 앞섰다고 할 수도 있지만, 당시 89세의 김 위원장은 공식적인 국가 대표이자 정치국 상무위원이었던 반면, 당시 30세 정도의 김여정은 선전선동부 제1부부장이었다. 그럼에도 김여정은 당직 및 국가직의 차이를 뛰어 넘어 상석을 차지했다. 김여정은 2019년 6월 12일 이희호 여사 서거를 애도하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조의문과 조화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남측 인사에 전달할 때도 김정은의 대리인 역할을 했다.


<사진 설명>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김여정, 김영남 일행_위키미디어


2018년 9월 평양 남북 정상회담 때의 일이다. 남측 당국자가 당시 대미, 대남 문제를 총괄하며 실세로 부상한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에게 한 가지 요청을 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보고해서 결심을 받아 내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김 부위원장은 ‘자신이 건의 드리기 어렵다’며 난색을 표해 김여정에게 요청했더니 즉시 처리했다고 한다(중앙일보 2019/7/18).


몇 가지 단편적인 사례만으로도 김여정은 김정은이 없는 자리에서 김정은을 대신할 수 있는 권위를 갖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당연히 그 권위는 눈에 보이는 제도를 뛰어 넘어, ‘보이지 않는 그 무엇’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분명하다.


이제 겨우 서른 살을 넘긴 김여정은 어떻게 이런 권력을 갖게 되었을까? 그는 누구인가?



김여정 권력의 배경: 김정일의 총애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은 가족들과 함께하는 공식・비공식 행사가 있을 때 부인과 어린 자녀들의 자리를 일정하게 정해 놓았다고 한다. 김정일의 오른쪽엔 부인 고용희, 왼쪽에는 김여정, 고용희의 옆에는 김정은, 김여정의 옆에는 김정철. 고용희가 없을 때는 김정은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김정철과 김여정의 위치는 변함이 없었다. 김정일이 정한 세 남매의 서열이 김정은, 김여정, 김정철 순이라는 뜻이다(후지모토 2003, 228). 김정일은 이미 자신의 자식들이 어렸을 때부터 정은과 함께 북한을 통치할 정치 지도자로 여정을 꼽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추측케 한다.


<사진 설명> 김정일 가족 좌석 배치도


김정일이 2001년 7~8월 러시아를 방문했을 때였다. 그는 콘스탄틴 풀리코프스키 러시아 극동연방지구 대통령 전권 대리인과의 대화에서 맏딸(김설송)1)도 후계자의 한 명이라며 가족사진을 보여 준 뒤 이런 말을 했다. “나에게는 (그 밖에도) 4명의 자식이 있지만 아래 두 명이 정치에 관심이 강하다. 위 두 명은 정치에 무관심하다.” 위의 두 명이란 성혜림과의 사이에서 난 장남 정남(당시 30세)과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차남 정철(당시 19세)을 말한다. 아래 두 명은 고용희와의 사이에서 낳은 3남 정은(당시 17세)과 막내 딸 여정(당시 13세)을 이르는 것이다(리 소테츠 2017, 310). 김정일은 장남인 정남을 낳았을 때 주체할 수 없이 기뻐했고2) 금이야 옥이야 하며 키웠지만, 1987년 여정을 낳자 정남에게 쏟았던 비정상적일 정도의 애정3)은 정은과 여정으로 옮겨 갔다(성혜랑 2001, 485). 김정일은 마흔여섯 살에 얻은 여정을 ‘공주’라며 애지중지했다(<KBS 누구 북한을 움직이는가> 제작팀·류종훈 PD, 123).


김정일은 현지 지도 때 후계자 정치 수업을 위해서였는지 모르지만, 남매를 자주 데리고 다녔다. 김정은이 2007년 무렵부터 김정일 현지 지도에 동행(고미 2018, 37)한 점으로 미루어 김여정도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2009년 4월 김정일이 원산농업대학을 방문했을 때는 정철·정은·여정 세 남매가 함께 동행하기도 했다(이영종 2010, 30).


김여정이 정치 무대에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2010년 9월 28일 제3차 노동당 대표자회 때였다. 뇌졸중에서 회복된 뒤 서둘러 후계 체제 구축에 나선 김정일은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임명, 그가 후계자임을 공식화했다. 이때 김정일이 핵심 간부들과 기념 촬영하는 자리에 김정은 외에 김여정도 참여했다. 김정은이 후계자 자격으로 처음 등장하는 공식적인 자리에 김여정도 동반 데뷔한 셈이다. 남매가 함께한 후계자로서의 첫 출발이었다.


남매는 다른 형제는 배제한 채 항상 한 팀으로 움직였다. 김정일이 2008년 8월 14일 뇌졸중으로 쓰러져 집중 치료실에 입원해 있는 동안 항상 곁을 지켰던 것도 정은·여정 남매였다(리 소테츠 2017, 328). 김정일 장례식 기간인 2011년 12월 20일 김정일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조문객을 맞은 가족도 정은·여정 남매뿐이었다. 다른 형제인 설송·정남·정철은 상주 역할도 하지 못했다.


김정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은·여정에게 정치적 역할을 부여할 생각을 했고, 그 구상대로 이행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남매가 하나의 정치 단위로서 김정일 체제, 김정은 후계자 체제, 김정은 체제 등 세 시기를 무사히 통과했을 뿐만 아니라, 남매 통치가 김정은 체제의 통치 방식으로까지 자리 잡았다면 김정일의 구상은 꽤 성공적인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북한은 국가가 지도자 개인의 소유물인 가산제적 국가에 해당한다. 이런 국가라면 가부장이 후계자와 후계자의 조력자를 미리 결정하고 일정한 시험기를 거쳐 새 체제를 출범시킬 수 있다. 한마디로, 김정은 시대 김여정의 위상과 역할은 가부장에 의해 사전에 부여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3대 수령으로 등극한 김정은이 아버지의 뜻에도 불구하고 김여정에게 권력을 나눠 줄 의사가 없었다면 남매 통치는 실현되기 어렵다. 그건 총살형을 당한 김정은의 고모부 장성택 당 행정부장의 운명이 잘 말해 준다. 정치적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선대 수령만이 아니라 후대 수령의 신임도 필요하다. 그런데 김여정은 두 수령의 신임을 모두 받은 유일한 존재다. 그것이 김여정이 김정은의 대리인 역할을 하는 근거이다.



우애 있고 공통점 많았던 정은·여정 남매

김여정의 출생 연도는 1987, 1988, 1989년 설이 분분하다. 김정일의 개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김정일이 직접 김여정을 토끼띠라고 말했으므로 1987년 9월 26일 출생했다고 주장한다(후지모토 2010, 59). 한국 정보 당국은 1988년생으로, 미국 정보 당국은 1989년생으로 각각 파악하고 있다(파이필드 2019, 356). 김정은의 출생 연도 역시 1982, 1983, 1984년 설로 나뉜다. 북한의 공식 입장은 1982년생이다. 김정은과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후지모토는 김정일이 김정은에게 “1983년생이니 멧돼지구나”라고 말해 돼지띠임을 직접 확인했다고 한다(후지모토 2010, 59). 한국 정부는 1984년을 실제 출생 연도로 판단한다. 스위스에 체류할 당시 사용한 여권, 김정일의 장남 김정남의 증언, 김정일의 부인 고용희의 동생으로 미국에 망명한 고용숙의 증언이 모두 1984년으로 일치하기 때문이다(고미 2018, 19). 김정일도 1941년생이지만 1942년생으로 바꿨다는 것이 정설인 점을 고려하면, 김정은의 출생 연도 역시 정치적 고려로 바꾸었다고 판단하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외부의 시선으로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러나 북한은 수령의 위대함이 구현되어야 하는 극장 국가이다. 권력의 정통성도 인민이 아니라 신비스러운 권위로부터 나와야 한다. 그러자면 수령에게는 뭔가 신성한 운명 같은 것이 느껴져야 한다. 하다못해 출생 연도라도 특별해야 한다. 김일성 1912년생, 김정일 1942년생, 김정은 1982년생이면 마지막 숫자가 2로 맞아 떨어지는 데다 30년, 40년의 나이차, 할아버지와는 70년 차이 역시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숫자를 얻을 수 있다. 이러면 3대가 수령의 대를 이어가야 할 어떤 피할 수 없는 운명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외부에서 보기에는 코웃음 칠 일이지만, 극장 국가를 운영하는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관객이 극장을 떠나지 않도록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진 설명> 평양 만수대 언덕에 위치한 김일성, 김정일 동상_조선중앙통신


김여정의 출생 연도를 북한이 공개하지 않아 외부 세계가 모르고 있는 것일 뿐, 그의 출생 시기를 둘러싼 시비는 없다. 수령이 아닌, 그의 출생 연도를 조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북한이 그의 출생 연도를 바꾼다면 눈 여겨 봐야 한다. 권력관계에 중대한 변화를 시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가 실제 일어날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에서 나이 조작과 권력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김여정은 ‘일순’으로 태어나서, ‘정순’으로 자라고 ‘여정’으로 세상에 나왔다. 원래 이름은 일순이지만, 스위스 베른에 정철, 정은과 함께 3남매가 유학할 때는 정순이라는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4) 유학 때 정철이 박철, 정은이 박은이라고 한 것처럼 가명을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언제 여정으로 바꾸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이름 변경 사실 자체는 주목할 필요가 있다. 김정은처럼 출생 연도를 바꾼 수준은 아니지만, 이름 변경은 그의 위상 변화를 고려한 결과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일순보다는 여정이 권력자다운 이름이기는 하다.


여정은 1996~2000년 말(혹은 2001년 1월) 스위스 베른에서 정은과 함께 유학했다. 남매는 처음 국제 학교에 입학했으나 몇 달 후 집 인근 공립 초등학교로 옮겼고, 정은은 공립 중학교까지 다녔다. 1996년 4월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보충 학습반에 들어간 여정은 1997년 8월 초부터 초등 3학년 반으로 옮겼다가 6학년 재학 중인 2000년 말 학교를 그만두고 귀국했다. 한 일본 언론은 1998년 2월 7일 남매가 참여한 학교 음악 발표회 장면이 담긴 동영상을 입수해 보도한 적이 있다.


이 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던 교사에 따르면, 북한 외교관의 딸로 신분을 위장한 여정은 등하교 때 여러 명의 여성이 교대로 동행했다. 조금이라도 몸 상태가 좋지 않으면, 주변에서 곧바로 병원으로 데려가는 등 보통 학생과 다른 대우를 받았다(이영종 2010, 54). 당시 스위스 대사가 리수용 당 국제부장, 국제 담당 부위원장이다. 김정일은 김정남의 스위스 제네바 유학을 위해 외무성 관리 리수용을 통해 학교를 미리 탐색한 뒤 김정남을 유학 보내면서 그를 주(駐)스위스 북한 대사관의 공사로 임명했다. 그 당시 그는 리철이라는 가명을 썼다. 나중에 정철, 정은, 여정 세 남매가 베른으로 유학할 시점에는 스위스 대사로 승진해 베른으로 근무지를 옮겨 학교를 마칠 때까지 대사로 지냈다(파이필드 2019, 298-300).


고용희의 여동생, 즉 세 남매의 이모와 이모부인 고용숙, 리강 부부는 2년간 이들을 뒷바라지했다.


“우리는 평범한 집에 살며 평범한 가족처럼 행동했어요. 나는 아이들 엄마 행세를 했습니다. 아이들 학교 친구들이 찾아오면 간식도 만들어 주었어요. 생일 파티를 하고 선물도 주고받는 아주 평범한 어린 시절이었습니다. 스위스 아이들이 집으로 놀러 오기도 했어요”(파이필드 2019, 64-65).


고용숙·리강 부부는 고용희가 유방암 진단을 받고, 프랑스에서 집중 치료를 하던 1998년 5월 17일 자신들의 자녀 세 명과 함께 미국 대사관으로 가 망명 신청을 했다. 이들은 현재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파이필드 2019, 73-74).


정은·여정 남매는 방학이 되면 보통 두세 달 씩 평양으로 와서 지냈고, 김일성·김정일의 생일 등 중요한 기념일에도 귀국했기 때문에 실제 스위스 체류 기간은 1년 중 5개월 정도였다(후지모토 2010, 139). 이처럼 정은·여정 남매는 함께 먼 나라로 떠나 유학 생활을 했다. 정철과 달리 정치에 특별히 관심도 있었다. 아버지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으며 현지 지도에도 함께 따라 다녔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 남매간 우애가 깊었다고 볼 수 있다. 남매는 정철과 비교하면 여러 면에서 확실히 달랐다.


“정철 왕자는 10대 때부터 이성에 대한 관심이 동생 정은보다는 많아 보였다. 그가 열다섯 살인가 열여섯 살이었을 때 여정 아가씨의 수행원이었던 여자에게 푹 빠졌던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이국적이고 예뻤으며 정철 대장보다 한 살 많았다. 여정 아가씨가 수행원들과 가는 여자들만의 영화관에 정철 대장이 그녀를 보러 들어갔다가 10분 정도 후에 여정 아가씨에게 끌려 나온 적도 있었다”(후지모토 2010, 135).


김정은은 11살 때 여정에게 큰 소리로 화를 낸 적이 있다. 여정이 ‘작은 오빠’라고 불렀다고 그런 것이다(고미 2018, 30). 김정은은 어릴 때부터 3남매의 둘째가 아니라, 홀로 ‘대장 노릇’에 익숙해 있었다.



김정은 시대의 개막과 함께 통치에 참여

김여정이 2000년 말까지 베른에서 학교를 다닌 이후 남매 통치를 시작하기 전까지의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귀국 이후 사교육을 받은 뒤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결혼과 출산을 했지만 남편이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시대가 개막함과 동시에 김여정은 김정은과 관련된 행사인 1호 행사를 관리하는 당 선전전동부 과장 겸 국방위원회 행사과장으로 김정은의 그림자 역할을 했다(전정환 외 2018, 88). 김정은은 2014년 9월경부터 중요 결정 사항을 제외한 일반적인 사무 처리 권한을 여동생에게 위임(리 소테츠 2017, 350), 본격적인 남매 통치를 시작했다. 2014년 3월 선전선동부 부부장으로 승진한 뒤에는 선전선동부의 일을 넘어 통치에 광범위하게 참여했다. 2017년 10월에는 당 최고 의사 결정 기구인 정치국의 후보 위원에까지 올랐다. 김정은 권력 승계 5년 만의 전례 없는 초고속 승진이었다. 2018년 4월 13일 쑹타오(宋濤) 중국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을 단장으로 한 50여 명의 중국 예술단이 평양 공항에 도착했을 때 그가 영접하는 장면은 그의 위상을 상징적이고 실질적으로 입증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처럼 선전선동부를 통해 역량을 발휘한 막내 딸

김여정이 지도하는 당 선전선동부는 북한 내에서 당 조직지도부 다음으로 강력한 권력기관이자 북한 체제 유지의 핵심 기둥이다. 노동당의 영도적 역할은 당 생활 지도와 당 정책 지도로 구분되고, 당 생활 지도는 조직 생활 지도와 사상 생활 지도로 세분된다. 조직 생활은 당 조직 지도부가, 사상 생활은 당 선전선동부가 담당한다. 김정일은 1974년 8월 전국 당 조직 일꾼 강습회에서 조직 지도부가 당 생활을 장악하고 결함과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판단하며, 선전선동부는 이에 기초해 결함을 고치는 데 맞는 사상 교양을 해야 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선전선동부는 김정일이 후계자 시절부터 당 조직 지도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북한 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1964년 김정일이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하고 당 조직 생활을 시작한 부서도, 1970년대 후계자로서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동원한 권력기관도 조직 지도부와 선전선동부였다(정창현 1999, 109). 김정일은 선전선동부 지도원을 거쳐 과장, 부부장, 부장, 선전 담당 비서에 이르는 시기에 여러 업적을 남김으로써 후계자로서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 조직의 위상은 말단인 지도원의 위세로도 알 수 있다.


“일개 지도원이라고 하면 남쪽에서는 우습게볼지 모르지만 북한에서는 다르다. 예를 들어 내각과 내각 산하 기관 국가보위부 사회안전부를 통제하는 (조직지도부 내) 중앙지도과 지도원의 경우 내각 산하 기구의 당위원회 비서, 내각 상(장관), 부상(차관)급을 상대하며 국장급은 상대하지도 않는 실세 자리다”(정창현 1999, 113).


1967년 박금철 숙청은 선전선동부가 권력 유지와 변화에 얼마나 중요한 기능을 하는지 웅변해 준다. 김일성의 동생 김영주가 조직 비서 겸 조직지도부장, 정치위원회 후보 위원이 되면서 당의 실권을 확보해 나가자 위기의식을 느낀 당 조직 담당 부위원장인 박금철은 선전선동부를 동원했다. 김도만 선전 담당 비서 겸 선전선동부장을 시켜 자신을 우상화하는 <일편단심>이라는 영화를 제작하게 하고 자신의 생가도 꾸렸다. 박금철이 주도한 갑산공작위원회의 항일 활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자기 처가 남편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것이 영화의 줄거리이다.


중국에서 경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둘러싼 대립이 문화대혁명을 촉발한 것처럼 사회주의 국가에서 문화 활동은 흔히 사상투쟁의 중요한 무기로 활용된다.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신화에 도전한 박금철의 <일편단심>도 선전선동부를 중심으로 한 사상투쟁과 권력투쟁을 촉발했다. 박금철이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선전선동부를 이용했다면, 김정일은 그 권력의 부상을 분쇄하기 위해 선전선동부를 동원했다. 1968년 선전선동부 문화예술지도 과장으로 승진한 김정일은 박금철 사건을 계기로 문화 예술 분야 사상투쟁을 벌였다. 이때 그는 <피바다>, <꽃 파는 처녀>, <밀림아 이야기하라>, <당의 참된 딸>, <금강산의 노래> 등 5대 혁명 가극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5대 혁명 가극은 김정일이 하나의 문화 예술 장르를 창조한 일대 문화적 혁명이었다. 빨치산 1세대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 낸 김정일은 이 업적을 발판으로 권력에 한걸음 다가설 수 있었다(정창현 1999, 120).


선전선동부의 지도 대상은 선전 활동, 사상 교육 및 출판, 영화, 예술, 언론 분야를 망라한다. 선전선동부는 또한 내각의 문화성과 출판지도국은 물론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조선중앙통신사, 『노동신문』, 조선노동당출판사, 내각 기관지인 민주조선 등 언론사와 출판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기록영화촬영소, 만수대창작사 등 모든 문화 예술 기관을 통제한다. 소속 인원도 방대해서 5백여 명에 이른다(정보사령부 2004, 22).


김여정도 선전선동부를 담당하고 나서 김정은 체제의 이미지를 일대 혁신했다. 김정은의 활동을 취급하는 선전선동부 제5과인 기록영화제작과를 직접 지휘하며 김정은의 동정을 담은 보고서, 사진을 선별해 언론 매체를 통해 알리는 일을 했다(파이필드 2019, 358). 그는 김정일 시대의 고루한 사상 교양 활동과 체제 선전 방식을 완전히 탈피했다. 김정은을 인민 친화적인 지도자로 부각하고, 대외적으로는 유연하고 부드러운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2012년 7월 평양 ‘릉라인민유원지’에서 김정은·리설주 부부가 팔짱을 끼고 돌고래 곡예를 보며 웃는 파격적인 장면도 공개했다. 같은 해 7월 모란봉 악단 공연에서는 미키마우스 복장의 마스코트가 등장하는가 하면, 할리우드 영화 <로키>의 주제곡이 흘러나왔고,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성 공연자도 등장했다. 같은 해 9월 1일에는 다시 김정은·리설주 부부가 평양의 번화가 창전거리를 팝콘을 먹으며 걷는 모습을 공개했다.


북한 언론도 획기적으로 변했다. 미담이나 성공담만을 다루며 체제의 장점만 선전하던 북한 매체들이 내부의 치부를 공개하며 김정은의 지시를 잘 실행하지 않는 기관을 비판하기도 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이 황해북도 산림 조성 문제를 지적한 것이 좋은 예이다. “양묘장에는 나무모가 없는 상태이고 온실에서는 남새(채소)만을 재배하고 있었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비판했다. 그러면서 “군에서는 잘못된 편향들을 시급히 바로 잡기 위한 대책을 세우지 않고 있는 상태”라고 질책했다(주성하 2018, 107). 미국 대통령의 사진과 이름이 1면에 그대로 크게 실리기도 했다. “지금까지 미 제국주의와의 계급투쟁 이론으로 세뇌당해 온 조선 사람들에게는 상당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는 사건이었다(주성하 2018, 105).


<사진 설명> 북미 싱가포르 합의 당시 사진. 김여정과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이 배석했다_트럼프 대통령 트위터


김여정이 선전선동부를 통해 변화를 일으키는 방식은 후계자 시절 김정일이 선전선동부를 통해 정치적으로 성장해 온 과정과 유사하다. 김정일의 ‘문화혁명’ ‘사상 혁명’과 비교할 수는 없지만 김여정이 젊은 나이에 핵심 부서를 맡아 체제 유지·발전에 기여하고 나름 평가를 받았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김여정이 짧은 시기 권력의 핵심에서 일하며 업적을 쌓아 가는 것도 김정일과 유사하다. 이런 결과는 김여정 개인의 역량5)도 작용한 결과이겠지만, 아버지와 오빠, 두 수령의 대에 걸친 신임과 사랑 없이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물론 북한에서 남매가 동시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 완전히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김정은-김여정 정도는 아니지만, 김정일-김경희도 남매 통치와 유사한 행태를 보였다.



김정일·김경희와 다른 차원의 김정은·김여정 남매 통치

김정일-김경희 남매의 우애는 김정은-김여정 남매의 우애를 뛰어넘을 만큼 각별했다. 어릴 적 불의의 사고로 둘째 동생을 잃은 김정일은 유일한 막내 동생 김경희를 잘 챙겼으며, 동생 사망 다음해인 1949년 어머니 김정숙을 잃은 뒤에는 더욱 동생을 잘 보살폈다. 한국전쟁 때 만주로 함께 피신하기도 했다.


당시 어린 김정일을 돌봤던 강길복의 증언이다.


“어머니(김정숙)가 돌아가셨을 때 친애하는 동지(김정일)는 여덟 살이고, 경희 동지는 세 살이었습니다. 경희 동지가 엄마를 찾으며 울면 친애하는 동지가 ‘경희야 울지 마라, 아버지 앞에서 울면 어카겠나’ 하고 달래고 우리에게도 ‘경희가 자꾸 울면 아버지가 가슴 아파 하시니 경희 앞에서 눈물 보이지 마오’라고 신신 당부해 저도 울고 싶어도 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자기 방에서 혼자 웁니다”(정창현 1999, 31).


김정일이 김경희를 아낀 만큼 김경희도 오빠를 잘 따랐다. 젊었을 때는 김경희가 김정일의 결혼 문제도 직접 챙겼다. 김정일이 아버지 김일성 몰래 연상의 유부녀였던 여배우 성혜림과 동거해 김정남을 낳고 살림을 차리고 있을 때 김일성으로부터 이제 결혼해야 한다는 ‘명령’이 내려왔다. 동거녀가 있는데 또 다른 여성과 결혼해야 하는 곤란한 처지가 되자 김경희가 문제 해결을 위해 발 벗고 나섰다. 김경희는 성혜림을 찾아가 ‘정남이는 여기서 잘 키워 줄 테니 혼자 모스크바로 떠나라’고 매몰차게 몰아붙인 것이다. 그 무렵의 상황을 직접 목격한 성혜림의 언니 성혜랑은 이렇게 썼다.


“혜림이 세 살 난 아이(정남)를 업고 마당에 있는 복숭아나무 밑에 있는데 정일의 여동생 경희가 왔다. 오빠를 데리러 왔다는 것이다. 오빠의 색시 감을 맞아들이기 위해서인 듯이 암시를 하며….

‘가자요, 오빠, 가자요.’

공주(경희)는 시뜩해서 오빠를 채근했다. 그녀는 정일을 깨워 데리고 갔다. … 혜림은 아들을 업고 살구나무 옆에 어정쩡히 서 있었다. … 여자를 맞아들였는지 말았는지 혜림과의 생활은 변함이 없었건만…”(성혜랑 2000, 376).


김정일은 김경희에게 무척 너그러웠다. 김경희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 자주 김정일에게 간드러진 목소리로 돈, 그것도 수천만 엔 수준의 거금을 요구하곤 했는데, 김정일은 상당한 액수도 김경희의 응석에 응해 주었다(후지모토 2010, 155).


“김경희는 애교가 많아요, 연회장에서 보면 김정일 옆에 앉아서 연신 ‘오빠, 오빠’ 하며 김정일을 굉장히 따랐어요”(후지모토 2010, 231).

“만일 장성택이 김경희로부터 이혼이라도 당하게 된다면 즉각적으로 권력을 빼앗길 것이 분명하다. 실제로 측근의 파티 회장에서 보면 장성택에 대한 김경희의 태도는 표독스러웠고, 아무 앞에서나 ‘장성택’이라며 남편의 이름을 마구 불렀다. 브랜디를 몰아치듯 마시는 김경희는 장성택에게 ‘자, 더 마셔’라고 하면서 부하나 하인에게 명령하듯이 술을 권했다. 그런 아내의 횡포에 대해 장성택은 거역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늘 얌전하게 부인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후지모토 2010, 155).


그러나 김정일은 김경희에게 중책을 맡기지는 않았다. 25세에 당 외곽단체인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6) 중앙위원회 집행 임원으로 공적 생활을 시작한 김경희는 당 국제부 과장, 국제부 부부장을 거친 뒤 1987년부터 23년간이나 당 경공업부장이라는 한직을 맡았다. 물론 김경희가 경공업부장의 역할에만 묶여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실제 업무는 제1부부장에게 맡기고 깊이 간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진다.7) 장성택이 2인자 역할을 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8) 대신 김정일의 곁에서 사적으로 여러 문제에 걸쳐 두루 조언하고 관여했다. 김정일은 노동당 중앙위원회에서 “김경희는 곧 나 자신이므로 김경희의 말은 곧 나의 말이요, 김경희의 지시는 곧 나의 지시”(이영종 2010, 250)라고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노년에 접어들면서 공개 활동을 더욱 활발히 했고, 당내 위상도 높아졌다. 특히 김정일이 뇌졸중에서 회복된 지 2년이 지난 2010년에 두드러진다. 통일부 자료에 따르면, 김경희는 2010년 상반기 김정일의 공개 활동을 가장 많이 수행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김경희는 77회중 56회, 장성택은 45회로 2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같은 해 당 정치국 정치위원, 조선 인민군 대장으로 임명됐다. 아들을 후계자로 정하고 나서야 여동생에 대한 공식적 예우를 격상한 것은 ‘후계자의 고모’에 해당하는 정치적 지위를 부여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김정일이 짜놓은 이 같은 권력 구조는 김정일 사망으로 김정은 시대가 개막되고 장성택이 처형되기까지 3년간 유지되었다. 김정은이 인민군 제534군부대 직속 기마중대 훈련장을 시찰했다고 조선중앙텔레비전이 2012년 11월 19일, 20일 보도한 내용에서 그 상징적인 장면을 볼 수 있다. 조선중앙텔레비전은 김정은이 장성택과 함께, 김경희가 김여정과 함께 말을 타는 영상을 내보냈다. 특히 2대, 3대 수령의 여동생인 김경희·김여정이 나란히 말을 타는 장면은 권력 엘리트의 교체에 따른 갈등이 없다는 사실을 과시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2대 수령의 여동생이 자기 인생 최고위직에 오른 순간이자 곧 내리막길로 내달릴 것이라는 전조였으며, 3대 수령의 여동생이 2대 수령의 여동생이 보유했던 것 이상의 권력을 누릴 것임을 예고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결국, 오빠 없는 김경희의 권력은 2013년 장성택의 처형과 함께 몰락했고, 오빠 있는 김여정의 권력은 김경희와 몰락과 반비례해 강력해졌다.


김정일 시대 김경희의 지위와 역할은 김정은 시대 김여정의 그것과 현격한 차이가 난다. 김정일은 김경희가 공개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는 고위직을 통해서가 아니라, 비공식적 혈연관계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도록 했다. 반면 김정은은 집권 3년도 안 돼 김여정에게 선전선동부 부부장이라는 핵심 직책을 부여하고, 5년 만에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고위직에 임명했다. 김경희는 노년에 이르기 전까지는 김정일의 공개 활동에 모습을 드러내는 경우가 드물었지만, 김여정은 김정은의 집권과 동시에 김정은이 있는 곳에는 항상 김여정이 있다고 할 만큼 김정은과 일체화된 행보를 했다.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는 것은 ‘혈통에 관한 인식의 변화’이다. 북한은 김정일이 지도자가 된 것은 탁월한 역량 때문이지 혈연 때문이 아니라고 선전해 왔다. 이런 상황에서 혈통은 공공연히 앞으로 내세우기 꺼려지는 조심스러운 것일 수밖에 없다. 북한은 김정은에 대해 김정일 등장 때와 마찬가지로 탁월한 역량이 있다고 강조하기는 하지만, 혈통이 가장 중요한 권력 승계 요인으로 기정사실화된 현실을 부정하기는 어렵게 되었다. 아무런 업적이 없는 젊은 김정은의 집권을 혈통이 아닌 다른 이유로 설득력 있게 정당화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이렇게 혈통 승계를 누구나 인정하는 현실에서는 김정일 시대처럼 굳이 김여정을 감출 이유도 없는 것이다.



김여정 권력의 근원을 설명하는 가장 쉬운 방법

김여정의 권력은 김일성의 직계 가계를 의미하는 ‘백두의 혈통’에서 비롯되었다.9) 김여정은 오직 그의 오빠가 수령이기 때문에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의 오빠가 수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아버지가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아버지가 수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할아버지가 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할아버지·아버지가 수령이 아니었으면, 그의 오빠도 수령이 될 수 없고, 그의 권력도 존재할 수 없으며, 남매 통치 역시 불가능하다. 이처럼 북한에서 권력의 탄생을 설명하는 일은 세상에서 가장 단순한 일 가운데 하나에 속한다.


그럼에도 북한은, 김여정은 말할 것도 없이 김정은, 나아가 김정일조차 김일성의 직계이기 때문에 수령이 되거나 권력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공식적으로 백두의 혈통은 북한에서 혈연관계를 뜻하는 용어도 아니다. 북한의 공식 문헌에서 백두의 혈통이라는 용어는 생물학적인 혈통의 의미로 쓰인 적이 없다. 백두의 혈통이란, 김일성이 당 건설과 혁명을 개척하고 이끌어 가는 노정에서 창시하고 발전시킨 모든 혁명적 재부를 말한다(곽승지 1993, 50). 말하자면, 정신이나 가치를 이르는 비유에 불과하다. 백두의 혈통을 ‘백두의 혁명 정신’으로 대체해도 아무 문제가 없다. 북한이 아무리 3대 세습까지 했다 해도 새 왕조를 자처하지 않는 한, 당연히 권력 승계를 정당화하는 근거로 혈연을 제시하지는 못한다.


혈통론은 김정일로의 권력 승계 과정에서 후계자가 되기 위한 최고의 조건으로 백두의 혈통 계승을 내세우면서 등장했다. 백두의 혈통 계승이란, 김일성의 사상, 혁명적 방법, 사업 방법을 이어받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의 후계자론의 논리는 이렇다. 수령이 위업을 고수하고 완성해 나가는 것은 혁명의 운명과 관련되는 중대한 문제이다. 노동계급의 당이 수령 후계자의 영도 체계를 튼튼히 세우지 못하면 수령의 영도적 지위가 후계자에게 계승되지 못하게 되고, 음모가와 야심가들에 의하여 혁명의 명맥이 끊어지며 결국 당과 혁명을 망치게 된다. 북한에서 후계자 문제는 혁명의 대를 잇는 문제와 동일하다. 그렇다면, 혁명의 대를 어떻게 성공적으로 이어갈 것인가?


흔히 북한은 이렇게 답한다. “수령님(김일성)께서 생전에 과업을 다하지 못하면 대를 이어 아들이 하고, 아들이 못한다면 손자 대에 가서라도 기어이 수행하고 말 것이라고 힘주어 말씀하시었다.” “몇 해 전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일꾼들에게 나는 어버이 수령님의 유훈을 받들 것이라고 말씀하시었으며 이는 내가 가다 못 가면 대를 이어서라도 끝까지 가려는 계속 혁명의 사상이었다(조선중앙방송 2005/1/27).” 여기서 ‘혁명의 대’ 역시 ‘백두의 혈통’과 마찬가지로 생물학적 서술이 아니라 수사적 표현이다.


후계자의 혈연에 관해 북한에서 발행한 한 저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후계자는 어디까지나 인물을 본위로 하여 선출해야 한다. 인물이 선출의 절대적이며 본질적인 표징이고 기타는 모두 상대적이고 비본질적인 것이다. 그가 남성이건 여성이건 청년이건 장년이건 관계없이 특출한 인물이면 후계자로 선출될 수 있다. 수령과의 혈연관계는 상관이 없다(김재천 1989, 43). 김정은이 후계자가 된 것은 그의 능력 때문이지 혈연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혈연은 단지 우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어떤 인물이 후계자로서의 모든 자질과 풍모를 지니고 있는 경우에는 그 인물이 수령과 혈연관계에 있다고 해서 후계자로 선출되지 못한다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김유민 1984, 77-78).


그러나 ‘백두의 혈통,’ ‘대를 이은 혁명’ 등과 같은 혈연적 비유를 단순히 문학적 표현으로 치부하기에는 현실과 너무 맞닿아 있었다. 실제로 혈통이 대를 이었기 때문이다. 사실과 비유 간의 경계와 거리가 무너진 것이다. 김일성은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그(김정일)가 당과 국가, 군대를 령도해야 민족의 장래가 담보되고 백두산에서 개척한 주체의 혁명 위업이 한 치의 편차도 없이 대를 이어 빛나게 계승 발전될 수 있다(김일성 1998, 310). 이 글만 보면, 대를 잇는다는 말이 단순히 계속 혁명을 뜻하는 것인지, 아들 계승을 의미하는 것인지 구별하기 어렵다.


사실에 직접 대응하는 언어의 구사를 두고 계속 비유라고 은폐하기는 쉽지 않다. 수령의 대는 같은 세대가 아니라, 새 세대에 속하는 인물이 되어야 한다(김유민 1984, 83-85)는 후계자론에 이르러서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지경에 이르렀음이 드러난다. 이 같이 비유의 고유한 기능을 상실한 언어, 세습에 익숙한 담론이 정치 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을 오랫동안 지배하면서 가랑비에 소매 젖듯 세습이 북한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조선의 태양은 언제나 백두에서 왔고, 백두의 핏줄기는 김일성 민족의 영원한 생명선(노동신문 2008/9/8)”이라는 선전이 일상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권력은 김일성 직계에서만 나온다’는 현실을 부정할 방법은 없다.


북한은 최고의 실질적 규범인 ‘당의 유일 사상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을 제정한 지 39년 만인 2013년 ’당의 유일적 령도 체계 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개정한 바 있다. 개정된 10대 원칙에는 다음과 같이 눈에 띄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주체 혁명 위업, 선군 혁명 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 완성”하기 위해 “우리 당과 혁명의 명맥을 백두의 혈통으로 영원히 이어나가며 주체의 혁명 전통을 끊임없이 계승 발전시키고 그 순결성을 철저히 고수해야 한다.” 이렇게 혈통을 명시한 것은 혈통이라는 용어를 당초 어떻게 사용했는가와 상관없이 실제 혈통 계승을 당연시하고, 비유를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북한 사람뿐 아니라 전 세계가 북한의 혈통 계승(순수 논리)은 혈통(실제 상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고 믿게 되었으므로 매우 오랜 백두의 혈통 계승 프로젝트는 완전히 성공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세습과 김정은 세습이 다른 이유

그러나 3대 세습은 2대 세습과 명백한 차이가 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세습은 사회주의 체제에서 존재하지 않는 권력 승계 방식이었다. 그 때문에 혈통이 아닌 탁월한 자질과 능력에 의한 계승이라는 점을 내세우면서도 실질적 혈통 계승이라는 사실을 고려, 김일성 혈통을 신성시하고 가계를 우상화함으로써 대를 이은 혁명의 필요성을 부각해야 했다(이상근 2014, 322). 그렇게 하고도 온전한 혈통 계승을 하지 못했다. 혈통 내부와 외부에서 후계 경쟁과 저항이 있었다. 그리고 김정일은 노동당 지도원에서 1974년 후계자 결정까지 10년, 후계자 결정부터 1980년 이를 당이 공식화하기까지 6년, 후계자에서 집권까지 14년을 합쳐 모두 30년에 걸쳐 단계적이고 완만한 승계 과정을 밟아야 했다.


이와 달리 김정은으로의 계승은 혈통 계승의 제도화가 완성된 상황이라 신속하고 순탄하게 이루어졌다.10) 혈통 승계의 제도화는 승계 과정에서 무력의 사용이나 위협이 없으며 권력 승계가 관습적으로 굳어진 것으로 정의된다. 그것은 혈통 승계가, 모두가 받아들이는 규칙과 절차에 따라 이루어지는 규칙적 승계가 되었음을 의미한다(오경섭 2010, 290, 291). 김일성 시대만 해도 김정일을 후계자로 결정할 때 지배 엘리트들의 건의와 합의라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야 했지만, 김정일은 자신의 독자적 결심만으로 후계자 선정을 모두 마쳤다. 후계자 자격을 정당화하는 작업도 필요 없었다. 김정일은 김정은의 생일인 2009년 1월 8일 당 중앙위원회 본 청사 사무실에서 당과 군대, 그리고 행정부의 최고위급 간부들이 모인 자리에서 “김일성 동지로부터 시작된 주체 혁명의 다음 계승자가 김정은 동지”라고 발표하면서 축하를 부탁했다. 그 순간 장내는 우렁찬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애하는 장군님 만세!” “주체 혁명 만세!” 김경희도 장성택도 만세를 불렀다(라종일 2016, 232). 이후 김정일이 한 유일한 절차는 당 조직 지도부를 통해 당내 각 단위 조직에 후계자 확정 사실을 통보한 것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지배 엘리트들이 후계자 선정 과정에 반대하거나 새 수령의 결정에 반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오경섭 2012, 13).


이렇게 혈통 계승이 완성된 조건에서 김여정의 노출을 피할 이유는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부각해야 한다. 장성택·김정남은 제거하고, 김경희, 설송·정철은 시야에서 사라지게 함으로써 두 사람의 ‘핏줄’이 더욱 선명하게 빛나게 해야 한다. 그래야만 지도자는 나이가 어리든 많든, 경륜이 있든 없든, 능력이 탁월하든 아니든 인위적인 요인에 의해 선출되고 물러나는 존재가 아닌, 신적 권위를 가진 절대자라는 것을 인정받을 수 있다. <끝>


주석

1) 김정일의 둘째 부인 김영숙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 김정일은 설송이 똑똑하다며 아꼈다고 한다.

2) 당시의 상황은 성혜랑 자서전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드디어 혜림이 아들이라는 신호를 보내자 왕자는 그 새벽에 온 병원이 떠나게 경정을 빵빵빵-빵빵빵 수 없이 울리며 차를 돌려 쏜살 같이 사라지더라는 것이다…. 정일이 그 아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는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다. 젊은 왕자는 잠투정하는 아들을 업어 재웠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업고 들추며 엄마들이 우는 아이 달래듯 아기와 중얼거리며 얼렀다(성혜랑 2001).

3) 1970년대 말 김정일은 장성택이 세도를 부린 혐의로 혁명화 조치를 취했다. 혁명화는 권력 엘리트 처벌의 한 방법으로 지방 기업소나 농장에서 노동하는 것을 말한다. 장성택이 혁명화 교육을 받던 강선 제강소에서 작업 중 몸을 다칠 정도로 고생을 하자 김경희가 남편 구출에 나섰다. 오빠에게 직접 말하기보다 내연녀 성혜림을 통해 설득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 성혜림에게 운을 띄웠다. 성혜림은 그날 저녁 김정일을 만나 장성택을 그만 용서하고 평양으로 불러오자고 하면서, 정남이 고모가 너무 마음고생이 심한 것 같다는 말을 슬쩍 덧붙였다. 정남이라는 단어가 김정일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것으로 믿은 것이다. 예상대로 김정일은 못이기는 척 그를 평양으로 돌아오도록 했다(라종일 2016, 152-153).

4) 애나 파이필드 『워싱턴포스트』 베이징 지국장은 김여정의 가명은 박미향이라고 다른 견해를 제시했다(파이필드 2019, 356).

5) “고 이희호 여사 서거 때 판문점에서 김여정이 나와 조의문 전달에 참석. 개인의 출중한 능력도 대단하더라 하는 것을 느꼈고요. 똑똑하고 잘하더라고요. 어제 보니까 제가 만났던 전에 수차보다도 훨씬 건강하고 피부 색깔도 좋고 얼굴도 아주 좋더라고요”(박지원 <교통방송>, 2019/6/13).

6) 조선민주연맹은 2016년 11월 제6차 대회를 열어, 명칭을 조선사회주의여성동맹으로 변경했다.

7)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이 2019년 7월 19일 ‘상반기 북한 정세 평가 및 하반기 전망’ 주제 기자 간담회에서 한 발언.

8) 김경희-장성택은 애증의 관계였다. 김경희는 스토킹 수준의 집착으로 짝사랑하던 장성택과 결혼했으나 2인자로 부상한 장성택은 여성들과 부화방탕한 생활을 했고, 김경희도 연하의 남성들과 문란한 성생활을 했다. 노년에 알콜 중독 상태였던 김경희는 간·심장·폐·신장 등 온전한 곳이 없을 정도로 폐인 지경에 이르렀다. 조카 김정은이 남편을 처형한 뒤 집을 찾아왔을 때는 권총을 꺼내 그를 겨누었다. 질겁을 한 김정은은 몸을 피했고, 측근들이 달려들어 앞을 막고 총을 빼앗았다(라종일 2016, 186, 220, 268).

9) 김정일은 소련의 하바롭스크에서, 고용희는 일본의 오사카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출신이다. 그 때문에 김정일, 김정은, 김여정은 백두 혈통이 아니라 후지 혈통이 아니냐는 우스개도 나돌았다(고미 2018, 22).

10) 파티 석상에서 식순 등으로 표시할 때조차 두 왕자들은 큰 대장, 작은 대장으로, 여정 아가씨는 공주님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다(후지모토 2010, 57)고 할 만큼 세습적 문화가 지배적이었다. 그럼에도 김정일이 세습을 포기할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정남은 2011년 이렇게 증언했다고 한다. “원래 아버지는 아들을 후계자로 내세울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직접 3대 세습은 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는데, 그 말을 내 귀로 직접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동생들도 그 이야기를 들었겠죠”(고미 2018, 55). 나종일 전 국가 안보 보좌관도 김정일이 주위에 “내 뒤로는 세습에 의한 권력 승계는 없다, 김 씨 일가는 앞으로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을 담보하는 상징적인 존재로서 인민이 충성을 맹세하는 대상으로만 남는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 전 보좌관은 김정일이 일본의 천황처럼 군림하되 통치는 하지 않는 입헌군주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으로 추측했다. 사실, 그런 소문으로 인해 한 때 북한이 왕의 권위가 절대적이되 직접 통치는 하지 않는 태국 모델을 추구한다는 관측도 나돈 적이 있다. 그러나 뇌졸중이 회복된 뒤 김정일은 급속히 세습 절차에 들어갔다. 김정일은 김경희·장성택 부부, 김정은과 가족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후계자로 정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자 김경희는 “분별력도 없는 아이에게 어떻게 나라를 맡긴단 말입니까?”하며 반대했다. 그 말을 들은 김정은은 화를 내면서 들고 있던 젓가락을 내던지고는 밖에 나가 버렸다(고미 2018, 34, 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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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성하. 2018.9. “로동신문 변화로 본 김정은 시대 북한언론.” 『관훈저널』 60(3).

● 후지모토, 겐지. 2003. 『김정일의 요리사』. 월간조선사.

● 후지모토, 겐지. 2010.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 맥스.


이대근 ㅣ경향신문 논설고문

1984년 경향신문사에 들어간 뒤 정치부 기자, 국제부장, 정치 국제 에디터, 논설위원, 편집국장, 논설 주간을 거쳐 현재 논설 고문으로 일하고 있다. 국내 정치, 외교 안보 분야를 주로 담당했다. 경향신문에 <이대근 칼럼>을 쓴다. 2000년 고려대학교 대학원에서 북한 선군 정치를 주제로 한 “조선 인민군의 정치적 역할과 한계”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북한대학원 대학교 겸임 교수. 저서는 와이키키 브라더스를 위하여 : 이대근 기자의 정치 읽기(2009), 『북한 군부는 왜 쿠데타를 하지 않나』(2009)